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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환경에서 생존하는 생물들의 전략

지구 대멸종도 견뎌낸 ‘물곰’처럼… 극한의 ‘내핍 경영’, 자연에서 배운다

서광원 | 220호 (2017년 3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자연은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는 생명체에겐 아주 가혹하다. 가차 없이 생과 사의 갈림길로 보낸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살아 있는 생명체들에게는 반드시 살아 있는 이유가 있다. 하지만 자연은 무작정 냉혹하지는 않다. 확실한 기준이 있다. 바뀌는 환경에 자기만의 답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엔 가차 없이 제거하지만 자기만의 답을 제시할 경우엔 살 기회를 준다. 무엇보다 그것이 독창적이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효과가 있는 것이라면 아주 후한 보상을 한다. 자연 속에서 이런 생존전략을 찾다 보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평범한 게 없다는 점이다. 극한 환경에서는 극한의 생존법이 필요하다. 지금 한계라고 생각하는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생존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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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우주국(ESA)은 2007년 9월14일 인간이 아닌 색다른 생명체가 타고 있는 우주선을 쏘아 올렸다. 우주선 ‘포톤(FOTON)―M3’에 탄 주인공은 ‘물곰(water bear)’이라고 불리는 완보동물. 녀석들은 우주에서의 생존실험을 위해 특별히 ‘선발된’ 존재답게 산소 마스크 같은 특수 장비를 장착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우주를 체험했다.

12일 후 지구로 돌아온 녀석들은 바짝 말라 있었고 죽은 듯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수분과 산소가 없는 진공 상태인 우주에서, 그것도 인간이라면 결코 살아날 수 없을 정도의 치명적인 방사선에 노출됐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물을 주자 그중 일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저히 살아 있을 수 없는 곳을 갔다 왔는데 살아난 것이다. 우주에 다녀온 많은 생명체들 중 생존에 성공한 경우는 이끼와 박테리아밖에 없었으니 동물로서는 최초였다.



완보동물의 생존 전략

사실 지구에서도 녀석의 생존력은 놀라울 정도다. 햇빛이 없는 해저 800m에서부터 1년 내내 극한(極寒)인 히말라야 꼭대기까지 이 녀석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을 꼽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남극과 북극은 물론 방사능이 분출되는 뜨거운 온천에서도 버젓이 살고 있다. 영국 BBC 프로듀서인 존 로이드가 하는 말 그대로 전하자면 “여러분의 집에 사는 개가 매일 아침 소변을 누는 곳에서도” 산다. 녀석들의 서식지는 한마디로 ‘어디든지’이고 생존력으로 말하자면 ‘웬만해서는 안 죽는 녀석’이다.

다행스러운(?) 건 녀석들이 워낙 작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녀석들의 몸 길이는 평균 0.5∼1㎜, 길어야 1.5㎜ 정도다. 10만 마리가 모여봤자 물 0.57리터에 다 들어간다. 곰처럼 둥글고 통통한 몸을 가진 덕분에 ‘물곰’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의 정식 명칭은 느리게 움직인다는 뜻의 완보동물(緩步動物·사진 1). 이끼에 주로 살아 ‘이끼 돼지(moss piglet)’라고도 하는데 영어 이름 타디그라다(Tardigrada)는 ‘느리게 걷는다’는 라틴어 ‘tardigradus’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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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느리다고 갖춰야 할 걸 갖추지 않은 건 아니다. 동물로서 가져야 할 건 다 갖고 있다. 물론 현미경으로 봐야 하지만 머리와 목은 물론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짤막한 다리 네 쌍, 그리고 생식기는 물론 배설기관(항문)까지 있다. 워낙 작아서 빗방울에 튕기거나 바람에 의해 움직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살아가는 힘까지 약한 건 아니다. 생존력 하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녀석들은 어떻게 이런 극한의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걸까?

녀석들은 그 누구도 갖고 있지 못한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다. 사는 게 어려워지면 신진대사를 최저로 낮추고 휴면상태로 들어간다. 몸을 둥글게 말아 신체 노출을 최소한으로 한 다음 신진대사를 극단으로 낮춘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정도 낮추는 것이 ‘극단’일까.

