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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

‘운하열’ 상인들의 슬기로운 기부 생활

조영헌 | 350호 (2022년 0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명과 청 시대 중국 대운하는 유지 보수비가 막대하고 예측이 불가능했다. 전근대 시대 운하를 준설하고 보수하려면 인력과 재원이 동원돼야 했는데 당국은 이때마다 민간 사회의 자발적 협력을 기대했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도시사회에서 영향력을 보유했던 지역 상인계층은 기부라는 사회 참여를 통해 공적 문제에 개입하며 지역사회의 좋은 평판을 이끌어 내는 데 활용했다.



빅테크의 기부 행렬과 ‘애국 기업’ 마케팅

2021년 7월 중국 허난성(河南省) 일대에 1951년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많은 호우가 쏟아져 300명 이상이 숨지고 수백만 명이 넘는 수재민이 발생했다. 피해는 인구 1300만 명에 달하는 허난성의 성도인 정저우(鄭州)에 집중됐다. 정저우는 역사적으로 수재(水災)가 끊임없이 발생했던 황하(黃河)가 경유하는 도시였다. 이번엔 황하 범람이 아니라 기록적인 폭우로 인한 피해가 생겼다는 차이가 있을 뿐, 사실 정저우에 물난리는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재 이후 이어진 기업들의 기부 행렬은 이례적인 참여라 할 만큼 특이했다. 마윈이 수장으로 있는 알리바바그룹이 총 2억5000만 위안(약 464억 원)으로 가장 큰 규모의 기부금을 내놓았고, 텐센트(騰訊), 바이트댄스(ByteDance), 디디추싱(滴滴出行), 메이퇀(美团), 핀둬둬(拼多多) 등 다른 빅테크 기업들도 1억 위안(약 186억 원)씩 내놨다. 스웨덴의 세계적 패션 브랜드인 H&M 역시 허난성 수재민들을 위해 현금과 물품을 포함하여 3억 원대의 기부를 해서 눈길을 끌었다. H&M은 2020년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내 위구르족 소수민족의 강제 노역을 통해 제품을 생산했다는 의혹을 받는 중국의 면사 기업인 화푸(華服) 패션과의 관계를 단절했다고 선언했다가 2021년 주요 인터넷 플랫폼에서 거래가 사라지는 등 중국 소비자들의 거센 불매 운동에 직면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의 기부 행렬에 대한 언론의 해석은 예리했다. 테크노드(TechNode)는 “규제 당국의 압박과 사회적 비판 속에 회사 이미지 개선을 기대한 움직임”이라고 평했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도 “사회적 책임보다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시선을 의식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윤 추구를 하는 기업이라 하더라도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분석이다. 최근 ESG라는 경영 가치 중 하나인 사회적 책임과도 관련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허난성의 수재에 구호 물품을 쾌척함으로 폐업 직전 회사가 기사회생했던 기적 같은 스토리가 전해졌다. 그 주인공은 중국의 토종 스포츠용품(운동화)을 판매하는 훙싱얼커(鴻星爾克)이라는 기업이다. 홍싱얼커는 허난성의 대홍수 소식에 어려운 경영 실적에도 불구하고 5000만 위안(약 97억 원)어치의 구호 물품을 전달했다. 이는 빅테크 기업들의 기부금에는 미치지 못하는 액수였지만 훙싱얼커의 규모나 재정 상황에 비춰 볼 때는 무리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부 소식이 전해지자 라이브 생방송 플랫폼 하루 방문 고객이 졸지에 800만 명으로 늘어나고 덩달아 판매액도 52배나 폭증했다. 초특급 재난 속에서 홍싱얼커는 졸지에 ‘애국 기업’으로 추앙받으며 기사회생했다.

‘애국 기업’의 기준과 시진핑의
‘공동부유(共同富裕)’ 선언

여기서 주목되는 점이 바로 중국의 ‘애국 기업’ 마케팅이다. 그리고 이러한 ‘애국 기업’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기준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당의 영도력과 방향성이다. 중국의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애국의 기준이 공산당이 제시하는 방향성과 거의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2020년 10월 제19기 5중전회1 에서 중장기 목표로 강조했던 ‘공동부유(共同富裕)’ 개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2035년까지 ‘전 인민의 공동부유 실현’을 목표로 한다는 개념이다. 이는 점차 심화하는 중국 사회의 빈부격차와 불평등 문제에 대한 대응책이지만 역사적인 맥락이 있다.

