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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①-김개천 국민대 조형대학 교수

“디테일까지 완벽해야 아름답다고? 대충 만든 게 더 멋있다”

김남국 | 132호 (2013년 7월 Issue 1)

 

 

편집자주

※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박별(한양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Issue 1 과거

왜 아름다움이 중요한가.

아름다움은 생명의 본능이다.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형식이다. 생생함을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것들이 살기 위한 방법, 생존하기 위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꽃들은 다 아름답다. 자신을 꾸미려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다. 곤충들이 아름다운 형식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꽃은 곤충을 유혹해야 생존한다. 모든 생명체는 특정 형식에 마음이 끌린다. 꽃은 곤충의 마음을 끌지 못하면, 즉 아름답지 못하면 생존하기 힘들다. 아름다움을 모른다는 것은 생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보기에 아름답지 않은 동물이나 생물도 있다.

그런 측면이 바로 디자이너들의 실수를 유발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은 다 다르다. 아름다움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절대 비례나 조화 이런 키워드는 과거에 아름다움을 보장해줬다. 옛날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건축의 예를 들어서 과거와 달라진 아름다움의 기준을 설명해달라.

그리스 시대에는 조화와 비례가 아름다움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은 황금 비례로 지어진 수학적 건축이다. 볼륨감이나 색상 등은 나중에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지만 그리스 시대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최고의 아름다움이란 영혼 불멸의 양식, 변하지 않는 형식이어야 했다. 색상 같은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이데아(Idea)를 추구했던 그리스인은 색상처럼 변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봤다. 대신 기하학적 법칙으로 구성된 비례를 영원한 형식으로 봤다. 물론 그리스인의 생각이 나중에 완전히 부정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아름다움에 절대불변의 원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그리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맥을 같이한다.

 

그리스 시대 이후에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나.

시대가 달라지면 미에 대한 기준도 달라진다. 로마인들은 영원불멸의 이데아를 추구하기보다 현실의 존재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르네상스로 가면서 이런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신의 원리가 들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데아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왜 물질의 형식을 빌려서현현(顯現)’해야 하느냐는 문제의식을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갖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물질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현존하는 물질, 색깔, 공간, 심지어는 감정 등이 모두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소재가 된 것이다.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Issue 2 현재

아름다움에 대한 최근의 인식 중 주목할 만한 포인트는 무엇인가.

형태를 안 갖는 것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구름을 보면 아름답지 않나. 구름은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계속 변화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바람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형식들은 제한적이고 한정적이다. 사랑으로 얘기해보자. 나는 당신을 이런저런 이유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사랑할 이유가 없어졌을 때 더 이상 사랑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사랑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타적 사랑이라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기애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형태가 없는 사랑은 다르다. 상대가 어떤 형태를 갖더라도 사랑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이유가 없이 그냥 좋은 것이 진짜 사랑이다. 상대의 거의 모든 면이 좋게 느껴지는 것, 형태가 없는 것이 더 숭고한 사랑이다. 내 얼굴을 봐라. 이 안에서 장동건 얼굴을 찾을 수 있나? 전혀 못 찾을 것이다. 나의 얼굴은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느낄 수 없다. 이게 바로 한계다. 뭔가 제한돼 있고 고정돼 있는 것은 안정적이긴 하지만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없다. 자유롭지 못하다. 형태를 안 갖게 되면 자유롭다.

 

형태를 갖지 않는 형식을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추상 같은 게 대표적이다. 현대는 보이지 않는 형식을 아름답다고 하는 시대다. 이런 흐름의 정점은 미니멀이다. 미니멀은 단순함만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게 아니다. 재료의 속성에만 의지하는, 다시 말하면 재료에 성질에만 의지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의지한 게 아니다. 미니멀의 대가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는 거대한 철판 하나를 둥글게 세워 놓은 유명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모양만 보고 단순한 형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작가는 철판이 녹슬면서 재료의 속성이 다른 걸로 변화하는 것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다. 과거의 아름다움은 형태를 추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준이 달라지다가 20세기 들어와서 인류는 형태를 벗어버리고 그 형태가 가진 어떤 속성에 의지했다. 형태를 버린 것, 아름다움을 추구해온 인류의 여정에서 20세기의 끝은 이렇게 장식됐다. 이게 한 시대의 끝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시대가 열리고 있다.

