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사업 철수

과수원의 가지치기를 배워라, 출구전략이 보인다

105호 (2012년 5월 Issue 2)

 

과수원을 가꾸는 농부들이 주로 하는 일 중 하나가 ‘가지치기’다. 말 그대로 과일나무에서 가지를 잘라내는 일이다. 성장이 더디거나 혹은 이미 말라 죽어버린 가지들이 잘려 나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경험 많은 농부들은 단지 죽은 가지를 쳐내는 데 그치지 않고 멀쩡하게 잘 자란 싱싱한 가지들까지 망설임 없이 베어 버린다. 심지어 수확철이 다가오면 최상 등급으로 판매하기에 전혀 부족함 없어 보이는 열매들까지도 가차없이 따서 버리기도 한다. 그들은 왜 싱싱한 가지와 잘 자란 열매까지 잘라내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렇게 하는 게 각 과일나무로부터의 수확량을 극대화하는 길임을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지가 너무 무성하게 자라면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방해한다. 가지 몇 개, 열매 몇 개 더 가져보려고 욕심 부리다가 훨씬 더 많은 걸 잃게 되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각화된 기업을 이끄는 CEO들에게 ‘과수원의 농부’ 이야기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 회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최적화할 수 있을까”에 대해 자나깨나 고민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올리버와이먼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적지 않은 CEO들은 ‘신(
)성장 동력’, 즉 미래 승부 사업을 발굴하고 추진하는 데 본인이 가진 대부분의 자원을 쏟아붓는 반면 기존 사업을 효과적으로 정리하는 데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그림1) 물론 기업이 지속적 성장(sustainable growth)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고 육성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돼 있다. 보유 자원이 전부 소진돼 버린 상태에서는 아무리 매력적인 사업을 발견해도 추진할 여력이 없다. 따라서 자사(自社) 입장에서 전략적 의미와 가치가 다한 사업은 (설령 현재 안정적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 하더라도) 과감하게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 어떠한 신사업을 추진할 것인가의 문제 못지 않게 어떤 사업을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의사결정이 신중하고도 과감하게 내려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고에서는 적시 적절한 사업 철수를 통해 전체 기업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 및 조정’의 최종 책임자인 CEO가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다뤄보고자 한다.
 
전략적 사업 철수의 목적
우선 사업 철수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많은 CEO들은 ‘사업 철수’라는 표현을 접하면 자연스럽게 BCG 매트릭스상의 ‘dog(개)’ 혹은 제품수명주기(PLC·Product Life Cycle)상의 ‘쇠퇴기’를 떠올리곤 한다. BCG매트릭스를 구성하는 양 축의 정의에 따르면 시장 매력도(수익성) 및 자사의 시장 경쟁력(시장 점유율)이 모두 낮은 사업들이 ‘dog’ 사분면에 속한다. 또한 제품수명주기상 쇠퇴기에 접어든 사업은 소위 이미 ‘한물간’ 사업들이다. 이처럼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사업은 마치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뇌사 상태의 환자와 비슷하기 때문에 손에 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의미 없는 자원의 소모만 눈덩이처럼 커질 위험이 높다. 따라서 신속한 결단을 통해 손실 규모를 최소화하는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서두의 과수원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이미 말라 죽어버린’ 가지를 쳐내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이와 같이 ‘사업 철수=실패’라는 등식이 대한민국 경영자들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물론 이것이 100%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100% 맞는 얘기라고 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안정적 사업 성과를 창출하는 사업, 심지어 자사의 모태가 된 창업 사업이라 할지라도 자사의 비전 및 중장기 사업 포트폴리오 전략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매각하는 사례도 많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서둘러 저수익 한계사업을 정리할 때와는 달리 자산가치에 프리미엄까지 적용된 만족스러운 가격으로 매각하는 게 가능하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기존 핵심 주력사업 및 미래 신수종 사업을 키우는 데 투자할 수 있다. 보다 확실한 ‘선택과 집중’을 추구함으로써 현재보다 우월한 사업구조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저수익 한계사업을 불가피하게 정리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선제적이고 전략적으로 기존사업을 정리·매각하는 것을 ‘전략적 사업 철수(Strategic Business Exit)’라 부른다.(그림2) 전략적 사업 철수는 자사 입장에서 ‘(매각 대상 사업의) 보유가치보다 매각가치가 더 큰 경우에 한해’ 자사보다 우월한 보유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원매자에게 사업을 이양하는 것이므로 거래 양 당사자에게 이득이 되는 ‘win-win 거래’다. 뿐만 아니라 구조조정 및 고용 승계 등 민감한 문제와 관련해서도 내부 직원의 반발 및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작다.
기존과는 달리 새 주인이 되는 회사에서는 주력사업으로 집중 육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전략적 사업 철수’는 사회적 관점에서 전체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순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사업 철수의 유형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유형의 사업 철수 방안을 활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1) 저수익 한계사업 정리
우선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저수익 한계 사업은 ‘청산(liquidation)’이 유일한 대안일 때가 대부분이다. 청산은 기업의 존속 가치가 청산가치보다 크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기존 보유 자산을 매각해 채권자 및 주주에게 분배한 뒤 회사를 완전히 해체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청산과 유사한 제도로 ‘파산(insolvency)’이 있다. 청산은 당사자 기업의 주도하에 자산 매각 및 채무 변제를 거친 뒤 스스로 회사를 정리하는 방식인 반면 파산은 파산법에 의거해 법원의 결정에 따라 절차가 진행된다. 부채 규모가 자산매각가치를 상회해 채무를 모두 변제하는 게 불가능한 경우 법원이 해당 채무 기업의 자산가치를 현가(現價)로 산정한 후 파산법 기준에 의거해 채권자들에게 분배하는 방식이다.
 