이 공동부유 개념은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1949년 이후 역대 지도자들이 목표로 제시하곤 했지만 그 시작은 마오쩌둥의 ‘공부론(共富論)’에 있다. 이는 일부 계층이 부를 독점하는 자본주의를 극도로 경계한 것이지만 그 결과 함께 빈곤해지는 ‘공빈(共貧)’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대약진운동 이후에 오히려 수천만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했다. 그 뒤를 이어 발생한 문화대혁명은 사회적 불만의 폭발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문화대혁명 이후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선부론(先富論)’을 주창하며 개혁개방을 주도했다. 즉 인민의 공동부유를 실현하기 위한 전 단계로 일부가 우선 부자가 되는 것을 용인해준 것이다. 이후 현재까지 이르는 중국의 놀라운 경제 발전은 우리가 다 목도한 바인데 그 결과 빈부격차라는 또 다른 부작용이 심화됐다. 따라서 시진핑의 ‘공동부유론’은 덩샤오핑의 ‘선부론’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을 가하여 마오쩌둥이 제시했으나 성취하지 못했던 ‘공부론’을 실현하기 위한 거대한 계획의 일환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문제는 ‘공동부유론’이 강조되자 그 부를 나눠줘야 할 주체가 져야 할 부담이었다. 누가 먼저 부를 나눠줘야 할까? ‘선부론’의 혜택을 입고 부를 축적했던 이들은 지난 40여 년 동안 다양했다. 기업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유기업의 비중이 높았고 사기업도 공산당과의 관련성 내지는 협조 없이 성장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공동부유론’을 제기하는 동시에 알리바바•텐센트•디디추싱 등 빅테크 기업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을 가했다. 또한 사교육 업계를 비롯해 제약 없이 뻗어나가던 민간 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초특급 수재 상황에서 빅테크 기업들이 기부 행렬에 동참한 것이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 먼저 부를 쟁취했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재해 지역과 재해민에게 기부하는 모습, 이보다 더 슬기롭게 ‘공동부유론’에 화답하는 그림을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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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물난리가 발생할 때 상인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지난 글에서 2014년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함께 등장한 중국 대운하에 대한 중국 사회의 ‘운하열’이 시진핑 정부의 일대일로와 연결되면서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2 그런데 과거 명과 청의 집권자들이 운하에 대해 지닌 애착에 비하면 오늘날의 ‘운하열’은 약과에 불과하다. 당시는 수도 베이징으로 곡물을 운송하는 유일한 수로 교통로가 대운하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바닷길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운하가 막히면 베이징은 공황 상태가 됐다. 집권자들은 대운하의 준설과 유지 보수에 심혈을 기울였고, 운하를 가로막는 홍수나 황하의 범람이 발생할 때마다 초긴장 상태가 연출됐다.

문제의 핵심은 대운하의 유지 보수비가 막대할뿐더러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홍수나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은 예측이 불가능했고, 몇 년에 한 번이라도 재해가 생기면 바로 대운하 유통망에 비상이 걸렸다. 홍수로 인한 황하의 범람이 대운하의 제방을 무너뜨리고 토사(土砂)를 대운하로 밀어 넣는 상황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제방이 무너지면 인공수로인 운하에는 선박 왕래가 통제됐고, 토사가 밀어닥치면 하상(河床)이 높아져 선박의 안전 운항에 빨간불이 켜졌다.

