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일본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라

72호 (2011년 1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명나라에서 보내주기로 한 구원병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최초의 구원부대였던 조승훈의 부대는 왜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그 다음에 온 이여송 군도 마찬가지지만 이 부대는 만주, 요동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어 왜구와 싸워본 경험이 적었다. 명나라 조정은 그 실수를 인정하고 명나라가 보유한 소위 대()왜구 전문부대를 파견한다. 그 부대가 바로 절강성 부대다.
 
절강성 부대는 명나라의 전설적인 명장 척계광(戚繼光·1528∼1588)이 창안한 절강 병법으로 단련된 군대였다. 그러나 막상 조선에 도착한 절강군을 본 조선 사람들은 기가 막혀 어쩔 줄 몰랐다. 어떤 이는 당황하고 어떤 이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때라 결코 웃을 상황이 아니었지만 실제로 웃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너무나 황당한 장비를 무기라고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지창·대나무창으로 무장한 명나라 절강군
그 무기 중 하나가 당파라고 흔히 말하는 삼지창이다.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선군이나 포졸들이 늘 삼지창을 들고 출연한 덕에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심지어 병사들이 항상 삼지창만 들고 나와 “조선군의 무기는 삼지창 밖에 없었냐?”는 비판을 듣는 상황까지 됐지만, 삼지창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16세기 조선인들의 눈에 절강성 부대원들이 들고 온 삼지창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무기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삼지창은 조선 사람이 알고 있는 좋은 창의 개념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조선의 전술에서는 늘 기병이 주력을 형성했다. 기병이 쓰는 창은 서양의 랜스(lance)처럼 길고 예리하고 뾰쪽해야 했다. 기병이 말을 타고 적을 찔렀을 때 창은 확실하게 적을 관통해야 했다. 만약 빗나가면 차라리 부러져 버려야 했다. 창이 둔해서 찌르는 과정에서 저항이 걸리면 말을 탄 기사는 반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에서 나가 떨어져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길고 뾰쪽하지 않다면 극()이라고 해서 창과 갈고리를 결합한 형태를 선호했다. 갈고리 창은 기병을 걸어서 말에서 떨어트리는 데 매우 유용했다. 수호지에서 호연작의 연환마(중장갑을 한 여러 말을 묶어서 탱크처럼 돌격시키는 전술)를 깨트리기 위해 등장하는 구겸창도 갈고리 창이다. 하지만 갈고리 창은 찌르고 베는 기능은 없으므로 창과 갈고리를 결합해서 극을 만들었다. 이 극은 백병전에서도 매우 쓸모가 많았으므로 기병과 보병이 모두 사용했다.
 
그런데 당파는 가지가 세 개나 달렸지만 갈고리 기능도 없고, 예리하게 찌를 수도 없다. 오히려 포크 형태라 공격당한 병사가 창이나 칼을 삼지창의 창날 사이에 끼워 넣어서 막기가 더 쉽다. 행여나 기병이 썼다가는 적을 찌르기는커녕 무언가에 걸려 기병이 나가 떨어지기 딱 좋은 창이었다. 창이란 누가 먼저 빠르게 찌르냐의 싸움인데, 적이 막기 편하게 만든 창이라니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당파의 어이없음도 낭선()의 황당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낭선이란 가지가 주렁주렁 달린 대나무였다. 인공으로 만든 것은 나무 몸통에 쇠로 사슴뿔 형태의 가지를 만들어 달았다. 굳이 규격을 말하자면 길이는 4.5m(15자) 정도로, 가지가 9∼11층 정도 주렁주렁 달린 게 표준형이었다. 이미 조총까지 전장에 등장한 마당에 죽창도 아니고 가지가 그대로 달린 생짜 대나무라니. 정글지대에 사는 야만족도 아니고 저걸 문명국 군대가 사용하는 무기라고 할 수나 있는 것일까?
 