2) 전략적 사업 철수
①전략적 철수 영역 선정 (where?)
앞서 설명한 ‘전략적 사업 철수’의 경우 당연히 청산 혹은 파산과는 다른 방식이 사용된다. 우선 매각 대상 사업이 선정됐다면 ‘매각 범위’를 확정해야 한다. 해당 사업에서 자사가 영위해온 사업영역 전체를 매각할 것인지, 아니면 그중 일부만을 분리해 매각할 것인지가 주요 의사결정 포인트다. 예를 들어 가치사슬(value chain) 전반에 걸쳐 사업을 수행해 온 경우에는 특정 가치사슬만을 매각 대상으로 내놓을 수 있다. 만약 다양한 지역시장에 진출해 있다면 특정 지역(권역)을 떼내어 팔 수도 있다. 이동통신 사업 영역 전반을 커버하던 SK텔레콤이 단말(휴대폰) 제조 자회사인 SK텔레텍을 팬택앤큐리텔에 매각한 것은 주력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가치사슬상 비핵심 영역을 정리한 사례다. 비록 전략적 사업 철수가 아닌 파산 사례이기는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리먼브러더스는 지역 단위 매각의 좋은 사례다. 당시 리먼브러더스의 북미 사업은 영국 바클레이스가, 아시아 사업은 일본 노무라증권이 부분 인수했다. 일반적으로 사업 영역 전체를 매각하는 게 거래 성사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체 매각이 바람직하지 않거나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다.
 
딜 성사 가능성을 높이는 적합한 철수 범위 선정을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A. 잠재적 원매자의 선호도 및 의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즉 잠재적 원매자와 자사 간 이익이 균형 있게 합치될 때에 딜 성사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잠재적 원매자가 선호하는 매입 영역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는 한편 자사가 희망하는 매각 영역과 다소 상이할지라도 협상 과정을 통해 융통성 있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B. 자사 사업에의 향후 영향력
자사의 현재 및 향후 핵심 승부사업과는 무관한 비관련 사업을 매각할 때에는 관계가 없지만 기존 사업의 가치사슬(value chain) 혹은 지역 시장 중 일부를 매각하는 경우에는 이 거래가 향후 자사 사업에 미칠 파장 및 영향력에 대한 면밀한 사전 점검이 필수다. 해당 거래의 성사를 통해 미래 잠재 경쟁자를 키우게 될 가능성은 없는지, 기존 고객 및 투자자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끼칠 위험은 없는지 등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
 
C. 정부정책과의 충돌 여부
정부 규제를 받는 사업의 경우 전체 매각 자체가 정책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혹은 광범위한 조사 과정을 거쳐 정책당국(공정거래위원회, 지식경제부, 금융위원회 등)의 승인을 받아야 할 때가 많다. 이러한 딜을 서둘러 무리하게 추진하다 보면 딜의 장기 지연으로 인해 막대한 피해가 초래될 수 있다. 매각 대상 사업은 명확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공중에 붕 뜬 채 지속적 가치하락 국면에 접어들게 되고 기업 전체적으로도 브랜드 가치 훼손 등 유·무형적 손실을 피하기 어렵다. 따라서 사업 철수 추진 시 유관 정부기관과의 사전 조율 및 정책 검토가 필수적이다.
 