 

 

20세기 얘기 조금만 더 하고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자. 미니멀의 사례를 들어달라.

20세기 미니멀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우선 미스 반 데에 로에(Mies van der Rohe)라는 독일 건축가다. 우리나라 삼일빌딩은 미스 건물의 대표적인 아류다. 그가 만든 미국의 시그램빌딩(Seagram Building)을 그대로 모방했다고 할 수 있다. (사진1) 철과 유리로만 된 건물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다. 또 르 코르뷔제(Le Corbusier)는 요즘 박스처럼 보이는 건물들의 원형을 만든 디자이너다. (사진2)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사각형 박스로 된 건물들이 다 그의 영향이다. 물론 현대에 이런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그런(형태가 아닌 속성에 주목했다는) 취지를 알고 만든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유행이라서 모방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몇몇 선도적 작가들이 본래의 의미를 깨닫고 작품을 만들었다. 문화라는 건 위에서 밑으로 흘러간다. 선도자의 깊은 뜻을 몰라도 유행은 확산되곤 한다. 그냥 멋있어 보여서 쓰는 사람도 많다.

 

미니멀이 재료의 성질, 속성에 의존했다고 했는데 속성이 왜 중요한가.

속성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아름다움의 형식은 없다는 생각이 더 중요하다. 무언가 가지지 않는 게 오히려 아름다운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그 원질을 따져봤을 때 재료가 계속 변하는 성질 그 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얼굴보다는 마음의 아름다움을 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런 얘기를 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름진 노인 얼굴 사진에서도 굉장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장미란 선수의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굉장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바로 그게 현대적 아름다움이다. 마음이라든가, 그 사람이 가진 정신이라든가 태도, 이런 것들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원천이다.

 

 

 

 

한국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우리는 저돌적 정열로 지금의 위치에 도달했다. 뭔지 잘 몰랐지만 저돌적인 성향으로 우리는 성장했다. 이를 나쁘게 평가하는 건 아니다. 이 정도 살게 된 건 다 그 덕분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선진국이 되기 힘들다. 선진국은 끌고 가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먼저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뭔지 알아야 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려면 인문학과 예술 과학이 결합해야 한다. 세 가지를 함께 가져야 한다. 인문학 열풍은 시작일 뿐이다.

 

학교 다닐 때 역사를 배우면 꼭 1950년에서 끝났다. 그 뒤 얘기는 안 해줬다. 항상 모던에서 끝났다. 지금 얘기를 해주는 것은 신문이다. 그런데 신문에서 현대의 정신을 알 수 있는 코너인 신간 서적 소개를 보면 신기한 공통점을 볼 수 있다. 기사를 쓰는 기자는 다 다르지만 꼭 기사의 결론은 교훈적 얘기다. 가치 지향적 얘기를 한다. 남을 더 돌봐야 한다는 식이다. 이게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기업에서 강연을 요청할 때도 그렇다. 뭔가 교훈이 되는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기업의 임원, 부장급이 구체적으로 현업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달라고 요구한다. 나는 그런 얘기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다. 좋은 강의는 사람을 바꾸는 힘을 가진 거지 교훈을 주는 게 아니다. 교훈 백날 얘기해봐라. 사람이 바뀌는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굉장히 많이 본다. 백날 봐봐라. 바뀌는 지. 약간은 도움이 될 거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지는 못한다. 이게 우리의 한계다. 실질적인 해답은 강의에서, 책에서 찾을 수 없다. 강의는 방향을 가르쳐 줄 뿐이다. 좋은 강의는 배경을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정작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자기가 찾아야 한다. 좋은 강의는 구체적인 답이 아닌 방향을 가르쳐줘야 한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고 어떻게 나아갈 것이라는 점에 대한 골격을 만들어주면 살은 본인들이 붙여야 한다. 답은 누구도 모른다.

