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ory & Practice
편집자주
성균관대 SKK GSB 김태영 교수의 ‘Theory & Practice’ 코너를 연재합니다. 김 교수는등 매니지먼트 분야에서 저명한 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탁월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학자입니다. 학술적인 연구 결과를 쉽게 풀어내 실생활에 적용한 김 교수의 글은 많은 통찰력을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김 교수가 학술지 이외의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것은 DBR이 처음입니다.
네트워크의 불편한 진실
어느 사회에서나 성공에 대한 신화가 존재한다.
<아웃라이어>의 저자인 말콤 글래드웰이 지적했듯이 성공신화가 팽배한 사회에서 성공한 개인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성공했다는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 본인 이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줬다는 단순한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이러한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의 근저에는 개인이 맺고 있는 다양한 인간관계의 네트워크(연결망)가 존재한다. 수십 년간의 매니지먼트 분야의 연구들은 그런 네트워크의 양과 질이 개인 혹은 기업의 성공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알려준다. 하지만 이러한 연결망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MBA와 Executive MBA 강의를 통해 접한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네트워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네트워크는 윤리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지식 혹은 존재를 수단화하는 네트워크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물론 지나친 수단화는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사업적 이해관계 속에서도 진실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가치다. 둘째, 직장생활을 오래하면 연결망이 좋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오래할수록 연결망의 폭이 좁고 인간관계가 좁은 경향이 있다. 직장동료와 상사와 오래 생활하다 보니 일도 같이하고 저녁 식사도 같이하고 취미도 공유하는 등 인간관계가 좁아질 수 있다. 좁아진 인간관계는 회사의 임원승진이 있을 때, 혹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연결망은 많은 사람을 만나면 좋아진다는 막연한 인식이 존재한다. 연결망에서는 양보다는 오히려 질적인 측면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을 알아도 비슷한 직업군, 학교, 직장 등에 한정돼 있다면 연결망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 이들 세 가지 중에서도 특히 연결망의 구조적 속성, 즉 개인의 연결망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는가에 대한 인식의 통찰이 절실하다.
네트워크와 양다리전술
우리말에 ‘양다리 걸친다’는 말이 있다. 한쪽에만 연결되거나 소속되지 않고 양쪽에 연결되거나 소속된 상황을 설명하는 말이다. 고약하게도 이 말에는 말하는 순간 어느 정도 부정적인 사회적/문화적 의미가 함축돼 있다. 이에 대해 주로 하는 비판들이 바로 ‘충성심이 결여돼 있다’ ‘기회주의적이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 등 양다리 걸치는 사람 혹은 기업에 대해 좋은 말을 하는 것을 듣기 힘들다. 자신이 속한 편을 확실히 정하고 우왕좌왕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아니면 남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팽배하면 반대쪽에 속한 사람들과 소통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양다리전술이 지닌 개인적 혹은 사회적 선의(善意)는 정말 없는 것일까? 그런 전술을 구사하는 개인 혹은 기업은 항상 그런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인가? 이념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순혈주의적 사회에 양다리전술이 들어설 자리는 매우 협소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양다리 전술의 이점은 오히려 그런 사회에서 더 크다.
양다리전술의 재해석
연결망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구조적 공백(structural hole)이다. 얼핏 보면 거창한 개념같지만 사실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이 개념은 서로 연결돼 있지 않는 두 사람 A와 B를 연결하는 사람 C의 네트워크적 속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를 학술적으로는 C라는 개인이 연결되지 않는 A와 B 사이의 구조적 공백을 차지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A와 B가 서로의 존재를 모를수도 있다. 혹은 서로의 존재를 알더라도 특정한 연결망, 즉 누가 프로젝트를 같이 해봤는가 하는 프로젝트 연결망 관점에서 보면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A와 B는 프로젝트를 해보지 않았고 A와 B는 각각 C와 프로젝트를 한 경험이 있다. 프로젝트 연결망 외에도 A와 B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지리적으로 멀어서, 서로의 관심사가 달라서, 경쟁자이기 때문에, 성격이 맞지 않아서, 부서에 따른 이해관계가 달라서, 세대차이가 나서, 취미가 달라서, 자라온 집안배경이 달라서 등 연결되지 않는 이유는 매우 많다. 학술적 논문에서 ‘구조적 공백’이라고 부르는 이 개념은 사실 ‘양다리전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양다리’는 어찌보면 하나의 관계가 아닌 복수적 관계의 최소 단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 다리 혹은 네 다리 걸치는 것도 ‘양다리 걸친다’로 설명 가능하다.
