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19세기 후반 조선은 그레이트 게임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미양요, 거문도사건 등을 겪으며 미국, 영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그들의 힘을 이용해 청나라, 러시아, 일본을 견제해서 독립국 지위를 얻고 근대국가로 발전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조정의 무지함으로 이를 놓쳤다. 아관파천 또한 국제적인 역학관계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 따른 잘못된 선택이었다. 경쟁이 없어 ‘승자가 언제나 승자’인 국가와 기업은 결국 역량 부족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멸할 수밖에 없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거센 바람 앞에 서 있는 작은 촛불이었다. 얼지 않는 항구를 얻기 위해 한반도로 내려오려는 의도가 명백했던 러시아에 맞서 서방세계의 리더,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 견제 정책, 일명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이 네덜란드를 유일한 창구로 하는 서구 학습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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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벗어나 떠오르는 산업 대국 미국과 가나가와 화친조약을 맺고 산업기술을 배우며 정한론을 다듬고 있던 반면,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전한 청나라는 서방세계의 제국주의에 시달리며 스러져가는 병든 거인이었다. 신흥강국 미국은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한반도에 영토 획득의 야망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조선은 이처럼 5개국의 치열한 각축전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조선에서 주일 청국공사관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은 개화 의식을 가진 조선 사대부들에게 외교 가이드북이자 국제관계 지침서 역할을 했지만 실제로는 없느니만 못한 의미 없는 종이 묶음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조선책략』은 기본적으로 러시아를 막기 위해 조선이 취해야 할 전략을 논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국제사회의 리더인 영국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조선 사대부가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긴장 관계, 즉 국제사회의 권력 구조와 영국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반면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산업기술을 배우면서도 일찍이 영국의 국제적 위상을 간파하고 1863년 영국 대학에 유학생을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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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등 영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만주와 한반도에서 청나라와 러시아를 밀어내고 동아시아의 맹주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을 다졌다.
그렇다면 조선은 일본처럼 영국, 미국과 가까워질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 1871년 신미양요는 1866년 대동강에서 발생한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 침몰 사건을 두고 미국이 조선에 책임을 묻는다는 목적보다는 조선을 개항해 교역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지만 조선 조정이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면서 무력 충돌로 치달았다. 조선은 미국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만 크게 부각시켰고, 그나마 일방적이고 비참한 패전을 승전으로 둔갑시키는 바람에 조선을 엉뚱한 방향으로 표류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 1885년 영국 해군이 여수 앞바다의 거문도를 강제로 점령한 거문도사건은 그야말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영국과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영국의 국제적 위상과 러시아 견제 정책에 대해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조선 조정은 2년간의 점령 기간 중 적극적인 교류를 시도하지 않는 실책을 저질렀다. 조선 조정은 거의 방관자처럼 행동하며 청나라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극히 소극적이고 종속적인 태도로 일관해 영국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떠나고 남은 건 영국 해군 장병과 거문도 백성들이 같이 찍은 사진, 그리고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