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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Minds

디즈니에서 쫓겨난 비주류인 래스터 실패 용인하는 픽사에서 꽃피다

이병주 | 182호 (2015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픽사애니메이션의 성공을 이끌고 있는 존 래스터는 디즈니의칼 아츠를 다니면서 애니메이션계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1981년 컴퓨터그래픽에 꽂힌 이후 평생을비주류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비주류성이 혁신과 창의성을 낳았고 픽사의 대성공을 만들어냈다.

픽사는 창조의 원천인 다양성을 확보하고 아이디어 창출을 돕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다.

1) 직원들에게 충분한 권한을 준다

2) 아이디어가 불어나도록 자극한다.

3) 직원들이 교류하도록 한다.

 

 

 

 

“존, 그런데 그 큰 전등은 엄마야? 아니면 아빠야?”

 

‘룩소 주니어시사회를 보고 컴퓨터그래픽 전문가인 엔지니어 친구가 존 래스터(John Lasseter)에게 와서 물었다. 래스터는 그 친구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다가올 때, 그림자 효과를 만드는 알고리즘이나 난해한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그 순간 래스터는 자기가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2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룩소 주니어 1986 8월 텍사스 주의 댈러스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컴퓨터그래픽 콘퍼런스인 시그래프(SIGGRAPH) 총회에서 상영됐다. 몇 달 전 루카스필름 컴퓨터사업부에서 스티브 잡스에게 인수돼 독립한 픽사가 야심 차게 만든 작품으로, 지금은 픽사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된 애니메이터, 존 래스터가 감독했다. 시그래프 총회에 참석한 6000명의 관객들은 대부분 컴퓨터그래픽 종사자였는데, 이들조차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이야기에 빠져서 영화를 봤던 것이다.

 

처음룩소 주니어를 만들었을 때, 래스터는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할지만 생각했다. 이야기의 구성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브뤼셀에서 열린 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초기 테스트용 화면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그것을 보고 벨기에의 존경 받는 애니메이터 라울 세르베(Raul Servais)가 이렇게 조언해줬다.

 

“아무리 짧은 영화라고 하더라도 시작과 전개가 있고 또 결말이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 전개를 놓쳐버리면 안 됩니다.”

 

래스터는 분량이 너무 짧아서 스토리를 담아낼 수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세르베가 이렇게 말했다.

 

10초짜리 영화에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어요.”

 

이 한마디가 래스터의 뇌리에 강력히 박혔다. 이후 그는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스토리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최종 완성한룩소 주니어는 최첨단 기술을 적용했지만 이 기술로 캐릭터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픽사의 성공은 여기서부터 잉태되기 시작했다. 픽사는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토이 스토리부터 최근 히트하고 있는인사이드 아웃까지 15개의 개봉 작품을 100% 히트시키고 있다. 이런 픽사의 창작을 이끌어온 래스터. 그는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주고,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킨다(Technology inspires art, and art challenges the technology)”라는 명언을 했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의 생각이었다.

 

 

기술에서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본 래스터

 

래스터는 1957년 캘리포니아 주의 할리우드에서 자동차 판매상으로 일하던 아버지와 고등학교 미술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하고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래스터는 고등학생이 됐을 때도 만화영화를 끊지 못했다. 심지어 어린이 프로그램 편성 시간에 TV에서 나오는벅스 버니를 보려고 고등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에까지 죽어라 뛰어가곤 했다. 친구들은 만화영화란 초등학생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몰래 이런 취미를 즐겼다. 그래서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러 갈 때는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어머니의 차를 얻어 타고 극장에 다녔다. 어느 날 디즈니 영화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어머니가 데리러 왔을 때, 래스터는 어머니에게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했다. 바로 디즈니에 취직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정말 멋진 목표를 세웠구나라며 격려해줬다.

 

어머니의 응원에 용기를 얻은 래스터는 디즈니에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편지에 넣어 보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그림 실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고, 학급 친구들은 그를최고의 화가로 뽑았다.

