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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고수(高手)’될 뻔한 ‘미생(未生)’ 장고 끝에 나온 최고의 묘수

주재우 | 143호 (2013년 12월 Issue 2)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최윤영(Assumption University 국제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나 하나쯤 어찌 살아도 사회는, 회사는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이 일이 지금의 나야.”(김 대리)

 

“조치훈 9단이 하신 말씀이에요.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 거, 그래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 없는 바둑. 그래도 바둑, 세상과 상관없이 그래도 나에겐 전부인 바둑.’” (장그래)

 

만화 <미생> 67()1 에 나오는 대사다. 입단을 꿈꾸며 평생 바둑만 두다가 실패해 종합상사에 낙하산 인턴으로 들어온 주인공 장그래와 직장 선배(김 대리)가 직장생활의 허무함과 자존감에 대해 나누는 대화다. 작가 윤태호는 회사 생활은 전혀 해보지 않고 평생 그림만 그린 전업 만화작가지만 이 작품을 두고꼭 내 얘기 같다라고 느끼는 젊은 직장인들이 많다.

 

지난 1120일 출판사 위즈덤하우스는 <미생> 50만 부 판매했다고 밝혔다. 한 권 정가가 11000원이니 55억 원어치가 팔린 셈이다.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조정래의 소설 <정글만리(11월 말까지 약 80만 부)>에는 못 미치지만 소설이 아닌 만화라는 장르의 한계를 뚫고 이뤄낸 성과라는 측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인터넷상에서도 이미 큰 히트를 쳤다. 책 출간에 앞서 2012 1월부터 2013 2월까지 1년여 동안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웹툰(인터넷 만화)으로 연재되기 시작해 누적 조회건수가 10억 건을 넘었다. 2012년 말오늘의 우리만화상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만화 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만화작품으로서 최고의 한 해를 누렸다. 유료 서비스로 전환된 현재도 꾸준히 독자가 들어오고 있으며 독자들로부터 역대 다음 웹툰 최고인 평균 평점 9.8점을 받았다.

 

<미생>이 만화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린 해가 2012년이었다면 2013년은 만화라는 틀에서 벗어나 원소스 멀티유즈(one-source, multi-use) 문화 콘텐츠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 해다. 우선 다음 커뮤니케이션은 광고회사 TBWA코리아와 협업해 미생 캐릭터가 등장하는 스마트폰용 단편 영화를 제작해 선보였다. 캐릭터 상품들의 출시도 이어졌다. 롯데칠성음료는 레쓰비-미생 캔커피를 내놓았다. GS리테일은 편의점 체인 GS25에서 미생 맥주컵, 종이컵, 노트, 이력서를 팔았다. 롯데백화점은 패션 브랜드 잭앤질과 함께 캐릭터 의류를 팔았다. 심지어 금융권까지 미생에 러브콜을 보냈다. 동양증권이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의 온라인 배너광고에 미생 주인공들을 넣었다. 미생 열풍은 2014년에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케이블채널 tvN을 운영하는 CJ E&M이 인기작응답하라 1994’의 뒤를 이을 드라마로 미생을 점찍었다. 방영은 2014년 여름부터 예정돼 있다. TV용 애니메이션 제작도 타진 중에 있다. 2014년 가을에는 다음 웹툰 서비스에서미생 시즌 2’가 연재될 예정이다. ( 1)

 

성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 만화로서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미생의 사례를 살펴보고 기업에 주는 시사점을 찾아본다.

 

 

2년 지각해 더 크게 성공

 

 

 

윤태호 작가는 허영만 작가의 문하생으로 활동을 시작해 독립한 후 <야후> <로망스> <이끼> 등의 히트작을 만들었다. <이끼>는 강우석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2010 340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윤태호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작품이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는 작가인 그에게 출판사 위즈덤하우스가 바둑과 샐러리맨을 소재로 한 만화를 그려보지 않겠냐고 섭외한 것은 <이끼>의 연재가 끝난 2009년이었다.

