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지역 정치경제학
Article at a Glance – 전략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연아(한성대 산업공학과 4학년) 씨와 장은빈(연세대 사회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2010년 봄. 포스코 관계자들이 인도네시아 전문가 한 명을 찾아갔다. 인도네시아 찔레곤 지역에 제철소를 짓기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와 모든 협의를 마친 상황에서 혹시나 주의해야할 점은 없는지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인도네시아 전문가는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토지분쟁과 관련된 문제였다. 인도네시아는 토지분쟁이 많이 발생하는데 국가가 최종적으로 소유권을 정리해줘도 주민 저항이 있기 때문에 결국 해결이 잘 안된다는 얘기였다. 제철소를 짓는다는 건 막대한 면적의 토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토지 소유권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두 번째로 ‘한국과 인도네시아 중앙정부 간 합의’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원래 인도네시아 찔레곤 지역에 제철소를 짓는 문제는 ‘순수한 비즈니스’ 차원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2008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할 때 인도네시아 부통령이 왔고 두 정치 지도자가 얘기를 나누다 ‘철강협력사업을 해보자’는 데에 합의해 추진된 일종의 ‘정책’이었다. 얼핏 보면 아무런 문제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지만 이는 대단한 착각이라는 게 이 전문가의 지적이었다. 1998년 인도네시아 민주화 이후 인도네시아 각 지역에서는 지방 토호 세력들이 지방자치를 통해 시장과 군수 등의 자리를 맡거나 그들을 후원하며 지역의 ‘맹주’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각 ‘맹주’가 있는 지역에서는 중앙정부의 지시나 정책이 잘 안 먹힌다. 그들이 해당 지역의 ‘자원 배분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그나마 중앙정부의 설득과 협박이 먹혀들었으나 1998년 민주화와 지방자치가 동시에 이뤄지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얘기였다. 인도네시아 전문가의 말을 들은 포스코 관계자들은 과연 두 가지 경고를 잘 받아들여 문제없이 일을 진행했을까?
국영기업과 합작한 포스코는 왜 ‘미운오리새끼’가 됐나?
2013년 12월23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포스코 정준양 당시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인도네시아 찔레곤 포스코-크라카타우 일관제철소 준공식이 열렸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국내 철강수요를 충당할 수 있는 공장이 생겨서 기쁘다”고 말했고 정준양 회장은 “제철소 완공으로 인도네시아 경제 성장이 가속화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아름다운 장면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상황이 연출됐다. 가동 열흘 뒤 고로 설비 중 열풍을 넣는 풍구에 문제가 생겨 쇳물이 새어나오는 사고가 발생해 수개월간 가동이 중단됐다. 공장은 지난 3월 중순이 돼서야 재가동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국영기업 크라카타우스틸과 합작해 만들어진 포스코 최초의 일관제철소’는 이 같은 기술적인 문제 이외에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수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사실 앞서 한 인도네시아 전문가가 경고했던 두 가지 문제는 그간의 포스코 공장 건립과정은 물론 현재 지역사회와의 갈등해결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포스코의 발목을 잡고 있다.
포스코는 크라카아우스틸과 7대3의 비율로 합작을 했다. 포스코는 차관을 얻어 30억 달러를 투자했고 인도네시아는 현금 대신 토지 338㏊를 제공했다. 문제는 이 땅 중 65㏊ 정도가 소유권이 불분명한 땅이었다는 것. 포스코는 이 사실을 몰랐다. 전문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와 다 얘기된 것’으로 생각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1999년 인도네시아 대법원이 국가 소유로 인정한 땅이었지만 그 지역의 첫 민선 지방자치단체장1 은 판결 직전부터 바로 그 땅에 항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 10년 동안 우리 돈으로 약 100억 원을 투자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어 민선 시장의 손을 들어준 행정법원 판결도 나왔다. 상황은 꼬일 대로 꼬여갔다. 더군다나 항만사업을 10년간 추진해왔던 찔레곤의 첫 민선 시장은 해당 지역에서 인도네시아 국가 형성 이전부터 지역을 사실상 통치해 온 맹주 집안사람2 이었다. 엄청난 네트워크와 영향력을 가진 그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중앙정부 하고만 소통하는 포스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이 투자한 항만사업까지 건드린 셈이니 지역민심 전체가 포스코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는 우여곡절 끝에 토지문제가 겨우 봉합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찔레곤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슬람 지도자와도 관계형성이 제대로 안됐다. 찔레곤은 전통적으로 인도네시아 ‘이슬람학도’들의 성지 같은 곳이다. 제철소 건설 당시부터 밀려들어온 한국인들은 이슬람 문화에 대한 배려 없이 돼지고기나 술을 먹거나 밤샘 유흥을 즐기기도 했고, 이에 독실한 무슬림인 찔레곤 사람들은 분노했다. 포스코는 자사 직원들은 통제할 수 있었지만 협력업체 직원들까지는 관리하기 어려웠다.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며 사업을 하고 있는 한 전문가는 “준공식 행사 때 대통령을 부르면서 찔레곤 시장을 안 불러 또 한 번 지방정부의 원성을 샀다”며 “‘윗선’ 하고만 일하면 된다는 전형적인 ‘한국식 사고방식’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회원 가입만 해도, DBR 월정액 서비스 첫 달 무료!
15,000여 건의 DBR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