중장비를 동원할 수 없는 전근대 시대에 운하를 준설하고 무너진 제방을 보수하려면 결국 인력을 동원하고 재원을 일시에 집행해야 하는데 예산의 예비비 항목에 천재지변이 고려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간단하게 보이는 제방 공사나 운하 준설이라 하더라도 수만 냥에서 수십만 냥이 소요되기 일쑤였다. 청대에 물관리 관련 주요 지출 내역을 보면 한 안건에 수백만 냥 이상이 필요한 사안도 다반사였다. 하지만 국가 예산 항목에는 물관리에 대한 충분한 지급 여유분이 없었다. 통상적으로 명과 청 시대 국가 예산의 지출 가운데 물관리 관련 경상비 지출의 비중은 대단히 미미했다.3

따라서 물난리가 발생할 때마다 당국은 민간 사회의 ‘자발적인’ 협력을 기대하곤 했다. 일차적으로 지역 엘리트인 사대부 계층의 협조와 공의(公議)를 기대했다. 송대 이래 공의식(公意識)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 사대부들이 지역사회의 현안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천하가 근심하기 전에 근심하고, 천하가 즐긴 후에야 즐긴다”는 재상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선우후락(先憂後樂)” 정신을 계승했던 명과 청 시대의 신사층은 실제로 각종 자연재해로 인해 발생한 지역사회의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신사들의 공의로 지역사회가 유지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도시사회는 좀 달랐다. 농촌사회와 달리 외지 인구가 집중하고 유동 인구가 증가하는 도시사회에서 신사4 층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지는 반면 경제력을 장악한 상인층의 영향력이 증대했다. 도시민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송대 이래의 주자학적 세계관에 더하여 인간의 욕망을 중시하는 양명학 계열의 심학(心學)이 확산됐다. 배금주의(拜金主義)까지는 아니지만 15세기 중엽이 되면 상품경제가 확산하면서 도시에는 사치풍조도 만연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양명학에 호응했고, 양명학의 태두인 왕양명(王陽明)은 “옛날에는 사민(四民, 즉 사대부, 농부, 공인, 상인)이 직업을 달리했으나 도(道)를 같이했다”고 하면서 상인들의 자존감을 한껏 올려주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상인들이 지역사회의 공적 문제에 개입할 틈이 열린 것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수재로 인한 황하 범람과 운하의 단절이 제공했지만 그 배후에는 ‘운하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운하에 대한 집권자들의 집착이 존재했다. 베이징의 집권자들은 수도의 생명줄인 대운하의 유지•보수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운하의 물관리는 지방에 대한 장악력과 행정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척도였다. 대운하가 경유하는 도시는 홍수 때마다 비상이 걸렸고 단기간에 필요한 재원 마련과 구호물자 조달에 상인만큼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운하 단절이나 제방 파괴는 선박으로 상품을 유통하는 상인들에게도 직접적인 손실 요인이 됐으니 그들이 직접 상업 인프라를 재건하는 데 참여하는 것은 모양새가 그럴듯했다.

‘운하열’에 대한 상인들의 슬기로운 기부 생활

명 시대에도 상인들의 기부 기록이 있지만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실제 지역사회의 현안에 물적 기부를 했던 사례는 더 많았을 테지만 기록이 많지 않다. 반면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동란기부터는 상인들의 사회 참여 기록이 많아진다. 송대 이래 지역사회의 엘리트로 군림했던 신사층의 위상이 동란기에 크게 손상된 탓도 있지만 지배층이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에 크게 구속받지 않던 만주족으로 교체되면서 상인들과 지배층 사이를 소원하게 만들었던 이념의 벽이 낮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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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청군(淸軍)이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을 점령하고 한족들의 거점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하며 남하하자 사태 파악이 빠른 이들은 신속하게 청군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오삼계(吳三桂, 1612∼1678) 등 훗날 삼번(三藩) 세력을 구축했던 한인 무장들을 비롯해 이해타산이 빠른 상인들은 충성의 대상을 명에서 청으로 교체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오늘날 주식시장에서 오랫동안 투자하던 기업의 주식이 하락장에 접어들자 재빨리 상승주로 옮겨 타는 투자가들에 비견할 만했다.5