이 어처구니없는 무기를 창안한 사람이 바로 척계광이다. 16세기에 중국은 왜구에 시달렸다. 특히 공격을 많이 받은 지역이 무역과 산업의 중심지인 절강성이었다. 중국의 동남해안지역인 이곳은 물산과 산업이 풍부하고, 중국 최대의 도자기 생산 지대였다. 공업지대가 발달해서 왜구가 약탈하는 수준과 방법도 차원이 달랐다. 해적은 보통 창고를 털고, 사람을 납치하는 게 정상이지만, 절강에 침입한 왜구는 비단 생산 단지를 점거하고 주저앉아 주민들을 모아 비단을 짜게 해서 그 생산품을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위력적인 일본도와 사쓰마 검법으로 명나라를 농락한 왜구
16세기 명나라는 왜구의 출몰과 이에 따른 약탈로 골머리를 썩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역시 일본도였다. 도는 중국에도 있지만 보통 짧고 한 손 무기였다. 일본은 도를 양손 무기로 개선해서 사람을 한번에 동강낼 정도로 강력한 파워를 지닌 무기로 바꾸었다. 게다가 독특한 제련법으로 일본도는 중국군이 지닌 그 어떤 무기도 베어버릴 정도로 강하고 예리했다. 중국군의 전통적인 보병전술은 방패와 창을 들고 적을 압박하는 밀집대형이었다. 하지만 긴 일본도를 휘두르는 왜구는 한 명이 18척(약 5.5m)의 공간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일류 무사는 이 밀집대형의 가운데로 뛰어들어 창과 방패와 몸통을 한번에 갈랐다. 그렇게 되면 밀집대형으로 있는 병사들은 여러 명이 한번에 쓰러졌다.
 
왜구 중에서도 사쓰마 번(현재의 규슈 가고시마 지역)은 독특한 검법으로 명성을 날렸다. 이들은 일본도를 높이 들었다가 기합과 함께 단숨에 내려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일본도를 들었다 내리치는 동작이 너무 커서 단조롭고 위험해 보이지만, 한칼로 방어하는 창과 칼을 부러뜨리고 사람을 동강내면서도 정작 칼을 휘두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번쩍이는 검만 보였다고 할 정도로 파워와 스피드를 키웠기 때문에 집단전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명나라 장수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장기는 집단전인데 집단 전술은 일본도 앞에서 대량살상의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무술 고수를 동원해 일대일 전투를 유도하면, 오히려 일본군은 사쓰마 검법 같은 집단전술과 풍부한 전투 경험으로 고수를 유린했다. 일대일 전투 능력, 전술 운영능력, 전투 경험 모든 부분에서 왜구가 명군을 압도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약점은 왜구는 거의 직업적인 전사라는 사실이었다. 반면 명나라 병사들은 대개 징집한 농민병이었다. 무술과 전술 운영능력에서 커다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답이 나오지 않았다. 병력이라는 중국의 장점을 살리려면 더 많은 양(병력)을 투입해서 압도해야 할까? 질을 개선해서 새로운 고차원의 무사를 투입해야 할까? 명나라는 실제 질적 개선을 위해 소림사를 위시한 전국의 무림고수를 불러들여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부대를 만들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대응은 타성에 젖은 바보들의 대응이다. 천재는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면 방법론에 대한 원론적 분석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양이든 질이든 그 방법이 유효하다는 것은 그 방법이 효율성을 담보해 준다는 의미다. 이전의 전쟁에서 중국은 우월한 인구, 발달된 병학 및 진법을 이용해 주변 민족을 상대했다. 병력의 우위가 효율성을 지녔던 상황은 양쪽 군대가 거의 서로 같은 형태의 병사와 전술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양쪽 전술의 효율성이 같다면 병력의 우위는 효율성의 양적 증대를 가져온다.
 
그러나 일본도 앞에서는 같은 형태의 병사를 모아놓은 벌떼형 집단이 오히려 약점이 됐다. 병력의 우위를 장점으로 만들어 준 체제의 효율성, 인구가 주는 장점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국이 지닌 근원적인 잠재력, 즉 병력의 우위에 효율성을 다시 부여하기 위해서는 병사 집단이 효율성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와 방법을 창안해야 한다.
 
척계광의 원앙진법
척계광은 바로 이 부분에서 병력 편제의 최하부 단위까지 동종집단이 아닌 분업화된 집단으로 편성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지금 보면 아주 간단한 발상 같지만 그렇지 않다. 유사 이래 16세기 이전까지 중국군이 경험한 전투에서 이런 식의 분업형 집단은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분업 또는 협업형 구조는 기병대와 궁수대, 보병대와 같은 보다 큰 단위로 사용할 때만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척계광은 날카로운 분석력으로 이 관습의 늪에서 벗어났다.
 