② 철수 방식 및 매입 주체 선정 (to whom & how?)
A. 제3자 일괄매각
일반적으로 업계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방식은 (경영권을 포함한) ‘제3자 일괄매각’이다. 말 그대로 최적 인수주체로 판단되는 제3자에게 보유지분 전량(혹은 경영권 이전이 가능한 수준의 지분)을 일괄 매각하는 방식이다. 제3자, 즉 매입주체는 그 성격 및 인수 목적에 따라 크게 ‘전략적 투자자(SI·Strategic Investor)’ 및 ‘재무적 투자자(FI·Financial Investor)’의 두 가지로 분류 가능하다. 전략적 투자자는 해당 사업 인수 후 자사의 핵심 주력 사업으로 육성하려는 목적으로 딜에 참여하는 투자자인 반면 재무적 투자자는 인수 후 중단기적 (통상 3∼5년) 관점에서 기업가치 제고(turn-around) 활동을 수행한 후 재매각을 통해 투자차익을 실현하고자 하는 투자자다.
 
개별 사안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전략적 투자자들은 자사의 비전 및 중장기 사업전략과 부합한다면 타사의 우량 사업 부문을 높은 프리미엄을 지불하고서라도 매입하고자 하는 의사를 갖고 있다. 반면 재무적 투자자들은 저평가된, 혹은 가치가 상당히 훼손된 기업을 상대적으로 저가에 매입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을 회생시킨 후 적정한 전략적 투자자에게 재매각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따라서 전략적 사업 철수를 추진하는 기업은 해당 사업 및 잠재적 인수자들의 특성을 감안해 매입 대상 후보군을 선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딜에 참여하는 잠재 인수 후보자가 많을 경우 유효 경쟁구도 조성을 통해 인수 제안가격이 높아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원매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다. 과잉 경쟁으로 인한 매각가격 상승 우려 등으로 딜에 참여하는 모든 원매자의 인수의지가 약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잉경쟁 상황하에서 지나치게 높은 가격에 M&A를 시도했다가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된 (이른바 ‘승자의 저주’에 빠진) 기업들이 늘면서 최근 한국의 M&A 시장은 신중하고 보수적인 투자성향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를 감안할 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소수 정예의 인수 후보군을 선정하고 이들 위주로 딜을 추진하는 게 성사 가능성을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이다.
 
B. Spin-off 및 MBO
‘제3자 일괄매각’ 이외에도 스핀오프(spin-off) 및 기존 임직원에 의한 매수(MBO·Management Buy Out) 등의 방식을 추가로 고려해볼 수 있다. 우선 스핀오프는 기존 사업영역 중 일부를 떼내어 현물출자 방식으로 별도 자회사를 만든 뒤 신설 자회사의 주식을 취득하는 방식이다. 특정 사업 영역의 사업 성과 부진이 지속돼 회사 전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 부진 사업을 본체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종종 활용된다. 스핀오프된 회사는 일정 기간 동안 다양한 회생 노력을 경주한 후 그 성과에 따라 독립된 기업으로 사업을 지속하거나 타 기업으로의 인수 혹은 청산 절차를 거치게 된다. 모토로라의 사례를 보자. 지난해 초 모토로라는 스마트폰 시대의 급속한 도래 이후 끝없는 추락을 거듭한 단말(핸드폰) 제조 부문을 ‘모토로라 모빌리티’란 이름으로 스핀오프했고 이 업체는 결국 같은 해 8월 구글에 인수됐다. 모토로라는 모토로라 모빌리티 매각을 통해 확보한 125억 달러를 핵심 승부사업인 기업용 솔루션 사업에 대거 투자한 결과 현재 안정적 경영성과를 창출하고 있다.
 