 

위즈덤하우스는 2008년 허영만 작가의 관상 만화 <>로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었다. <>은 관상이라는 주제를 다뤘지만 직장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재들로 채워진 만화였다. 이 출판사에서 <미생>을 담당한 최유연 팀장(편집자) “<>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유사한 기획을 준비하게 됐다실력 있는 만화가와 그에 맞는 아이템을 매치시켜 직장인들에게 실용적인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한다는 목표였다고 말했다.

 

위즈덤하우스는 내부 논의 끝에 바둑이라는 아이템을 잡았다. <이끼>로 주목을 받고 있던 윤태호 작가가 바둑에 관심이 있음을 알고 찾아갔다. 바둑 애호가인 윤 작가는 과거에 바둑꾼 이야기와 창업 이야기를 각각 만화로 그리려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이 두 가지를 합쳐보자는 출판사의 제안에 작가가 흔쾌히 응하면서 2009 4월 계약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계약서에 서명만 빨리 했을 뿐 작품은 시작될 기미가 없었다. 위즈덤하우스가 처음 제안한 제목은고수(高手)’였다. 바둑의 고수가 회사원들의 세상에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는 내용을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본인의 스타일과 맞지 않다며 찜찜해했다. 뭔가 다른 관점을 찾기 위해 수없이 한국기원을 들락거리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 영화 <이끼> 판권 계약을 한 렛츠필름의 김순호 대표가 힌트를 줬다. 고수가 아닌 하수, 영웅적인 경영자가 아닌 일반 샐러리맨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달라는 얘기였다.2

 

이렇게 갈피를 잡았을 때는 이미 계약하고 2년 반이 지난 후였다. “(계약 후) 1년 안에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예상보다 준비기간이 길어졌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가 오랜 시간 자료 준비와 고민을 거듭했기에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최유연 팀장의 말이다. 윤 작가는 작품 취재를 위해 종합상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비롯, 수많은 샐러리맨과 바둑인들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대기업 종합상사들은 모두 윤 작가의 취재를 거부했기에 알음알음 지인들을 통해 취재원을 섭외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림만 그려온 윤 작가는 기업이나 무역 실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이는 평생 바둑만 둬온 고졸 인턴사원장그래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됐다.

 

윤 작가는 출판사로부터 통상적인 계약금만 받았을 뿐 별다른 간섭 없이 모든 취재를 자기 의지대로 했다. 최유연 팀장은작품 취재에 대해 위즈덤하우스가 한 일은 계약 이후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독촉하지 않고 기다린 것이라며작가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초기 기획이 무엇이었건 작품은 작가의 몫이라는 생각이 <미생>의 탄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만화의 틀이 잡히고 나자 이제 어떻게 독자들에게 선보일지 그 방법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윤태호 작가는 출판 만화 출신이다. 인터넷 만화, 웹툰이라는 장르가 생기기 전부터 책 형태의 만화를 만드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미생> 역시 웹툰이 아니라 책에 맞는 형태로 그리고자 했다.3  그러나 이미 국내 만화 시장은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웹툰 쪽으로 급격하게 주도권이 넘어온 상태였다. 과거의 만화시장을 주름잡았던 만화 잡지들은 거의 사라졌고 대부분의 만화가들은 다음, 네이버, 네이트 등에서 무료로 웹툰을 연재한 후 이를 책으로 묶어 내는 방식을 택했다. 윤 작가와 위즈덤하우스도 이런 트렌드를 따라야만 했다.

 

“만화는 기본적으로 연재를 전제로 한다. 연재가 돼야 팬도 생기고, 그 팬들이 소장욕구로 책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웹툰으로 만화를 먼저 무료 연재하면 책이 안 팔리는 것이 아니라 웹툰으로 먼저 성공해야 책도 잘 팔린다고 볼 수 있다.” 최 팀장의 설명이다. 윤 작가는 <미생>을 출판용으로 먼저 그린 후 웹툰으로 연재하면서 그림과 대사를 하나씩 떼어서 다시 올리는 작업을 했다. 웹툰용으로 먼저 그리는 것보다 단행본의 품질이 올라가는 효과가 있었다.

