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남의 나라 이야기?
국민들은….
일자리가 무자비할 정도로 줄어들고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당한 뒤 더 낮은 임금에 복지 혜택도 거의 없는 비노조원(비정규직) 자격으로 재고용된다. 중국과 인도 같은 저임금 국가로 설비 이전이나 해외 아웃소싱을 통해, 혹은 그렇게 하겠다는 위협만으로도 임금 인상은 억제되고 협력업체와 그 종업원들은 지속적인 단가 인하 압박에 시달린다. 정부 또한 법인세가 낮고 기업 보조금이 많은 나라로 설비를 재배치하겠다는 기업의 위협으로 인해 끊임없이 법인세 인하 및 보조금 확대 압력을 받는다. 그 결과 소득 불균형은 극심해졌고 대다수 국민은 큰 규모의 빚을 지지 않고서는 번영에 동참할 수 없게 된다.
기업에서는…
스톡옵션으로 막대한 양의 주식을 챙긴 전문 경영인들이 엄청난 혜택을 누린다. 고용 삭감은 단기적으로는 생산성을 높인 듯 보이나 장기적 노동력 부족은 노동 강도 강화로 이어진다. 지친 노동자들의 실수가 잦아져 결국 제품의 품질이 저하되며 기업의 평판도 나빠진다. 끊임없는 해고 위협으로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진 노동자들이 업무에 요구되는 기술과 지식에 대한 자기계발 시간 투자를 꺼리고 궁극적으로 기업의 생산 잠재력이 훼손된다. 주요 투자의 재원인 사내 유보 이윤은 배당금을 높이고 자사주 매입을 늘린 이유로 줄어들고 그 결과 투자가 감소한다. 때문에 장기적 기업의 기술력이 후퇴해 기업의 생존 자체가 위협당한다.1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불편한 이 내용은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의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중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 챕터에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을 서술한 내용이다. 장 교수는 1981년 잭 웰치 GM 회장의 연설에서 ‘주주가치’라는 용어가 사용된 이후 주주가치 극대화는 미국 재계의 시대정신이 됐고, 이를 통해 전문 경영인들과
주주들 간에 결성된 소위 ‘비신성 동맹(unholy alliance)’이 기업의 기타 이해관계자들을 착취했다고 정리한다. 그는 미국 주주자본주의 폐해의 극단적 사례로 GM을 들고 있으며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절대 우위를 잃고 GM이 끝내 파산한 이유를 주주가치 극대화의 선봉에 서서 끊임없이 다운사이징을 추진하고 투자를 기피했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GM은 2009년에 파산할 때까지 이러한 전략을 바꾸지 않았는데 GM과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이 무너지는 동안에도 오직 그 경영인과 주주들만은 행복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찾고 있다. 장하준 교수는 부동(浮動)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국민 경제와 기업 모두에게 불공평할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하며 잭 웰치의 최근 고백을 인용해 ‘주주가치란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아이디어’라고 규정한다.
장하준 교수의 주장에 대한 찬반을 떠나서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을 봐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주주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경제민주화의 큰 축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업과 경제는 향후 주주가 아닌 누구의 가치를 극대화하도록 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주주에게 이로운 것이 기업에도 이롭다?
주주들은 기업의 법적 소유주이기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이해관계자 중에서 기업의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에 가장 관심이 없는 집단일 수도 있다. 최근 사회책임투자 등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기업에 대한 투자가 의미 있는 흐름으로 성장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거대하고 냉혹한 주주자본주의의 생태계에선 그 영향이 미미하다. 오래 전 GE가 친환경기술 투자를 발표했을 때 그랬듯이 기업의 장기적 투자 의사결정이 단기적 수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될 때면 단기 수익에 집중한 주주들은 그 회사의 주식을 내다판다. 하지만 임직원, 협력회사와 지역사회와 같은 주주와는 다른 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은 기업이 어려워도 쉽게 떠나지 않는다. 직원들은 소속된 기업이 필요로 하는 특정 지식과 기술을 축적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했으며 그 기업의 협력회사들은 납품을 위해 요구되는 설비와 인프라를 갖추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주식을 팔듯 쉽게 떠나서 다른 기업의 이해관계자가 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기업을 수용하고 주민이 그 기업에 고용되며 환경과 사회적 영향을 직접 받는 지역사회는 말할 것도 없다. 대부분의 주주들보다는 노동자나 협력회사, 그리고 이들이 지리적 활동의 기반을 두고 있는 지역사회가 해당 기업의 장기적인 생존 여부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주주가치 극대화만으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로 구성된 지역 경제 전체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해당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더욱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기업은 태생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제 주체의 요구를 수렴하며 그 안에서 기업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소위 사업면허(License to operate)를 유지하고 연속성을 추구할 수 있다. 최근까지는 기업 경영은 재무적 가치, 이익 극대화에 영향을 미치는 주주, 고객 등 특정 이해관계자에 포커스를 맞추고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만으로 사업면허 유지, 성장 및 리스크 관리가 가능했다. 그러나 주주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비판과 ‘지속가능한 발전’ 논의의 전 세계적 확산에 따라 기업에 환경보호와 사회적 조화를 추진하도록 요구하는 CSR 개념이 대두됐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관련 활동을 예의주시하는 압력이 증가하면서 소수 이해관계자에게만 집중했던 전통적 기업의 경영방식은 비로소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 버지니아대 다든 경영대학원 석좌교수인 에드워드 프리먼(R. Edward Freeman)은 만약 기업 경영자가 이해관계자의 요구에 대응하지 않으면 이러한 이해관계자들은 해당 기업에 대해 각자의 지원을 철회하기 때문에 기업활동에 주요한 비재무적 이해관계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기업은 이제 장기적 기업의 가치, 브랜드와 명성을 관리하기 위해 비재무적 이해관계자가 기업에 던지는 메시지를 수렴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갖추고 이를 기업 경영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야만 한다.