3학년 때 월트 디즈니가 세운 캘리포니아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Arts, 칼아츠)로부터 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에 참가하라는 초대장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결국 1975년 칼아츠에 입학했다. 래스터는 훗날 유명한 감독이 될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20명 급우 중에는인어공주를 감독한 존 머스커(John Musker)나 픽사의인크레더블라따뚜이를 만든 브래드 버드(Brad Bird)도 있었다. 괴짜 감독 팀 버튼(Tim Burton)은 래스터보다 1년 뒤에 들어왔다. 래스터는 애니메이션에 미쳐 있는 학생들이 모인 곳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이곳 학생들은 졸업 전에 디즈니에 취직하곤 했는데, 래스터는 학사 학위를 받으려고 디즈니의 입사 제안을 거절했다. 그가 학창 시절에 만든 두 편의 작품숙녀와 램프’ ‘악몽은 각각 1979년과 1980년에 애니메이션 부문 학생 아카데미상을 연이어 받았다. 칼아츠 시절 이미 화려한 경력을 쌓은 래스터는 졸업 후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은근한 경계 속에 1979년 디즈니에 입사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건 당시가 디즈니의 암흑기였다는 사실이다. 한때 최고 인기를 누리던 TV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떨어졌고 작업 중인 애니메이션은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애니메이션의 보조 작업은 래스터가 꿈꾸었던 일이 아니었다. 답답함을 느끼던 래스터는 잠시 디즈니를 떠나 다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옮겨봤지만 거기서도 성취감을 맛보지 못하고 1년도 안 돼 다시 디즈니로 돌아왔다.

 

 

그건 제작되지 않을 테니까

디즈니에서 자네 프로젝트는

이제 끝났네. 그러니 자네가

있을 자리는 없어. 디즈니와

자네 사이의 계약 관계도

끝났단 말이네.”

 

그러던 1981년 어느 날 칼아츠를 같이 다녔던 친구가 영화트론의 몇몇 장면을 봐달라고 래스터를 불렀다. 디즈니가 제작하던 실사 영화인트론에는 약 15분 분량의 컴퓨터 이미지가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그 친구가 그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디즈니의 한 트레일러 안에서 래스터와 친구들은 컴퓨터로 만든 최초의을 보았다. 빛의 오토바이들이 펼치는 가상의 경주 장면이었다. 사실 이 장면에는 캐릭터 애니메이션은 전혀 없고 지금의 눈으로 보면 컴퓨터그래픽도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본 래스터는 어떤 계시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화면의 입체감을 여태껏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만일 이 기술을 활용한다면 애니메이션 제작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거야말로 월트 디즈니가 생전에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새로운 차원의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했다. 래스터는 경영진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작비가 많이 든다며 컴퓨터그래픽을 주장하는 래스터를 골칫거리로 여겼다. 그럼에도 래스터는 걸핏하면 컴퓨터그래픽 전문가들을 초빙해서 자문을 받았고, 급기야 선배를 설득해서 30초짜리 테스트 필름을 제작하는 기획안을 올렸다. 경영진은 이 아이디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래스터는 상사로부터 짐을 싸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건 제작되지 않을 테니까 디즈니에서 자네 프로젝트는 이제 끝났네. 그러니 자네가 있을 자리는 없어. 디즈니와 자네 사이의 계약 관계도 끝났단 말이네.”

 

이렇게 래스터는 디즈니에서 쫓겨났다.

 

10년 넘게 비주류로

 

컴퓨터그래픽에 관심을 갖게 된 후 래스터는 콘퍼런스나 관련 전시회를 쫓아 다녔다. 3D 화면을 만들기 위해 컴퓨터그래픽 기술자들에게 자문을 받다 보니 유명 엔지니어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자연스레 루카스필름의 컴퓨터사업부에서 컴퓨터그래픽 부문을 이끌고 있던 에드 캣멀(Edwin Catmull)과도 알게 됐다. 캣멀은 래스터가 디즈니에서 해고됐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 그를 스카우트했다. 이렇게 해서 1984년부터 래스터는 루카스필름 컴퓨터사업부에서 일하게 됐다. 사실 이곳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가 아니었다. 스타워즈의 광선검 장면처럼 주로 실사 영화에 들어가는 특수 효과를 만드는 일을 했다. 다만 캣멀에게는 언젠가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회사의 주인인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는 애니메이터를 고용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캣멀은 루카스필름 경영진에게는 래스터의 직책을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라고 소개했다.