 



포털에 새로운 사업기회 제공

 

작가는 웹툰 연재처로 포털사이트 다음(DAUM)을 선택했다.4  다음의 박정서 PD(웹툰 기획자)와는 전작 <이끼>5 로 손을 맞춰본 적이 있어 서로가 편했다. 첫 회는 2012 2월에 나갔다. 연재는 2013 8, 145수에서 끝났다.

 

웹툰이 나오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포털이나 웹진에서 작가에게 직접 의뢰하는 경우, 출판사가 작가와 포털/웹진에 의뢰하는 경우, 마지막으로 작가가 소속된 에이전시들이 움직이는 경우다. <미생>은 출판사가 먼저 바둑이라는 아이템을 던졌지만 작가가 이를 혼자서 3년간 숙성시킨 후 포털에 연재를 제안한 드문 사례다.

 

다음의 박정서 PD는 연재 시작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다. 처음 연재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바둑 쪽에 많이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얼마나 잘 될까 싶었다. 60회 정도 해보자고 했었는데 10회 정도 지나니 독자들의 반응이 바로 오기 시작했다. 댓글을 다는 독자들이 작품의 맥락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왔고, 작가님이오케이, 그럼 갈 데까지 가봅시다라고 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웹툰에 댓글을 달았다. 작품의 주인공장그래는 어려서부터 바둑만 두어 온 바둑 연구생이었다. 남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할 나이에 바둑 프로 입단에 실패하자을 통해 원인터내셔널이라는 종합상사에 2년 계약직으로 취업한다. 기업 활동이나 회사 생활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한 장그래가 매일매일 상사들에게 깨지고 잘난 동료들에게 상처받는 모습을 본 20, 30대 직장인들은내 얘기 같다혹은우리 회사에도 저런 사람 있다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던졌다.

 

‘올해의 우리만화상등을 수상하며 웹툰이 큰 성공을 거두자 출판을 하는 위즈덤하우스도 입이 벌어졌다. 2012년 여름 1, 2권을 출간하면서 대대적인 홍보 이벤트를 기획했다. 웹툰을 내고 있는 다음에도 협조를 구했다. 책의 예약판매, 작가와의 만남, 사인회, 각종 사은품 증정 이벤트 등의 공지 등을 다음을 통해 알릴 수 있었다. <미생> 1차 독자가 모이는 곳이 다음이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이벤트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게 위즈덤하우스의 판단이었다.

 

다음은 다음 나름대로 고민에 빠졌다. 2012년 당시 다음은 회사 전반의 전략을 다시 짜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국 2위 인터넷 포털로 안정적으로 성장해왔지만 2010년경부터 급속하게 확산된 스마트폰 문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인터넷 문화가 PC에서 모바일로 급격하게 넘어가는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사용자들이 순식간에 다른 서비스로 떠나고 광고매출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마케팅 부서에도 위기감이 느껴졌다. 인터넷 기업들이 좀처럼 하지 않는 TV광고라도 해서 다음의 모바일 앱을 홍보하고자 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생>이 큰 인기를 끌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 지금까지의 인터넷 포털(portal)은 문()이라는 뜻처럼 이미 타인이 만들어놓은 콘텐츠를 사용자에게 보기 편하게 정리해 전달해주는 역할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포털도 자기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팔수도 있지 않느냐, 또 이런 자체 제작 콘텐츠를 포털 서비스 홍보에 이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견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광고 내용 자체가 가치 있는 콘텐츠가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나왔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미생>이 실험 대상이 됐다.

 

“광고에 인기 연예인이 나와다음 좋아요. 다음 앱 한번 써보세요라고만 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다음에 꼭 와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배성준 마케팅제휴커뮤니케이션 본부장의 말이다.