관련 연구에 의하면 휴면상태에서의 신진대사율은 0.01%에 불과하다. 보통 때 쓰는 에너지의 0.01%, 그러니까 평소 100 정도의 에너지를 쓴다면 그 1만 분의 1만 쓴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 실낱 같은 생명의 끈만 쥐고 있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살아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휴면상태로 들어갈 때 녀석들은 몸 속에 있는 물을 다 배출한 후 세포에 있는 지방을 트레할로스(trehalose)라는 당분으로 변환시켜 이걸로 필수 장기를 둘러싼다. 방어벽을 치는 것이다. 덕분에 어느 날 갑자기 많은 양의 수분이 주어져도 급하게 팽창하지 않아 세포가 파괴되는 걸 막을 수 있다. 또 수분이 얼어서 세포가 찢어지는 것도 예방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내부에서는 DNA나 세포 손상을 보수할 수 있는 항산화제를 만든다. 이런 특수 물질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녀석들은 무려 100년 넘게 휴면상태로 지낼 수 있다. 100년을 쥐 죽은 듯 자다가 환경이 좋아지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시간만 견디는 게 아니다. 연구에 의하면 녀석들은 영하 272도에서도 죽지 않고 물이 펄펄 끓다 못해 모든 걸 태울 듯한 섭씨 151도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극약인 액체 헬륨 속에 1주일을 넣어놔도 끄덕 없고 인간에게 치명적인 방사능 양보다 1000배 강한 방사능에 쏘여도 별 탈이 없다. 지난해 일본 도쿄대 구니에다 다케카주 연구진이 밝혀낸 결과에 따르면 이 녀석들이 방사선에 쏘여도 DNA가 멀쩡한 이유가 있었다. ‘DSUP’라는 특수한 단백질 덕분이었다. 연구진이 이 단백질을 사람의 신장세포에 넣었더니 방사선으로 인한 세포 손상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이 단백질을 만들어낸 덕분에 방사선쯤은 개의치 않을 정도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능력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900여 종의 물곰들 중 원시종은 이런 능력이 미약하다. 5억 년 전쯤 이 지구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 녀석들은 대멸종 같은 어마어마한 위기를 다섯 번이나 겪고 중소 멸종을 수십 번이나 겪어내면서 그때마다 그런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덕분에 이름이 붙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미확인 종이 최소한
1만여 종에 이른다. 종이 다양하고 많다는 건 번성 중이라는 말이다. 2013년 3월 미 항공우주국이 ‘지구에 사는 동물 중 외계 생명체로 가장 적합한 후보’를 뽑았을 때도 역시 첫손가락에 꼽혔다. 명실상부하게 최강의 극한 생명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에는 이유가 있다

지금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생명체들에는 이유가 없는 게 없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반드시 이유가 있다. 자연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절대 인자하지 않다. 아니, 냉혹하다. 무엇보다 자연은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는 생명체에겐 아주 가혹하다. 가차 없이 생과 사의 갈림길로 보낸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살아 있는 생명체들에게는 반드시 살아 있는 이유가 있다.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그곳은 완전히 폐허가 됐다. 모든 것이 사라졌고 사라진 곳에는 방사능이 남았다. 학자들조차 푸른 싹을 보려면 최소한 50년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푸른 새싹이 돋아났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쇠뜨기였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새싹이 돋다니…. 이전까지 쇠뜨기는 밭일을 하는 농부들을 귀찮게 하는 아주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워낙 끈질기게 자라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면서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증거가 됐다.

사실 쇠뜨기는 농부들뿐만 아니라 야생동물들에게도 기피의 대상이다. 독을 갖고 있어서 먹어봐야 좋을 일이 없다. 해독법을 개발한 녀석들도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먹지 않는다. 이빨이 다 닳아버리기 때문이다. 쇠뜨기는 토양에서 실리콘을 흡수, 농축하는 능력을 개발해 줄기를 만든다. 실리콘을 기본으로 한 결정화합물 실리카는 유리의 재료다. 유리를 만드는 재료를 씹으면 어떻게 될까? 이빨이 견뎌내질 못하고 금방 닳아버린다. 하루 종일 거친 풀과 잎을 먹어야 하는 초식동물들에게 이빨이 없다는 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초식동물들에게 쇠뜨기는 가까이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존재다. 남다른 능력을 개발한 덕분에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생태학은 이런 능력을 어떻게 가지게 됐을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3억8000만 년 전 삶을 시작한 쇠뜨기들은 당시 전 지구를 뒤덮을 만큼 승승장구했던 존재들이었다. 지금은 딱 하나의 속에 15종만이 남아 있고 크기도 엄청나게 줄었지만 당시에는 지금의 나무만 한 크기로 자라는 수천 종이 번성했던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이 나무들이 파묻혀 지금의 석탄이 됐는데(덕분에 산업혁명이 가능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살아남은 쇠뜨기들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힘을 기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게 된 것이다.

자연은 냉혹하지만 무작정 냉혹하지는 않다. 확실한 기준이 있다. 바뀌는 환경에 자기만의 답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 가차 없이 제거하지만 자기만의 답을 제시할 경우엔 다르다. 무엇보다 그것이 독창적이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효과가 있는 것이라면 아주 후한 보상을 한다. 남들이 할 수 없는 걸 해낼수록 더 잘살 수 있도록 한다.

일견 냉혹해 보이는 이 삶의 원리가 생각과 달리 생태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덕분에 수없이 다양한 생명체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아무리 혹독한 환경이라도 그 환경이 요구하는 답을 찾아내기만 하면 삶이 보장되는 까닭이다. 이 중에는 요즘 같은 불확실성 가득한 시대에 기업과 경영자들이 참고할 만한 사례들도 많다. 먼저 가장 흔하게 떠오르는 혹독한 환경으로 가보자.





