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Editor`s letter

펭귄을 날게 한 크리에이티비티

김현진 | 289호 (2020년 1월 Issue 2)
이렇게 작심하고 온 국민이 똘똘 뭉쳐 ‘실체’를 애써 밝히지 않는 존재가 등장한 것은 산타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극에서 온 10살짜리 EBS 연습생 ‘펭수’ 이야기입니다. ‘국민 펭귄’ 펭수는 급기야 월드스타 BTS를 제치고 지난해 취업 포털 인크루트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 1위에 올랐습니다. 성공 요인이야 다양합니다만 펭수가 짧은 시간에 전 국민적 지지를 받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엄격한 규칙들을 통쾌하게 벗어던진 탈규칙성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유튜브와 공중파 TV, 어린이용과 성인용 콘텐츠, 심지어 방송사를 넘나드는 무(無) 경계성에 성별도 없습니다. 큰 키와 걸걸한 목소리 때문에 당연히 남자 어린이(?)로 설정돼 있다고 믿었던 펭수가 지난 연말 시상식과 타종 행사에서 각각 순백의 드레스와 조바위를 갖추고 등장했을 때 생경하지만 신선했습니다. 대중은 펭수라는 브랜드가 확장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함께 상상에 동참하면서 ‘탈 속’ 진실 따위는 거부합니다. 이런 펭수의 성공은 이 시대가 원하는 크리에이티비티(creativity)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합니다.

『창조하는 뇌』를 공동 저술한 뇌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과 작곡가 앤서니 브란트는 창의성의 정의를 ‘익숙한 경험을 이전에 보지 못한 형태로 전환하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보지 못한 것을 예측하는 것이 상상력이라면 그 예측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창의성입니다. 따라서 종종 창의성은 노력의 산물을 대중에 내놓고 그에 따른 평가를 받으면서 영향력을 검증받습니다. 이번 스페셜 리포트를 위해 DBR과의 인터뷰에 응한 저자들은 “따라서 혁신가, 그리고 예술가들의 산출물은 모두 ‘익숙함과 낯섦’ 사이 긴장감 속에서 생명력을 얻은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애플워치를 만들 때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는 아날로그 시계에서 용두(태엽을 감는 꼭지)처럼 보이는 입력 장치인 디지털 크라운을 굳이 시계 중앙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에 두었습니다. 이는 최대한 시계처럼 보이되(익숙한 것을 모방), 용두와 다른 새로운 기능을 한다는 기대감(신선함)을 모두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애플 신화를 만든 스티브 잡스는 “창의력은 새로운 무언가에 자신의 경험 등 이것저것을 ‘연결’하는 일이라 창의적인 사람에게 어떻게 그걸 해냈냐고 물으면 약간의 죄의식을 느낀다”고도 말했습니다.

창의성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다양한 사례도 있습니다. 잡지 뉴요커 표지 등의 창의적 시각물로 인정받던 그래픽 아티스트 로니 수 존슨은 2007년 세균 감염으로 생사를 넘나들다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었는데 신체 기능이 회복되고도 다시 붓을 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과거의 축적된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할 순 없었던 겁니다.

‘이 시대 크리에이터’로 꼽히는 펭수 역시 익숙함에 신선함을 더한 전략의 산물입니다. 팬들 사이에 ‘띵언(명언)’으로 불리는 “사장님이 친구 같아야 회사가 잘됩니다” 같은 말 역시 수평적 리더십과 팔로어십이 중요한 요즘 조직문화 질서를 고민하는 직장인이라면 모르는 말이 아닙니다. 익숙함(귀엽고 친숙한 펭귄)으로 점철된 동물 캐릭터가 신선한 행동(불과 10살짜리 연습생이 사장에게 대놓고 도발)을 하는 게 ‘익숙한 낯섦’을 원하는 대중의 뇌를 적절히 자극한 것입니다.

새해를 맞아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점점 더 중요한 덕목이 돼 가는 ‘창의성’을 고민하면서 DBR은 문화, 예술, 과학 등을 아울러 경영계에 통찰을 줄 수 있는 단초들을 수집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분야를 막론하고 혁신을 준비하는 2020년 버전의 ‘크리에이터’의 역할은 반짝반짝 빛나는 독창적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남들이 하기 전에 그 아이디어가 실제로 구현돼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는 일, 즉 행동(action)입니다. ‘창조’의 기본 원칙이 내가 알고, 내가 가진 무언가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혁신의 출발점도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현진 편집장
bright@donga.com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