 

배 본부장은 스마트폰 사용자들에게 최적화된 10분 안팎의 미생 단편 영화를 만들고 이를 TV와 각종 마케팅 채널을 통해 광고하기로 했다. 결정이 내려지자 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TBWA와 함께 콘셉트를 잡고 윤태호 작가와 콘텐츠 사용 계약을 맺었다. , 웹툰 원작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라 캐릭터들의 과거를 밝힌다는 일명프리퀄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우선 윤태호 작가가 너무 바빴다. 작가에게 캐릭터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들을 순 있었지만 대사 하나하나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에 맞게 고쳐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TBWA는 시나리오 작가를 따로 고용해 대본을 작성한 후 윤태호 작가에게 보고해 확인을 받는 접근 방식을 택했다. 영화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영화를 만들어줄 수 있는 젊은 감독과 작가를 섭외했다. 이들 제작진 역시 모두 미생 세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사회생활 초년병들이었다. 여섯 편의 총제작비는 5억 원이 들었다. 이는 다음이 2년 전 걸그룹소녀시대를 광고모델로 계약하면서 썼던 것보다 낮은 금액이었다.

 

모바일 영화는 524일부터 매주 금요일 다음 모바일 앱에서 공개됐다. 다음은 이를 영화관, 길거리 배너, 포스터 등을 통해 알렸다. 지하철 2호선 스크린 도어와 차내에도 광고물이 설치됐고 서울 시내버스 100대에도 광고를 붙였다.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모바일 영화 캠페인 동안 총 260건의 크고 작은 언론 기사가 나왔다. KBS, SBS의 저녁뉴스에도 보도됐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도 출품했다. O.S.T.도 네이버뮤직, 멜론, 다음뮤직 등을 통해 판매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미생> 캠페인 이후 일반인들의 다음 인지도가 5%포인트 가량 올랐다. 모바일 포털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라는 질문에다음이라고 답한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었났다는 뜻이다. 자체적으로는 약 수십만 명의 모바일 신규 이용자를 유치했다는 분석 결과를 얻었다.

 

다음이 웹툰 사업에서 얻은 가장 큰 수익은 자사의 서비스로 사용자들을 모으는 집객 효과다. 유료화에 대한 거부감이 큰 한국 웹툰 시장의 특성상 윤태호 같은 인기작가라 하더라도 연재 중에는 대부분 무료로 공개된다. 유료화로 전환된 후에도 대부분의 수익은 작가의 몫이고 포털이 가져가는 건 10% 정도다. 박정서 PD의 표현에 따르면서버 유지비 정도. 그러나 <미생> 이후 만화 콘텐츠 자체로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아모레퍼시픽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미생의 성공 이후 다음에꽃처럼 산다라는 작품을 의뢰해 10월부터 연재 중에 있다. 작품은 10대와 20대에 맞춘 로맨틱 코미디 혹은 순정만화의 스토리라인과 그림체를 하고 있지만 중간중간 아모레퍼시픽의마몽드브랜드를 홍보하는 내용이 독자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들이 일하는 꽃집의 이름이 마몽드다.

 

<미생> 모바일 영화 작업들을 통해 다음의 정체성 확립이 가능해졌다. 우리도 무언가를 프로듀싱할 수 있다는 기반을 마련했다. 바로프리미엄(Freemium, 공짜를 뜻하는 free와 고급을 뜻하는 premium의 합성어)’이라는 개념이다. ‘웰메이드된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하고 이를 통해 사용자들을 끌어들여 비즈니스 기회를 만드는 접근이다. 예를 들어 <미생> 모바일 캠페인 후 방송사에서도 판권에 대해 관심을 보였고 기업에서도 다음 웹툰을 활용한 마케팅을 하겠다는 연락들이 들어오고 있다.” 배성준 본부장의 설명이다.

 

멀티유즈 콘텐츠 소스로서의 <미생>의 가치가 올라가며 앞으로 더욱 다양한 플랫폼 회사들의 협업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위즈덤하우스의 최유연 팀장은 “<미생> 시즌 1의 비즈니스가포털-출판사-방송사의 협업의 시작이었다면 시즌 2에서는 협업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확산시킬 예정이라고 말한다.