사막: 4000만 분의 1의 생존 가능성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막인 아프리카 남서부의 나미브사막은 비는 거의 내리지 않고 한낮 온도는 70도를 오르내린다. 오로지 작열하는 태양과 모래밖에 없는 뜨겁기 만한 텅 빈 공간이다. 어디에도 물이 없다. 생명은 물을 기반으로 생겨났으니 물이 없는 곳에는 생명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도 생명체들이 산다.

살아 있는 움직임은 이른 아침 날이 밝아오기 전부터 시작된다. 2㎝ 정도 되는 손톱만 한 거저리(사진 2)들이 ‘등산’을 시작한다. 녀석들은 바람이 만들어놓은 모래산들 중에서도 가능하면 높아 보이는 산을 오른다. 어떤 모래산은 300m가 넘는 것도 있는데 우리가 보기엔 작을지 몰라도 녀석들에겐 에베레스트급이다.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데드라인이 있다. 가능하면 해가 뜨기 전에 올라야 한다. 부지런히 꼭대기까지 올라간 녀석들은 곧바로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물구나무를 선다. 뭘 하는 걸까? 녀석은 지금 물구나무를 서서 이곳에서 유일한 물을 ‘긷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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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대신 아침마다 대서양에서 안개가 밀려온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살 수 있는 게 생명의 법칙. 한참 물구나무를 서 있으면 등에 자그마한 물방울들이 맺히면서 흘러내린다. 안갯속 수분이 물구나무를 선 등에 부딪쳐 응결되는 것이다. 이걸로 체중의 40%에 이르는 수분을 흡수할 수 있다. 안개는 해가 뜨고 나면 사라지기 시작하기에 늦으면 안 된다. 또 가끔 변덕이 심한 안개가 며칠에 한 번씩만 올 때도 있기에 가능하면 많은 수분을 흡수해야 한다.

아무렇게나 물구나무만 선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안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가뭇없는 실체. 빠르고 효과적인 집수(集水) 장치가 필요하다. 영국의 동물학자 앤드루 파커가 2001년 11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녀석들은 등에 울퉁불퉁하게 생긴 미세한 요철 모양을 수없이 갖고 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10㎛(마이크로미터, 1㎛는 100만 분의 1m) 크기로 촘촘하게 돋아 있는 이 돌기들의 끝 부분은 물과 잘 달라붙은 친수성, 돌기 아래는 물을 밀어내는 소수성으로 돼 있다. 공기 중의 수분을 잘 달라붙게 한 다음 신속하게 입 쪽으로 향하게끔 세밀하게 설계한 것이다. 덕분에 녀석들은 몇 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이곳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 (파커는 2004년 6월 이 원리를 응용해 안개에서 물을 뽑아내는 특허를 획득했고 최근 나미비아 정부는 이런 원리로 대량의 물을 채취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찮은’ 거저리에게서 ‘한 수’ 배운 것이다.)

혹독한 환경일수록 독특한 생존 기술을 개발해야 살아갈 수 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생존의 원리다. 예를 들어 이곳에 사는 나마쿠아 카멜레온과 핫로드 개미들은 모래가 뜨거워지면 네 발 중 두 발을 번갈아 든다. 녀석들이 대각선으로 발 한 쪽씩을 드는 걸 보면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지만 극한 환경에서는 아무리 작은 것도 도움이 된다. 연구에 의하면 드는 발은 온도가 10도 정도 낮아진다. 이곳의 모래는 다른 곳에서 바람에 날려온 메뚜기들이 모래에 닿자마자 죽을 정도로 뜨겁다.

그런데 이 뜨거운 곳에 뿌리를 내리고 무려 2000년이나 살아온 식물이 있다. 얼핏 보면 넓은 잎을 가진 풀이 시들어서 맥없이 나동그라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웰위치아(사진 3)다. 하지만 이건 풀이 아니라 나무다. 살아남기 위해 풀처럼 바뀐 것이다. 원시적이긴 해도 솔방울을 만드는 걸 보면 소나무의 먼 친척임을 알 수 있다. 이 삭막한 환경에서 어떻게 2000년이나 살아올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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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결은 ‘완전 내핍 경영’이다. 이 식물은 평생 딱 두 장의 잎만 키운다. 떡잎이 나고 난 다음에 나는 본잎을 일생 동안 키운다. 환경이 열악하다고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을지 몰라도 끈질기게 조금씩 조금씩 성장한다. 그래서 웰위치아가 달고 있는 잎은 최소한 수백 년쯤 된 것들이고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웰위치아는 2000년이 넘는 잎을 달고 있다. 마치 작업용 장갑 하나를 다 닳아질 때까지 쓰고 또 쓰는, 맨주먹으로 성공한 알짜 중소기업 사장들처럼 말이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400㎞ 떨어진 칼라하리사막에 있는 거대한 아카시아 나무들은 다른 방법을 터득했다. 무려 40m나 되는 뿌리를 땅 속 깊이 뻗어 물을 확보한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극한 환경에서는 뭐든 특별히 잘하는 능력 하나는 반드시 필요하다.