 

당장 뭔가 성과를 내려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지금 우리 시대는 너무 표피적인 것, 근시안적인 것만 추구한다. 근시안적 생각으로 모든 것의 겉만 보다 보니 정작 그 속에 들어 있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다. 한 기업이네 마음대로 해. 그게 정답이야라는 카피를 들고 나왔는데 정작 그 배경이 뭔지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선진적이 되려면, 창조경제 하려면, 이런 관행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미에 대한 안목, 창조적 아이디어가 책 몇 권 읽거나 강의 좀 듣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Issue 3 미래

이제 이번 인터뷰의 핵심, 미래의 아름다움으로 가보자.

현재 가장 존경받는 디자이너는 애플의 수석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일 것이다. 조너선 아이브의 스승이 디터 람스(Dieter Rams). 아이폰, 아이팟 등의 원형을 디터 람스에서 찾을 수 있다. ‘아름다움은 단순한 거야이런 말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이런 모든 현재의 트렌드가 다 디터 람스가 주창한 좋은 디자인 10가지 원칙에서 나왔다. 10가지 원칙이 워낙 큰 영향력을 발휘해서 ‘10계명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혁신적(innovative)이고, 유용해야 하며(useful), 아름답고(aesthetic), 이해하기 쉬워야 하며(understandable), 정직하고(honest), 과도하지 않아야 하며(unobtrusive), 오래가고(long-lasting), 디테일까지 철저해야 하며(thorough down to the last detail), 환경친화적이면서(environmentally friendly), 최소한의 디자인(as little design as possible)이다. 이 가운데 단 하나라도 반박할 게 있나.

 

 

 없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게 스티브 잡스의 디자인 철학이다. 서양인들이 근대에 와서 얘기하는 아름다운 형식의 원리라고 얘기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게 정답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된다. 이런 것들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미래는 없다.

 

디자인 10계명의 한계를 논한다니 기대된다.

혁신적이어야 한다는 디자인 원칙부터 짚어보자.

혁신은 세상에 없다. 인류사의 모든 발명품은 혁신적인 게 아니라 융합된 것이다. 당시에 있던 것들을 몇 가지로 융합한 것이다. 우리는 혁신적이어야 하는 줄 알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이는 꿈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뉴턴의 만유인력도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발견했다는데 다 거짓말이다. 이전에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만유인력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다르게 몇 개를 조합해서 발전시켰을 뿐이다. 철학자들의 새롭게 느껴지는 말들, 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고 사회 현상 속에서 예리한 시각으로 발견한 것일 뿐이다. 혁신 백날 찾아봐야 돈만 들어갈 뿐이다. 기존에 멋진 기술이 많다. 몇 개 끄집어다가 응용하면 된다. 혁신이 아니라 융합이 중요하다.

 

기능적인 것도 문제가 있나.