척계광의 전법은 원앙(鴛鴦)진법이라고 명명됐다. 한 팀은 12명으로 구성됐는데, 1명은 대장, 한명은 취사병이었다. 따라서 실제 진을 구성하는 병사는 10명이다. 척계광은 접전상황과 왜구의 검법을 연구해서 10명의 임무와 기능을 아주 세밀하게 재구성했다. 10명 중 1명은 오각형의 큰 방패, 1명은 둥근 등나무 방패를 휴대하고, 2명은 낭선을 휴대했다. 뒤의 4명은 창을 들고, 뒤의 2명은 당파를 들었다. 당파는 창대에 화통을 달아 비록 1발이지만 신기전도 발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충돌에서 방패와 낭선이 일본도의 공격을 저지한다. 일본군은 방패를 제거하고 쓰러트리는 법은 알았지만 낭선까지 가세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낭선은 거의 10층의 가지로 구성돼 있고 커버 범위가 넓어서 빠르고 궤적이 잘 보이지 않는 일본도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칼을 든 상대와 싸울 때 의자를 들어서 막는 것과 같은 이치다. 척계광은 지금의 버마 지역에서 정글의 원주민과 싸우다가 이 낭선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일선에서 왜구의 공격을 저지하고 묶어 두면 이 틈을 노려 이선의 창병이 왜구를 공격한다. 4개의 창병이 시간차를 두고 페인트 모션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공격했다. 한번의 공격에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일본군도 재빨리 2차 공격을 시도할 수 있으므로 이때도 당파가 같이 붙어서 수비를 담당한다. 당파도 일본도를 막는 데 효과적이다. 방패와 낭선보다는 방호력이 떨어지겠지만 1차 공격이 가장 강력할 것이라는 전제로 보면 공격은 전혀 불가능한 낭선과 달리 공격능력도 보유했다는 게 장점이다. 당파가 공격능력을 보유한 또 하나의 이유는 원앙진 역시 1차 공격이 실패했을 때 2차 공격을 감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외에도 원앙진은 매우 정교한 전술을 지니고 있다. 방패가 큰 방패와 작은 방패로 나뉜 이유는 큰 방패를 든 사람은 분대의 선두에서 칼을 들고 지휘하는 임무를 맡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낭선과의 협력전술을 펴야 하는 방패(등패)는 둥글고 작은 방패로 시야를 확보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들은 공격을 할 수 없으므로 표창을 지급했다. 방패수는 왜구가 달려들면 표창을 던져 타이밍을 끊고 방어에 임한다. 왜구가 혹 자신을 지나쳐 뒤의 창수와 붙을 때도 표창은 유용하다. 방패와 낭선, 창병을 복수로 구성했기 때문에 왜구의 병력과 위치에 따라 팀을 둘로 나눠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분업형·협업형 진법으로 왜구 소탕
원앙진은 명군의 집단에 그야말로 새로운 효율성을 부여했다. 무엇보다도 분업화를 통해 최대의 약점, 즉 징집병이 지니는 훈련과 전투 능력의 부족을 극복할 수 있었다. 원앙진을 기반으로 한 척계광 군대는 5년 여간 계속 된 왜구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왜구 소탕의 첨병 역할을 했다.
 
물론 이 원앙진에 대해 너무 복잡하고, 10명이 왜구 1, 2명을 상대하는 구조라 비효율적이며 낭비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분명히 그런 문제가 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앙진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일본도의 스피드와 파워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병사들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왜구와 백병전을 벌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자 그 외 여러 가지 작전과 과거의 전법들도 힘을 받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원앙진법이 지닌 최대의 장점이자 척계광이 원앙진을 만든 진짜 목적이었다.
 
척계광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과거의 핵심 역량을 가능케 한 여러 상황적 여건들을 총체적으로 분석해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기존의 방법론을 답습하는 대신 애초에 그 방법이 효율적일 수 있었던 원리를 파고들어 변화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해결책을 만들었다. 효율성을 높이고 병력 증강에 도움만 된다면 야만족으로부터 신무기의 아이디어를 얻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 정도로 개방적 자세도 취했다. 과거의 성공에 얽매이지 않고 핵심을 꿰뚫어 혁신을 추구하는 자세, 문화적 개방성이 척계광을 전설적인 명장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촌구석 농민들로 구성된 절강성 부대는 전문 무사들로 구성된 왜구에 비하면 10대 1의 비율도 되지 않는 오합지졸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까지의 전술 패러다임과 궤를 달리 하는 척계광의 혁신적 진법과 신무기를 통해 정교하고 영리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왜구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통해 그들은 결국 왜구 소탕에 혁혁한 공을 세운 무적 부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임용한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8호 The New Chapter, Web 3.0 2022년 07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