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승리의 정점에서 그 성취감에 도취돼 무리하게 공격을 지속하면 패배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멈췄다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관용을 베풀었다면, 히틀러가 소련 점령에 나서지 않았다면 역사의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한편 피사로는 우연한 기회에 잉카제국의 왕을 생포한 후 군사 행동 대신 왕의 권력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방식으로 제국을 정복했다.
아무리 잘 팔리는 제품이라 해도 매출이 특정 수준에 이르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정체하다가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내리막길로 접어든 다음에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면 이미 늦었다. 매출이 늘어날 때 정점에 도달하는 시점을 예측하고 대책을 미리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초일류 기업인 삼성전자는 D램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로 오랜 기간 많은 수익을 누렸다. 잘나가고 있을 때 다음 단계의 신제품 개발을 준비해야 했지만 HBM 개발이 늦어지면서 현재 잠시 주춤하고 있다.
성공의 정점(Culmination Point)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은 지속적인 번영을 추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루틴이다.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잘 활용한 선거 전략으로 승리를 거뒀다. 민주당의 해리스 후보는 바이든 대통령이 사퇴하고 전당대회에서 교체 후보로 선출된 후 인상적인 상승세를 탔다. 유명 인사들의 해리스 후보 지지 선언이 줄을 이으면서 암살미수사건 이후 상승세를 탔던 트럼프 후보를 앞서 나갔다. 그런데 트럼프 후보는 해리스 후보가 상승세를 타고 있는 기간에 오히려 공격을 자제했다. 맨투맨식 접촉으로 경합주들의 바닥 민심을 훑는 전략을 구사하며 해리스 후보의 지지율이 정점에 이르길 기다렸다. 그리고 해리스 후보의 지지율이 정점에서 정체 현상을 보이자 그제야 대대적인 네거티브 공세를 퍼부어 상황을 역전시켰다. 해리스 후보는 지지율이 정점을 지나 답보할 때도 전국적 TV 광고에 주로 의존하며 역전을 노렸지만 실패했다. 만일 해리스 후보가 지지율 정점을 예측하고 경합주에 더 집중하는 등 선거 운동 방식에 변화를 줬다면 선거 결과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전쟁을 치르다 승리의 정점에 이르러 더 이상 전투에서 승리하기 어렵게 되면 강화조약 체결 등 전쟁을 끝내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승리의 정점에서 전략의 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역습을 받아 오히려 패배의 나락으로 몰릴 수 있다. 전쟁사에서 승리의 정점에서 전략의 변화를 모색하지 않은 채 기존의 공격 기조를 유지하다 실패한 사례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 승리 후 멈췄다면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16년 8월, 칸나이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니발이 지휘하는 5만 명의 카르타고군이 8만 명이 넘는 로마군을 전멸시켰다. 한니발은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한 양 날개 포위 작전을 써서 성공했는데 훗날 많은 전투에서 이 작전 개념이 응용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독일군이 기갑부대의 기동력을 이용해 마지노선을 붕괴시키고 프랑스를 전격적으로 점령했을 때,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의 양 날개를 돌파해 독일 제6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고립시켰을 때가 대표적인 예다.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전멸하자 로마 원로원은 로마를 굳게 지키며 한니발과의 교전을 철저하게 회피했다.
한니발은 승리의 정점에서 전략의 변화를 모색해야 했다. 한니발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2가지였다.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고 철수하는 것과 로마를 포위하고 섬멸전을 하는 것이다. 로마를 포위해 장기전을 시작하는 것은 원정군 입장에서 무리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탈리아반도 안에서 로마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반도 안에 로마 영향권에 있는 도시국가들을 포섭해 반로마동맹을 맺고자 했다. 한니발 군대는 로마를 포위 공격해 함락시키기에는 병력이 부족했으며 용병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반로마동맹을 통해서 병력을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한니발의 반로마동맹 결성은 도시국가들의 미지근한 태도로 지지부진했고 시간만 흘러갔다. 이때 기회를 보고 있던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의 보급 거점인 스페인을 무너트리고 한니발 군의 존재를 무시한 채 과감하게 북부 아프리카에 상륙해 직접 카르타고 본국을 노렸다.
한니발은 본국의 다급한 구원 요청을 받고 허겁지겁 귀국해 자마에서 로마군과 결전을 벌였지만 크게 패했다. 결국 해외로 도피하던 중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바로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고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빼앗겼던 땅을 되찾은 후 배상금을 받는 선에서 만족했다면 한니발은 승리한 장수로 남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니발은 ‘로마의 완전한 멸망’이라는 현실성 없는 목표에 집착하면서 그간의 모든 의미 있는 성취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몰락했다.2.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길에 나서지 않았다면유럽을 석권한 나폴레옹은 영국마저 정복하고자 했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배한 후 해군력의 열세를 절감했다. 그래서 영국을 옥죄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 교역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그런데 근대화를 위해 산업기술을 배우는 데 열심이었던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과 교역을 하자 대뜸 대군을 직접 이끌고 러시아 원정길에 올랐다.
이 선택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프랑스가 영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산업 생산능력이나 인구 규모 측면에서 볼 때 무리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충분한 준비 없이 대규모 원정을 서두르는 바람에 초반 엄청난 규모의 비전투손실을 입으며 휘청거렸다. 증류수를 충분히 준비하지 않아 목이 마른 병사들이 행군로 주변의 더러운 물을 마시면서 티푸스가 돌아 병력의 3분의 1이 병사했다. 말을 먹일 건초가 부족해 기병대 군마의 절반이 폐사했다.
