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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으로 다시 읽는 역사

조선 지배층의 무지가 기회를 날리다

최중경 | 361호 (2023년 0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19세기 후반 조선은 그레이트 게임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미양요, 거문도사건 등을 겪으며 미국, 영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그들의 힘을 이용해 청나라, 러시아, 일본을 견제해서 독립국 지위를 얻고 근대국가로 발전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조정의 무지함으로 이를 놓쳤다. 아관파천 또한 국제적인 역학관계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 따른 잘못된 선택이었다. 경쟁이 없어 ‘승자가 언제나 승자’인 국가와 기업은 결국 역량 부족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거센 바람 앞에 서 있는 작은 촛불이었다. 얼지 않는 항구를 얻기 위해 한반도로 내려오려는 의도가 명백했던 러시아에 맞서 서방세계의 리더,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 견제 정책, 일명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이 네덜란드를 유일한 창구로 하는 서구 학습 체계1 에서 벗어나 떠오르는 산업 대국 미국과 가나가와 화친조약을 맺고 산업기술을 배우며 정한론을 다듬고 있던 반면,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전한 청나라는 서방세계의 제국주의에 시달리며 스러져가는 병든 거인이었다. 신흥강국 미국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한반도에 영토 획득의 야망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조선은 이처럼 5개국의 치열한 각축전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조선에서 주일 청국공사관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은 개화 의식을 가진 조선 사대부들에게 외교 가이드북이자 국제관계 지침서 역할을 했지만 실제로는 없느니만 못한 의미 없는 종이 묶음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조선책략』은 기본적으로 러시아를 막기 위해 조선이 취해야 할 전략을 논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국제사회의 리더인 영국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조선 사대부가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긴장 관계, 즉 국제사회의 권력 구조와 영국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반면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산업기술을 배우면서도 일찍이 영국의 국제적 위상을 간파하고 1863년 영국 대학에 유학생을 파견2 하는 등 영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만주와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러시아를 밀어내고 동아시아의 맹주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을 다졌다.

그렇다면 조선은 일본처럼 영국, 미국과 가까워질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 1871년 신미양요는 1866년 대동강에서 발생한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 침몰 사건을 두고 미국이 조선에 책임을 묻는다는 목적보다는 조선을 개항해 교역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지만 조선 조정이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무력 충돌로 치달았다. 조선은 미국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만 크게 부각시켰고, 그나마 일방적이고 비참한 패전을 승전으로 둔갑시키는 바람에 조선을 엉뚱한 방향으로 표류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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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1885년 영국 해군이 여수 앞바다의 거문도를 강제로 점령한 거문도사건은 그야말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영국과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영국의 국제적 위상과 러시아 견제 정책에 대해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조선 조정은 2년간의 점령 기간 중 적극적인 교류를 시도하지 않는 실책을 저질렀다. 조선 조정은 거의 방관자처럼 행동하며 청나라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극히 소극적이고 종속적인 태도로 일관해 영국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떠나고 남은 건 영국 해군 장병과 거문도 백성들이 같이 찍은 사진, 그리고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뿐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19세기 후반의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인 역학 관계와 역사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도출하고자 한다.

1. 19세기 후반의 국제 역학 관계 개관

19세기 후반에 국제 질서를 이끄는 리더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카리브해에 걸쳐 광대한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전쟁과 보불전쟁을 거치며 유럽에서의 주도권을 확립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이 의미하듯이 영국은 전 세계적인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1)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그레이트 게임

뒤늦게 산업화 대열에 합류한 러시아가 식민지 획득과 해외시장 개척을 통해 몸집을 늘릴 목적으로 남진 정책을 추진하자 영국이 제지에 나선다(Great Game). 아프간전쟁(제1차: 1838~1842, 제2차: 1878~1880)과 크림전쟁(1853~1856)의 결과 러시아의 의도가 좌절됐다. 러시아로서는 대외 교역과 식민지 획득을 위해 남진 정책을 추진해야 했으며 그러려면 얼지 않는 바다와 항구가 필요했지만 영국을 포함한 기존의 유럽 열강들은 러시아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크게 경계했다. 특히 영국은 러시아가 인도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의심하며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밀착 견제했다.3 러시아는 태평양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하와이제도의 카우아이(Kauai)섬에 러시아 포대 유적지가 남아 있다.4 태평양으로 향하는 동쪽 출구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한반도는 러시아의 중요한 관심 대상이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고 나서야 비로소 타의에 의해 한반도 진출의 뜻을 접었다고 볼 수 있다.5