기존 임직원에 의한 매수(MBO)는 매각 대상 사업부, 혹은 계열사에 근무하고 있는 현 경영진 및 임직원들이 주도해 해당 사업을 인수하는 방식이다. 제3자 일괄매각과 달리 MBO는 기존 임직원이 인수 주체가 되기 때문에 인수 과정상에서의 갈등, 잡음 및 부작용 등을 최소화할 수 있다. 기업은 상대적으로 용이한 방식으로 한계사업 정리 및 인력 구조조정을 시행할 수 있고 임직원들은 명예퇴직 혹은 실업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얻는 동시에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win-win 사업 철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인수자금은 임직원들의 퇴직금, 모기업의 지원(담보 대출 등) 및 금융기관들의 MBO자금대출 상품 등을 통해 마련되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쌍용중공업의 대표이사를 지낸 강덕수 씨가 동 기업을 인수해 설립한 STX그룹이 대표적 MBO 사례라 할 수 있다.(그림3)
 
이상에서 전략적 사업 철수의 목적, 범위 및 대표적 실행 방식에 대해 살펴봤다. 모든 전략적 의사결정이 그러하듯 목적 및 범위에 대한 심사숙고가 전제되지 않은 성급한 실행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반면 분명한 목적과 명확한 범위가 결정된 전략은 높은 실행력을 갖고 추진될 수 있다. 전략적 사업 철수에도 이 점이 그대로 적용됨을 명심해야 한다.
 

전략적 사업철수 사례


1. IBM

2000년대 중반 IBM은 신규 고부가가치 영역인 기업 솔루션 시장에 집중하기 위해 기존 주력 사업 중 하나인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및 PC 사업 철수를 단행했다. 2005 5, IBM은 현금 약 65000만 달러 및 주식 6억 달러를 받고 중국 Lenovo에 동 사업을 매각했다. 이 딜을 통해 마련된 투자자금을 바탕으로 IBM은 소프트웨어, 대형 컴퓨터 서버 및 IT 컨설팅 관련 기업을 다수 인수하면서 컨설팅 및 솔루션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그 결과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상황 속에서도 IBM의 주가는 2005 PC사업 매각 시점 대비 약 2배 가까이 상승했다. 뿐만 아니라 Lenovo 역시 Dell을 제치고 HP에 이어 세계 2위의 PC 제조업체로 부상했다. 결과적으로 이 딜은 IBM Lenovo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는 win-win 딜로 판명됐다.

 

2. 필립스

2000년대 초까지 조명, 의료기기, 반도체, 전자 부품, 생활가전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해 온 필립스는 기존의 문어발식 사업 구조를 지속할 경우 어떤 분야에서도 세계 선도적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대대적 사업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필립스는 면밀한 분석을 통해 이미 사양 산업화됐거나 자사의 경쟁열위가 현저해지고 있는 핸드폰 및 반도체 사업의 철수를 결정했다. 대대적 매각을 통해 확보된 자금을 바탕으로 미래 주력사업인 헬스케어, 조명 등에 집중 투자한 결과, 현재 필립스는 동 분야 글로벌 선도업체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지키고 있다.

 

3. 두산

1990년대 중반까지 내수 소비재 위주의 사업을 영위해 온 두산그룹은 내수 소비재 사업의 성장 잠재력 한계(협소한 시장), 경기 민감도 및 출혈적 단기 마케팅 경쟁 등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 사업 포트폴리오 변신(business portfolio transformation)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OB맥주, 두산음료, 두산씨그램 등 기존 알짜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매각했다. 일련의 매각 작업들이 IMF 금융위기가 발발하기 직전에 이뤄진 덕분에 두산그룹은 좋은 조건으로 우량 계열사들을 매각할 수 있었다. 두산그룹은 이를 통해 확보된 자금을 바탕으로 한국중공업(2001, 현 두산중공업), 대우종합기계(2005, 현 두산인프라코어) 및 밥캣(2007, 현 두산밥캣) 등을 인수, 인프라사업 중심의 대대적 사업구조 변신을 이뤄냈다.

전략적 사업 철수 실행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시인의 ‘낙화(落花)’ 중 일부분이다. 전략적 사업 철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것, 즉 철수의 ‘타이밍’이다. 올리버와이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다수 기업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바로 ‘타이밍을 놓친다는 것’이다.
 
