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tegic Communication
퇴근길, 과일 가게에 들른 당신. 먹음직스럽게 생긴 수박 한 통을 발견했다.
“사장님! 이 수박 얼마예요?”
“1만4000원입니다. 정말 달아요!”
“네? 좀 비싼데… 만 원에 주시면 안 돼요?”
“안 돼요. 그럼 남는 게 없어요.”
잠시 생각하던 당신. 그러다 번뜩이는 재치를 발휘해 이렇게 제안한다.
“알겠어요. 그럼 서로 반씩 양보해서 1만2000원에 하시죠? 어때요?”
“안 되는데… 좋아요. 오늘만 특별히 해드릴게요.”
1만2000원에 수박 한 통을 산 당신. 처음 요구했던 1만 원에 사지 못한 게 못내 아쉽긴 하지만 기분이 좋다. 가게 주인이 처음 요구했던 1만4000원보다 2000원을 깎았으니까.
어떤가? 이 협상, 잘한 협상인가? 협상이 끝난 후 기분이 좋았다면 내 입장에서는 잘한 협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시장에서 ‘4000원’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양측이 똑같이 ‘2000원’씩 양보한 상황이 아니라 기업 간의 비즈니스 관계에서 ‘4억 원’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2억 원’씩 양보한 협상이라면? 아직도 이 협상이 ‘괜찮은 협상’이라고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협상은 서로 공정하게 양보하면서 타협점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반씩 나누기’를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이건 협상이 아니다. 단순한 가격 ‘흥정’일 뿐이다.
흥정이 아닌 협상을 하기 위해선 논리가 필요하다. 논리적 접근을 통해 협상 3.01 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상대의 ‘인식’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협상 상대의 인식을 만족시키기 위한 논리 만들기. 이를 위해 기억해야 할 3가지 개념을 소개한다.
사실(Fact)로 협상하라
중학생 아들을 둔 당신. 어느 날, 당신의 아이가 기말고사 성적표를 내민다. 형편없는 성적을 보고 충격을 받아 버럭 소리를 치고 싶지만 화를 꾹 눌러 참고 말한다. “아빠가 너만할 때는, 집안일도 내가 다 하면서 공부했어. 그리고 학원? 그런 게 어디 있어. 형이 보던 문제집, 지우개로 다 지우고 다시 풀면서 공부했어. 그런데 너는 안 그렇잖아. 해 달라는 과외 다 해주고, 사달라는 참고서 다 사주잖아. 뭐가 문제야? 아빠가 너한테 뭘 더 해 줘야 하니?” 아들은 꿀 먹은 벙어리다. 이유가 뭘까? 아들은 당신의 말에서 ‘전혀’ 현실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달라졌는데 ‘옛날 얘기’만 하는 당신의 말에 설득되지 않는 건 당연하다.
협상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아들과의 대화’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협상을 하면서도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많은 협상가들은 내가 팔려고 하는 제품이 얼마나 좋은지, 자신의 의견이 얼마나 합당한지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주장에 쉽게 넘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영업사원은 이렇게 하소연하기도 한다. 우리 제품은 정말 좋은데 멍청한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본다고.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걸 모른다고 한탄하는 부모의 마음과 똑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안한 얘기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내 입장’이 아닌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는 어떤 것일까?
정답부터 얘기하면 ‘사실’만 제시하라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로 들리는가? 나는 항상 사실만을 근거로 협상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퀴즈를 풀어보자. 판매 가격을 결정하기 위한 협상 상황에서 다음의 제안은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일까?
“우리 회사 제품은 처리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가격을 10% 더 받아야 합니다.”
답은? “NO”다. ‘빠르다’는 것에 대한 구체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나에겐 빠르지만 상대에겐 그저 그런 스피드일 수도 있다. 주관적 판단이 들어갈 수 있는 개념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주장이 사실이 되려면 ‘경쟁사 제품보다 속도가 얼마나 더 빠른지’ ‘이 제품을 사용하면 구매사의 생산 속도가 지금보다 몇 % 더 빨라질 수 있는지’ 등을 수치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 더 해 보자.
“내부 테스트 결과 불량률이 0.5%포인트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러니 충분한 가격 인상 요인이 됩니다.”
어떤가? 이것은 구체적인 불량률 ‘수치’가 들어갔으니 사실일까? 아니다. 그 이유는 그 수치가 믿을 수 있는 자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부 테스트’는 객관적인 자료로서의 힘이 부족하다. ‘외부 전문가의 발표 자료’와 같이 협상 상대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게 객관적인 사실이다.
제대로 된 협상을 하려면 이처럼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 사실이 필요하다. 양측이 모두 확인할 수 있고 이에 대해 인정 혹은 반박을 할 수 있을 때 논리적인 협상이 가능해 진다.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상대를 설득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 협상이 있다. 우리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기 꺼려하던 유럽연합(EU)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협상장에서 생긴 일이다. 2005년 당시, EU에서는 우리나라와 FTA를 체결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화장품 산업, 조선업 등 한국과 EU는 산업군이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나라 협상단은 ‘괜찮을 테니 해 보자’라는 식의 막무가내 설득이 아닌 데이터를 가지고 협상에 임했다.
EU 협상단은 “한국은 시장 규모가 너무 작다”며 한국과의 FTA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이 주장에 대해 우리나라 협상단이 제시한 논리는 ‘국경의 무용론’이었다. 중국과 일본을 양쪽에 끼고 있는 한국과 FTA를 체결한다는 건 동북아시아 전체와 FTA를 맺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가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한국이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일본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 왔다는 자료, 최근 이 두 나라와 한국 간에 이뤄지는 활발한 교류에 대한 자료를 제시했다.
그러자 EU에서 이렇게 반박했다. “동북아 시장이 매력적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럴 거라면 중국이나 일본과 먼저 FTA를 맺겠다”고 한 것. 여기서 우리 협상단이 제시한 데이터는 ‘빠른 FTA 진행’이었다. 대한민국은 FTA 체결에 대한 의지가 높다며 이미 추진된, 그리고 현재 추진 중인 FTA 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통계 수치를 제시했다. 한국과의 FTA 체결로 양측 모두 만족할 만한 조건을 ‘빠른 시간’ 안에 찾을 수 있고 이를 통해 FTA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하지만 EU는 “동북아도 좋은데 그보다 아세안(ASEAN)이나 인도 시장이 더 잠재력이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여전히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때 우리 협상단은 ‘EU의 경제력’과 ‘아세안의 경제력’에 관련한 자료를 보여주며 설득했다. 수많은 선진국의 연합체인 EU가 개도국 연합인 아세안과 FTA를 맺는 건 힘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점을 구체적인 숫자를 활용해 이해시킨 것. 이에 더불어 지금까지 EU는 개발 원조 차원의 FTA만 있었지 진정한 의미의 상업적 FTA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대한민국과 첫 상업적 FTA를 맺는다’는 점을 적극 홍보하자고 설득했다. 결국 처음엔 대한민국과의 FTA는 생각지도 않던 EU 집행부의 마음을 돌려 본격적인 FTA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다.
협상은 주장의 맞고 틀림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다. 상대의 인식을 만족시킬 만한 사실을 제시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그러한 사실을 최대한 많이 제시할 수 있을 때 자연스럽게 협상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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