2) 아편전쟁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중국의 차와 도자기를 유럽으로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약인 아편의 판매를 통해 중국에서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국민 건강을 크게 해치는 아편의 폐해가 심각해지고 중국의 은이 해외로 과다 유출되는 문제가 생기자 청나라 조정에서 아편 무역을 금지했다.6 이에 반발한 영국이 청나라를 침공해 아편전쟁이 발발했는데 인류 역사상 명분이 없는 전쟁 중 하나였다. 두 차례(제1차:1839~1842, 제2차:1856~1860)에 걸쳐 일어난 전쟁에서 중국은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의 삽질과 무기의 열세로 패배했고,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홍콩, 연해주와 같은 영토를 할양하는 굴욕을 당했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청나라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으며 유럽 열강의 각축장 신세가 됐다. 중국의 몰락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중국과 조공 관계를 맺고 경제와 안보를 중국에 의존해왔던 아시아 국가들의 시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청나라와의 조공 무역이 거의 유일한 대외 교역 창구인 조선 입장에서 볼 때 청나라의 몰락은 독립해 다른 길을 걸으며 생존할 것인가, 같이 몰락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는 중대한 도전이었지만 조선은 청나라에 더욱 예속되는 길로 역주행을 했다.

3) 가나가와 화친조약

1853년에 페리(Mattew C. Perry) 제독이 이끄는 동인도 함대가 개국을 요구하자 일본 막부는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1년의 숙고 기간을 요청했다. 이미 일본은 제1차 아편전쟁을 계기로 힘의 축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기울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편전쟁 이전에 일본 막부는 1825년 공포한 이국선타불령(異國船打拂令)에 따라 청나라 배와 네덜란드 배 이외의 외국 선박이 접근해 올 경우 대포를 쏘아 쫓아냈으나 아편전쟁에서 유럽 세력이 승리하자 방침을 바꿔 유럽 선박에 우호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7 1년의 숙고 기간이 지난 이듬해인 1854년에 미국과 일본은 가나가와 화친조약을 맺고 시모다, 하코다테 등 2개의 항구를 개방했다. 일본은 페리 제독이 끌고 온 증기선8 을 처음 보고 놀라서 임진왜란 이후 오랜 기간 서학 스승으로 모신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스승을 바꾸고 맹렬하게 미국의 산업 역량을 섭렵하며 세계적인 군사 강국으로 올라서는 과정을 착실하게 밟아나갔다. 그란트(Ulysses S. Grant) 대통령이 퇴임 후 일본을 방문해 우에노공원에 기념식수를 하고, 일본이 워싱턴에 왕벚꽃나무를 가로수로 기증하는 등 미국과 일본의 우호적 관계는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0년대 후반까지 80년 이상 지속되며 일본의 서구화를 이끌었다. 19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4) 태국의 독립국 지위 유지: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

태국은 18세기 후반 인도차이나로 진출하려는 프랑스에 밀려 인도차이나의 중심 국가로서의 영향력을 잃으며 주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영국을 끌어들여서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세력 균형을 토대로 중립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를 넘겼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태국의 외교 전략을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라고 한다. 유연하게 휘는 대나무처럼 주변 정세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입장을 정리한다는 뜻이다. 때로는 영토를 떼어주고, 때로는 치외법권과 경제적 특권을 인정해주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을 지켰다. 프랑스에는 라오스, 캄보디아에 행사하던 영향력을 포기하는 유연성을 보였으며, 영국과는 1855년에 체결된 보링(Bowring) 조약을 통해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자유무역권을 부여했다. 이런 유연한 외교로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896년에 영국과 프랑스 간의 조약이 체결돼 국제적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다.

