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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시대(1415∼1784), 중국 상인 이야기

정경유착이라는 양날의 칼

조영헌 | 339호 (2022년 0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관료들의 후원은 중국 대운하 시대 활동하던 상인들에게 성공 보증 수표였다. 주요 인사들과 친분이 있는 상인들은 교역 물품을 검수하거나 화물 거래 시 발생하는 세금과 관련해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또한 실력자나 유력 관리는 제대로된 상법이 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사회적 위상이 낮은 상인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었다. 자본가의 존망은 경제 논리보다는 정치 논리에 따라 결정된다는 중국의 역사적 교훈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편집자주

중국 상인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온 조영헌 고려대 교수가 ‘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과도기적 역사 속에서 신속한 대처 능력과 전략적 투자로 입지를 넓혀 나간 역사 속 중국 상인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난세를 극복하는 경영의 지혜를 익히시길 바랍니다.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의 화려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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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24일. 중국 언론들은 온통 붉은색으로 장식된 장면을 보도하며 “중국의 승리”를 외쳤다. 베이징에서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기념해 성대한 자축 행사를 벌였던 7월1일로부터 채 3달이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장소는 정치 중심지 베이징이 아니라 경제 중심지 광둥의 선전(深圳)이었다. 주인공 역시 정치 지도자 시진핑(習近平)이 아니라 경제 지도자인 화웨이(華爲)의 부회장 멍완저우(孟晩舟)였다. 중국 정부가 마련한 전세기가 선전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오성홍기가 그려진 비행기의 출입문이 열리자 빨간 드레스를 입은 멍완저우가 등장했다. 그는 2년9개월간의 가택 연금을 마치고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도 여유롭게 비행기 앞 레드카펫에 발을 디뎠다. 그가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간을 밝히며 긴 여정을 거쳐 집으로 인도한 것은 찬란한 조국의 붉은색”이라는 감성적인 멘트와 함께 손을 흔들자 환호성이 터졌다.

멍완저우는 중국의 거대 통신장비 업체인 화웨이의 창업자인 런정페이(任正非)의 딸이자 화웨이의 부회장으로 최고재무책임자(CFO)였다. 엄연한 맏딸이지만 자유롭게 성을 결정할 수 있는 중국 결혼법에 따라 가급적 신분을 숨기기 위해 어머니의 성인 멍(孟)을 따랐다고 한다. 화웨이의 후계자로 손꼽히는 그의 귀환에 온 중국이 흥분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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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캐나다 밴쿠버의 공항에서 체포된 멍완저우는 2년9개월이나 가택 연금 상태에 있다가 풀려났다. 그녀가 체포된 이유는 미국 검찰이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를 위반했다는 명목으로 그를 기소했기 때문인데 2021년 9월 미국의 기소 연기 결정에 따라 석방됐다. 화웨이는 세계 최대의 통신장비 업체이자 한때 중국 최대의 스마트폰 제조업체로 주목받는 하이테크 기업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끌던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에 대한 고강도 제재를 취하며 화웨이를 지목했고, 캐나다 정부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총수의 딸이자 후계자를 밴쿠버공항에서 전격 검거한 것이다. 그리고 6개월 후인 2019년 5월, 미국 상무부가 화웨이를 미국 기업들의 거래 금지 명단에 올리는 ‘화웨이 블랙리스트 사건’이 발생했고 화웨이는 궁지에 몰렸다. 멍완저우의 체포와 화웨이의 블랙리스트 사건은 중국의 기술 굴기를 견제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조치로 손꼽혔기에 멍완저우의 귀환은 일견 ‘미국에 대한 외교적 승리’로 자축할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화웨이 회장 런정페이 어록의 양면성

