‘신뢰’는 경제를 돌아가게 만들고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초강력 윤활유라는 평가를 받는다. 불티나게 팔린 경영 베스트셀러들은 한결같이 신뢰의 힘과 미덕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학자들도 신뢰의 이점을 보여주는 연구들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이 와중에 월가를 뒤흔든 금융 사기꾼 버나드 매도프가 등장했다. 매도프는 희대의 금융 사기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찰스 폰지의 이름을 딴 ‘폰지(Ponzi)’ 수법으로 650억 달러의 사기극을 벌였다. 매도프에게 속은 한 브로커는 그를 두고 “이 사람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의 뛰어난 혈통, 명성이 신뢰를 불러일으킨다”고 표현했다.
겉으로 보기에 매도프는 뛰어난 투자 실적, 화려한 이력서, 전문성, 인맥 등 신뢰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뛰어난 금융 전문가나 경영자 등 많은 사람들이 매도프의 사업이 매우 안전하다고 믿었다. 이 사실을 생각해보면 신뢰에 대해 좀더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사람들은 그토록 쉽게 상대를 믿는 것일까?
더구나 매도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기를 친 첫 번째 인물도 아니다. 엔론, 월드컴, 타이코 등 지난 10여 년간 지저분한 사건들이 종종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업을 신뢰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30여 년간 사회심리학자의 길을 걸어온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신뢰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해왔다. 최근 엄청난 규모로 대중의 신뢰가 농락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매일 또 다른 스캔들이 발생할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필자는 왜 우리가 그토록 쉽게 신뢰를 하며, 왜 가끔씩은 믿지 말아야 할 대상을 믿는지,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논문을 통해 인간은 유전적 요인 및 학습의 영향으로 상대를 쉽게 신뢰하게 되며, 신뢰는 인류가 지금껏 번성할 수 있었던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인간은 상대를 쉽게 믿어버리는 습성 때문에 종종 문제에 부딪힌다. 믿어도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을 때도 많다. 믿을 만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다는 점은 사회적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개인 차원에서 보면 믿지 못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큰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
한 개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명하게, 제대로 신뢰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를 ‘절제된 신뢰’라고 표현하고 싶다. 자신에게 계속 올바른 질문을 던지다 보면 절제된 신뢰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왜 사람이 쉽게 상대를 믿는지부터 살펴보자.
신뢰는 인간의 본능
모든 현상은 인간의 두뇌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나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의존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놀라운 근거가 하나 있다. 신생아는 태어난 지 한 시간 이내에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의 눈과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놀랍게도 자신을 보살피는 사람의 표정도 흉내 낸다. 아이의 엄마는 단 몇 초 내에 아이의 표정 및 감정에 반응하고 똑같은 감정을 표현한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신뢰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는 뜻이다. 신뢰는 생존을 위한 인간의 노력에 큰 도움을 준다. 사회심리학자 셸리 테일러는 신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학자들은 두뇌를 발달시키는 결정적 요소로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특성을 꼽는다. 배려와 사랑은 부모와 자식의 유대 관계, 조직 문화, 기타 온건한 사회적 관계 등에서 나타난다. 이는 하나의 생물체로서 인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진화 역사를 살펴봐도 인간이 왜 상대를 쉽게 신뢰하고자 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연구 결과를 보면 감정을 통제하는 두뇌 작용 또한 신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경경제학자 폴 자크는 인체 내의 강력한 천연 화합물 옥시토신이 신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옥시토신은 출산을 돕고 모유 생산을 촉진하는 호르몬이다. 옥시토신 성분이 들어 있는 스프레이를 코에 뿌리기만 해도 신뢰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옥시토신을 이용한 연구에서 실험 참가자들은 옥시토신을 사용했을 때 상대를 더욱 믿었고, 스스로도 신뢰할 만한 행동을 한다는 점이 나타났다. 다른 연구에서도 옥시토신이 긍정적인 감정 상태와 관련이 있으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옥시토신을 주입하면 동물들 역시 좀더 차분해지고, 조용해지며, 불안감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때로는 놀라울 만큼 단순한 신호에 의해 신뢰가 싹트기도 한다. 가령 사람들은 어떤 측면에서건 자신과 비슷한 특성을 가진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리사 드브륀은 연구를 통해 이 가설을 증명해 보였다. 그는 실험 참가자의 얼굴과 점점 닮아가는 방향으로, 또 점점 닮은 부분이 없어지는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컴퓨터 이미지를 만들었다. 실험 결과, 피실험자는 자신의 얼굴과 닮은 부분이 많을수록 컴퓨터 속의 인물에 대해 높은 신뢰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닮은 사람을 믿는 현상은 이러한 사람이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다른 연구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모임의 구성원들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욱 좋아하고 신뢰한다는 사실이 나타났다. 이 ‘내부자 효과’는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한 그룹을 무작위로 작은 소그룹으로 나누는 간단한 일로도 소그룹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다.
심리학자 대처 켈트너와 다른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상대를 가볍게 터치하는 행동만으로도 상대방의 신뢰를 높일 수 있다. 한 실험자는 피실험자들에게 내용을 설명하면서 게임 시작 전 피실험자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줬다. 실험자가 짧고 가볍게 등을 두드려준 피실험자들은 파트너와 경쟁하려 하지 않고,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켈트너는 세계 각국에서 인사를 할 때 가벼운 접촉이 있는 이유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인사를 할 때 악수를 나누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연구 결과가 뜻하는 점은 간단하다. ‘신뢰를 얻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볼 때 신뢰는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일상적, 반사적으로 타인을 신뢰한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믿는 일도 종종 있다. 임상심리사 도리스 브라더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이 특정 순간 스스로에게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왜 신뢰하고 있나’ 하고 자문하는 일은 ‘여전히 지구가 궤도를 돌고 있을까’라고 질문하는 횟수보다 적다.”
필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어떤 현상이나 사람을 믿는 인간의 이런 특성을 ‘가정에 기초한 신뢰(presumptive trust)’라고 부른다. 물론 이는 인간에게 도움을 줄 때가 많다. 끔찍한 배신의 경험이 없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과 조직에 대한 신뢰를 가진다. 또 신뢰를 통한 긍정정인 경험을 하면서 성인으로 성장한다. 신뢰를 갖고 있을 때 끔찍하리만치 일이 틀어지는 사례도 극히 드물다. 신뢰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 자체를 불합리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