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가장 큰 원동력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기업의 R&D를 담당하는 연구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생산자(producer)’ 못지않게 수많은 혁신을 주도한 집단이 있습니다. 바로 ‘사용자(user)’입니다. 생산자는 어떤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개인이나 기업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용자는 어떤 제품을 (구매한 다음에) 사용함으로써 효용을 얻는 개인이나 집단을 뜻합니다.
실제 선반, 밀링머신 등은 장비 전문 생산업체가 아니라 이런 장비를 활용해서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기업들이 혁신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산악자전거도 자전거 생산업체가 아니라 등반 마니아들이 집단지성을 활용해 자전거와 부품의 성능을 개량하며 발전시켰습니다. 스케이트보드 같은 스포츠는 처음부터 사용자들에 의해 고안됐으며 시리얼도 식품회사가 아닌 개인 사용자가 개발하고 개량하면서 거대한 시장을 창출했습니다. 의료용품이나 농기계 등 산업에서는 대부분의 혁신이 사용자에 의해 이뤄졌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용자가 혁신을 주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정보의 비대칭 문제입니다. 생산자는 사용자가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용자들이 원하는 사항들은 상대방에게 쉽게 전달되기 힘든(sticky)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생산자들이 사용자들의 욕구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를 사용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선뜻 신제품 개발에 나서지 않는 사례도 많습니다. 결국 당장 원하는 바를 달성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를 가진 사용자들, 특히 제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전문성을 가진 선도 사용자(lead user)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혁신을 이뤄내곤 합니다. 이들은 다른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혁신을 단행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돈과 시간을 들인 혁신 결과물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타인과 공유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산자 혁신에 주력해온 기업들은 사용자 혁신의 잠재력에 주목하지 못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용자 혁신을 과소평가하거나 적대시하기까지 합니다. 레고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사용자들이 레고의 모듈로봇 조립 세트인 마인드스톰의 소프트웨어를 해킹해 마음대로 개조하자 초기에 레고 직원들은 이를 불법적인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고심 끝에 생각을 바꾸자 새로운 사업 기회가 열렸습니다. 사용자들이 마음대로 소프트웨어를 수정하면서 기능을 추가하도록 허용하자 마인드스톰의 고객 기반이 확대됐고 학생들을 위한 로봇 교육 같은 신사업도 가능해졌습니다.
이제 생산자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더군다나 인터넷 보편화와 대중들이 쓰기 편안한 소프트웨어의 확산, 3D프린팅 등 제조 분야의 혁신 기술 등장으로 사용자 혁신은 더욱 활성화하고 있습니다. 사용자 혁신이란 개념을 창안한 에릭 폰 히펠 MIT 교수의 말대로 ‘혁신의 민주화(Democratizing Innovation)’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런 트렌드에 대응하기 위해 DBR은 이번 호 스페셜 리포트로 사용자 혁신을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이번 스페셜 리포트 제작에 참여한 KAIST 김영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국민들의 1.5%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용자 혁신 활동을 벌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선진국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 의미는 적지 않습니다. 무려 54만 명이 혁신 활동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이 지출한 비용도 3670억 원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어지간한 대기업의 R&D 투자비보다 훨씬 큰 규모입니다. 이런 엄청난 자원을 활용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의 혁신 성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용자 혁신의 개념을 활용해 현업의 경쟁력 강화 방안을 모색하시기 바랍니다.
김남국 편집장·국제경영학 박사 mar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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