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적인 함박눈이 한반도를 강타하던 2009년 12월 27일, 역사적인 소식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한국이 약 200억 달러(22조 원: 운영 관련 분야 제외)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공사를 수주하여 원자력 사업 30년 만에 한국형 원전을 수출하게 된 것이다. 한국전력, 두산중공업, 현대건설, 삼성물산 등과 일부 해외 업체로 구성된 한국전력 컨소시엄은 우리에게 원전 기술을 가르쳤던 일본, 미국, 프랑스 업체를 제치고, 계약을 따냈다. UAE와 전통적인 동맹 국가이며 원자력 기술 선진국인 프랑스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군사적 문화적 인센티브를 제안하며 마지막까지 한국과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경합 초반 프랑스의 손쉬운 승리를 예측하는 견해도 많았다.
하지만 UAE는 막판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의 원전 기술 및 안정적 운영과 이명박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 정부의 강한 추진력을 높이 산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성과는 1970, 1980년대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 민관이 똘똘 뭉쳐 세계 시장을 개척한 한국 수출 외교의 ‘21세기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원전 수출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부의 재정 지출이 확대되면서 인프라 투자가 유망 시장으로 떠올랐으며, 이 같은 공공 분야 시장 개척을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의 유기적인 협력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위기 이후의 안정을 되찾고 있는 세계 경제에서 정부 역할과 민관 협업 패러다임의 새로운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뉴 노멀’ 시대의 정부는 ‘플레잉 코치’
아서디리틀(ADL)이 2009년에 실시한 글로벌 설문 조사에 의하면, 세계의 경영자들은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장 및 비즈니스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비즈니스에 대한 정부의 역할이 지속적으로 확장될 것으로 예상했다.
70% 이상의 응답자는 정부가 비즈니스에 대한 정의와 규제를 정립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주요 산업의 성장을 주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정부는 게임의 심판 역할에서 벗어나 코치, 선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플레잉 코치(Playing Coach)’로 시장 경제를 리드해나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기업 경영자는 정부 규제에 대한 수동적인 대응뿐만 아니라 정부의 차기 정책을 예측하고 적극적인 협업 관계를 형성하지 않으면 시장 경쟁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정부의 개입주의는 갑작스레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장기적인 트렌드의 연속선 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결과였다. 먼저, 기업 및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증폭되고 있었다. 구 소련이 몰락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세계화의 흐름과 시장의 글로벌화가 본격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후 20년간 미국 및 서구 자본주의 국가는 ‘황금 구속복 (the golden straigh-tjacket 1
’이 성장을 추구하는 국가가 입어야 할 글로벌 유니폼으로 믿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엔론 사태와 같은 금융 사건들이 터지면서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시아 개도국은 외환위기의 시련을 겪었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유시장주의에 의한 개도국의 삶의 질(Quality of Life)에 대한 개선이라는 성과도 거뒀다. 하지만 빈부 격차는 크게 완화되지 않았고, 과도한 약육강식 논리 속에서 진정한 기업가 정신 및 활동 그리고 창의성이 퇴색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여기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터지면서 시장에 대한 신뢰가 급락하고 정부 개입이 공식화된 것이다. 2008년 말 실시된 에델만 신뢰 지표(Edelman Trust Barometer)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38%만이 기업의 도덕성을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전년 대비 20% 포인트 하락한 수치다.
보호무역주의의 그늘
2009년 2월, 미국 의회는 7870억 달러(약 900조 원)에 해당하는 경기 부양책을 내놓았다. 이는 부도 직전에 몰린 미국 은행, 보험사, 자동차 회사에 대한 구제 금융을 지원하고 세제 혜택과 각종 보조금을 주는 오바마 행정부의 단기 경제 회생 전략이었다. 미국 내에는 부양책의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많았지만, 국제 사회에서는 이 부양책의 의무 조항인 미국산 철강 제품 활용 조항 등이 보호무역주의로 흐를 수 있다며 우려했다.
2009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World Knowledge Forum)에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 확대 속에서 시장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민간 섹터의 혁신과 추진 방안에 대해 많은 세션이 할애된 것을 보면, 국제 사회에서 정부의 개입주의에 대한 우려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정부의 지나친 간섭 및 관여가 자유 시장 및 자유 무역에 악영향을 미쳐 1980년대 이후 확보된 세계화, 글로벌 경제의 성장과 혁신을 되돌려놓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 개입이 이전까지 제기된 시장의 실패를 해결하고 공공의 필요성을 충족하되, 민간 분야의 혁신과 성장을 옥죄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많다. 정부 개입이 과도한 규제로 이어져 시장을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반 국민이 영위하는 생활권과 기업의 비즈니스 영역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기업 활동과 공공 정책과의 연관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노후화에 따른 연금 및 복지에 대한 관심, 기후 변화에 따른 환경과 에너지에 대한 중요성, 주택 시장에 대한 투기성 기대심리, 통신 및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일상화 등 국민의 기본적인 권한 및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기업의 역할도 어느 때보다 커졌다.
결국 바람직한 정부의 역할 강화는 보호무역주의 등 시장의 혁신과 창조를 막는 산업 시대의 규제가 아니라 시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각종 인센티브 제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며, 이 같은 변화에 대한 요구가 강해질 것이다.
국경을 뛰어넘는 국제 공조 강화
글로벌화로 기업, 자본에 대한 정부 규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해외 생산 아웃소싱이 대표적이다. 자국 내 노동자의 건강 및 안전에 대한 규제가 기업의 해외 현지 업체 운영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 이동도 마찬가지다. 자유 무역이 확대되면서 기업과 자본은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으며, 자본 규제나 세금이 낮은 곳으로 쏠린다. 어느 한 곳을 규제하더라도 다른 쪽이 튀어나오는 ‘풍선 효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된 세계 경제의 글로벌화와 일국 규제의 한계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파괴력을 키웠다. 국제 사회가 금융 시장과 세계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공조 체제를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 대처를 위해 G20 회의가 열렸듯이 자본 시장과 세계 경제 안정을 위한 각국 정부 간 공조가 더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새롭지만 익숙한 ‘뉴 노멀 시대의 정부’
‘뉴 노멀’ 시대에 각국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조정 및 개입은 시장이 안정화되고 경제위기가 회복된 이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한 가지 안심되는 것은 이러한 정책 기조가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며,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개발 도상국의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지극히 ‘노멀’하게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의 아시아 국가의 빠른 경제 성장과 10여 년 전 외환위기 시련을 조기에 탈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정부의 개입 정책 기조였다. 한국은 경제 개발 초기 값싼 의류나 섬유 등의 수출품으로 산업 고도화에 필요한 고부가가치 기술 및 장비를 확보했고, 정부는 이런 방식으로 구축한 고부가가치 산업을 관세와 보조금으로 보호하고 육성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안으로 산업이 신규 기술을 받아들이고 경쟁력 있는 제품을 역수출할 수 있는 ‘시간’과 ‘재원’을 벌어주었던 것이다.
물론 앞으로 관세나 시장 진입 규제 등 보호무역 장벽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과거 경험에서 체득한 민관의 긴밀한 협력 체계는 ‘뉴 노멀’ 시대의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UAE 원전 수주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와 기업도 ‘한국형 모델이 21세기형 성장 모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정부와 기업의 역할과 책임을 다시 정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