나폴레옹은 승리의 정점을 이미 지난 상황에서 변화를 거부하고 전쟁의 길을 선택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천신만고 끝에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러시아가 강화를 요청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러시아는 강화를 거부하고 전의를 불태웠다. 이미 탈진한 프랑스군의 전투력이 고갈됐기 때문에 더 이상 러시아에 머무르는 것은 전멸을 의미했다. 러시아군의 매서운 추격을 간신히 뿌리치고 러시아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은 국내외에서 완전하게 고립됐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어겼을 때 나폴레옹이 조금만 너그럽게 대해 줬다면 몰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프랑스가 영국 대신 러시아의 근대화를 도와줄 방도를 제시하고 영국과의 교역을 필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허용하는 관용을 베풀었다면 어땠을까. 프랑스가 전쟁을 계속하기에는 프랑스의 국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을 냉철하게 인정하고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승리의 정점에서 변화를 거부한 탓에 그동안 나폴레옹이 이룬 대단한 업적들이 빛을 잃었다.3. 히틀러가 소련 점령에 나서지 않았다면폴란드를 소련과 분할 점령하고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유럽을 호령하게 된 히틀러는 영국도 굴복시키고 싶었지만 해군력이 절대 열세여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때 공군 원수 괴링이 아이디어를 냈다. 독일의 막강한 공군력으로 영국을 폭격하면 영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40년 7월부터 약 4개월간 영국 본토 항공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결과는 2000대 가까운 비행기와 숙련된 조종사를 잃은 독일의 패배였다. 괴링이 영국의 공군 전력을 치밀하게 분석하지 않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상지여서 기술 수준이 전반적으로 독일보다 앞섰고 특히 항공기 엔진 분야는 독보적이었다. 영국 전투기의 성능이 독일이 자랑하는 전투기와 대등했다. 레이다 기술이 발전해서 독일 폭격기 편대가 도버 해협을 건너기도 전에 탐지돼 영국 전투기 편대의 요격을 받았고 대기하고 있던 대공 화기가 불을 뿜었다. 영국 국민들은 폭격기가 오기 전에 방공호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한 히틀러는 대뜸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수립해 소련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갑자기 기습을 당한 소련군은 우왕좌왕하며 모스크바 근방까지 밀려났지만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전세를 뒤집고 나치 독일을 몰락의 길로 몰아넣었다.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는 상대방의 전력을 근거 없이 폄하하는 오류를 반복했다. 소련은 러시아혁명 이후 산업화와 군대 현대화에 매진한 덕분에 탱크와 비행기 생산 능력이 독일에 앞서 있었다. 또 인구도 독일보다 많아 전쟁이 장기화되면 독일에 승산이 없었다.
히틀러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쓴 실패를 맛봤을 때 전쟁의 흐름을 분석하고 향후에도 독일군이 의미 있는 승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분석했어야 했다. 즉 독일군이 승리의 정점을 이미 지나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변화를 모색해야 했다. 예컨대 연합국과 강화를 통해 전쟁을 끝내고 적당한 선에서 독일의 국익을 챙겨야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난데없이 버거운 상대인 소련에 달려드는 중대한 실책을 범하면서 스스로 무덤을 팠다. 승리의 정점은 프로이센 장군이었던 군사 이론의 대가 클라우제비츠가 제시한 개념인데 프로이센 군대의 전통을 잇는 나치 독일 군대의 지휘부가 승리의 정점에 대한 세밀한 계측도 없이 무모한 행보를 계속한 것이 흥미롭다. 독재 권력의 폐해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웅변하는 역사의 한 페이지라고 할 수 있다.
4. 승리의 정점에서 전략을 바꾼 피사로다른 한편 1532년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62명의 기병과 106명의 보병으로 전투에 나설 정도로 잉카제국을 정복하겠다는 비현실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하늘이 준 기회를 포착하고 그 기회를 활용해 잉카제국을 정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잉카 왕을 사로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던 피사로에게 잉카 왕이 만나러 온다는 전갈이 왔다. 크게 긴장한 피사로 일행은 완전무장하고 초긴장 상태에서 잉카 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잉카 왕이 비무장 상태로 수만 명의 잉카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피사로는 잠시 주저했지만 잉카 왕을 생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결단을 내려 공격을 개시했다. 보병의 총포가 일제히 불을 뿜어냈고 요란한 금속 나팔 소리와 함께 피사로의 기병대가 비무장 군중을 향해 돌격했다. 총포가 발사되면서 낸 엄청난 굉음과 처음 보는 거대 동물인 말의 돌격, 귀를 째는 듯한 금속 나팔 소리에 혼이 빠진 잉카인들이 혼비백산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기병들이 휘두르는 칼에 속수무책으로 잘려 나갔다. 순식간에 현장은 시산혈해가 되고 잉카 왕은 사로잡혔다.
잉카 왕을 사로잡은 피사로는 무력 사용을 자제하고 잉카 신민이 왕에게 절대 복종하는 점을 악용해 잉카제국의 황금을 약탈하고 잉카제국 내의 권력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잉카제국을 장악해 나갔다. 피사로는 신망을 잃은 왕을 가톨릭 율법에 따라 처형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해 그를 통해 자신과 스페인의 목표를 실현시켜 나갔다. 피사로는 우연한 기회에 잉카 왕을 생포한 것이 잉카제국 정복 전쟁에 있어서 승리의 정점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리고 군사행동을 자제하고 잉카 왕의 절대 권력을 활용하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잉카제국을 스페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시켜 나갔다. 피사로가 성공한 이유는 잉카 왕과 신민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승부를 건 결단력과 승리의 정점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