경영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실기(失機)’의 이유를 CEO들의 심리적 요인에서 찾기도 한다. 오늘날 전 세계 모든 CEO들은 ‘성장’의 강박에 가로 눌려 살고 있다.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심지어 잠자는 동안에도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그들에게 ‘성장’의 대척점에 놓인 듯한 뉘앙스를 가진 ‘철수’는 생각만으로도 부담스럽고 찜찜하다. 숨가쁘게 외형을 확장하고 수익을 늘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기존에 힘들게 닦아놓은 사업기반과 규모마저 제 손으로 줄인다니 선뜻 내키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전술한 바와 같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저수익 한계사업’이나 정리하는 게 그들이 생각하는 ‘철수’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는 것이다. 1년 단위로 성과평가를 받는 입장에서 ‘잘되는 사업을 선제적으로 제값 받고 매각해 이를 통해 확보된 자원을 핵심사업 강화를 위해 투자한다’는 중장기적 시나리오에 관심을 가질 만한 심적 여유가 없다. 심지어 어떤 CEO들은 ‘기존 사업에서 철수하게 된다면 나의 경영능력이 의심받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우려를 갖기까지 한다. 이러한 심리적 요인들이 실제 경영 의사결정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좀 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첫째, 주요 경영진이 집단적으로 ‘매몰비용의 오류(fallacy of sunken cost)’에 빠지는 경우다. 이미 투입된 막대한 규모의 경영자원을 감안할 때 이제 와서 도저히 사업을 정리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불확실하나마 소기의 성과가 달성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사업 철수 옵션은 더더욱 받아들여지기 힘들어진다. 지금이 9부 능선이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노력하면 결국엔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집단 최면적 착각’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결국 철수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둘째, 본인 주도로 시작된 사업에 과도한 애착을 갖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우다. 이러한 경영자들은 균형 있는 시각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사업 성과를 판단하기보다는 사업 유지에 유리한 몇 가지 지엽적 지표에 집착한다. 주요 경영지표들이 조기 경보를 울리고 있음에도 그 의미를 애써 평가절하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가 시작한 사업의 중단=내 커리어(career)에 치명상’이라는 등식이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스톡옵션의 존재도 이러한 경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객관적 경보 및 합리적 비판을 무시하고 반박하며 의사결정을 지연하다 보면 그나마 제값 받고 사업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는 갈수록 멀어지게 된다.
 
셋째, 불가피하게 사업 철수를 결정한 후에도 CEO 자신의 자존심과 업적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 결과적으로 철수 프로세스를 방해하는 경우다. 기왕 매각을 결정했다면 인수 시장 내의 시장 원리에 따라 사업 정리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게 당연하다. 따라서 매각 가치 또한 잠재 구매자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선정돼야 한다. 그러나 CEO 본인의 자존심과 아집이 반영된 비상식적인 매각가치를 고집함으로써 적정 원매자 발굴에 실패하는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 또한 시장에서 형성된 매각가치를 끝까지 수용하지 않고 “이렇게 헐값이라면 차라리 안 팔고 말겠다”는 식으로 매각 과정을 지연시키는 경우도 많다.
 
마지막으로, CEO 본인이 임직원들의 감정적 호소에 너무 쉽게 흔들리는 경우다. 예를 들면 매각 대상 사업의 본부장이 “이 사업은 그 누구보다 내가 잘할 수 있다. 한번만 기회를 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면 이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부 CEO들은 “김경문 감독도 베이징올림픽에서 빈타에 허덕이던 이승엽에게 계속 기회를 준 끝에 그의 뒤늦은 활약에 힘입어 우승하지 않았느냐”며 기회를 주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다는 변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본인의 ‘우유부단함’을 ‘믿음의 리더십’으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CEO들의 이 같은 우유부단함을 굳이 김경문 감독 사례로 비유하자면 “김 감독 본인은 내심 부진의 늪에 빠진 이승엽을 타순에서 제외하고 싶었는데 이승엽이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기에 어쩔 수없이 내보냈더니 그가 20타석만에 결승홈런을 친”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CEO로서 이 같은 ‘우연’이 늘 일어나주길 바라는 건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CEO라면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인간이 돼 그 어떤 감정적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그림4)
 
이상에서 CEO의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적시에 적절한 사업 철수가 이뤄지지 못하게 되는 사례들을 살펴봤다. 물론 CEO도 인간인 이상 여러 심리적 요인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선배 경영자들이 반복적으로 저지른 실책들의 유형을 사전에 파악하고 유사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본인의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사업 철수의 적기를 놓치게 될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전략적 사업 철수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제언
 
올리버와이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략적 사업 철수에 능한 기업들로부터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업 철수의 핵심 성공요인’과 ‘M&A의 핵심 성공요인’ 간에 상당한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지금부터 전략적 사업 철수의 핵심 성공요인에 대해 살펴보자.
 
