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비즈 타임스: 한국 근대 기업가의 초상 ① 박흥식
Article at a Glance – 전략,혁신
1926년 상경한 청년 박흥식은 근대 경성 비즈니스계의 기린아로 꼽혔다. 첫 사업인 쌀장사에서 인쇄업과 종이거래상으로 기민하게 전환한 것은 기미년 3·1운동 이후 변화하는 정국을 맞아 급증하는 출판 언론 수요를 간파한 덕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축적한 자본을 발판으로 20대 후반에 대형 잡화상 ‘화신상회’를 인수해 백화점 사업을 시작했고, 현대와 유사한 형태의 마케팅을 창의적으로 도입해 선발주자인 일본 백화점에 맞서 경쟁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위기는 허무하게 찾아왔다. 항공기 제조사를 설립하라는 일본 정부의 지시가 발단이었다. 해방 이후 그는 일본의 전쟁에 동조했다는 심판을 받으며 큰 타격을 입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으로 생각해야 할 기업인의 운명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
편집자주
DBR은 근대에 기업을 일군 국내 경영자들을 소개하는 ‘경성 비즈 타임스’를 연재합니다. 근대사의 흐름과 중대한 판단의 고비 속에서 근대 경영 선구자들이 내린 결정과 이에 따른 결과는 후대 경영인들에게 많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현대 기업의 초기적 틀을 갖추고 이 땅에 출현한 근대적 기업의 역사를 대략 100년 안팎으로 볼 때, 그 초기 무대를 장식한 기업의 구성과 운영 및 기업 환경, 그 속에서 명멸한 기업인의 분투기는 시대를 초월하는 하나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기업과 인간의 경영에 대해 새롭게 성찰해보는 계기를 갖게 되길 바랍니다.
1949년 1월11일, 박흥식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3일 전 종로 2가 화신백화점 4층 사장실에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된 몸이었다. 구정을 3주 앞둔 주말 오후의 번잡한 백화점을 포위하고 벌어진 그의 체포는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새해 들어 반민특위가 문을 연 지 3일 만에 처음 잡아들인 반민족행위자 1호.
이 이유만으로도 여론이 떠들썩했다. 광복을 맞이한 지 4년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5개월째였다. 그가 체포되기 전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첫 연두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에 대한 배상금 요구 문제와 남북통일 등 시국 현안에 대해 담화를 발표했다. 해방 이전과 이후, 1930년대와 40년대를 통틀어 20년 가까이 최대의 재력과 최고의 지명도를 자랑하며 기업인의 대명사로 불려온 박흥식이 한시적 특별조직의 조사관과 대면해 앉은 장소는 중앙청 2층.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청사이자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한 귀퉁이였다.
그에 대한 심문은 처음부터 비행기 회사에 집중됐다. 특별법 제4조7항, 즉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장을 책임 경영한 자’가 그에게 적용된 주 혐의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아직 만들어내지도 않는 비행기, 그리고 실제 탄생하지도 않았던 그 회사는 무엇이었을까. 정부 수립 이후 처음 민간항공사로 발족한 대한국민항공사가 국내 취항을 목표로 4인 규모의 미국산 여객기 수입을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때였다. 그날을 시작으로 2월 말까지 5주간에 걸쳐 진행된 10차례의 신문을 종합한 조사보고서는 박흥식의 범죄 사실로 다음을 맨 위에 꼽았다.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책임 경영하였다.’
회사를 경영한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진술과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그 전말의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5년 전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결정 단계에 이른 1944년, 일본 정부는 항공 전력 확대를 위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창설하기로 하고 그 임무를 박흥식에게 맡겼다. 박흥식은 그해 10월 조선총독으로부터 항공기 제조사업 허가를 받았고 12월 육군 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받아 생산책임자로 취임했다. 전년도 10월에 처음 조선군사령관으로부터 사업제안을 받은 지 근 1년 만이었다. 화신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그의 사업이 절정을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제조업은 그때까지 그에게 생소한 분야였다. 유통을 중심으로 시종일관 형성돼온 그의 사업군에는 비행기는 물론 공업이라는 단어조차 스며들 틈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방대한 규모의 방위산업체가 마치 빙산과도 같이 흘러든 것이다.
보신각 앞에서 바라본 1958년의 화신백화점
비행기는 조선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의 지도하에 경기도 안양의 공장 부지와 주변 일대를 활용해 제작하기로 했다. 폭격기 같은 것이 아니고 목제 경비행기였다. 자본금 5000만 원 가운데 2500만 원이 불입됐다. 총 사업예산은 무려 1억800만 원이어서 부족한 금액 8300만원을 융자받기로 했다. 1944년도 조선총독부 예산이 19억 원 규모였다. 주식 100만 주 중에 그는 16만 주를 인수했다. 본사는 화신백화점 본점 내에 두었다. 1945년 6월 기준 650명에 이르는 직원은 대표 박흥식과 그의 화신계열사 측근 두어 명 외에는 전원 일본인이었다. 재무와 기획과 기술 등 모든 분야를 일본인 실무자들이 장악했다. 지금껏 숱한 회사를 운영해왔지만 이렇게 많은 일본인이 고용된 적은 없었다. 민족기업을 표방한 마당이어서 일본인은 아예 없거나 간혹 대외교섭상 필요에 따라 한두 명 정도만 이사진에 앉히는 게 전부였다. 이처럼 기업 본부에 압도적인 숫자의 일본인이 배치돼 실무를 맡았다는 것 자체가 이 회사의 성격과 주체를 시사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그곳은 전시 일본의 막바지 국책사업의 한 갈래였으며 박흥식은 그곳의 현지 책임경영자로 선임된 민간 CEO와도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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