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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려라, 승리가 보인다

윤동일 | 25호 (2009년 1월 Issue 2)
인류 역사에서 문자가 없던 시기에 회화는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가장 오래된 회화인 알타미라, 라스코 동굴 벽화는 문자가 없던 시절의 인류 생활상을 전해 주는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다. 고대 중국 갑골문에서 발견된 흑점과 백점은 일반적으로 길흉화복을 점치는 복점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의 사냥 방식을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노출된 백점은 사냥감을 미리 정해 놓은 함정으로 몰아가는 역할을 하고, 유리한 위치에 숨어 있는(매복한) 흑점은 함정에 몰린 목표물에게 일격을 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해석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굴 벽화나 갑골 문자는 고대인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메시지(이를테면 오늘날 전략이나 전술)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쟁에서 그림은 의사소통 수단
전쟁과 전투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는 무수히 많다. 지형과 기상의 변화, 적의 위치와 배치, 아군 부대의 상황, 지역 주민의 성향, 보호해야 할 시설물 등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이런 환경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적진에 스파이를 보내거나 항공사진, 인공위성 등 첨단 기술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렇게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입수한 첩보나 정보는 통상 그림을 활용해 한눈에 보기 좋게 표현한다. 특히 이런 그림이 얼마나 정확하고 유용한지에 따라 작전 계획의 치밀도가 결정되고, 나아가 전투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실제로 전 세계 모든 군대는 간부들에게 지형 정찰 후 지도를 활용해 적의 행동을 예상하고, 나의 행동을 구상하며, 우발계획(Plan-B, 항상 우발계획을 준비한 비스마르크로부터 유래)을 준비하도록 훈련을 시킨다. 이 과정에서 군사 지도, 실제 지형을 본떠 만든 사판이라는 보조물, 입체적인 영상지도 등이 활용된다. 최근에는 인공위성을 이용해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수백km 떨어진 사령부에서 실제 투입된 전투병과 똑같은 화면(공통작전 상황도)을 보면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역사적으로도 그림은 전쟁이나 전투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존재였다. 한나라의 조충국(趙充國)은 선제로부터 서북 변방 유목민족인 강족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어느 정도 규모의 토벌군을 보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는 직접 현장을 방문한 뒤 적의 배치와 자신의 계획을 상세히 그림으로 그려 보고했다. 그는 이 그림을 토대로 무력보다 외교적 수단으로 대처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안을 관철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다.
 
이 밖에도 작은 고지를 위한 전투건 세계를 상대로 한 전쟁이건 그림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군대는 장교나 간부들에게 그림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림은 군에서만 그리는 게 아니다.
군에서 한 장의 그림은 현재와 미래의 상황은 물론 전략과 임무, 조직원간 협조 사항 등 무수히 많은 것을 설명한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략과 전술부터 실행, 평가에 이르는 전 단계에서 그림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숫자와 전문 용어로 가득 찬 수백 쪽짜리 문서보다 그림 한 장이 의사결정에 더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1984년에 씨티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존 리드는 늘 임원들에게 ‘큰 그림’을 그리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업부 리더들에게 단 몇 장의 슬라이드(no more than a few slides)로 전략을 표현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실천하지 못한 임원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또 잭 웰치 전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도 100개가 넘는 계열사를 단 13개의 사업부로 구조조정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수백 쪽에 이르는 기획보고서나 다양한 기법을 동원한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을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한 레스토랑에서 아내와 식사하는 가운데 생각난 아이디어를 냅킨 위에 동그라미 3개로 표현했다. 이 간단한 그림은 거대한 조직 변화의 출발점이었다.

비록 한국과 독일에서는 참패했지만 EDLP(Every Day Low Price)를 외치며 월마트를 포천 500대 기업의 정상에 서게 한 샘 월턴은 직접 경비행기(1957년에 1850달러를 주고 산 소형 항공기 ‘ERCOUP’)를 몰며 매장과 물류창고 위치를 선정했다. 하늘에서 지형을 한눈에 바라보고 입지를 선정한 월턴은 유통업의 신기원을 달성했다.
 
일본에서 가장 열악한 홋카이도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물 수도 다른 곳의 5분의 1에 불과한 아사히야마 동물원은 10여 년 전만 해도 연 방문객이 26만 명에 불과한 꼴찌 기업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동물원은 일본 최고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방문객도 300만여 명으로 급증했다. 이 변화를 이끈 주역은 유도 선수 출신인 고스케 마사오 현 동물원장이다. 그는 내부 학습조직의 아이디어를 적극 실천에 옮겨 동물원의 변화와 혁신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 펭귄을 바깥에 풀어놓아 사육사와 관람객이 함께 걸어 다니는 ‘펭귄과의 산책’ 같은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이다.