1) 전략적 사업 철수 전담 조직을 구성, 운영하라
자사의 비전 및 중장기 사업 포트폴리오 전략에 부합하는 사업 철수 전략을 실행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작업이 ‘어느 날 갑자기 아무나에 의해’ 이뤄질 수는 없다. 국내 유수 대기업들이 최고경영자 직속의 그룹 포트폴리오 전략 팀 및 M&A 전담팀을 두고 인수 대상 물건을 상시적으로 탐색하듯이 전략적 사업 철수 또한 유관 역량을 보유한 전문인력들로 구성된 상시 조직을 통해 수행하는 게 바람직하다. 여기에 공식화된 사업 철수 가이드라인까지 제정해 적용한다면 사업 철수는 ‘깜짝 이벤트’가 아닌 기업 경영 체계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2) 철두철미한 철수 계획 ‘PDI’를 수립하라
M&A 성공의 핵심은 ‘인수 후 통합(PMI·Post Merger Integration)’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유사하게 전략적 사업 철수의 성공도 ‘얼마나 치밀한 사전 철수 계획을 수립했느냐’에 달려 있다. 이를 ‘사전적 분리 계획(PDI·Plan for De-Integration)’이라 부른다. 철수 목적, 범위, 대상, 방식 등에 대한 면밀한 사전 계획의 수립은 성공적 철수를 가능케 하는 지름길이다. 치밀한 준비가 바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추진한 딜은 그 성사 여부와 관계 없이 매각 가치를 극대화하기 어렵다. 특히 잠재 인수 대상 후보군 입장에서 자사의 매각 대상 사업을 평가하는 ‘역() 실사(reverse due diligence)’를 실시해 보는 것은 매각 협상 전략 수립에 큰 도움이 된다. 이제는 PMI에 더해 PDI를 함께 기억하라.
 
3) 일단 결정했다면 신속하게 움직여라
M&A를 하기로 결정했다면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 전담 팀 구성, 자문사 선정 등을 포함한 입찰 준비는 빠르면 빠를수록 유리하다. 사업 철수 역시 마찬가지다. 일단 철수가 결정된 후에는 전사 차원의 신속한 실행이 수반돼야 한다. 철수가 지연될수록 철수 대상 사업부 구성원들의 동요 및 시장의 우려 확대 등으로 인한 기업 가치 훼손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시장에서는 사업 철수를 신속히 공시하고 빠르고 과감하게 추진하는 기업들의 주가가 그렇지 않은 기업 대비 약 2∼5% 높게 형성된다고 한다. 언제나 신속한 실행이 핵심이다.
 
4)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어야 한다
아무리 전담팀을 조직해 주도 면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속하게 실행한다 해도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우선 철수 대상 사업부 구성원들의 동의 및 공감을 얻어내지 못할 경우 철수 추진 과정 내내 강력한 반대와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사회 구성원 및 주주들의 심적 지지를 이끌어내야 하는 건 물론이다. 이를 위해 기업 내·외부 이해관계자들에게 사업 철수의 목적 및 당위성을 ‘쉽고, 명확하고, 반복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특히 대상 사업부 구성원들에게는 철수를 통해 더 큰 기회와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심정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찬 이성’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더운 가슴’이 필요하다.(그림5)
 
결론
대다수 CEO들의 주요 관심사가 ‘신사업 중심의 성장’에 맞춰져 있는 게 사실이지만 지속적 성장 동력 마련을 위해서라도 ‘성공적 사업 철수’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다. 나아가 성공적 사업 철수는 거래 당사자 기업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앞서 지적한 바 있다. 기업들은 각기 상이한 경영 자원 및 핵심역량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 간 활발한 사업 매각 및 인수를 통해 각자가 보유한 자원 및 역량에 ‘가장 잘 맞는’ 사업영역을 구축함으로써 사회적 차원의 자원 활용도를 극대화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전략적 사업 철수’에 요구되는 역량 및 시스템을 잘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형태의 win-win 거래를 성공시키기를 기대해 본다.
 
신우석 올리버와이만 서울사무소 팀장 Wooseok.Shin@oliverwyman.com
 
필자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신재생 에너지, 소비재 및 사모펀드 고객사를 대상으로 다수의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올리버와이만(Oliver Wyman)은 2007년 5월 머서매니지먼트컨설팅, 머서델타, 머서올리버와이만이 통합해 출범한 글로벌 경영컨설팅회사다. 전 세계 약 30여 개 국에서 4000여 명의 컨설턴트가 일하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18호 Dynamic Workspaces 2021년 04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