 

컴퓨터그래픽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래스터는 루카스필름에 와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그램 사용법을 배웠다. 동시에 사용자로서 소프트웨어의 개선방안을 프로그래머들에게 알려줘 엔지니어들도 그를 좋아했다. 회사 전체 인원 중 애니메이터는 혼자뿐이었지만 워낙 친화력이 좋아 엔지니어들과 잘 어울렸다. 래스터는 이때부터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래스터가 비록 엔지니어들에게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배웠지만 그가 하는 일은 항상 같은 일, 즉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그의 일은 비핵심 업무에 불과했다. 이곳의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리기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스토리를 지닌 서사 영화를 만들었던 루카스의 눈에는 래스터가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이 너무 조잡해 보였다. 그래서 컴퓨터사업부에서는 절대로 영화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루카스필름의 재정이 악화되자 컴퓨터그래픽 부문을 매각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평소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즈니를 비롯해서 여러 곳과 매각 협상을 벌였지만 타결되지 않았고, 결국 1986 1월 자신이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나 새로운 일을 찾고 있던 스티브 잡스에게 팔렸다. 잡스는 루카스에게 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따로 500만 달러를 여기에 투자했다. 이렇게 픽사라는 회사가 탄생했다.

 

래스터는 새롭게 출발한 픽사에서도 비주류였다. 잡스의 관심은 오로지 컴퓨터 사업이었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잡스는 픽사를 그래픽 제작용 컴퓨터 제조회사로 키우려고 했다. 의료업계, 연구소, 석유탐사 분야, 국방 분야의 고객들에게픽사 이미지 컴퓨터를 판매하려고 했다. 그래서 잡스는 래스터를 포함한 애니메이션 부서가 회사에 전혀 필요 없다며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캣멀을 비롯한 경영진은 우수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낼수록 픽사의 컴퓨터가 더 잘 팔릴 거라고 잡스를 설득해 살아남았다. 이렇게 해서 래스터는 1년에 한 편씩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서 발표했다. ‘룩소 주니어를 시작으로 매년레드의 꿈’ ‘틴 토이’ ‘장식품등의 작품을 만들며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적용 범위를 넓혀갔다. 이 중틴 토이 1988년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컴퓨터 판매가 생각만큼 늘어나지 않아 회사의 적자가 쌓여갔다. 결국 픽사는 컴퓨터 판매 사업을 포기하고 애니메이션 제작 소프트웨어인 CAPS(Computer Animation Production System) 판매로 돌아섰다. 디즈니를 비롯한 몇몇 고객들에게는 성공적으로 팔렸지만 이런 값비싼 프로그램을 살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자연스레 남들이 벌어온 돈을 쓰기만 하던 애니메이션 부서는 다른 부서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래서 1990년부터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중단하고 TV 광고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래스터로서는 처음으로 회사에 돈을 벌어다준 것이다. 애니메이션 제작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복권, 구강청결제, , 자동차 등 다양한 기업에서 광고 제작을 부탁했고 한 해 10편 이상씩 만들었다. 이렇게 애니메이션 부서를 꾸려갔다. 그러던 중 디즈니에서 픽사와 손잡고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91년부터토이 스토리를 장기간에 걸쳐서 준비했다. 물론 이 기간에도 TV 광고 제작은 꾸준히 하면서 영화 작업을 진행했다. 결국 1995년 개봉한 ‘토이 스토리가 대박이 나자 픽사는 온전히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 스튜디오로 탈바꿈하게 됐다. 1981트론에서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본 이후 무려 15년 만에 이뤄낸 꿈이었다.

 

다양성과 아이디어가 숨쉬는 픽사

 