이 사건을 반추하는 이유는 그가 선전공항에서 했던 연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관심을 가져준 데 깊이 감동을 받았다”며 “지난 3년을 돌아보며 나는 각 개인과 기업, 국가의 운명이 실제로 연결돼 있음을, 조국이 발전하고 창성해야 기업도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국민도 행복하고 안전할 수 있음을 더 분명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미•중 패권 갈등이 심화하던 상황인데다가 구금 이후 시진핑까지 나서며 멍의 석방을 요구했기에 이러한 멍 부회장의 발언은 상투적인 레토릭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미국이 화웨이를 추궁했던 이유가 바로 화웨이의 ‘백도어 논란’이었음을 기억한다면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미국은 전 세계로 통신장비를 수출하는 화웨이의 제품에 이용자의 데이터를 빼돌릴 수 있는 ‘뒷문’이 설계돼 있고 화웨이의 지분을 상당량 보유한 중국 정부가 백도어 설치를 지시했다고 의심했다. 화웨이 측은 기술적으로 백도어 설치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정부와의 커넥션을 전면 부인했지만 멍완저우의 석방 과정과 공항에서의 첫 발언은 그야말로 화웨이와 정부가 운명 공동체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사실 화웨이(華爲)라는 회사 이름이 ‘중화의 행동’이라는 뜻을 지닌 ‘중화유위(中華有爲)’에서 왔음을 상기한다면 화웨이와 중국 정부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화웨이의 창업자이자 전직 군인 출신인 런정페이는 기업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그은 바가 있다. “상인은 절대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 됩니다. 중국에 상인이라는 존재가 등장한 이래 만연한 정경유착, 즉 상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문화와 완전히 결별해야 합니다.” 대부분 국유기업 중심으로 성장이 이뤄지던 개혁개방 시기의 중국에서 민간 기업으로 통신 업계를 개척했던 런정페이로서는 ‘순수한 상인’ 이미지를 강조하며 차별화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화웨이를 설립했던 선전은 중국 특유의 ‘관시(關係)’라 불리는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신흥 경제특구였다.1

따라서 런정페이의 어록에서 양면성을 읽어내야 한다. 하나는 그 자신이 군부 출신의 엘리트로서 1980년대 군 출신들이 주도했던 국영기업의 급성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화웨이 역시 군에 납품하며 벌어들인 돈을 기반으로 지금과 같은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런 회장의 정치 후각은 사실 남달랐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런정페이는 이 과정에서 정경유착의 위험성에 대해 체감할 수 있었다. 정치 권력의 후원을 받으며 급성장한 기업 가운데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이름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런정페이는 정경유착의 유혹 속에서도 상인의 정치 간여를 극구 부정하며 한 우물을 파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정경유착의 유혹 : 성공의 보증수표

중국사를 돌아보면 역대로 막강한 재화를 자랑하는 이들이 정치적 관계를 발판 삼아 거상(巨商)의 자리에 올랐던 사례는 무수히 많다. 전국시대의 여불위(呂不韋), 명나라의 엄세번(嚴世蕃), 청나라의 호설암(胡雪岩)이나 교치용(喬致庸)이 대표적인 사례다. 관료들의 후원은 대운하 시대(1415∼1784)에 활동하던 상인들에게 성공의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관료들과의 밀접한 관계 형성을 위해 상인들이 동원하는 방식은 앞선 연재에서 언급했던 혈연, 지연, 학연이라는 연결고리를 활용한 관시 네트워크다.2 특별한 혈연, 지연, 학연이 없다면? 이때 동원되는 수단은 바로 각종 선물과 접대이다. 여기에는 합법과 불법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명분과 복잡한 단계가 포함된다. 혈연, 지연, 학연, 그리고 선물 경제 속에서 이른바 정경유착이 횡행했다.

대운하 시대 정경유착으로 성장했던 상인의 일상생활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소설 『금병매(金甁梅)』를 읽어야 한다. 일반인에게는 19금 애정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금병매』는 대운하 도시인 임청(臨淸)을 배경으로 활약했던 서문경(西門慶)의 상업 활동과 일상을 그린 16세기 장편소설이다. 많은 이가 자주 『수호전』과 『금병매』에 모두 등장하는 서문경을 혼동해 동일 인물로 취급하지만 둘은 상당히 다르다. 전자가 한 명의 호걸이자 악당에 더욱 가까운 인물이라면 후자는 한 사람의 상인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푸단(復旦)대 샤오이핑(邵毅平) 교수는 “『금병매』가 위대한 것은 중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평범한 회색빛 상인의 생활을 장편소설 형식으로 묘사하는 데 가치를 발견했다는 것”이라 평가했다.3 그런데 이 서문경은 보통 상인이 아니라 관청과 결탁한 상인, 즉 정경유착의 전형성을 보여주는 상인이다.

