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신(神)’, ‘위기 극복의 신(神)’. 마쓰시타 전기, 즉 파나소닉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별칭이다. 23살에 창업하여 70여 년 동안 마쓰시타를 이끈 고노스케. 그에게는 수많은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는 그만의 독특한 경영 철학이 있었다.
회사는 공동운명체, 해고는 없다
마쓰시타전기가 직면한 최초의 위기는 1929년 세계 대공황 속에서 찾아왔다. 매출은 반으로 뚝 떨어졌고, 창고에는 재고품이 넘쳐났다. 당시 와병 중이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병상에서 간부들의 보고를 받았다. 골자는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종업원을 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고노스케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장래에 마쓰시타를 더욱 키우려고 한다. 때문에 한 사람도 해고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러나 창업자가 아무리 큰 뜻을 품었다 한들 구체적인 방안이 없다면 무용지물일 뿐이다. 고노스케는 직접 그 대안까지 제시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생산을 반으로 줄여라. 공장은 반일(半日) 근무만 하라. 월급을 전액 지급하는 대신 휴일에도 전 사원이 재고품을 팔아라.”
고노스케의 결단으로 마쓰시타는 조직에 드리운 암운을 순식간에 걷어낼 수 있었다. 생산량은 반으로 줄고 영업력은 배가되었으니 재고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사기가 충만한 종업원들은 열심히 영업에 매달렸다. 그 결과 2개월 뒤에는 재고를 일소하고 전일 생산 체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불황기에 잉여 인력을 영업으로 돌리는 관행이 있다. 바로 마쓰시타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책임을 위한 일선 복귀
1964년 도쿄올림픽 특수가 끝난 뒤 마쓰시타에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마쓰시타가 직면한 문제는 과잉 설비, 수요 정체, 판매 부진이었다. 게다가 밀어내기식 영업으로 인해 계열 판매회사와 대리점은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궁여지책으로 대량의 어음을 발행해야만 했다.
당시 고노스케는 회장의 직함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휴양 중이었다. 그러나 회사의 심각한 사태를 관망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판매점 및 대리점 경영자들을 아타미(熱海) 호텔에 불러 모았다. 장장 13시간 동안 단상에 서서 그들의 불만을 경청했으며, 사흘에 걸쳐 열띤 토론을 벌였다.
고노스케는 다시 결단을 내렸다. 회사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창업자인 자신이 직접 나서서 책임을 지기로 한 것이다. 고노스케 회장은 곧 영업본부장 대행으로 일선에 복귀했다. 오직 책임과 위험만이 기다리고 있는 복귀였다.
병폐의 싹, 돈 들여서라도 잘라내라
그는 문제의 핵심이 대리점과 소매점 사이의 어음 결제에 있다고 진단을 내렸다. 대리점은 실적 올리기에만 급급했고, 소매점은 당장 발등의 불을 끄기에만 급급했던 탓이다.
고노스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명 ‘신 월부 판매제도’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즉 판매점 및 대리점이 소매점에 밀어낸 제품을 회사가 전량 회수하고, 월부 판매회사를 설립하여 이 제품들을 직접 관리하는 것이다. 또 어음 결제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대금을 현금으로 지불하는 소매점에는 판매 장려금을 지급했다.
당시 고노스케가 각오한 손실은 조정 기간 2년 동안 무려 300억 엔이었다. 밀어내기식 영업과 어음결제 관행처럼 회사를 좀먹는 근본적인 병폐는 큰 금액을 들여서라도 과감히 뜯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혹독한 경비 절감도 진행했다. 직원들에게 전자계산기 대신 주판을 쓰라고 할 정도로 철저하고 지독했다. 비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스도 과감히 줄였다. 그는 하루 70개 올라오는 보고서를 보고 ‘오늘 보고하지 않으면 내일 회사가 망하는 보고서’ 외에는 올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일일 보고서가 당장 4개로 줄었다.
이 정책은 어떤 효과를 거두었을까. 월부 판매회사의 설립비용은 7억 엔에 그쳤다. 또 경비 절감은 300억 엔 손실이 아니라 300억 엔 이익을 가져왔다. 바로 이듬해 마쓰시타는 최고의 이익을 기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