북미 애리조나의 소노란사막에서 자라는 서와로 선인장(사진 4)은 사막이라는 곳이 얼마나 혹독한 환경인지를 잘 알려주는 또 다른 살아 있는 증거다. 얼핏 보면 어른 키보다 더 커서 그런가 보다 생각되지만 5㎝ 자라는 데 무려 10년이 걸리고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10m 크기로 자라는 데 최소한 100년이 걸린다. 생명체의 기본적 목표인 성체가 되는 데 10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생존 환경이 혹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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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살아 어른이 되면 드디어 생애 최대 목표인 번식에 참여하는 꽃을 피울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밤에만 꽃을 피운다. 왜 환한 낮이 아니라 캄캄한 밤에 꽃을 피울까? 이유가 있다. 이 선인장들은 이곳에 사는 박쥐들에게 중매(수분)를 맡기고 있는데 이 녀석들이 밤에 활동하는 까닭이다.



우리로 치면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추는 것이다. 한 번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3주 동안 200송이 정도를 연달아 피우는데 꽃 하나하나는 하룻밤 만에 지고 수분이 되면 즉시 씨앗을 만든다. 그렇게 한 해에 수천 개쯤 만든다. 시간이 없으니 모든 걸 속전속결하는 것이다.

사막의 생리를 터득한 이 선인장은 미래를 운에 기대지 않는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도 잘 아는 듯싶다. 씨앗을 퍼뜨릴 때 씨앗 속에 달콤한 즙을 넣는 것도 그렇다. 말이야 달콤한 즙일지 몰라도 사실 그 즙은 무려 100년 동안 애써 모은 에너지를 모두 투자하는 것이다. 너무도 아깝지만 그렇게 해야 가끔 지나다니는 새들이 얼른 먹을 것이고 땅을 기어 다니는 개미들이 주워갈 것이기 때문이다. 새들이 먹고 나서 씨앗을 배출해주면 자연스럽게 더 멀리 더 넓은 곳으로, 더 살기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많아지고 개미가 땅속으로 가져가면 말라 죽을 가능성이 적어진다. 제 아무리 씨앗을 잘 만들었다 한들 제대로 뿌려지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과감하게 투자한다.

선인장 한 그루는 이렇게 평생 4000만 개 정도의 씨앗을 만들고 덕분에 여기저기 흩어진 씨앗은 비가 오길 손꼽아 기다린다. 이 많은 씨앗 중 살아서 10m가 넘는 우람한 선인장으로 크는 씨앗은 얼마나 될까? 한 개 정도만 그렇게 자란다. 사막은 그렇게 혹독한 곳이다. 하지만 살 수 없는 곳은 아니다.



동토의 왕국: 5000년을 살아온 비결

생명체들에게 사막만큼 혹독한 환경이 있을까? 있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동토의 왕국이다. 이곳은 사막과 정반대로 물이 많지만 다 얼어붙어버리기에 살기 어려운 곳이다. 하지만 생명력이란 이전까지 한계라고 여겼던 곳에서 살아가는 힘을 찾아내는 것이고 한계를 넘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다.

매년 설날 즈음이 되면 신문과 방송에서 봄을 알리는 전령사로 소개되는 꽃이 있다. 하얀 눈 속에 피어나는 노란꽃, 복수초다. 설날 아침에 꽃이 핀다고 해서 원일초(元日草), 주변의 눈이 녹아 내린다고 해서 눈새기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작은 꽃이 어떻게 차가운 눈과 얼음을 뚫고 나올 수 있을까?

복수초 꽃이 피었을 때 뿌리를 캐보면 비결을 알 수 있다. 다른 풀들의 뿌리와 달리 온기가 느껴지고 공기에 노출되면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흔히 체온은 동물에게만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생명의 세계에서 한계란 깨지라고 있는 것이고 예외는 남다른 생존전략을 개척한 결과다. 사막의 웰위치아가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풀처럼 모양을 바꾸었듯이 이 작은 식물은 동물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스스로 열을 내는 법을 개발했다. 눈과 얼음을 녹이고 솟아오를 수 있게끔 말이다. 원리는 간단하다. 매서운 겨울 추위가 물러가면서 땅이 녹기 시작하면 뿌리에 있는 강심배당체(cardiac glycoside, 强心配糖體, 심장에 좋다는 강심작용을 하는 성분)가 눈과 얼음이 녹으면서 생기는 수분과 결합, 열을 발생시킨다.

이와 함께 오목하게 생긴 꽃을 피워내 소중한 햇빛을 살뜰히 모은다. 이렇게 모은 열로 꽃 속을 따뜻한 난로가 되게끔 해서 추위에 떠는 곤충들을 불러모은다. ‘따뜻하면서도 맛있는 꿀이 있으니 빨리 오라’고 말이다. 꽃 색깔이 노란색인 것도 이 즈음 눈에 가장 잘 띄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한 봉사가 아니다. 쉬고 머무는 동안 곤충의 몸에 꽃가루를 묻혀 이 꽃 저 꽃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자연스럽게 중매쟁이 역할을 하게끔 한다.