서문경의 시작은 미약했다. 사실상 하층 무뢰배에 가까웠던 서문경은 본거지인 임청의 지리적 특성을 파악해 이를 기반으로 큰돈을 벌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그래서 먼저 예물(혹은 뇌물)을 쓴 곳이 임청 초관(鈔關, 수로 교통의 요지에 설치된 세관)에서 왕래하는 선박의 크기와 화물의 가치를 따져 세금을 부과하던 관리(전錢 주사主事)였다. 임청은 산동성의 대표적인 운하 도시였기에 1년 내내 조량(漕糧)을 실은 선박, 상선, 그리고 수도 북경을 왕래하는 관료나 과거 수험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세관 관리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 놓게 되면 화물을 거래할 때마다 세금 탈루로 인한 반사이익이 만만치 않았다. 소설에는 서문경이 전 주사에게 보낸 선물을 ‘뇌물’이라고 표현했지만 당시 이를 주고받는 상인과 관리는 인간관계의 ‘윤활유’와도 같은 ‘예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서문경은 이것이 뇌물처럼 인식되지 않도록 고급스러운 접대 문화를 동원하는 센스가 뛰어났다. 가령 전매품인 소금의 유통을 관리하는 양회순염어사(兩淮巡鹽御史)가 양주에 가는 도중에 임청에 머물게 되자 연회를 베풀고 융숭한 대접을 했다. 사돈과 함께 양주의 소금 유통업에 참여하려고 하던 서문경에게 연회와 대접은 치밀한 계산 속에 이뤄진 ‘합법적인’ 관계 형성의 장이었다. 그 사이에 품위 있는 편지와 함께 크고 작은 선물이 전달됐다. 그 결과 서문경의 소금은 양주에서 까다로운 체험(掣驗, 소금 판매권인 염인을 획득한 이후 염인에 적힌 액수만큼의 소금을 염장에서 수령해 판매하기 직전에 받는 검사) 단계를 다른 상인보다 한 달이나 빨리 통과할 수 있었다. 시간과 정보가 생명인 상업 세계에서 한 달이나 시간을 절약했다는 사실은 전매품인 소금 유통업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모든 연회가 다 관료와의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됐을까? 아니다. 서문경의 연회에는 다른 상인들의 연회와 차별되는 ‘무언가(something)’가 있었다. 바로 관료나 관료 예비군인 과거 합격자와 소통이 가능한 문화적 감각이다. 『금병매』에 소개된 대표적인 사례는 연회마다 등장하는 희극 공연이다. 서문경은 과거 시험에 합격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는 관료 예비군을 위한 연회를 베풀면서 소주(蘇州)에서 온 4명의 희극 배우를 초빙해 공연을 마련했고, 환관 일행을 초대할 때는 해염희(海鹽戱) 극단을 초대해 공연을 개최했다. 강소성을 대표하는 소주의 악극인 곤산강(崑山腔)과 절강성을 대표하는 해염강(海鹽腔)은 명나라 시기에 발전돼 경극(京劇)이 유행하기 전까지 강남의 문인들이 향유하는 최고의 고급문화였다. 특히 해염강은 북경 관리들의 표준어인 관화(官話)를 사용했기에 북경에서 온 환관이나 관료들을 대접할 때 친숙하게 접근하는 매개물이었다.4 서문경은 비록 하층 무뢰 출신이지만 재력만으로는 채워줄 수 없는 무엇, 즉 문인 관료들 사이에 소통되는 ‘우아한’ 문화적 소통 코드를 읽어내고 충족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한 번의 연회에 1000냥에 달하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사용했던 서문경의 배포는 이를 통해 관계(官界)의 주요 인물들과 교제권을 형성하게 되면 이를 바탕으로 상업이나 재판에서 비용으로 계산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축적된 경험의 소산이었다.5

따라서 정치 권력과의 우호적인 관계 형성은 상인들에게 성공의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중앙의 관리나 환관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방관이나 하급 세관(稅官)에게 주어진 권력만으로도 사회적 말단신분으로 인식되던 상인을 몰락시키기에는 충분한 힘이었다. 따라서 관료와의 관계 형성이 어려워 그렇지 일단 우호적인 관계만 형성할 수 있다면 상인은 돈을 벌 수 있는 정보와 기회를 선점하기도 하고 수많은 수탈로부터 보호받기도 쉬웠다. 그러니 어느 누가 정경유착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웠으랴!