대체 어떤 게 기능적인가. 엄밀한 의미에서 기능적인 것은 없다. 내가 앉은 의자를 보자. (플라스틱 재료의 의자를 가리키며) 이거 기능적이라고 만들어놨다. 앉아보면 편할 수는 있지만 겨울에는 차갑다. 겨울에는 의자가 따뜻해야 기능적이고 여름에는 차가워야 기능적이다. 자동차는 얼마나 반기능적인지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기능적인 것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기능적인 걸 만들 수 있겠나. 대부분 기능적이라는 것들은 반기능적이다. 책상의 코너를 봐라. 기능적이지만 모서리에 부딪히면 크게 다친다. 어떤 면에서 진보했다면 어떤 면에서는 퇴보한 것이다. 대부분 기능적이란 말로 포장한 것일 뿐이다. 이 시대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기능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재미를 추구한다. 대표적인 게 똥처럼 만들어놓은 치약(페리오 키즈플러스 치약, 일명 똥치약·사진 3)이다. 길쭉한 모양의 일반 치약이 기능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나중에 치약 짜려면 고생해야 한다. 기능적인 게 이렇게 허상이다. 똥치약은 애들이 좋아한다. 똥을 짠다는 게 재미를 준다. 짜는 것 자체가 즐겁다. 어차피 기존 치약과 똥치약 모두 기능적이지 않다. 똥치약은 짜는 게 더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는 기능보다 재미가 우선이다. 한 친구가무전기 시절부터 아이폰까지 매번 신제품을 들고 다녔지만 매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능적이라는 제품 들고 다닌다고 실제 혜택을 입은 것은 별로 없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 데스그립(손으로 아이폰을 꽉 쥐면 통화가 안 되는 현상) 이슈에 대해 그 정도 불편한 게 뭐가 문제냐고 말한 적이 있다. 기능보다는 그 안에 있는 무궁무진하면서 재미있는 콘텐츠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대응했다가 손해를 많이 봤지만 잡스는 근본적으로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름다워야 한다는 점은 반박하기 힘들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 아름다움에는 객관적 기준이 없다. 시대에 따라 변한다. 또 세계에서 가장 잘 생긴 배우로 꼽히는 니콜 키드먼과 톰 크루즈도 이혼했다. 아무리 예쁜 얼굴을 갖고 있어도 싫증을 유발한다. 이제 아름다운 형식보다 매력적인 형식이 돼야 한다. 다시 말해 멋진 형식이 돼야 한다. 아름다운 것과 매력적인 것은 다르다. 키가 작고 얼굴이 사각형이어도 매력적일 수 있다. 내 친구가 그랬다. 다리는 짧고 얼굴은 엄청 크고 사각형이지만 너무 매력적이다. 멋진 말을 정말 잘한다. 옷도 자신에게 잘 맞게 입는다. 뭔가 나이스하다. 그래서 여자친구가 많다. 반대로, 요즘 TV에 나오는 천편일률적으로 얼굴 고친 사람들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이 안 든다. 김연아가 어떤 영화배우보다 더 매력적인 건 그가 갖고 있는 정신 훈련과정 등 여러 가지가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과 같아지려 해서는 매력을 찾기 힘들다. 얼마 전 한 지역의 미스코리아 얼굴이 똑같아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똑같은 건 아름다울지 몰라도 매력에서는 멀어지는 길이다. 남과 다른 자신만의 것을 가져야 한다.

 

지금 10가지 원칙을 반박하고 있지만 그래도 10개 자체가

굉장히 잘 만들어진 것 아닌가.

10가지 원칙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이 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일 뿐이다. 다음 시대에 지금 내 이야기를 뛰어넘는 다른 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계속 진보한다. 답을 갖고 하는 게 아니다. 인류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답을 제시하는 것은 인류를 멈추게 한다.

 

실제 요즘 창조경제를 정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과거 스타일로 하는 것 같다.

혁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혁신은 문제점을 볼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한다. 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가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 인류사의 모든 혁명이 대부분 실패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다음 항목,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로 가보자.

개인적으로 이해를 하는 것보다 ‘feel이 온다는 말을 좋아한다. 이해와 필은 다른 말이다. 이해는 지적, 이성적, 논리적 힘으로 납득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에 호소하는 시대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의 10번 한다고 사람이 바뀌나. 우리 제자들을 봐도 무슨 말인가를 느끼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 한마디 말 없이 눈만 쳐다봐도 필이 올 수 있다. 이런 게 훨씬 유용한 형식이다. 오히려 더 이해를 잘 시켜주는 형식이다. 물건을 왜 좋아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필이 오기 때문에 좋아한다. 이해해야 세상을 바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냥던져진 존재(thrown being)’. 그런데 우리는 마치 이유가 있어서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그때그때 내가 어떤 결정을 했기 때문에 여기 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게 더 중요하다. 문제는 직관적 판단도 아무나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집에 개가 한 마리 있는데 파리가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다가 순식간에 움직여 파리를 잡아먹는다. 영리한 개다. 멍청한 개였으면 파리를 무턱대고 쫓아갔을 것이다. 순간을 포착해서 입을 벌려야 할 때를 안다. 이런 게 직관이다. 파리가 어디로 튈지 계산해서 잡아보라. 파리가 잡히나. 말로 설명은 못하지만 그 순간에 탁 잡는 능력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오늘날 리더에게 요구되는 게 바로 이런 능력이다. 언제 오래 생각하고 결정 내려본 적 있나. 대부분 순간적으로 결정한다.

 

 

 

 

통찰이 무척 흥미롭다.