진정성 있는 CSR로 경제민주화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물결에 대응하자
기업의 모든 활동과 가치사슬 전반에서 이해관계자가 존중되고 이들에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CSR’과 ‘지속가능경영’의 포괄성 원칙과 그 맥락을 공유한다. 그럼 왜 갑자기 경제민주화에 대응하는 논의에서 이해관계자가 강조됐을까?
미국발 금융위기와 전 세계적 경기 침체는 월가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를 정점으로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의 비판에 기름을 부었고 대안으로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을 급증시켰다. 향후 기업들에 주주 등의 특정 이해관계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적 경영의 방식에서 탈피해 기업 자체가 사회를 구성하는 기업 시민의 개념에서 모든 이해관계자의 관심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으로 경영의 위기와 기회를 관리하도록 하는 사회적 요구는 더욱 급속히 증가하고 강화될 것이며 이러한 기류는 상당한 기간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에서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바람과 맞물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논의가 확대돼 우리 기업 경영의 큰 패러다임 변화의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따라서 우리 기업들도 사업 활동, 더 폭넓게는 가치사슬 전반에 영향을 주고받는 비전통적 이해관계자에 대한 발언권을 인정하고 소통하며 중요 이해관계자가 경영의 의사결정에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매우 혁신적인 거버넌스 체계의 수립이 필요하다. 또, 그 노력의 성과와 과실을 다시 이해관계자에게 투명하게 보고하고 소통해 개선과 혁신을 강화하는 진정한 의미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 경영 체계의 선순환을 준비해야 할 때다. 이것이 도도한 시대적 흐름인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를 맞이하는 기업의 자세여야 하며 전략이 없는 사회공헌과 기부, 차별성이 없는 지속가능성 보고서의 발행과 겉만 번지르르한 CSR 시상제도와 지표에 매달리는 지금 현실과는 다른, 진정성 있는 CSR의 추진돼야 하는 이유다.
이해관계자 참여 기반의 포괄적 거버넌스 구축이 출발점
그럼 진정한 의미의 CSR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돼야 하는가? 진정성 있는 CSR 추진의 최고 상위 동력은 ‘거버넌스의 포괄성’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우선 ‘포괄성’의 개념을 먼저 짚어봐야 한다. 표준에서 정의하는 포괄성이란 이해관계자들에게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하고 그들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조직이 전략적으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대응방안을 개발하고 이를 성취함에 있어 이해관계자에 대한 설명의무(Accountability)를 다해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업이 리스크를 파악하고 대응하는 전 과정에 비전통적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 그리고 이해관계자가 그 과정에서 직간접적인 의견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권리를 부여함을 의미한다. 더 간단히 말하면, 기업 경영에 이해관계자가 배제(exclusive)되지 않고 포함(inclusive)된다는 의미다.
최근 한 CSR 수준 조사에 따르면 한국 기업의 CSR 추진에서 글로벌 기업들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거나 총체적으로 부재한 것으로 드러난 영역이 이 거버넌스의 포괄성 부문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한국 기업 경영진이 아직 이해관계자의 목소리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부 기업을 제외하고는 기업의 최고의사결정 과정에 이해관계자가 참여할 수 있는 공식 혹은 비공식적 채널이 없고 관련 비재무 리스크가 전사 리스크 관리에서 통합적으로 다뤄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연한 이야기로 이렇듯 거버넌스의 포괄성이 취약한 기업은 CSR의 추진이 형식적이거나 이해관계자가 아닌 경영진에 대한 성과 보여주기식이 되기 쉬워 단편적 사회공헌 활동에 집중하거나 지표, 지수, 평가나 시상을 받는 데만 목을 매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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