따뜻한 봄이 왔을 때 하면 될 텐데 추운 날 왜 사서 고생을 할까? 따뜻한 봄은 복수초에게만 오는 게 아니라 모든 풀들에게 온다. 모든 풀들에게 온다는 건 엄청난 경쟁을 뜻하고 잘못하면 수분을 못할 수도 있다. 한다고 해도 에너지 소모가 많다. 어렵더라도 매개곤충을 독점할 수 있는 차별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기를 녹여 살길을 만드는 복수초와 달리 극한환경에 완전히 적응하는 전략도 있다.



해발 3000m가 넘는 수목한계선은 말 그대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이런 곳은 대체로 고산지대임에도 일출을 보기 힘든 곳이 많다. 예를 들어 미국 서부 산악지역의 수목한계선은 1년 중 대부분이 혹한과 강풍이 몰아쳐 빛나게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보기 힘들다.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1년 중 한 달 반밖에 안 될 정도다.

이런 곳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거스를 수 없는 환경이라면 적응해야 한다. 이곳에 사는 브리슬콘소나무(사진 5)의 전략이다. 그런데 워낙 환경이 험악해서 그런지 이곳 소나무들은 거의 대부분 죽어 있는 듯 보인다. 어쩌다 보이는 가지 하나 정도만 간신히 잎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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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전략적 선택이다. 워낙 춥고 척박한 지역이라 생존의 최대 관건이 에너지 보존이기에 여러 가지 중 하나만 성장시키고 다른 가지들은 휴면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사막의 웰위치아처럼 잎들도 최대한 아낀다. 우리 주변의 소나무들은 보통 2년에 한 번씩 잎을 떨구지만 이 소나무들은 최대 30∼40년 같은 잎을 달고 있다. 그럼에도 강풍과 혹한이 얼마나 몰아치는지 하나같이 껍질이 벗겨지고 뒤틀려 있고 옹이가 져 있다. 이런 상처투성이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생명력에 관한 한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다른 게 많다. 이 나무들 중에는 무려 5000년 넘게 살아온 주인공들이 있다. 놀라운 건 최근 50년 동안 성장 속도가 30%나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자라지 못하는 게 아니라 환경이 열악해 자라지 않았을 뿐 자랄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언제든 좋은 시절이 오면 쑥쑥 자랄 모든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이 소나무들은 마치 시오노 나나미가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에 쓴 로마인의 특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인간성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았고 그들 스스로에 대해서도 환상을 품지 않았다. … 그들은 실패한 상황에서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했고 … 수 없는 패배와 실패를 뛰어넘었기 때문에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시련을 통해 강해졌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특성이 천년 제국 로마를 만들었다고 했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약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걸 통해 외려 강해졌다는 것이다.

혹독한 환경에 완전히 적응하는 건 이 소나무만의 전략이 아니다. 비슷한 전략으로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동물도 있다.

북극에 가까운 알래스카는 모두가 다 아는 동토의 왕국. 포유류처럼 일정한 체온을 가지는 항온동물도 살아가기 힘든 곳이다. 상황이 이러니 변온동물인 양서류들에게는 엄동설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엄두도 못 내는 서식지라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땅속까지 얼어붙은 동토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땅이 얼면 땅속으로 들어간 개구리의 몸도 얼어붙는다. 얼어붙는다는 건 몸속의 수분이 얼음으로 변하는 것인데 뾰족하고 날카로운 얼음 결정들이 삐죽삐죽 생기면 몸속은 이 예리하고 뾰족한 것들로 인해 난도질을 당한다. 살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양서류이자 변온동물인 나무숲산개구리는 이 알래스카에 산다. 태생적으로 추위에 약한 녀석이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미국의 생리학자 케네스 스토리와 재닛 스토리 부부의 연구에 의하면 위기가 온다 싶을 때 이들의 부신피질에서 아드레날린이 급하게 뿜어져 나온다. 강도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 같은 위기 상황에서 우리 몸에 빠르게 확산되는, 그래서 없던 힘도 생기게 하는 그 아드레날린이다. 아드레날린은 전쟁이 터지면 전령이 그렇게 하듯 전속력으로 간으로 달려가 이곳에 저장된 글리코겐을 포도당으로 바꾸게 한다. 얼음이 세포 속으로 들어올 때쯤이면 세포 속이 포도당으로 가득 차 있게끔 말이다. 왜 포도당일까? 포도당은 에너지원이기도 하지만 부동액과 같은 효과를 낸다. 덕분에 세포 안은 얼음이 생기지 않고 세포의 바깥, 그러니까 혈관을 비롯해 세포와 세포 사이의 공간에만 얼음이 생긴다. 이때 녀석들의 세포는 또 한 가지 어려운 일을 한다. 얼음이 얼 때 세포 속의 수분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빼앗기는 게 아니라 내어주는 건 그래야 세포 안이 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이 개구리들은 세포 바깥에 생긴 얼음 정도는 웬만큼 견딜 수 있다. 정확하게는 몸 속 수분의 65%가 얼음이 됐을 때도 최대 4주를 버틴다.