정직하다는 부분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정직은 다 거짓말이다.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해본 적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에서 너무 힘들어진다. 남 앞에서 괜찮은 사람 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국 몸만 고생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70% 이상은 종교를 갖고 있어 교회나 절에서 매번 정직하게 살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왜 효과가 없을까. 우리 몸이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욕망을 갖고 태어났다. 욕망은 생존을 위한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그동안 우리는 욕망을 죄악시했다. 욕망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려 했다. 욕망은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도록 요구하는데 우리는 이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도록 교육받았다. 욕망은 선생님 말 안 듣고 놀라고 요구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몸이 제일 좋아하는 형식은 바로 노는 형식이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은 몸이 싫어하는 방식의 인간을 만드는 게 목적이다. 가치나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정해진 답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이어서 좋지 않다. 우리가 정답으로 여겼던 것 중 하나가 정직이다. 하지만 정직하지 않은 게 더 멋있을 수 있다. 거짓말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사람도 멋있을 수 있다.

 

 고속도로 타고 가다가 반대쪽 길이 막혔을 때 엄청 신나지 않나. 분명 우리는 그걸 보고 기분이 좋은데 사회나 교육기관에서는 자꾸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내가 기분이 좋았다고 누구한테 피해를 준 게 있나. 좀 즐기면 안 되나. 남이 미끄러질 때 웃기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기가 잘될 때 기분이 좋다. 그래야 생존에 유리하다. 날마다 남 좋은 일만 해보라. 자신의 삶에 소홀해진다. 정말로 남한테 관심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한테 충실하다. 자기를 더 잘 보살피는 사람일수록 남한테 더 관심이 많다. 자연의 법칙이 그렇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자기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꽃은 자기를 위해서 꽃피우지 곤충을 위해서 꽃피우는 게 아니다. 쌀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번식하려고 쌀을 만드는 것이지 인간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러나 자기한테 최선을 다한 결과가 남을 이롭게 한다. 정직 같은 도덕적 덕목보다는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게 인간의 몸에 맞는 형식이다.

 

과도하지 않은 것, 오래 지속되는 것,

디테일에 철저한 것도 요즘 상식으로 당연한 것 같다.

때로는 과도한 게 필요하다. 과도한 선물 공세, 때로는 막 퍼주는 게 마음에 들 때가 많다. 인간의 심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나한테 하나라도 더 주는 사람에게 끌린다. 우리나라 옛날 밥상을 보면 상이 넘쳐날 정도로 음식이 많았다. 그 과도함이 내 기분을 좋게 한다. 과도한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오래 지속되는 것, 이건 진짜 안 좋은 것이다. 하나 만들면 오래 써야 한다는 것, 영원 불멸을 추구했던 그리스 시대 정신의 연장선상이다. 하지만 이는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라디오 하나 사서 평생 쓰는 분들이 전자업체에 얼마나 큰 해를 끼치나. 현대는 오래 가는 형식이 아니라 순간적 형식에 관심이 더 많다. 꼭 영원해야 좋은 것은 아니다. 클래식은 오래 가는 음악이고 대중음악은 기껏해야 한 달 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중음악을 수준 낮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니다. 너무 멋지다. 왜냐. 지겨울 만하면 다른 음악이 나오지 않는가. 패션쇼도 그렇다. 한 모델이 나왔다 곧 다른 모델이 끊임없이 나온다. 한 명의 멋진 모델이 한 시간 동안 무대에 서는 것보다 여러 모델이 나오는 게 훨씬 좋다. 일본이 실패한 이유가 있다. 오래 쓰는 형식에 집착하는 장인정신 때문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장인정신이 요구되는 분야가 있다. 하지만 이게 반드시 맞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그때 새로운 걸 계속 만드는 게 더 좋다.

 

디테일을 철저하게 만들려면 엄청난 공이 들어간다. 그러다 타이밍을 놓칠 수 있다. 때로는 대충 만든 게 더 멋있다. 대충 찢어진 청바지, 색이 바랜 청바지 이런 게 매력적이다. 디테일은 철저히 하지 않아도 된다. 핵심 코어에만 집중해도 된다. 뭔가 괜찮은 포인트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디테일을 철저하게 하면 돈만 비싸진다. 때로는 싼 게 좋다. 모든 기능 없이 딱 한 가지만 있는 전화기가 더 괜찮을 수 있다.

 

환경친화적인 것, 이건 맞는 거 아닌가.