운하 도시인 양주(揚州)에 청군이 입성하자 이에 재빠르게 호응했던 이들도 문인 사대부가 아니라 외지에서 진입한 상인들이었다. 가령, 명조 말기에 할아버지를 따라 휘주를 떠나 양주에 정착했던 소금 상인 왕문덕(汪文德)은 청군이 만주족에 저항하던 양주를 함락한 후 무차별한 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목도했다. 이에 왕문덕은 동생 왕문건(汪文健)과 함께 청군을 이끄는 예친왕(豫親王) 도르곤(1612∼1650)에게 나아가 군대에 대한 위로금으로 30만 냥을 바치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해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6 이를 가상히 여긴 도르곤은 왕문덕을 부하 관리로 삼으려 했으나 왕문덕은 사양하고 장사를 계속했다. 이후 그의 가문은 고향과 양주의 지방지에 모두 이름이 오를 정도로 번창했는데 새로운 지배층인 청조의 후원이 없을 리 없었다. 문인 관료들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지방지는 그를 ‘의로운 행위[義行]를 한 자’들의 열전에 배치했지만, 상인들의 입장이 많이 반영된 ‘염법지(鹽法志)’에는 그를 ‘재략(才略)이 뛰어난 자’들의 열전에 배치했다. 위기 상황에서 지역민들을 보호하면서도 지배자의 필요를 채워주는 기민한 기부 방식의 양면성을 보여준다.7

이 외에도 양주에 사업 기반을 두고 활동하던 휘주 상인들 가운데 청 초기에 각종 공익사업과 구휼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왕조 교체의 동란기에 무너진 학교나 사찰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기부하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양육하는 육영당(育嬰堂) 건립을 위한 재원 마련을 주도했다. 특별히 이들의 기부행위는 개인적이거나 산발적인 선행이 아니라 협력 관계를 지닌 네트워크로 진행됐다. 양주의 휘주 상인들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여러 공익사업에 협력하며 참여했다. 그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불렀으며 공공선에 대한 목표 의식을 공유했다. 가령, 오자량(吳自亮)은 반란군에게 사로잡힌 지역의 부녀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동지’들의 협조를 끌어내서 돈을 모았다. 또한 민세장(閔世璋)은 수재를 겪은 양주의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죽을 만들어 제공하는 죽창(粥廠)을 마련할 때에 동지들의 협조를 동원했다. 왕응경(汪應庚)은 1731∼1733년 강물이 범람해 주민들이 주거지를 잃어버리자 돈을 기부해 살 곳을 마련해 주고 미곡 수천 석을 보내줬다. 연달아 전염병이 유행할 때는 자비로 약국을 개설해 주민들을 치료해 줬다. 1732년 홍수로 홍택호(洪澤湖)가 범람하자 포수방(鮑潄芳)은 제방을 보수하기 위해 여러 상인의 중의를 모아 은 300만 냥을 기부해 공사 대금에 충당했다.

여기서 휘주 상인들의 기부 활동이 수로 교통에 집중돼 있어 눈길이 간다. 이는 동란 직후 운하의 물자 유통을 빠르게 정상화시켜 새로 정복한 남방 지역의 통치 안정과 경제 활성화를 이룩하려는 만주 지배층의 필요를 정확히 타기팅한 결과였다. 1665년(강희4년) 발생한 거대한 해일(海溢)로 인해 무너진 40㎞에 달하는 범공제(范公堤)가 재건되는 과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범공제는 운하 도시인 양주와 회안으로 유입된 물이 바다로 빠져나가는 길목이자 바다로부터의 해일로부터 소금 생산지를 보호해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제방이었다. 강희제도 순행으로 남방을 경유할 때마다 범공제의 지속적인 보수와 관리를 누차 강조했다. 당시 무너진 제방의 보수 작업에 재빨리 참여해 기부금을 마련하고 사업을 독려한 이들은 지역 관리나 신사가 아니라 휘주 상인 황가패(黃家珮)와 황선(黃僎)이었다. 여기에 휘주 상인 정양입(程量入, 1612∼1694)이 협력했다.8 이들은 청조가 공식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선제적으로 범공제를 보수했다. 이는 지역사회의 치수 체계를 정비할 책임이 있지만 재정적 부담을 느끼던 지배층의 복심(腹心)을 읽어낸 것인 동시에 소금을 생산하는 지역민들의 환심을 얻었던 슬기로운 기부행위였다. 이들 휘주 상인은 삼번의 난(1673∼1681)이 발생할 때에도 기부금을 헌납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청조를 도왔다.