어쨌든 몸속에 얼음이 생기기 시작하면 심장은 완전히 멈추고 혈액 순환도 멈춘다. 당연히 숨도 쉬지 않는다. 이 정도면 ‘완전한 사망’ 상태인데 딱 하나, 세포는 살아 있다.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포도당 덕분에 최소한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마치 브리슬콘소나무가 가지 한 개만 살려놓고, 물곰이 신진대사율을 0.01%로 낮추듯이 말이다. 그러다 좋은 시절, 그러니까 봄이 되면 얼어 있던 몸에 피가 돌기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24시간 만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 폴짝폴짝 뛰기 시작한다. 완전 회복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른 개구리들이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기에 녀석은 다른 곳에서와 같은 경쟁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개구리 세상에서만큼은 완전 독점적 생태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지금은 SF영화에서만 가능한 이런 기술을 우리가 개발할 수 있다면 아마 새로운 산업이 생겨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니다. 또 다른 동토의 왕국인 남극에는 이와는 다른 적응전략으로 번성하고 있는 녀석들이 있다. 뒤뚱거리긴 하지만 ‘연미복을 입은 신사’로 불리는 펭귄이다.

펭귄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큰(키 1.2m 정도) 황제펭귄(사진 6)은 남극의 모진 눈보라 속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운다. 여기서 ‘모진’이란 어느 정도를 의미할까? 최대 시속 190㎞의 눈보라와 영하 60도까지 내려가는 상황을 말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겨울 폭풍이다. 평균으로 낮춰 잡아도 시속 130㎞의 바람과 영하 40도의 추위를 견뎌내야 한다. 좋은 날도 극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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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쯤 남극 내륙 깊숙한 곳에 도착한 펭귄들은 짝짓기를 한 후 두 달 뒤 알 한 개를 낳는다. 암컷이 알을 낳을 때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컷이 이 알을 넘겨받으면 암컷은 소모한 영양분을 채우기 위해 바다로 나간다.

홀로 남은 수컷은 바다로 나간 암컷이 돌아오는 두 달 동안 알과 알에서 깨어난 새끼를 털이 가득한 두 다리 사이에 품고 키운다. 두 달의 시간이 걸리는 건 바다까지 왕복 거리가 보통 100㎞가 넘기 때문이다. 이 거리를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왕복해야 하는 암컷도 힘들지만 정작 고생은 수컷이 더 한다. 이곳으로 오는 행군 시점부터 포함해 거의 넉 달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위 속에 있는 것마저 깨어나는 새끼에게 주면서 극한의 추위를 견뎌야 한다. 얼마나 힘든지 이 기간 동안 수컷들의 체중은 45%나 감소한다. 그야말로 ‘반쪽’이 되는 것이다. 알을 하나만 낳는 것도 추위에 18초만 노출돼도 얼어버리는 가혹한 환경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가 그렇듯 이곳에서는 새끼 둘을 돌볼 여유가 없다.

녀석들은 오랜 진화를 통해 언제나 39도를 유지하는 체온 유지 장치를 획득했지만(1㎠당 11개의 털이 빽빽이 나 있다) 24시간 내내 사정없이 몰아치는 남극의 칼바람 폭풍은 지구상 가장 처절한 겨울이다. 설상가상 지구의 공전 때문에 넉 달 동안 해까지 사라져 세상은 온통 어두컴컴하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황량하기만 한 얼음 벌판에 꼼짝 없이 서 있어야 하는 수컷 펭귄들의 몸도 점점 한계에 이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견딜 수 없는 한계에 이를 때 펭귄들은 500∼600마리씩 무리를 형성해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 물샐 틈 없이 완전히 밀착한 다음 천천히 원을 그리면서 돌고, 또 돈다. 안에 있어 온기를 많이 받은 녀석은 바깥으로 가고, 바깥에서 온갖 바람을 다 맞은 녀석들은 안쪽으로 들어오는 허들링(huddling)으로 처절한 시간을 견딘다. 연구에 의하면 바깥쪽과 안쪽은 무려 60도 차이가 날 정도로 온도 차가 크다. 안에 있는 녀석들이 밖에 있는 녀석들을 위해 찬바람을 맞는 따뜻한 이타심을 발휘하는 걸까? 그러기에 남극의 추위는 너무 심하다. 너무 심하다 보니 밖에 있는 녀석들은 죽기살기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사실은 이런 힘이 순환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타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안쪽에 있는 녀석들이 별 저항 없이 밀려주는 덕분에 모두들 ‘훈훈한’ 온기의 혜택을 볼 수 있어 최악의 상황을 이겨낸다.



척박함은 기발한 혁신의 원동력

보통 극한 환경이라고 하면 사막이나 남극, 북극을 떠올리지만 생명체들에게 극한의 환경은 꼭 이런 곳만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연봉을 많이 주는 회사라도 일하는 방식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 같은 곳이듯 물리적 오지만이 극한 환경은 아니다. 상대적인 오지가 있다.