환경친화적이라는 것도 사실 꿈이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은 환경친화적이지 않다. 앞서 기능적인 것처럼 우리는 친환경에 대한 과도한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 진짜 환경친화적이 되려면 쓰레기를 아예 만들지 말아야 한다. 재활용은 해봐야 10∼20%밖에 효과가 없다고 한다. 문제의 70%는 쓰레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줄이려면 생산을 안 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경제 체제에서 원시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원시로 돌아가려고 시도하는 순간 낙오자가 된다.

 

예를 들어 친환경적이라고 만든 모든 것들은 친환경적이지 않은 측면을 갖고 있다. 태양열 발전을 한다면서 얼마나 많은 재료를 써야 하나. 친환경 계란을 먹으려고 남해에서 가져오는 사람도 있던데 친환경란 생산과 배송 과정에서 환경이 파괴된다. 환경 문제는 친환경 제품이 아닌 과학과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생각해보자. 서울시내 곳곳에서 사람들이 나오자마자 에너지 친화적 이동 수단을 이용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든다면 개인들은 장거리 용도 외에 자동차를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친환경보다는 오히려 인체에 유익한 것을 만드는 게 더 낫다. 환경에 좋아서가 아니라 인체를 유익하게, 인간의 몸에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 환경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최소한의 디자인은 요즘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트렌드 아닌가.

흔히들 ‘Less is more’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런데 less라는 말은 고정된 것이다. 최소한이 되는 순간 바로 한정적인 게 된다. 요즘 아이돌들은 무더기로 나온다. 완벽한 외모를 가진 여성 한 명을 보는 게 좋은가, 아니면 다양한 10명을 보는 게 더 좋은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대부분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Less 한 게 반드시 more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여러 요소가 섞여 있는 게 훨씬 풍요롭다. 나는 ‘less but more’라는 말을 쓰길 좋아한다. Less, 하지만 more가 되는 것, 그리고 more가 한순간 less가 되는 것을 선호한다. 고정돼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게 아름답다. 그리스 시대에는 변하지 않는 게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less라는 것으로 고정하는 순간 덜 매력적인 게 된다. Less가 안 된다는 게 아니다. 덜 매력적이라는 얘기다.

 

Less more로 변하는 ‘less but more’의 사례를 들어달라.

한정하지 않는 형식이 모두 사례가 될 수 있다. 전화 무제한 요금제 같은 것도 어떤 제한이 없다. 내가 부산에 설계한 건물한 칸 집’(사진4)이 있는데 계속 변하는 집이다. 대부분 벽에 문이 달려 있다. 벽이, 문이 움직이면서 계속 다른 모양이 된다. 지금 아파트는 고정돼 있다. 정해진 형식은 아름답지 않다. 구속과 방임, 그 어느 쪽에도 속해 있지 않는 게 아름답다. 특정한 이념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도 매력적이다. 이런 걸 요구하는 시대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길로 가는 거다. 대신 엉뚱한 길로 가는 게 실패는 아니다. 다만 뒤따라가는 것일 뿐 진보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새로운 패러다임 적응에 애를 먹고 있다.

최근 한 굴지의 대기업이 강연 요청을 했다. 나 같은 사람을 부른 건 변화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게 강연의 주제까지 정해주더라. 청바지도 못 입게 했다. 물론 쓸데없는 싸움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 문제로 싸우지는 않았다. 강의 마치고 나올 때 하복 자율복장 안내판을 봤다. 내용을 보니 자율이 아니라 사실상 이런 방식으로 입어야 한다는 강제적 권고 복장이었다. 코미디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기업들은 강점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과거의 방식으로는 평생 열심히 해봐야 1.5위 정도 할 것이다. 목표가 1.5위라면 굳이 안 바꿔도 된다. 하지만 1등이라면 바꿔야 한다. 모두가 바뀌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리딩 그룹은 바꿔야 한다. 새로운 제안, 더 진보적인 제안이 필요한 시대다. 지금까지의 성공 공식이 더 이상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인터뷰=김남국 DBR 편집장 march@donga.com

 

 

 

 

  • 김남국 김남국 |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장
    -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편집장
    -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정치부 IT부 국제부 증권부 기자
    - 한경가치혁신연구소 선임연구원
    mar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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