 

성공요인 분석

 

1. 샐러리맨의 애환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우수한 콘텐츠

 

대부분의 문화 콘텐츠가 그렇듯 <미생>의 가장 큰 성공요인은 물론 작품 그 자체의 뛰어남이다. 윤태호 작가는 스타 만화가답게 <미생>으로 재미와 작품성 모두를 잡는 데 성공했다. 작품 자체의 인기 비결은 크게 여섯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직장 생활과 바둑이라는 다른 소재를 어색하지 않게 연결했다. 각각의 영역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이라도 호기심을 갖고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융합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둘째, 오랜 준비기간 동안 열심히 취재한 자료를 바탕으로 영업 현장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거나 엎어지는 상사맨들의 현실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줬다. 셋째, 기업 현장에서 발표돼도 좋을 만한 수준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등장하거나 실제로 일어날 법한 기업 내·외부인과의 미팅 장면이 등장하는 등 디테일이 강조됐다. 기존의 직장인을 다룬 만화들이 주로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는직장인 코스프레에 그쳤던 것과 대조적이다. 넷째, 인턴, 사원, 대리, 과장, 차장, 임원, 그리고 퇴직한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급의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이들이 각각 겪을 수 있는 어려움과 갈등을 단계별로 소개했다. 어떤 독자라도 자신과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나 에피소드가 하나쯤은 포함돼 있었다. 다섯째, 소속된 팀의 구성원들이 각 직급별로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하면서 팀워크도 다지는 모습을 보여줘 이상적인 직장인, 이상적인 팀의 모델을 보여줬다. 여섯째, 독자들이 웹툰의 내용이나 바둑의 수를 자세하게 해설하거나 본인이 처한 현실과 대비해서 댓글을 달아주는 등 자생적이면서도 건전한 독자들의 상호작용이 있었다.

 

2. 작가의 창의성을 중시한 출판사의 전략적 판단

 

시간이 곧 비용인 일반 기업에서 디자이너, 연구개발자 등 창의적 업무를 맡은 직원들에게 무한정의 시간과 자유를 주기가 쉽지 않다. 출판사에서도 통상적으로는 경제·경영 관련 서적을 만들 때에는 기획 후 늦어도 1년 안에 내는 걸 목표로 한다. 워낙 환경이 급박하게 바뀌다 보니 시기를 놓치면뒷북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위즈덤하우스의 최유연 팀장은 그러나소설이나 만화처럼 작품의 독창성이 중요한 분야에선 작가가 원고를 줄 때까지 기다려준다하루에 원고 몇 장씩 내라고 독촉한다고 좋은 원고가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기업 현실에서는 창의성만큼 시의성도 중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영자에게 필요한 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창의성인지 시의성인지를 판단하는 능력, 그리고 소비자 트렌드에 너무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창작자에게 일정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운영의 묘다. 천재적인 창작자들이 일하는 방법은 다르다. 이들에겐 외적 동기보다 내적 동기가 더욱 중요하다. 인세, 계약금, 혹은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서 연재시기를 조정하거나 작품의 스토리를 바꾸는 것보다는 작가 본인이나 본인과 같은 창작가 커뮤니티가 납득할 만한 수준 높은 작품, 혹은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위즈덤하우스는 이런 측면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창작자가 천재적인 역량을 갖춘 경우라면 당장 상업적 수익을 올리기 위한 지시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자유를 주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다. 만화라는 장르적 특성과 스타 작가의 역량에 대한 신뢰에 기초해 내린 전략적 판단이었다. 윤태호 작가에게 무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허용했다. 긴 기다림이 큰 성과로 돌아온 것은 물론이다.

 

출판사가 원래의 기획 의도를 끝까지 고집하지 않고 작가와의 협의를 통해 진화, 발전시켜간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원래 위즈덤하우스가 윤태호 작가에게 처음 제안했던 건 <고수>라는 이름의 바둑만화로 바둑의 고수가 샐러리맨들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내용의 실용만화였다. 그러나 작가는 긴 고민 끝에 출판사의 기획 의도가 자신의 스타일이나 철학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평범한 사람들, 아픔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긴 호흡의 극화 형태로 다루기를 원했다. 출판사는 작가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렇게 탄생한 만화가 <미생>이다.