예를 들어 요즘 집에서 많이 키우는 화초들에게 한국의 겨울은 극한의 시간이다. 대체로 1년 내내 뜨거운 열대 지역 출신들이 대부분인 까닭이다. 그러면 이 화초들의 고향인 열대 밀림은 어떨까? 온갖 나무들로 빽빽한 곳이니 생태적으로 풍요로운 곳일까? 이곳 역시 보이는 것과 다른 사실이 있다. 풍요로운 곳도 있지만 보기와는 달리 아주 빈약한 곳들이 많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섬은 오래된 열대우림 중의 하나인 데도 보기와는 달리 아주 척박하다. 겉만 화려한 텅 빈 생태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오랜 시간 아무도 건드린 사람이 없어 숲이 우거졌을 뿐 거의 날마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폭우가 토양의 영양분을 모두 쓸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있는 나무들이 하나같이 껍질이 두껍고 잎에 독이 많은 것도 어떻게든 영양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것이다. 먹을 게 많지 않으니 당연히 포유류도 많지 않다. 특히 나무처럼 잎이 많지도 않고 뿌리가 깊지도 않은 풀들에게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오지이다. 나무들이 태양을 가리면 햇빛을 볼 수 없어 낮에도 캄캄한 곳이 많다. 하지만 생명의 역사가 수없이 증명하듯 척박하고 절박한 환경은 완전히 새로운 생존법을 만들어내는 토양이 된다. 위기는 언제나 기발한 혁신을 만들어낸다.

풀과 나무 같은 식물은 사냥이 아니라 광합성과 흙 속의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흙 속에 영양분이 거의 없다시피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삶을 포기해야 할까? 생존에 한계는 없다. 살아갈 방법이 마땅치 않다면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바뀌는 게 최선이다. 가장 좋은 건 그 환경에 풍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르네오 밀림에는 곤충들이 많은데 이걸 어떻게 내 삶의 에너지로 만들 수 없을까? 있다. 자신이 가진 기존 한계를 넘어서면 된다. 이곳에서 번성하고 있는 벌레잡이통풀(Nepenthes·사진 7)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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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면 이 풀은 생존방식을 완전히 바꿔 동물처럼 ‘육식’을 한다. 식물이 ‘육식’을 한다고? 그렇다. 녀석들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길다란 맥주잔 같은 통처럼 생겼고 통 속에 3분의 1쯤 물을 채우고 있다. 빗물을 받은 것이지만 이 안에는 각종 소화액이 분해돼 있다. 소화액이 들었다면 위장인가? 그렇다고 해도 무방하다. 바로 이곳에서 먹이를 소화시켜 영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식물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데 어떻게 사냥을 하는 걸까? 갈 수 없다면 오게 해야 하고, 오게 하려면 와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공해줘야 한다. 통풀의 설득력 있는 제공물은 아찔한 향기가 나는 꿀이다. 숲속으로 퍼지는 향기는 곤충들에겐 거부할 수 없는 유혹, 냄새를 따라 온 곤충들은 어김없이 통 입구의 동그란 테두리에 내려선다. 맛있는 꿀이 발라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 미끄러져 통 속으로 빠진다. 사실 조심해도 빠지기 쉬운 이 끈적한 통 속은 죽음의 수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부림을 칠수록 가라앉는다. 먹이가 위장에 ‘도착’하면 물에 풀어진 소화액은 먹이를 녹이고 통풀은 천천히 ‘고기 맛’을 흡수한다. 독일의 말리스 메어바흐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한 시간 동안 6000마리나 되는 흰개미를 수프로 만든 통풀도 있었다.

냄새를 따라 온 곤충들은 어김없이 통 입구의 동그란 테두리에 내려선다. 맛있는 꿀이 발라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 미끄러져 통 속으로 빠진다.

하나의 비즈니스 모델이 성공하면 이 모델과 원리가 다양하게 분화되는 건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이 원리로 벌레가 아닌 박쥐 배설물을 ‘사냥’하는 통풀도 있다. 이 통풀은 흰개미 사냥꾼과는 달리 박쥐들이 하룻밤 잘 수 있는 둥지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배설물을 사냥한다. 박쥐는 잘 때 배설하기 때문이다. ‘웬 배설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박쥐의 배설물에는 영양분이 많이 남아 있어 이걸로도 먹고살 만하다. (쇠똥구리가 번성한 이유이기도 하다.)



배설물이라고 쉽게 얻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자연은 절대 ‘대충대충’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통풀 또한 이런 자연의 이치를 잘 알고 있는 듯 놀라울 정도로 고객지향적인 ‘장치’를 만들어 놓고 있다. 뚜껑과 대롱의 각도를 세밀하게 조절해 박쥐들이 하룻밤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한 걸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박쥐들이 자신들을 잘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 박쥐들이 내는 음파에 잘 감지되도록 하는 덮개까지 개발해 놓고 있다.