래스터는 루카스필름에 들어간 후 10년 넘게 핵심에서 벗어난 곳에서 비주류로 일했다. 그러나 캣멀 등 경영진은 래스터가 하고 있는 일을 묵묵히 지원했다. 그동안 픽사는 SF 영화의 특수효과 처리를 하던 회사에서 컴퓨터를 팔기도 하고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기도 하다가 TV 광고 외주 제작사를 거쳐 애니메이션 영화사가 된 것이다. 이처럼 혁신은 중심에서 벗어난 비주류에서 나온다. 캣멀과 래스터는 이런 경험을 픽사의 경영에 그대로 도입했다. 픽사는 다양성과 예외적인 아이디어가 사장되지 않도록 독특한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첫째, 직원들에게 충분한 권한을 준다. 픽사에서는 영화 제작을 담당하는 팀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한다. 그러다 보니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한 사안에 대해 문제가 생기면 위에 기대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한다. 심지어 예산 문제까지 해당 영화의 감독과 팀들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버려둔다. 2006년 디즈니와 픽사가 합병한 뒤 픽사의 캣멀 사장과 래스터 CCO(Chief Creative Officer·최고창조책임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장과 CCO를 각각 겸임하게 됐다. 당시 디즈니는라이온 킹이후 12년 동안 히트작이 없었다. 재무팀이 영화 제작팀을 통제하고 있어서 두 팀 사이에 항상 언쟁이 발생했다. 캣멀 사장은 픽사에서 해오던 대로 재무팀을 없애버렸다. 제작팀이 스스로 예산을 짜서 집행하게 했다. 그러자 제작비가 70% 이상, 무려 1억 달러 넘게 올라갔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라푼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오랜만에 대히트를 기록했다. 성공은겨울왕국까지 이어져 디즈니가 다시 황금기를 맞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둘째, 아이디어가 불어나도록 자극한다. 디즈니에서 래스터는 컴퓨터그래픽을 애니메이션에 도입하려고 했지만 결국 윗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아서 아이디어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픽사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직원들이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면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스스로 실험하고 시도해 볼 수 있는 풍토를 조성했다. 가령 개미와 곤충들의 이야기를 다룬벅스 라이프를 만들 때, 제작팀에서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러자 기술자 두 명이 바퀴를 단 소형 비디오 카메라를 만들었다. 버그캠으로 불린 이 카메라를 막대기 끝에 단단하게 묶어서 잔디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촬영을 했다. 풀과 나뭇잎과 꽃잎이 마치 투명한 차양처럼 보였다. 곤충의 시점에서 바라본 풍경을 접하면서 제작진은 많은 영감을 얻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를 실험한 후 그냥 놔두지 않고 그 아이디어가 더 커지도록 돕는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픽사는애니메이션 데일리(Animation Daily)’라는 일일 리뷰회의를 매일 연다. 전날 시도해본 아이디어의 결과물을 작은 영화방에서 틀어보며 동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이 회의는 업무 진척도를 체크하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를 더하는 게 목적이다. 그래서 미완성 상태 그대로 보여주고 동료들의 의견을 얻는다. 작업물이 어느 정도 완성된 단계에서는 조언을 주기도 어렵고 수정도 힘들지만 미완성 상태에서는 아이디어의 발전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아마 버그캠으로 찍은 영상도 다음날 바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보면서 작품에 활용할 수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셋째, 직원들이 교류하도록 한다. 다양한 분야의 직원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주고 있다. 픽사의 본사 건물은 화장실, 회의실, 카페, 식당이 모두 중앙에 몰려 있다. 건물이 워낙 커서 양쪽 끝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중앙으로 오기가 꽤 불편하다. 그럼에도 건물을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사람들이 넓고 긴 뜰에서 심심찮게 서로 마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잡스와 래스터가 설계에 직접 참여했는데, 그들은 애니메이션 쪽에서 일하는 직원과 기술을 담당하는 엔지니어가 의도하지 않게 우연히 만날 때 창의성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실제 래스터는 평생 다른 분야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또 픽사 대학이라는 사내 교양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픽사 대학에서는 영화, 애니메이션, 컴퓨터그래픽은 물론 음악, 글쓰기, 펜싱 등 110개 이상의 과목을 운영하고 있다. 애니메이터나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보안요원, 요리사까지 누구나 수강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유도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직원들이 수업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교류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다양성의 힘

 