2. 신미양요: 미국은 통상을 원했다

1871년 신미양요는 미국이 1866년 대동강에서 조선 관민의 화공을 받고 불에 타 침몰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조선 측에 묻고, 조선을 개국해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로저스(John Rodgers) 제독이 지휘하는 아시아 함대(군함 5척, 함포 85문, 병력 1230명)를 강화도에 보냈다가 조선군과 충돌한 사건이다. 여기서 미국의 주된 의도는 일본에서 페리 제독이 그랬던 것처럼 무력시위를 통해 조선이 자발적으로 개항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피시(Fish) 국무장관이 로(Low) 북경공사에게 그란트 대통령이 조선 왕 앞으로 보내는 서한을 송부하고 난파선의 보호와 구조를 확약하는 통상조약을 맺을 것을 훈령했으나 조선 조정은 개항을 할 의도가 없었다. 특히 일본 막부처럼 미국의 군함인 증기선이 함유하는 기술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완강하게 미국 측 통상 의도를 무시하던 중 무력시위를 위해 미군 함정이 접근해오자 조선군이 발포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됐다. 초지진과 광성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현대식 곡사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의 우세한 화력에 일방적으로 밀린 조선군은 사령관 어재연까지 전사하면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참패했지만 미군 전사자의 수는 3명에 불과했다. 조선 조정에서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하고 전투 의지를 보이자 미군은 더 이상의 전투가 무의미하고 본국의 훈령 범위를 벗어난다고 판단해 스스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조선군이 미군과 싸워 이겨서 미군을 패퇴시킨 것으로 포장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면서 쇄국정책의 고삐를 더욱 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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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과정에서 조선 측은 조선이 중국의 번국이므로 독자적으로 외교할 권한이 없다는 둥, 조선은 너무 가난해서 교역을 할 만한 물건이 없다는 둥 횡설수설하고 완고한 태도로 일관함으로써 미국 측이 제풀에 나가떨어진 측면이 없지 않다. 쇄국정책을 실행하는 관점에서 보면 나름 협상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미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통해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청나라에 여전히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신흥강국인 미국의 역량에는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음으로써 우물 안 개구리의 참모습을 보여준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만약 조선 조정이 국제정세를 꿰고 있었다면 이 기회를 청나라의 사슬을 끊고 독자적인 발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계기로 인식하고 적극 활용했어야 했다. 미국에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관해 유감 표명과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부산, 목포 등 몇 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우선무역권한 등 특별 대우를 약속한 후에 영국이 태국에서 했던 것처럼 미국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균형추 내지는 보호자 역할을 하도록 요청하고 미국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여서 조선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어야 했다.

조선은 왜 이러지 못했을까? 조선 조정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하고도 무기 체계의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상식적인 정부라면 전투 과정과 결과를 분석해 패전 원인을 분석하고 신식 무기의 구입과 제작에 사활을 걸고 대대적으로 나서야 했지만 10년 후인 1881년에야 비로소 두 개 소대 규모의 신식 군대를 편성해 신식 무기로 무장하는 데 그쳤다. 조선 조정은 미군이 물러가며 포로를 송환하겠다는 제의를 거절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국민을 위한다면 조정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다 포로가 된 군인을 구출하려고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그들을 저버린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다.

3. 거문도사건:
영국의 힘을 이용할 기회 상실

1885년 3월1일 영국 해군은 군함 3척을 보내 여수 앞바다의 거문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1887년 2월5일까지 주둔했다. 러시아는 1860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제로 점령하면서 유럽에서 좌절된 남진정책을 동아시아 극동에서 추진하려는 의지를 보였으나 블라디보스토크도 부동항은 아니어서 더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후에도 영국과 러시아는 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여전히 긴장 상태에 있었다. 영국은 러시아의 한반도 점령 의도를 선제적으로 봉쇄할 전진 기지로서 주변의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의 기항이 가능한 거문도를 선택했다. 영국 해군은 거문도를 해밀턴항(Port Hamilton)으로 명명하고 섬 주위에 기뢰를 설치하고 섬에 방어진지와 포대를 설치해 군사 요새로 만들었다. 조선 조정은 조선이 세계적 규모의 분쟁인 그레이트 게임의 한가운데 있다는 인식을 갖지 못했고, 더군다나 이 기회가 세계 최강국 영국과 친해지는 행운을 선사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저 고약한 서양 오랑캐가 나타났으니 청나라에 기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지극히 얌전한 생각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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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일본은 영국을 지지했고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적극 개입했다. 청나라는 처음에는 종주권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겸 영국의 거문도 점령과 조차를 공식적으로 승인하려 했지만 러시아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조선의 다른 섬을 점령할 수도 있다는 협박을 하자 방침을 바꿨다. 청나라가 영국 해군의 철수를 요청했고 북양대신 리훙장의 중재로 러시아로부터 조선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자 거문도의 군사전략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던 영국 해군은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결국 거문도사건은 조선 조정의 소극적 태도와 무지로 병든 거인 청나라에 대한 예속만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제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허약체임을 만천하에 알리게 돼 국제사회의 동네북으로 전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만약 조선이 청나라와의 마찰을 각오하고 독자적으로 영국과 교섭해 거문도 조차를 허용하고 반대급부로 조선의 독립적 지위를 영국으로부터 인정받는 외교 수완을 발휘했더라면 조선은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까?