나무두더지를 초대하는 통풀은 하룻밤 잠자리가 아닌 다른 편의시설을 만든다. 이 고객은 박쥐와 달리 먹으면서도 배설할 수 있기에 편하게 앉아 꿀을 먹으면서 배설을 하도록 하고 있다. 기능이 비슷해서 그런지 생김새가 우리가 쓰는 화장실 수세식 변기와 아주 흡사하다.

그런데 꿀만 먹고 그냥 가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의외의 변수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 그런 고객을 탓하기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 통풀은 달콤한 꿀에 배설이 빠르게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약물’을 넣어 초대 손님의 ‘선물’을 최대한 빨리 받아낸다. 어떻게 이런 관계를 터득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수백만 년의 시간 동안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자기만의 답을 찾아냈을 것이다. 덕분에 79종이나 번성하고 있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파리지옥이나 끈끈이주걱 역시 이런 식충식물이다.



다들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간다

지구 생태계에서 대표적인 극한 환경이라고 할 만한 사막과 남북극, 그리고 상대적으로 척박한 곳에서 자기만의 생존전략으로 살아남은 이 사례들은 그야말로 일부분일 뿐이다. 기상천외한 생존전략들은 무수히 많다.

멕시코와 캘리포니아 지역에 서식하는 도롱뇽은 천적에게 다리를 잡히면 다리를 던져주고 도망친다. 다리 없이도 살 수 있는 걸까?

더한 능력이 있다. 녀석들은 없어진 다리를 8주 만에 다시 만들어내는 재생력을 갖고 있다. 심지어 눈과 뇌까지 다시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혈압을 낮게 유지한 덕분에 과다출혈도 없다.

연구 결과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녀석들 몸속 세포들은 미발달 상태로 되돌아가 배아 상태에서부터 다시 생물학적 과정을 시작한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연구 중이다. 아직 답을 모른다는 말이다. 아시아 사막에 사는 도마뱀붙이도 같은 능력이 있다. 생명의 역사에서 이 녀석들은 ‘한물간’ 파충류들인데도 포유류들도 가지지 못한, 아니 이 지구를 명실상부하게 장악하고 있는 우리 인류도 가지지 못한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다. 그 덕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원시동물이라고 생명력까지 원시적인 건 아닌 것이다. 녀석들은 끊임없는 혁신을 이뤄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다.

어떤 생명체는 닥쳐오는 극단적 환경에 적응하는 게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아예 극단적 환경을 선택하는 새로운 개념의 혁신을 통해 생존에 성공하기도 한다.

낙타는 북미 대륙이 고향인데 고향에서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변화하는 환경에 살길을 찾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오래 전 유라시아와 북미 대륙이 연결됐을 때 새로운 땅으로 건너간 낙타들은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한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사막을 선택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살기 어려운 곳을 선택했을까? 남들이 선택하지 않는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한다면 다른 동물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쌍봉 낙타와 아프리카의 단봉 낙타(사진8)가 그 주인공들인데 이 녀석들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개발한 능력 덕분에 지금도 잘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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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소개한 복수초와 겨울을 견디며 살아남는 냉이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 주인공들이다. 남극의 펭귄은 평범한 서식지와 하늘을 버리고 새로운 신천지인 남극과 바닷속을 개척한 경우다.



갈수록 살기 어려운 세상이 돼가고 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생존이 극한으로 몰리는 일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이런 극단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지금까지 소개한 생존전략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평범한 게 없다. 남들도 다 하는 평범함으로는 극한 환경을 이겨낼 수 없는 까닭이다.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에게 바둑을 가르치던 삼촌이 이런 말을 한다. “파격이 없다면 고수가 될 수 없다.”

바둑에서만 그럴까? 살아가는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범에 머물러 있거나 상식에 갇혀 있다면 고수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는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환경이 지금까지의 패턴에서 벗어난다면 생존법도 그래야 한다. 극단적 환경에 처한다면 생존법도 극단적이어야 한다. 극한 환경에서는 극한의 노력, 극한의 생존법이 필요하다. 지금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살아갈 수 있고 탁월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명의 세계를 들여다볼수록 확연해지는 게 있다. 작은 미생물부터 모두들 죽을 힘을 다해서 산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한다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자기만의 살아가는 법, 나만의 생존전략을 만들어내야 한다. 환경이 바뀐다면 그 환경에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주인공은 어떤 누군가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나 자신이 만든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araseo11@naver.com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사장의 길> 등이 있다.




One Point Lesson

1 자연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절대 인자하지 않다.
무엇보다 자연은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는 생명체에겐 아주 가혹하다.
가차 없이 생과 사의 갈림길로 보낸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살아 있는 생명체들에게는 반드시 살아 있는 이유가 있다.

2 자연은 특히 독창적이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환경에서 효과가 있는 답을 제시하는 생명체에겐 아주 후한 보상을 한다.
남들이 할 수 없는 걸 해낼수록 더 잘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서광원 |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
    araseo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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