픽사가 다양성을 중시하고 직원들의 예외적인 아이디어를 활용하려고 하는 이유는 영화산업이 고도로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흥행 확률은 15%를 넘지 않는다. 이처럼 불확실한 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통해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생물학자들이 픽사가 옳았음을 실험으로 증명했다(Bjedov , 2003). 이들은 무려 787개의 접시에 대장균을 배양해 의도적으로 가혹한 환경을 만들었다. 영양분을 빼앗아 굶주리게 하거나 산소를 차단해 생명 유지를 어렵게 하는 등 가혹한 환경에서 대장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조사했다. 가혹한 환경에서도 대장균들은 생식을 통해 개체 수를 늘렸는데 특이한 점은 돌연변이를 급격하게 많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혹시 가혹한 환경이 박테리아의 생체 기능에 충격을 줘서 돌연변이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검증했다. 그래서 돌연변이가 어떻게 진화되는지 기록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돌연변이와 비교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었지 가혹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돌연변이나 정상적인 환경에서 나타난 돌연변이나 똑같은 분포를 그렸고 진화에도 똑같이 기여했다. 다만 가혹한 환경에서 증가된 돌연변이들이 진화 프로세스를 통해 개체의 다양성을 높였고 환경에 적응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돌연변이의 증가가 다양성을 가져와 불확실한 환경을 극복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연구는 물벼룩의 생태를 떠올리게 한다. 물벼룩은 연못이나 습지에서 서식한다. 이들은 무성생식을 한다. 암컷들이 작은 주머니 속에다 자신과 똑같은 새끼를 낳는다. 그래서 물벼룩 공동체는 암컷으로만 이뤄져 있다. 무성생식은 번식이 쉽기 때문에 개체 수가 쉽게 늘어난다. 그런데 가뭄이 들거나 겨울이 다가오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암컷이 수컷을 낳기 시작하고 유성생식으로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유성생식을 통해 만들어진 알들은 다양성이 늘어나 가뭄이나 겨울을 버티는 녀석이 반드시 나온다.

 

혁신을 연구해온 경영학자들이 기업계에서도 똑같은 패턴을 발견했다(MacCormack, Murray, Wagner, 2013). 연구자들은 지난 20여 년간 미국과 유럽의 민간과 공공 부문에서 주최한 대규모 혁신 경진대회를 조사했다. X 프라이즈 재단이 주최한 미래 산업 분야의 각종 기술혁신 경진대회, 넷플릭스가 공고한 영화추천 알고리즘 선정대회, 미국 정부의 의료혁신상과 수소에너지기술혁신상 등 수많은 경진대회의 참가자와 평가 결과를 분석했다. 또 추가적으로 참가자들을 인터뷰한 사례 연구까지 진행했다. 연구자들은 방대한 분석결과로부터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해당 산업에서 통용되던 기존 방식을 따르는 그룹과 새로운비전통적방식을 적용한 그룹으로 구분한 것이다. 그랬더니 두 그룹의 차이가 명백하게 나타났다. (그림 1) 전통적 방식을 활용한 그룹이 평균적으로 더 좋은 아이디어를 냈고 해결안이 더 우수했다. 대체적으로 수준 높은 해결책을 동원했고 성공 확률도 높았다. 반면 비전통적 방식을 차용한 그룹은 평균적으로 보잘것없는 성과를 냈고, 일부 해결안은 가치가 없는 실패작들도 있었다. 그런데 비전통적 방식을 사용한 참가자들은 서로 간 편차가 매우 컸다. 그래서 수준 이하의 결과물도 많았지만 최고로 좋은 해결안도 여기서 나왔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나 산업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혁신적인 해결안은 비전통적 방식에서 나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혁신은 래스터 같은 비주류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같은 패턴이 교육에도 적용된다. 우리나라의 입시경쟁은 매우 과열돼 있어 고비용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교육 방식이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다고 비판받고 있다. 주입식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위의 연구에서 나온 전통적 방식처럼 평균적으로는 똑똑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한국인이 똑똑하다는 것은 인종적인 특징이 아니라 이런 교육의 결과일 것이다. 창의 교육이나 대안 교육은 평균적으로는 덜 우수한 인재를 만들어내지만 소수의 천재를 키워내므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빠른 시간에 남을 추월하는 데에는 우리가 해온 주입식 교육이 훨씬 효과적이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천재가 필요하다. 장단점을 잘 살펴야 한다.