불법적인 성격이 강한 뇌물이나 접대로 정치 권력과의 관계 형성이 부담스러운 상인들 가운데는 스스로 명목뿐인 벼슬자리를 추구하거나 자식들에게 과거 합격을 종용하는 이들이 있었다. 역사에서는 이러한 상인을 ‘관상(官商)’이나 ‘신상(紳商)’이라 부른다. 상인이지만 동시에 관료나 신사의 정체성을 겸비한 자들이다. 청나라 후기가 되면 관상이나 신상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는 반면 관료군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들면서 양자 사이에 대등한 수준의 ‘거래’가 자주 발생했다. 앞서 언급했던 호설암이 휘주 출신의 대표적인 신상으로 태평천국의 반란으로 위기에 처한 좌종당(左宗棠)의 관군을 지원했다면 교치용(1818∼1907)은 의화단의 난으로 피신하는 서태후에게 자금을 빌려주기도 한 산서 출신의 관상이었다. 호설암이나 교치용이 활동하던 19세기 후반은 아편전쟁 이후 상업의 힘과 상전(商戰)의 위력에 눈이 떠진 때로 관료들이 주도적으로 상업 활동을 감독하는 관독상판(官督商辦)이 유행처럼 번졌으나 사실상은 관 주도의 정경유착 버전일 뿐이었다. 공산당의 집권 이후에는 국영기업으로 정경유착의 전통이 이어졌다.

소송 사회와 ‘호송(好訟)’ 풍조

중국에 정경유착의 전통이 이처럼 유구하게 이어졌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상인의 역할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사농공상의 말단으로 인식되면서 상인을 보호해주는 법적 안전망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상법(商法)은 20세기나 돼야 등장했고 상업은 본업(本業)인 농업을 부식시키는 말업(末業)으로 간주됐으니 상인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야박하기 그지없었다. 상업과 관련한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그 피해는 사회적 안전망에서 제외된 상인들이 뒤집어쓰기 일쑤였다.

그런 와중에 소송(訴訟) 사건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상업이 발전하고 중소 도시가 급증하면서 장거리 유통업 및 객상의 풍조가 만연하던 대운하 시대에 발생한 동시적인 현상이었다. 인과관계가 없을 리가 없었다. 15세기 중반부터 현저하게 증가하는 인구 이동, 물자 유통과 함께 교통의 중심지에서 각종 분쟁과 사건이 급증한 것이다.6 문인 관료들이 남긴 기록은 이러한 ‘호송(好訟)’ 풍조로 인해 사회적 기강이 문란해지고 본업을 버리고 말업을 좇는 자들이 많아지는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이에 편승해 소송 사건을 맡아 해결하는 변호사와 유사한 송사(訟師)도 급증했다. 그야말로 소송 사회로 돌입한 듯했다.7

모든 현상이 마치 ‘자본주의의 맹아’처럼 보이던 중국이었지만 한 가지 측면에서 확연히 유럽과 달랐다. 상인들의 위상이 낮았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법적,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했다. 따라서 소송에 휘말린 상인이 승소하기 위해서는 법이 아니라 실력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유력한 관리나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신사를 우익으로 삼는 것이 객지에서 돈을 벌려는 상인들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 되고 말았다. 오랜 관존민비(官尊民卑)의 관행 속에서 민 가운데 가장 말단이 상인이라는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각지 상인들의 경쟁 속에서 벌어진 흥미로운 소송전(訴訟戰) 이야기를 통해 소송 사회에서 정경유착이 가진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 상업 및 화폐경제에 근거한 명 말 도시민의 세계를 무대로 탄생한 『두편신서(杜騙新書)』라는 범죄소설에 소개된 이야기다. 경쟁 상대는 휘주 상인 왕봉칠(汪逢七)과 광동 상인 위방재(魏邦材)이고, 사건은 항주에서 함께 탄 선박에서 발생했다.8