구조적 공백을 차지한, 아니 양다리전술을 구사하는 개인 혹은 기업은 다음의 두가지 이점을 지닌다. 첫째, 정보의 다양성 측면에서 우월성을 보인다. 한사람 혹은 동일한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받는 정보의 다양성보다 서로 연결되지 않은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받는 정보의 다양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따라서 구조적 공백을 이용한 양다리전술을 잘 구사하는 개인은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낼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마케팅부서와 개발부서 양쪽과 모두 소통하고 있는 개인은 각각의 부서에서 들어오는 정보의 다양성과 각 부서가 놓인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덕분에 오직 한쪽 부서와만 소통하고 있는 개인보다 보다 현실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고안한 시카고 경영대학원의 로버트 버트 교수는 구조적 공백을 차지하고 있는, 즉 양다리전술을 구사하는 개인은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연봉 협상에서 유리하고, 승진을 빨리 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실제로 증명했다. 둘째, 양다리전술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한다. 서로를 모르는 A와 B를 대상으로 개별 협상을 진행해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물론 A와 B가 서로 협상의 내용을 알려주고 공조하면 양다리전술에서 오는 이러한 우위는 반감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양다리전술의 대가: 메디치 가문
이러한 양다리전술의 이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전설적인 가문이 있다.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에 대한 위대한 후원자이자 피렌체 국가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행한 수많은 행적들 중 브르넬리스키를 도와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를 건축하고 도나텔로와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많은 예술인들을 후원했으며 마르실리오 피치오와 함께 아카데미아 플라토니카를 지원하고 콘스탄티노프 학자들과의 교류를 촉진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피렌체는 1347년에 닥친 흑사병에서 도시인구의 절반 이상이 피해를 보고 다른 도시국가들과 전쟁의 위험에 시달리는 등 정치적 불확실성이 매우 높았으나 직물과 금융업이 발전하는 등 급격한 경제성장을 도모하면서 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상횡에서 코시모 메디치가 활동하는 15세기 초반에는 약 4만 명 정도 인구에 200개가 넘는 가문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공존하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을 포함해 당시에 많은 가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부를 기반으로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집(팔라초), 별장, 교회, 무덤 등에 필요한 그림과 조각을 유능한 예술가에게 부탁했다.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은 그러한 가문들의 요구에 자신들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찬란한 예술품을 선사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르네상스란 바로 이러한 가문들의 경쟁에서 나온 예술적인 문화적 산물이다.
그렇다면 메디치 가문은 수많은 가문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당시 피렌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피렌체 국가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코시모 메디치는 마카아벨리가 효과적인 지도자의 덕목이라고 주장한, 목적이 분명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였을까?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코시모 메디치는 오히려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리며, 자신의 영향력을 숨기고, 필요한 때만 행동하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임에 분명한 듯하다. 더우기 코시모는 공식적으로 거의 공직을 맡지 않았으며 대중연설도 거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 공화국 지배를 설명하는 세가지 널리 알려진 주장들을 잠시 소개한다. 첫째, 복식부기를 처음으로 도입하는 등 금융업을 바탕으로 일군 막대한 재산이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에 도움을 주었다는 주장이다. 코시모는 18만 플로린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교황들과 세력가들이 메디치가문의 주요 고객이었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 이외에도 당시의 구귀족가문들 역시 막대한 재산을 축척하고 있었다. 1 즉, 경제적 배경이 필요한 것은 것은 사실이지만 메디치가문 혼자 피렌체 전체를 소유했을 것 같은 인식은 사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얘기다. 둘째, 구귀족가문은 주로 전통적인 부를 소유한 가문이고 메디치 계열 가문들은 주로 신흥가문이 많았다는 주장이다. 메디치가문의 영향력은 구귀족가문과 신흥 가문과의 정치적 갈등의 산물로 보는 이런 견해는 구귀족가문 계열과 달리 메디치가문 계열은 구귀족가문과 신흥가문이 상존해 있었다는 점에서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 즉,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중립적인 다른 가문들에 비해 메디치 계열가문들이 뚜렷하게 구귀족가문의 비율이 높았다. 셋째, 메디치 계열가문들은 산죠바니 지역(아르노강 위 강북지역)에, 그리고 그들의 정적은 산타크로체지역(아느로강 아래 강남지역)에 거주했다는 지적이다. 산죠바니지역은 메디치가문 계열과 구귀족가문들이 많이 거주했다. 하지만 양쪽 지역 모두 서로 겹쳐서 존재했다. 즉, 산죠바니와 산타크로체 지역 모두 정치적으로 나눠져 있었다. 따라서 지역적인 요소가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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