강희제의 남순 시기에도 휘주 상인은 운하 보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며 집권층의 ‘운하열’에 적극 부응했다. 휘주 잠산도(岑山渡) 출신의 정씨(程氏) 가족은 좋은 사례다. 명 말에 휘주를 떠나 회안으로 이주한 정씨 가족은 양주로 이주했다. 이 과정에 정조선(程朝宣)은 황하가 범람해 회안의 일부 지역이 수몰되자 나랏돈을 빌려 운하 준설을 주도해 회안 지역민으로 입적(入籍)되는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1666년 대운하와 홍택호를 분리하던 고가언(高家堰)이라는 제방이 붕괴했을 때 사재 3000냥을 출연(出捐)해 제방 보수 및 수재민의 구조 작업에 필요한 선박 마련을 도왔다. 당시 수재 의연금을 통해 정조선은 조운 관련 최고 관료인 조운총독(漕運總督)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정조선의 조카인 정증(程增, 1644∼1710)은 1699년 3차 남순을 마친 강희제가 하도총독(河道總督)에게 지시한 망도하(芒稻河) 준설에 필요한 돈을 마련했다.9 망도하는 양자강과 연결된 길이 10㎞에 달하는 대운하의 지류로, 운하의 수량을 조절하는 핵심적인 물길이었다. 강희제는 대운하를 이용해 남순을 다녀오면서 물관리의 중요성을 체감했고 신임하던 장붕핵(張鵬翮)을 하도총독에 임명해 망도하 준설을 책임지게 했다. 1701년에 준설은 마무리됐고, 당시 소요된 3만5000냥의 재원은 정증이 앞장서 마련한 기부금으로 충당했다. 4년 뒤인 1705년 5차 남순에서 양주를 방문해 준설된 망도하를 목도한 강희제는 정증을 임시 거처인 행궁(行宮)으로 초대해 “정로(旌勞: 노고를 위로하고 치하한다)”라는 어서(御書)를 하사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이라는 직함을 하사했다. 통상적으로 당시 어서를 하사하는 대상이 고위 관료나 유명한 종교 시설에 국한됐음을 감안한다면 상인으로서 정증이 수여받았던 어서와 직함은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였다. 황제의 어서를 통해 정증은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지역사회에 드높였고 7품 중서사인을 획득함으로 관료와 대면해 지역사회의 각종 현안을 논의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한 것이다.10 ‘운하열’에 대한 슬기로운 기부를 통해 수많은 상인이 선망하던 최고의 엘리트 자리에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정씨 가문의 기부행위는 이후로도 이어졌다. 정증의 넷째 아들 정종(程鍾)은 1747년 회안 지역이 큰 홍수로 수몰되자 ‘동지’들을 규합해 수재민을 수용하는 시설인 서류소(棲流所)를 건립하는 데 기부해 10만여 명의 수재민이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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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상인들은 기부를 열심히 했을까?

그렇다면 당시 상인들은 왜 이렇게 많은 돈을 기부금으로 낼 뿐 아니라 기부 활동을 주도했을까? 이미 언급된 사례처럼 기부행위에 뒤따르는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의 반대급부는 무시할 수 없는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른바 ‘급공의서(急公議敍)’, 즉 “공익에 열심을 냄으로써 관직을 하사받는다”는 보상의 메커니즘은 오랜 역사의 교훈이기도 했다.

