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스토커다.”
10여 년 전 국내 이동통신사의 신규서비스 담당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한 벤처기업가를 피해 다니기 바빴다. 아침 출근길 집 앞에서, 퇴근길 회사 앞에서, 심지어 저녁약속 후 귀갓길에 들른 포장마차에서도 이 벤처기업가가 출몰했다. 그 주인공은 모바일 벤처 다날의 박성찬 대표였다.
박 대표는 휴대전화로 온라인 콘텐츠 사용료를 결제하는 서비스를 하자며 이동통신사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건설업계 출신으로 정보기술(IT) 전문가도 아닌 박 대표의 주장을 처음부터 신뢰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결제사업은 일종의 금융업이었다. 아무런 기반도 없는 소형 신생기업이 추진할 만한 아이디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치열한 설득 끝에 2000년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 결제 서비스가 이뤄졌다. 이후 휴대전화 결제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현재 한국에서만 휴대전화 결제 규모가 연 2조 원 규모로 불어났고, 다날은 이 시장의 약 4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다날의 연간 매출액도 800억 원 대로 커졌다(표1, 2 참조). 특히 다날은 대만,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도 휴대전화 결제 서비스를 본격화하고 있다. 다날은 휴대전화 결제 외에도 온라인 및 모바일 콘텐츠, 게임 시장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다. 극심한 환경 변화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원이 풍족하지도 않은 벤처 기업 다날이 지속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기 위해 박성찬 다날 대표 및 류긍선 개발본부 이사와의 인터뷰, 광범위한 문헌 조사를 실시했다. 우선 다날의 성장 스토리를 살펴본다.
창업과 휴대전화 결제 아이디어 제시
다날 박성찬 대표는 원래 주택을 짓는 소형 건설업체를 운영했다. 분양도 비교적 잘 됐기 때문에 회사는 안정적으로 운영됐다. e메일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던 박 대표는 우연히 인터넷을 접하고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정보기술(IT)이 미래를 바꿀 것이란 강한 확신을 가진 그는 이 분야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997년 새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을 고민하다 ‘미래(未來)’를 뜻하는 순우리말을 찾아보았다. 미래, 내일 등 모두 한자 일색이었다. 미래를 의미하는 순우리말로는 ‘다음날’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읽기 쉽게 ‘음’자를 빼고 ‘다날’이란 이름을 지었다.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에 대비하는 사업을 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처음 사업 아이디어를 고민하다 무선호출기(삐삐)에 주목했다. 초기 무선호출기는 전화번호만 전송했다. 당연히 문자를 전송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반 전화기의 12개 번호 버튼을 한글 모양처럼 누르면 해당 글자가 전송되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일부 업체에 솔루션을 납품했는데, 의외로 무선호출기 전성시대가 빨리 끝나버려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후 휴대전화가 시장을 장악하자 과거의 아이디어는 자연스레 휴대전화 한글 입력 시스템 개발로 이어졌다. 음성통화 외에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고 싶은 고객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세종얼’이란 입력 시스템을 개발했고, 당시 ‘걸리버’ 브랜드를 갖고 있던 현대전자에 납품했다. 하지만 현대전자 휴대전화 사업부가 인수합병(M&A) 당하면서 세종얼도 시장에서 사라졌다.
다날은 휴대전화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이 과정에서 1990년대 후반 닷컴 거품이 꺼지면서 고전하던 온라인 업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익모델을 제대로 갖춘 온라인 회사가 드물기도 했지만, 그나마 팔릴 만한 콘텐츠를 개발했다 해도 고객에게 돈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됐던 온라인 결제 수단은 신용카드였다. 하지만 보안이 허술해서 입력된 정보가 불법으로 유출되기도 해 소비자들이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또 몇 백 원짜리 콘텐츠 결제에 신용카드를 사용하기도 부담스러웠다. 선불 형태의 e코인 서비스가 있었지만 수수료가 30∼40%에 달해 닷컴 업체들은 사용을 꺼렸다. 물론 소비자 입장에서도 e코인을 매번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인터넷 콘텐츠는 구입 의사를 가졌을 때 곧바로 결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구매 의향이 쉽게 바뀔 수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냉장고나 TV 같은 제품은 꽤 오랜 기간 제품의 기능과 가격을 따져보고 구매한다. 하지만 게임 아이템이나 아바타, 도토리 같은 인터넷 콘텐츠는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재화가 아닌 저관여 제품이기 때문에 충동구매가 자주 일어난다. 생각날 때 즉시 구매하지 못하면 이후 같은 콘텐츠를 살 확률이 뚝 떨어진다. 따라서 콘텐츠 업체 입장에서는 편리한 결제 시스템이 기업의 수익성 및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마침 다날은 휴대전화로 부가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모델을 찾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휴대전화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휴대전화는 24시간 고객들이 항상 가까이 두고 사용하기 때문에 온라인 콘텐츠 결제 수단으로 매우 유용하다. 또 매달 체계적으로 과금이 이뤄지기 때문에 거래의 안정성도 높다. 다만, 누군가가 온라인 업체와 콘텐츠 사용자, 이동통신사를 연결시켜주는 시스템을 구축해줘야 한다. 다날은 사업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제안서를 만들어 이동통신사 관계자를 찾아다녔다.
강한 의지로 ‘큰 그림’ 실행
휴대전화로 결제를 하자는 아이디어 자체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작은 벤처기업이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큰 그림’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휴대전화 결제가 이뤄지려면 반드시 거대 이동통신사들이 움직여야 했다. 또 고객의 돈을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정산해주는 일종의 금융업을 하겠다는 것이어서 정부 동의도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 이동통신사들은 신규 사업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었다. 다날이 사업을 제안했을 당시 휴대전화 업체들은 가입자 늘리기가 지상 과제였다. 급성장하는 시장에서 가입자 유치는 성장 잠재력 확충을 위한 최고의 대안이었다. 그런데 휴대전화 결제는 후불로 운영됐다. 당시 다날은 1인당 월 2만원 한도에서 휴대전화 결제를 하자는 아이디어를 이동통신사에 제시했다. 그러나 이동통신사들은 요금 부담이 커져 통신사를 바꾸는 고객이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상 과제였던 가입자 유치에 부담을 주는 서비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