광동성 최고의 갑부로 알려진 위방재는 자신의 재력을 믿고 주변 사람들을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하루는 강남의 호주(湖州)에서 비단을 구매해 광동으로 오기 위해 항주에서 큰 원양 선박으로 갈아탔는데 그 배에는 20여 명의 객상이 동승했다. 풍랑으로 인해 출항이 연기된 사이에 위방재와 그 노복들의 거만한 태도가 이어지자 이를 참지 못한 휘주 상인 왕봉칠 일행과 다툼이 벌어졌다. 왕봉칠 역시 휘주에서 위세 당당한 벼슬아치 가문 출신의 상인이었기에 위방재의 거만함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물리적 충돌이 생긴 가운데 왕봉칠은 돼지 피를 머리에 바르고 관아에 가서 “인명을 급히 구해달라(急救人命)”는 명목으로 위방재를 고소했고 위방재도 왕봉칠이 자신의 물건을 훔쳐 갔다고 맞고소하기에 이르렀다.

본격적인 소송 승부는 이제부터였다. 왕봉칠은 이미 100냥의 은자(銀子)를 관아의 징세 담당 관원에게 뇌물로 전달한 상태였다. 이에 질세라 위방재는 150냥을 사건 발생 현의 9명의 진사(進士, 과거 최종 합격자)에게 뇌물로 전달했다. 하지만 왕봉칠은 이를 예상하고 동일한 9명의 진사에게 200냥을 뇌물로 전달하며 맞불을 놓았다. 소송은 1년 가까이 이어졌고 더 많은 재력으로 다양한 이에게 뇌물을 전달해놓았던 왕봉칠이 승소했다. 패배한 위방재는 빈털터리가 돼 고향으로 돌아갔고 결국 집안 사람들의 질타 속에서 스스로 분을 못 이긴 채 수개월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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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겸손하면 이익을 얻고 교만하면 손실을 초래한다(謙受益, 滿招損)”는 교훈으로 마무리되지만 정작 감상의 묘미는 소송 사회에서 승패의 분수령이 됐던 정경유착의 힘에 있다. 두 사람 모두 뇌물로 관리와 지역 신사에게 호소했으나 더 많은 재력으로 다양한 이를 포섭했던 휘주 상인이 승리했다. 문인 이유정(李維楨, 1547∼1626)은 이 승리의 요인을 설명해준다. “휘주에는 대자본을 지닌 상인이 많은데 사투(私鬪, 즉 쟁송)에 용맹해 이기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뿐 아니라 권세가에 대한 아첨에도 능하다.”9 『두편신서』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소송 사건이 발생하기만 하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휘주 상인의 경쟁력이 정경유착의 노하우(권세가에 대한 아첨)와 연관돼 있음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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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휘주 상인이 모든 소송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특별히 그 상대방에게 관리가 개입됐다면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 『석점두(石点頭)』 권8에 등장하는 휘주 상인 왕씨(汪氏)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항주와 소주처럼 강남의 대운하 거점 도시에서 명주와 비단을 유통하면서 세관(稅關) 납세에 대한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호북성 형주(荊州)에 갔다가 세관 관리로 새로 부임한 하급 관료를 만나게 되는데 그 관료는 왕래하는 선박에 대해 조정의 과세 기준을 위반하고 과도한 납세를 요구했다. 왕씨는 관료의 부당한 세금 징수에 대해 다른 지역의 과세 기준을 제시하며 용감하게 저항했고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결국 관원의 힘에 밀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10

자본의 힘을 압도하는 중국 정치의 힘

『석점두』에 등장했던 휘주 상인 왕씨의 소송 패배는 씁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근대적 상법에 따라 판결이 진행됐다면 결론이 달라졌겠지만 전근대 중국에는 상인에 대한 법적,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했다. 아무리 상품경제가 발전하고 상인의 비중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사회적 인식과 법적 개혁이 ‘혁명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한 자본가는 정치 권력자의 하수인에 머물거나 기껏해야 조력자에 만족해야 했다.