프랑스의 위협에 직면한 태국이 영국을 끌어들여 세력 균형을 이루고 유연한 대나무 외교로 독립을 지켰듯이 조선 조정도 영국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거문도사건의 중요한 역사적 의미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의 외교 역량과 국제적인 안목이 턱없이 부족했다. 진정 아쉬운 역사의 한 장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거문도에 상륙한 영국 해군은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제공하고 공사에 동원할 경우 근로 대가도 충분히 제공하는 등 우호적 태도로 일관해 조선 관민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서구 열강의 군대가 비유럽 국가에서 보여준 일반적인 행태에 비춰볼 때 영국 해군과 거문도 주민과의 사이에 형성된 우호적 관계는 당시 영국 정부가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선과 우호적 관계를 갖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조선이 제대로 대응했다면 세계 최강 영국과 의미 있는 관계를 창출해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특히 흑룡강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과의 전투 경험도 있었던 조선으로서는 영국과 공감대를 형성할 소재도 있었다는 점에서 아쉽다.9 이처럼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 내지 국운의 기로라고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4. 조선 지배층의 무지가 날린 기회

조선 조정은 신미양요에서 마주한 미국, 거문도사건에서 마주한 영국을 다루는 데 있어 지극히 경직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방식으로 일관함으로써 조선 조정이 미국과 영국의 비호 아래 중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 발전해 나가며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 조선 조정은 왜 현명하고 열린 대처를 하지 못했을까? 국방과 무역을 중국에 의존하는 번국의 지위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세력은 병자호란이 끝난 후 전란의 책임을 희석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소중화론을 앞세웠다. 즉, 대륙에서 사라진 한족 국가 명나라의 명맥을 조선이 잇는다는 해괴한 발상을 한 것이다. 조선은 내내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청나라로 보내는 외교 문서에만 청나라 연호를 썼다.10 그러다 보니 청나라와의 관계도 왜곡되고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수입하는 것도 불경한 일이 돼 해금정책으로 이미 중국 이외의 창구가 막혀 있던 조선은 바깥세상의 발전과 동떨어진 외딴섬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명나라를 숭배하는 소중화론을 신봉하고 실천하면서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청나라에 반기를 들지 않고 오히려 청나라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아마도 청나라 조정에서 활약하는 리홍장과 같은 한족 관료를 명나라와 동일시하는 오류와 착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나 이해가 쉽지 않다. 소중화론이 조선 지배층의 뿌리 깊은 소신이 아니라 인조반정 세력이 자신들을 합리화하는 도구에 불과했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다른 한편, 16세기부터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과 교역하며 유럽의 산업기술과 문화를 이해하고 있던 일본 막부는 나름 국제사회와 서구 열강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었다. 페리 제독의 증기선을 마주했을 때 증기선이 함유하는 산업기술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일본 막부는 미국의 산업기술이 유럽을 앞선다는 인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미국에 다가간 반면 조선 초 세종 시대의 산업기술조차 온전히 계승하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있었던 조선의 지배층11 은 강화도 앞바다에 출현한 미국 해군함대 증기선이 갖는 산업기술의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양선, 즉 모습이 다른 배는 기술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선악 판단의 대상일 뿐이었다. 청나라와의 조공 외교 이외에는 국제사회와 연결고리가 없었던 조선은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영국이 국제사회에서 갖고 있는 절대적 지위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영국에 적극적으로 다가갈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아무런 도전 없이 대대로 부와 권력을 누리던 인조반정 세력의 자손들은 나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을 가질 이유도, 자극도 없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개화론자, 청나라를 배우자는 북학파가 대부분 서자 출신이거나, 중인 계급 출신이거나, 주류 세력에서 제외된 양반이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 아관파천이 부른 국제적 고립:
잘 짜인 각본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일본공사관 직원,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대한제국의 황후가 시해된 세계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만행, 을미사변(1895년 10월8일)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으로 청나라를 밀어낸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의 향후 행보에 걸림돌이라고 여긴 민비를 제거했던 것이다. 을미사변 후 친일 내각이 들어서서 일본의 핍박이 거세지자 고종 황제는 이듬해인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부른다.12 고종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지만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 잘못된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당시 대세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이 적대시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1885년에 러시아의 남진을 경계해 거문도를 점령한 적이 있는 영국 입장에서 보면 조선이 러시아로 접근하는 것이 커다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고 영국과 공조하는 미국 입장에서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선 스스로 연출한 것이다. 청일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종주권을 박탈하는 데 성공한 일본으로서는 버거운 상대인 러시아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는 입장이 됐는데 아관파천은 일본이 필요로 하는 스토리를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는 기막힌 소재였다. 즉,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야욕을 부각해 조선과 만주를 두고 일본과 대립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영국과 미국,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계심을 높여 다가오는 러시아와의 일전에서 일본의 우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미국계 자본의 도움으로 확보한 전쟁 자금으로 영국의 최신식 전함과 대포를 구입해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13 또한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에 다가가는 조선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조선을 독립국으로 둘 것이 아니라 일본의 일부로 관리하는 것이 조선과 러시아가 가까이 가는 것을 막는 유효한 방안이라는 것을 영국과 영국의 동맹국들에 이해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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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으로 친일파 내각이 물러나고 일본이 궁지에 몰리는 듯 보였지만 일본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관파천을 주도한 친러파 이완용은 후에 대표적인 친일파가 되는데 아관파천이 결과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완용의 행적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완용은 처음부터 일본을 위해 활약한 친일파일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을미사변, 아관파천은 서로 연계된 일련의 과정으로서 친일파가 기획하고 주도한 고도의 전략일 가능성은 제로인가? 아니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정한론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정교하게 기획하고 친일파를 하수인으로 동원한 신의 한 수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모든 잘못은 국제 정세와 국제 역학 관계,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관계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지 못한 조선 지배층, 특히 고종 임금의 무능함에 있었다. 영국의 국제적 위상,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레이트 게임에 대한 지식을 조금만 갖추고 있기만 하면 러시아 공관으로 가는 길이 망국의 길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터인데 너무나도 아쉽다. 언제까지 아관파천을 일본의 마수를 뿌리치기 위한 고종 임금의 용단으로 치부할 것인가?14 사건의 본질을 간과한 채 아관파천 때 고종 임금이 이용한 통로가 임금의 봄 나들이길이나 되는 양 관광 코스로 만들어 놓고 선전하며, 아관파천 시절에 활약한 러시아 청년 건축가를 영웅처럼 설명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다.

