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6일 새벽, 적어도 그때까지는 유례가 없는 사상 최대의 함대와 비행단, 6000척의 배와 약 1만3000대의 항공기 및 글라이더가 영국 해협으로 출발했다. 6일 새벽 7개 사단이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했다. 해변 상륙에 성공했다고 작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해안 지방의 요충지를 확보해 적의 반격을 격퇴하고, 안전한 교두보를 차지해야 비로소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상륙 부대의 신속하고 과감한 전투와 지속적인 보급 및 제공권 장악이 필수적이다. 노르망디 상륙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의 치명적인 판단 착오와 느린 대응 덕에 이런 과제를 모두 해결했다. 상륙 초기 3주간의 전투에서 연합군의 피해는 전사 8975명, 부상자 5만1796명이었다. 상륙 당일의 전사자는 약 2500명이었다. 적지 않은 희생이지만, 상륙 작전의 규모와 위험 수준을 감안하면 예상치를 훨씬 밑도는 양호한 수준이었다.
상륙 작전은 당시까지만 해도 낯설고 위험한 방법이었다. 더 이상 전선 확대나 영국 점령이 불가능해진 독일군으로서는 상륙 작전이 승기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하는 상륙 부대를 격멸하거나 커다란 타격을 입힌다면, 연합군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꺾고 독일의 유럽 지배를 인정하는 강화 협정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히틀러의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이 기회마저 사라져버렸다.
어처구니없이 날아간 기밀 서류
규모 면에서도 엄청났고, 준비 기간만 반년이 넘는 작전이었던 만큼 상륙이 성공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은 노력과 헌신이 필요했다. 상륙 작전의 성공을 좌우하는 최우선 과제는 상륙 지점에 대한 보안이었다. 영국 정보부는 보안 유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수많은 거짓 정보를 날리고, 독일 정보부에 완전히 노출된 이중간첩을 통해 상륙 지점이 노르망디라는 진짜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영국에 주둔 중인 150만 명이 넘는 미군의 편지는 엄격한 검열을 받았고, 나중에는 모든 통신과 연락이 금지됐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밀이 유출되고 말았다. 더운 여름날, 갑자기 돌풍이 불어 비밀문서들을 창밖으로 날려 보냈다. 사령부의 장병들이 허겁지겁 거리로 달려가 서류를 주웠지만, 상륙 지점을 표시한 일급 문서 몇 장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며칠 후 비가 내리는 날, 한 노인이 “글씨가 작아 읽기가 힘들더군요”라는 말과 함께 정문 보초에게 문서를 건네주고 사라졌다. 그 노인의 신원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총사령부는 노인의 판단력과 애국심을 믿고 작전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UDT(수중 파괴반)에 해당하는 특수 수색대는 매일 밤 노르망디 해안으로 가서 해안가 전체와 강 하구의 해저 지형, 수중 장애물을 파악해 보고했다. 패스파인더라고 알려진 공수부대 선발대에는 황당한 임무가 내려졌다. 공수부대가 낙하하기 전에 미리 낙하지점에 침투한 뒤, 낙하지점을 표시하는 등을 들고 서 있으라는 명령이었다. 그 불빛을 공수부대보다 독일군이 먼저 발견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지만, 수송기 조종사가 레이더가 아닌 눈으로 낙하지점을 찾아야 했던 당시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상륙 당일 그들 중 절반 정도가 살해됐다.
전 국토가 감옥이 된 영국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힘든 생활을 견뎌낸 영국 시민들이야말로 상륙 작전 성공의 숨은 영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44년 무려 150만 명의 미군이 영국에 주둔했다. 이들을 한곳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 캠프가 건설됐다. 이들의 보급품을 대기 위해 영국의 모든 항구와 도로는 거의 만원이 됐다. 당시의 항구나 도로 시설은 지금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는 영국민의 일상생활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항구에서 미군의 식량을 내리기 위해 영국민 57만 명분의 식량 수송을 포기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도로 이용조차 금지됐다. 처음에는 전 영국이 병영처럼 변했다가 나중에는 전 국토가 감옥이 됐다. 병사들은 철조망으로 차단된 캠프에, 영국 국민은 마을에 갇힌 채 몇 달을 지내야 했다.
적국이었던 독일에도 숨은 공로자들이 있다. 노르망디 방어 사령관이었던 롬멜은 연합군에 제일 불리한 지점, 즉 상륙 당일 해안에서 연합군을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무기인 독일의 기갑사단을 노르망디에 전진 배치해달라고 요구했다. 반면 룬트슈테트를 비롯한 다른 장군들은 전통적인 방어 작전 개념대로 적이 상륙하면 일단 전초부대가 시간을 끌며 적을 유인하고, 그동안 예비부대를 집결시켜 반격을 가하는 방식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침공군이 진격하는 동안 병력이 분산되고, 진군 행렬이 길게 늘어지면 측면이 노출되는 약점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공략하면 된다는 논리였다. 이렇게 작전을 수행하려면 기갑사단을 후방에 배치해야 한다. 그런데 논쟁이 진행되다 보니 결국 기갑사단의 지휘권을 누가 장악하느냐가 최대 현안이 돼버렸다. 두 장군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자 히틀러와 본부의 몇몇 장군이 나서 타협안을 만들었는데, 기갑사단을 예비대로 돌릴 뿐 아니라 기갑사단의 지휘권을 아예 두 장군의 관할에서 빼내 최고사령부로 넘겨버렸다. 이는 룬트슈테트 원수의 방안보다도 더 나쁜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기갑사단은 멀리 가버렸고, 기갑사단의 이동에는 히틀러의 결재가 필요했다. 연합군이 상륙한 날 룬트슈테트는 기갑사단의 출동을 요청했으나, 히틀러가 이미 수면제까지 먹고 잠들었다는 이유로 결재가 다음 날로 미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