이런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낸 학습조직 구성원들은 방대한 기획 문서 작성에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독특한 아이디어를 14장의 그림으로 그려 이를 토대로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또 예산 지원을 위한 보고는 물론 동물원 홍보에도 이 그림을 활용해 성과를 높였다.
 
그림으로 사고하라
대부분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지휘하는 존 웨인(빗발치는 포탄 속에 파이프를 입에 물고 ‘이오지마 해변’을 기어 오르는 미국 해병대의 선두에 서서 당당하게 부하들을 독려하던 장면. 이를 존 웨인 신드롬이라 한다)을 전형적인 전쟁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전투는 영화와 완전히 다르다. 과거 전쟁에서도 늘 상대편의 우두머리는 최고 표적이었다. 고도의 정밀화된 오늘날 전쟁에서도 상대편의 의사결정 체계를 무력화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에 지휘관은 쉽게 적들의 목표물이 된다.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처럼 지휘관이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장수가 현장에서 전투를 지휘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목숨 보존과 같은 일차원적 이유때문이 아니다. 조직의 의사결정 체계를 유지함으로써 최소 희생으로 전투와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전쟁에서 거대 조직의 리더는 반드시 안전하고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전투 부대는 규모에 상관없이 최고 책임자의 위치를 예하 부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정한다. 또 이곳에 모든 정보를 종합하고 분석하며 대안을 세우는 소위 상황실(war room)을 운영한다.
 
기업에서도 경영자는 전체를 조망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경영자는 현장의 정보를 집약 처리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한 곳에 ‘war room’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한 장의 백지 위에 모든 상황을 입체적으로 그려 넣고 상황 판단 및 전략 전술을 개발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 군에서는 ‘조건 반사적’ 수준으로 그림 활용 기법과 노하우를 배우라고 요구하고 있다. 전쟁에서 그림을 통해 결정적인 전투를 구상하는 과정이 기업 경영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리고자 하는 범위를 한정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너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 나온다. 이로 인해 오히려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신제품 개발 때 블루오션 전략을 활용하고 있는 삼성전자 VIP(Value Innovation Program)센터는 최종 의사결정 단계에서 전략 캔버스로 불리는 단 한 장의 그림을 문서 맨 위에 붙인다. 전략 캔버스는 신제품의 특징과 장점을 매우 단순한 그래프 한 장으로 볼 수 있도록 표현한 도구다. 수많은 내용 가운데에서 핵심을 간추리는 것 자체가 대단히 창조적인 작업이다. 이는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둘째, 의사결정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인 외부 환경 및 내부 역량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창의력과 혁신만 강조하다가 자칫 내부나 외부 상황과 무관한 상상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위기와 기회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통찰을 지녀야 한다.
 
셋째, 가능한 시나리오 또는 비교 대상을 한눈에 비교하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이다. 경영도 전쟁과 마찬가지로 불확실성과 맞서 싸워야 한다. 심사숙고 끝에 도출한 최초 계획의 대다수는 변경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능한 시나리오를 세우고, 이를 비교할 수 있는 우발 계획을 수립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넷째, 현재 상황을 나타내는 그림 외에 미래를 내다보는 그림 한 장이 더 필요하다. 현재의 결전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 남아 승자가 되려면 항상 미래를 조망하고 있어야 한다.
 
다섯째,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 경쟁 상대도 우리만큼 똑똑하다. 지금은 고객의 성향과 외부 환경도 극심하게 변하고 있다. 결코 단 한 번의 그림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최초 계획을 꾸준히 수정 보완해야 하며, 우발 계획도 항상 재점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많은 정보를 한 장의 그림으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한 간단한 도식과 용어를 미리 정해두는 게 좋다. 필요하면 직원 교육도 해야 한다.
 
기업 경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단 한 장의 그림으로 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지금처럼 경영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바라보고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춰야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특히 그림을 토대로 의사결정을 할 경우 전체 윤곽을 먼저 파악(우뇌)한 뒤 각 부분과의 관계를 분석(좌뇌)하는 우리 뇌 구조의 특성에 잘 맞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림으로 사고하는 역량은 군대 못지 않게 기업에서 더 중요하다. 복잡하고 두터운 기획 보고서를 과감히 버리고 단 몇 장의 그림으로 현재와 미래의 결정적인 전투를 구상해 보자. 그리고 주기적으로 이를 수정하고 보완해 나가는 습관을 갖자.
 
필자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인사관리담당, 기계화부대 대대장, 전쟁사 및 전술학 교관 등을 거쳐 현재 국방부 인사복지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헬싱키경제경영대학원 MBA 과정을 마쳤으며, 이를 계기로 ‘전쟁과 경영에 대한 포괄적 관련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기업체, 대학, 군부대의 요청으로 ‘전쟁에서 배우는 경영’ ‘전쟁 리더십’등의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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