6. 교훈

19세기 후반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가 처했던 국제적 환경을 이해하고 동아시아로 관심을 돌리는 서방 세계의 압력에 동아시아 각국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보면 국가 대전략(Grand Strategy)15 의 품질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는 교훈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경쟁이 없는 사회, 승자가 정해져 있는 사회는 발전하기 어렵다. 바깥세상과 단절돼 있는 폐쇄된 사회도 발전하기 어렵다. 인재 양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운명은 지배층의 지적 능력에 달려 있다. 구한말에 지적 능력을 갖춘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더라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조선은 위대한 지도자가 탄생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돼 있지 않았다. 완고한 계급 사회에서 양반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사회 진출을 허용했기 때문에 폭넓은 인재 양성이 될 수 없었다. 소수 핵심 지배층이 관직을 독점함에 따라 정책 관료의 정책 역량을 키우기 어려웠다. 잘하든 못하든 그들만의 리그를 통해 주요 관직을 세습화해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금 정책으로 무역 활동이 없다 보니 바깥세상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상황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경쟁이 없고 승자가 언제나 승자인 국가, 바깥세상과 단절된 폐쇄 국가는 결국 역량 부족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젊었을 때 기업 오너의 측근이었다고 죽을 때까지 그 역할을 하는 기업이 있다면 결국 집단 사고의 오류에 빠져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해 쇠망의 길을 가기 쉽다. 기회는 언제나 널리 열려 있어야 하고 평가는 언제나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조직의 인적 역량이 극대화되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하는 계속기업(Going Concern)의 길이 보장될 것이다.


최중경 한미협회장 choijk1956@hanmail.net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 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 최중경 | 한미협회장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 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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