 

만약 위즈덤하우스가 원래 기획 의도대로 약속했던 계약 기간에 맞춰 작품을 만들어내라며 윤태호 작가를 닦달해 <미생>이 아닌 <고수>를 계약 후 1년 안에 내놓았다면 지금과 같은 성공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즈덤하우스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장르적 특성과 스타 작가의 역량 등 다각적 변수를 고려해 전략적 판단을 내렸다. 이처럼 유연한 경영 방침이 결국 대작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다.

 

3. 창작가를 주축으로 한 공동 운명체 형성

 

아무리 재미있고 작품성 좋은 만화라고 해서 모두 미생처럼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좋은 작품을 내는 건 전적으로 작가의 일이지만 이를 수익으로 연결하기 위해선 출판사, 포털, 방송사 등의 역할도 중요하다. 최근에는 일반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도 창의성, 혁신, 디자인 등이 강조되면서 창의적인 개발자, 엔지니어, 디자이너와 같은 혁신자의 힘을 극대화하는 방법에 대해 알고자 하는 기업들이 많아지고 있다. 미생과 같은 혁신적인 신제품을 낼 수 있는 창작자와 효과적으로 일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원소스 멀티유즈 콘텐츠로 최고의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현재 한국 웹툰 산업의 커뮤니티는 과거 출판 만화 시절에 비해 창작 활동에 우호적인 환경으로 조성돼 있다. 박정서 다음 웹툰 PD에 따르면 다음, 네이버, 파란, 야후 등에서 웹툰을 담당하거나 담당했던 기획자들은 대부분 <보물섬> 만화잡지를 보며 자란 30대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작가들과 오랜 기간 교류하면서 인간적인 친분을 맺고 그들과 외부 사회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이들 보물섬 세대는 회사의 이해관계와는 별도로 스스로가 만화를 좋아하고 한국 만화산업에 대한 애정이 크다. 과거 출판 만화 시장에서 작가들이 겪기도 했던 일부 부당한 대우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출판사들 역시 웹툰 업체들과 공생을 원하는 분위기다. 예전 만화시장을 좌지우지하던 월간지와 주간지들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웹툰의 파급력을 빌리지 않고서는 단행본도 많이 팔 수 없는 세상이란 걸 출판사들도 잘 알고 있다.

 

<미생>은 이런 업계의 상생 트렌드를 가장 잘 이용한 상품이다. 단행본 출간 이후 여러 가지 홍보·마케팅 활동이 다음과 위즈덤하우스, 그리고 서점들의 공동 작업으로 진행됐다. 예를 들어 예약 판매, 작가와의 만남, 사인회, 각종 사은품 증정 이벤트를 위즈덤하우스가 기획하면 다음에서는 온라인 홍보를 도왔다.

 

이런 협업이 가능했던 데에는 작가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다음과 위즈덤하우스 관계자들 모두 윤태호 작가가 모든 의사결정의 중심을 잡아준 데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작가가 여러 관계사들의 의사소통 및 협업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이끌었으며, 그래서 서로 간에 의견 충돌이 없었다고 덧붙인다. 웹툰 연재와 단행본 출간의 일자 조정, 각 상품의 가격도 모두 작가가 결정했고 다른 이해관계자들은 불만이나 우려가 있더라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를 수용했다. 그 결과 온라인 조회 수 10, 단행본 50만 권 판매에 드라마 판권 계약이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작가도 홀가분하게 연재 완료 후 <미생 시즌 2>를 위한 취재로 돌입했다. 관계사들 역시 이런 협업 관계를 2014년에도 꾸준히 이어가고 또 강화할 계획이다. 

 
 

주재우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 jaewoo@kookmin.ac.kr

주재우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는 서울대에서 인문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고 토론토대 로트만경영대학에서 마케팅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제품 개발, 디자인 마케팅, 소비자 행동을 주로 연구한다.

 

조진서 기자 cjs@donga.com 

  • 주재우 주재우 |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

    필자는 서울대에서 인문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를 받았고 토론토대에서 마케팅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제품 개발과 신제품 수용을 위해 디자인싱킹과 행동경제학을 연구하며 디자인마케팅랩을 운영하고 있다.
    designmarketinglab@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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