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로 제조업, 에너지는 물론 금융 부문에서조차 미국의 지배력은 날로 약화되고 있다. 다만 이 와중에도 미국의 독창성과 창의성만큼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 이것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창의력보다는 끈질김으로 서구 국가들의 부러움을 받아온 중국 기업들이 더욱 혁신적이고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수 년간 기반을 구축해 오고 있다. 싱가포르 역시 마찬가지다. 핀란드는 내년 경영, 디자인, 공학 부문의 최고 대학들을 통합해 여러 학문을 두루 가르치는 ‘혁신 대학’을 만들 예정이다.
전미과학아카데미가 ‘밀려드는 폭풍을 넘어 부상하기’라는 제목으로 2007년에 발표한 600쪽 분량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미과학아카데미 및 전미공학아카데미 이사회는 ‘미국 과학 기술력의 약화가 미국 사회의 경제 상황을 악화시키고, 특히 고급 직업군에 대한 경쟁력을 잠식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요즘처럼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과학·기술·경영 부문의 진보적 생각, 즉 혁신 향방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통념적으로 산업계, 정부, 학계는 위험 부담과 단기 비용이 따르는 부문에 투자를 줄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 혁신을 위한 맥 연구소’의 폴 슈메이커 연구 이사는 어떤 기업에게는 경제 위기가 혁신의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 위기는 다면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출과 이익의 감소는 우선 비용을 삭감해야 한다는 인식을 형성할 것입니다. 이는 혁신에 바람직하지 않지만 환자가 피를 흘리고 있다면 일단 지혈부터 하는 것이 순리겠지요.”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신중한 것 또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많은 조직이 획기적인 ‘파괴적’ 혁신보다 ‘점진적’인 혁신에 너무 의존한다는 것. 혁신의 주기에서 이 둘은 ‘작은 혁신’과 ‘큰 혁신’으로 차별화되어 왔다. “비즈니스에서 커다란 수익은 패러다임과 조직을 뒤엎는 과감한 혁신에서 나온다”고 슈메이커는 강조한다.
파괴적 기업
기업에서 ‘파괴적 혁신’을 즐겨 쓴 것은 불과 10년 정도다. 그러나 이는 훨씬 오래 전에 태동한 개념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들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뒷받침하는지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적 혁신’이라는 표현을 차용했다. 이때 당시 그는 이미 이 개념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업가 또는 기업은 어떻게 하면 ‘파괴적’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투자자나 최고경영진에게 급진적인 생각들의 가치를 설파할 수 있을까.
알카텔루슨트의 벨 연구소 소장이자 성공한 기술 기업가인 김종훈 소장은 시장에 파괴적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분열적 혁신을 위한 길 열기’라는 제목의 최근 발표에서 여러 제안을 내놓았다.
김 소장은 파괴적 혁신이 매우 중요하다는 회사 전반의 인식이야말로 기업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한다. 이미 성공을 거두었거나 관료주의 기업 문화가 강한 회사에서는 이런 인식을 가지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때문에 기업은 연구개발(R&D)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김 소장은 “기술 분야에서 파괴적 혁신이 갖는 의미는 절대적이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단순히 몇몇 명석한 엔지니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유능한 경영진이 없다면 뛰어난 기술은 회사의 연혁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심한 경우 경쟁사가 그 기술을 사용할 것이다. 김 소장은 신기술을 개발했지만 결국 남에게 자신의 위치를 내 준 회사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고도 덧붙였다.
혁신가들이 쓰는 용어로 ‘다른 사람’이란 ‘재빨리 따라잡는 기업’을 말한다. 즉 자금력이 있고 명민한 경영진을 갖춘 기업은 그 기술의 창안자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 신기술을 맨 처음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유연하고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회사가 오래 살아남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질문이 하나 등장한다. 혁신을 촉진하기에 가장 좋은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일까. ‘와튼, 신기술 관리에 대하여’의 공동 저자이기도 한 슈메이커는 “다양한 의사 결정 수단은 기업이 혁신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도록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슈메이커에 따르면 혁신은 ‘소총’이 아니라 ‘엽총’을 쏘는 것과 같다. 혁신적 사업은 실패율이 높으므로 기업들은 모든 희망을 그에 걸기보다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 결과를 다양하게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