또한 휘주 상인이 부유하다는 명성을 확보한 이후부터 이재민을 구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지역사회로부터 기부금 요구의 우선 대상으로 손꼽히게 된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사대부의 공의에 의존하던 과거와 달리 경제가 발전한 도시에서 상인 공의가 공공연하게 활용되는 사회적 변화의 결과였다. 유럽에서는 일찌감치 발생했던 상인들의 공적 기부 문화가 중국에서는 17세기 경제도시를 중심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유교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한족 지배층에서 실리적인 만주족 지배층으로의 변화도 한몫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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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외에도 이러한 기부 활동이 지역사회의 좋은 평판을 이끌어내 결국 자신들의 상업 활동에 도움이 되리라는 상인들의 적극적인 기대 심리도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의 ‘애국 기업’ 마케팅처럼 ‘기부 상인’ 마케팅 효과라 할 수 있다. “선행을 할 때 가능한 한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꺼렸지만 지역의 지식인들과 거리의 행려자들은 이 일을 가리키며 입을 모아 칭송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12 17세기 상인들의 아름다운 기부 전략과 평판 상승은 이렇게 연결돼 있었다. 특히 수로 교통의 요지에 운하의 말뚝을 제거하거나 물에 빠진 이들을 구조하는 구생선(救生船) 운행에 기부함으로써 왕래하는 선박의 탑승자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상인들의 선행은 사회적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제고된 평판과 신뢰도가 다시금 활동 무대인 지역 상계(商界)에서 지배구조의 강화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13 이쯤 되면 이미 17세기 중국 상인들이 오늘날 유행하는 ESG 경영 가운데 사회적 책임을 뜻하는 S(Social)에 대한 민감도를 상당히 갖췄던 것으로도 보인다.

다만 과도한 기부 강요로 인해 파산 지경에 처한 상인들의 사례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삼번의 난으로 인해 재정이 부족해진 청조는 소금 세금을 증가하고 각종 명목의 기부금에 해당하는 수헌(輸獻)을 부유한 염상(鹽商)들에게 강요했다. 이에 적지 않은 상인들이 경영을 포기하고 회안과 양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건륭제의 치세 기간에는 황제의 남순마다 양주에서 접대를 도맡으며 염상계의 태두와도 같은 역할을 맡았던 휘주 상인 강춘(江春)이 말년에 과도한 기부금 출연으로 파산에 이르렀다.

기부 활동의 핵심은 기부자의 ‘자발성’에 있다. 비록 기부 액수가 과다하다 하더라도, 혹은 기부의 동기가 아무리 이해타산적이라 하더라도 기부자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뤄진다면 그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휘주 상인처럼 돈을 잘 벌어도 인색하다는 평가 일색이었던 상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얼마나 인색했던지 명 말의 소설에서 “원래 휘주인에게는 편향된 성격이 있는데 그것은 오사모(烏紗帽, 관리를 지칭)와 홍수혜(紅綉鞋, 여색을 지칭)에 대한 편향성이다. 일생 동안 이 두 가지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인색하다”14 는 평가와 이를 보여주는 상인 형상이 자주 등장했다. 따라서 부를 축적한 휘주 상인들이 17세기 중엽부터 수재 등 지역사회의 어려운 현안에 대해 기부 활동을 늘리는 것은 이미지를 향상시켜 결국 마케팅에 성공하기 위한 슬기로운 전략이었다. 18세기 양주에서 휘주 상인이 신사층을 압도해 지역 엘리트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돈을 잘 버는 것보다 잘 사용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부자의 자발성을 넘어서는 과도한 기부를 강요하는 데 있을 것이다. 더구나 기부의 용처가 지역사회의 공적 용도를 벗어나 집권자의 사적 취향에 편향될 경우 평판에 부작용이 발생할뿐더러 상황 변화에 따라 기부자가 파산될 위험성도 높아졌다. 지역사회의 치수와 관련된 기부는 순기능을 발휘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황제 권력에 부합하는 기부는 역기능을 발휘하기 십상이었다. 오늘날 중국 정부의 공동부유론 주창에 따른 기업들의 기부 행렬이 사회적 순기능으로 작용할지, 아니면 결국 기업 이미지와 경영에 패착이 될지 관심을 갖고 두고 볼 일이다.


출처: 麟慶 著文, 汪春泉 等繪圖, 『鴻雪因緣圖記』, 北京古籍出版社, 1984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chokra@korea.ac.kr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 학자와 하버드-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근세 시대에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 및 북경 수도론이 주된 연구 주제이고, 동아시아의 해양사와 대륙사를 겸비하는 한반도의 역사 관점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 저서로 『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엘로우 퍼시픽: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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