오랜 중국의 역사 속에서 진시황을 비롯한 황제 권력은 19세기까지 억상(抑商) 정책을 유지해 왔고 농업사회라는 거대 국가의 기본 성격 역시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황제의 세속 권력은 2000년 동안 유교, 불교, 도교, 이슬람교,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종교적 권위의 도전도 압도했다. 그 결과 서구 유럽처럼 종교 권력(교황)이 세속 권력(황제)과 대등하거나 때로는 압도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의 은행가 야코프 푸거(Jakob Fugger, 1459∼1525)의 성공 스토리를 보면 ‘종교와 정치를 압도한 자본’ 이야기로 귀결된다.11 그래서일까? 중국에는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의 길항 속에서 성장했던 부르주아 계층의 성장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강력한 중국의 세속 권력은 종교 세력뿐 아니라 상인 세력까지 압도해 버렸다. 개별적인 상인들의 놀라운 성공 이야기는 이어졌으나 그들 사이의 연합과 세력화는 용납되지 않았다. 특별히 정치 권력의 핵심적인 안보(security) 문제를 건드릴 정도로 상업 세력이 성장할 때는 ‘반역’이나 ‘모반’이라는 낙인을 붙이고 가차 없이 제거해버렸다. 일찍이 한비자(韓非子)가 언급했던 용의 ‘거꾸로 솟은 비늘’, 즉 역린(逆鱗)을 건드리지 않아야 군주를 설득해 성공할 수 있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중국에서는 아무리 강력하고 훌륭한 상인도 황제의 역린을 건드려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경험이 축적돼 있다. 정경유착으로 성공하는 전형을 보여준 상인 여불위의 비참한 말로나 상인 집안 출신으로 한무제 시기 소금과 철에 대한 전매제를 시행했던 상홍양(桑弘羊)이 마지막에는 모반죄로 몰려 멸족당했던 사례는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 명나라 시기 조정의 해금 정책을 거스르며 해양 세력과의 개시(開市, 교역 허용)를 선구적으로 주장했던 휘주 상인 왕직(汪直, ?∼1560)의 비참한 최후 역시 놀라운 학습 효과를 발휘했다. 정치 권력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 상인만이 안정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 검열이었다.

그렇다면 자본의 힘을 압도하는 중국 정치의 힘은 전근대 시대의 종료와 함께 사라졌던가? 불평등 연구 분야의 전문가인 브랑코 밀라노비치 교수는 저서 『홀로 선 자본주의』에서 “과거 중국의 권위주의 국가들은 부유한 상인들이 국가를 위협하지 않는 한, 한마디로 그 상인들이 너무 커지지 않는 한 평화롭게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항상 그들을 경계했다”고 말한다.12 그래서 부유한 상인조차도 계층적 이해관계를 정책으로 반영하지 못했고 상업적 이익은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충분히 조직화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상인이나 종교 등 어떤 권력도 감시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권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식 국가자본주의 사회에도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런정페이 회장이 중국 역사에 만연했던 정경유착을 경계하며 “상인은 절대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조했던 이유도 실상은 자본을 압도하는 정치의 영향력에 구속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정경유착으로 정치에 밀착한 자본가는 언제든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에 따라 존망이 결정된다는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경영인들에게 정치는 여전히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즉 가까이 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멀리할 수도 없는 영역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오늘날 중국에 진출해 사업을 하려는 기업인이라면 중국 사회의 오랜 정경유착의 관행과 운영원리를 통찰하고 중국의 중앙 및 지방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문화적인 차원에서 존중하되 과도한 밀착을 경계하면 좋을 것이다.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chokra@korea.ac.kr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 학자와 하버드-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근세 시대에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 및 베이징 수도론이 주된 연구 주제이고, 동아시아의 해양사와 대륙사를 겸비하는 한반도의 역사 관점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 저서로 『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엘로우 퍼시픽: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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