 

이를 자녀교육에 대입하면 문제가 명확해진다. 자녀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 찬성하는 부모는 많지 않다. 성공의 지표를 수입으로 단순화시켜 이야기해보자. 부모가 반대하는 이유는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가 성공했을 때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은 매우 많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크다. 연예인은 1% 안에 들어가야 화려한 삶을 살지만 대부분은 평균 이하의 수입을 벌게 된다. 자녀를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으로 키우려는 이유는 이들이 대단한 수입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꽤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2)

 

 

비전통적인 방식, 창의적 교육, 연예인의 꿈 등은 모두 최고가 됐을 때에만대박이 나는 전략이다. 이에 반해 전통적 방식, 주입식 교육, 회사원의 진로 등은 실패 가능성이 적은 안정적인 선택이다. 획기적인 혁신을 원한다면 전자의 방법을, 실패를 피하려면 후자의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일을 즐기게 하라

 

기업에서 혁신을 추진할 때도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바로 실패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의 문제다. 조직 차원에서는 다양성과 비전통적 방식을 장려해 획기적인 혁신을 만들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개인 입장에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나라 전체를 위해서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도 필요하지만 내 자녀가 그 위험을 감수하게 할 부모가 없는 것처럼,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기댓값(평균값)이 큰 선택을 선호한다. 그래서 혁신이 어렵다. 기업에서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평균적인 성과를 얻는 게 훨씬 수월하다. 획기적인 혁신을 이루려면 실패가 뻔한 일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픽사는 실패의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 첫째, 실패에 대한 안전망을 설치했다. 다른 할리우드 영화사는 영화 단위별로 고용계약을 한다. 그래서 한 영화가 끝나고 다른 영화에 투입되지 않으면 실직 상태가 된다. 영화인은 대부분 계약직이다. 그런데 픽사는 모든 인력을 정규직으로 고용해서 최소한의 안전망을 마련해줬다. 물론 정규직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3∼4개의 영화가 동시에 진행돼야 쉬는 직원이 생기지 않는다. 픽사의 이런 고용 방식은 인건비를 상승시켰지만 직원들의 입장에서 실패의 위험이 줄어들기 때문에 마음 놓고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혁신을 위해 실패를 장려하라고 한다. 하지만 실질적인 안전망이 없으면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둘째, 일을 즐기는 문화를 만들었다. 권한과 자율성을 주는 게 이 때문이다. 부모가 아무리 말려도 춤과 음악에 미쳐 있는 아이는 연예인을 지망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실패해도 후회가 적기 때문이다. 즉 좋아하는 일을 하게 만들고,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일을 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픽사의 많은 직원들은 자신들의 일을 좋아한다. 니모를 찾아서에서 그려낸 물속 세상은 픽사가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래스터는 95m짜리 수족관을 들여놓은 후 여기에다 온갖 바닷물고기를 풀어놓고 관찰하게 했다. 어떤 직원들은 하와이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기도 했다. 당시 직원들은 물속 세상에 빠져 있었다. 영화에는 주인공 물고기들이 고래에게 잡아 먹혀 고래 뱃속에 들어가 있는 장면이 나온다. 미술팀 두 명은 쇠고래가 해안가로 떠밀려와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그리로 달려갔다. 그리고 고래의 몸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런 열정으로 물속 세상과 물고기의 사실성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표현해냈다.

 

1988틴 토이가 아카데미상을 받았을 때 디즈니는 래스터에게 여러 차례 거액을 제안하며 디즈니로 돌아오라고 설득했다. 당시 래스터의 경제상황은 좋지 않았고 픽사에서 받는 월급은 부족하기만 했다. 그러나 래스터는 가지 않았다. 디즈니로 옮겼다면 돈을 많이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래스터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래스터는 디즈니의 제안을 거절하며 동료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디즈니로 가서 감독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여기 남아서 역사를 쓰고 싶어요.”

 

‘트론’에서 컴퓨터그래픽 영상을 본 후토이 스토리가 성공하기까지 15년 동안 래스터는 비주류로 지냈다. 그에게 그 15년은 어떤 기간이었을까? 성공을 위해 힘든 일을 참았던 고난의 시절일까? 아니다. 그는 매일매일 애니메이션을 혁신하고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실패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편집자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창조 노하우를 소개해왔던 Creative Minds가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독자들의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 capomaru@gmail.com

이병주 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LG경제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창의성, 변화관리, 리더십 등을 연구했다. 저서로 <애플 콤플렉스> <> <3불전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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