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경제 교과서나 신문기사에서 기업의 투자자금 조달 통로로 주식시장의 역할이 강조되곤 한다. 예를 들어 “주식시장은 기업이 유상증자를 통해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이는 설비투자(이른바 capex, Capital expenditures)로 이어져 국민 경제의 성장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유상증자는 기업의 설비투자에 어느 정도까지 기여를 하는 것일까. 기업재무 분야의 주요 이론 가운데 자금조달우선순위라 불리는 이론(pecking order theory)이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기업의 경영자는 투자자금 조달 시 내부창출자금(영업현금흐름) > 부채 > 유상증자 순으로 자금조달수단을 선호하는 서열이 있으며 결국 유상증자는 경영자들이 회사채 발행·은행차입 등의 부채보다 덜 선호하는 자금조달수단이라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2016년 회사채발행은 281건(24조4000억 원)이었지만 유상증자(IPO 제외)는 90건(6조3000억 원)에 불과했다. 이는 부채 조달에 비해 유상증자를 기피한다는 자금조달순위이론의 예측과 일관된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유상증자보다 회사채 발행을 선호하는 현상은 국내 기업에 국한된 사실은 아니다. 최근 수년간 저금리 기조 속에서 미국 기업들 역시 회사채 발행을 적극적으로 늘려왔다.
국내 기업이 유상증자를 회사채 발행보다 꺼리는 것은 이론적 관점에서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상증자로 조달된 자금이 어떤 용도로 배분되는가 분석하면 매우 놀라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가 고려대 최희정 박사와 공동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 기업의 유상증자 조달자금이 설비투자로 이어지는 비중은 극히 적었다. 구체적으로 계량경제기법을 사용한 추정에 의하면 평균적인 한국 상장기업이 유상증자로 100억 원을 조달할 때 평균 0.7억 원, 즉 겨우 7000만 원만이 설비투자로 사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용도는 현금을 쌓거나(31억 원), 단기 부채를 상환(11억 원)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특히 자회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그룹 모회사의 경우 유상증자 조달자금의 주요 사용처는 자회사 지분투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적인 모회사가 유상증자로 100억 원을 조달할 때 이 중 46억 원 정도가 자회사 지분 투자로 흘러간다. 이렇게 자회사로 흘러간 자금까지도 자회사 내 설비투자보다는 부채 해소, 보유 현금 증가 등 재무구조 개선 목적으로 주로 사용됐다.
미국 기업은 어떨까. 필자와 유사한 추정방법을 사용한 미국 센트럴 플로리다대 교수 등으로 이뤄진 연구진의 논문(2009)에 따르면 미국 기업 유상증자 자금 평균 38% 정도가 설비투자로 흘러갔다. 또 워싱턴대 교수 등으로 이뤄진 연구진의 논문(2009)에 의하면 ‘테크 버블(Tech bubble)’ 등을 포함한 기간에 미국 기업의 유상증자가 연구개발(R&D) 등의 투자활동을 지원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기억하자. 국내 기업 유상증자의 주된 목적은 설비투자 자금조달이 아니라 자사의 재무상황을 개선하거나 상황이 좋지 않은 자회사를 지원할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다. 원인이 무엇일까? 기업들이 마땅한 투자기회를 찾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주주가 지분 희석을 꺼리기 때문에 재무적으로 곤경 상태에 몰리기 전까지는 유상증자를 피하기 때문일까? 유상증자가 활발한 자본투자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은 매우 우울한 일이다. 제도적 개선을 통해 이 현상을 해소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인지, 한국의 독특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서정원 성균관대 경영학부 교수·EMBA 학과장
필자는 서울대 경영대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싱가포르국립대, 규슈대,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서 방문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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