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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의 리더십

진시황의 죽음과 제국의 몰락 - 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7(끝)

김영수 | 54호 (2010년 4월 Issue 1)
 

천하 통일, 콤플렉스의 결정체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치열하게 접근해가는 과정에서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결함. 즉 콤플렉스는 장애가 아닌 적극적인 자극제로 작용할 수 있다. 역사상 사소한 콤플렉스는 물론 심지어 치명적인 결함을 가졌음에도 궁극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적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진시황 역시 그랬다. 그는 콤플렉스가 많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강인한 의지와 자기만의 독창적 방식으로 극복했고, 천하 통일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완수했다.
 
천하 통일을 이루기까지 진시황이 보여준 리더십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치밀한 준비와 시기를 놓치지 않는 냉혹한 결단, 필요에 따라 자신을 굽힐 줄 아는 유연한 전략적 두뇌,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물리력이 아닌 심리적으로 파고드는 독수, 확실한 마무리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통일에 따른 제국의 재편성 과정에서는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시스템에 의한 국정 운영, 이를 위한 문물제도의 정비와 통일, 정치·경제·군사·문화를 한꺼번에 염두에 둔 기반 시설의 확충(도로)과 정책(인구 이주책) 등은 오늘날 보아도 여간 참신하지 않다.
 
특히 통일 이전의 진시황은 대단히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위료나 왕전에 대해 한껏 자신을 낮춘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韓)나라가 진나라의 재정을 파탄 낼 요량으로 수리 전문가 정국(鄭國)을 간첩으로 파견한 사건에 대한 진시황의 대처 방식에서도 그의 유연함이 잘 드러난다. 정국이 간첩이란 사실이 탄로 나자 진나라 조정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펄펄 끓는 물 같았다. 정국을 잡아 죽이자는 의견은 물론 당시 진나라에서 활약하던 외국 출신들을 모조리 내쫓아야 한다는 여론까지 나왔다. 하지만 진시황은 이를 역이용했다. 정국에게 수리 공사를 맡겨 경제적으로 큰 득을 보았다. 수리에 관한 한 정국은 발군의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유연성은 군사 방면에서도 발휘되었다. 천하 통일을 위한 본격적인 전쟁은 진시황 나이 30세를 전후로 시작되었다. 첫 대상은 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른바 삼진(三晋)으로 불리는 한(韓), 조(趙), 위(魏)나라였다. 한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멸망시켰다. 그러나 명장 이목(李牧)이 버티고 있는 조나라는 만만치 않았다. 진시황은 27세(즉위 14년) 무렵 이목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다. 그 후로도 조나라에 대한 공격은 여의치 않았다. 이에 진시황은 32세를 전후로 강경 대응 전략에서 반간계(反間計)로 전략을 수정해 조나라 군과 정계를 흔들었고, 결국 기원전 228년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인사 방면에서도 진시황은 확실히 고수였다. 무엇보다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특정인을 승진시킬 때마다 그 권한을 억제하는 조치를 함께 취했다. 그는 생전에 특정인을 남다르게 총애한 일도 없었다. 측근인 환관이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철저하게 통제했다. 심지어 그는 황후조차 두지 않았다. 이는 음탕한 어머니에 실망해 여성에 대해 환멸감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외척의 발호를 근원적으로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다. 요컨대 진시황은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부리되,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자기만의 용인(用人)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다. 이는 통일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통일에 이르는 과정에서 진시황이 보여준 리더십은 ‘세상에 쓸모없는 인재는 없다. 사람을 쓸 줄 모르는 군주가 있을 뿐’이라는 속설을 정확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리더십의 변질
진시황의 리더십에 언제 변화가 생겼는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다만, 통일 이후 여러 지표들이 리더십의 질적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당시 진나라는 물론 시대의 숙원이었던 통일을 기점으로 그의 리더십에 변화가 생겼다고 보면 무난할 것 같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시기는 기원전 221년, 그의 나이 39세였다. 인생의 절정기에 그는 대업을 성취했다.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이 어마어마한 성취가 그의 자만심에 불을 댕겼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욕망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20년 넘게 늘 숨죽이며 살면서 억제했던 본능이 무한 권력과 함께 밖을 향해 발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했다.
 
통일 후 진시황이 취한 첫 조치는 놀랍게도 자신에 대한 호칭과 최고 권력자와 관련한 용어 변경 및 재검토였다. 그는 자신을 신(神)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로 올려놓았다. 이전에 쓰던 제왕들의 호칭도 못마땅해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는 이름을 취했다. 황제가 자신을 부를 때 쓰는 ‘짐(朕)’이란 용어도 처음 등장했다. 아울러 사망 후 자식과 신료들이 상의하여 붙여주는 이른바 ‘시호(諡號)’ 제도도 폐지했다. 누가 감히 자신의 사후 호칭을 결정할 수 있느냐는 이유에서다. 그의 자만심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정상에 오르거나 큰 성취를 이룬 자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의 원천이 바로 자만심이다.
 
진시황 리더십 변질의 두 번째 징후는 과도한 토목 공사를 통해 나타났다. 함양에다 크게 궁전을 짓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자신의 무덤 축조, 아방궁 수축, 만리장성 건설, 각종 도로공사 등이 쉴 새 없이 진행됐다. 자신의 무덤인 여산묘와 아방궁 건설에는 무려 70만 명이 동원되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진 건 당연했다.
 
진시황 리더십 변질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사건은 기원전 218년, 그의 나이 42세 때 발생했다. 훗날 한나라의 개국 공신이 되는 귀족 출신의 장량(張良)이 창해역사를 고용해 박랑사란 곳에서 진시황의 수레를 저격했다. 천만다행으로 수레를 잘못 골라 암살은 실패했지만 진시황이 받은 충격은 컸다. 진시황은 기원전 227년 33세 때 형가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바로 이어 형가의 친구 고점리(高漸離)의 공격을 받은 후, 10년 만에 다시 암살 위기를 당한 것이다. 30대 젊은 나이 때 당한 저격과 40대, 특히 천하 통일을 이룬 뒤 당한 저격은 충격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진시황은 전국적으로 3일 밤낮으로 대대적인 수색령을 내리는 것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성격인데다 저격까지 당하니 그의 성격은 더욱 폐쇄적으로 변했다. 오로지 시스템에 의해서만 제국을 통제하려는 강박관념이 더욱 커졌다. 44세 때는 야밤에 함양을 미행하다 도적을 만나 한바탕 싸운 일이 있었다. 이때는 관중 일대를 무려 20일 동안 대대적으로 뒤지는 소동을 벌였다.
 
40세를 전후로 진시황은 몸에 이상을 감지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일중독인 그가 철인이 아닌 이상 건강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41세 때부터 방사(方士)들과 동남동녀(童男童女)들을 동원해 신선(神仙)과 불로장생(不老長生) 약을 구하게 했다. 결국 사이비 유생과 방사들에게 속은 것을 안 그는 기원전 212년 48세 때 유생과 방사 460명을 생매장하는 갱유(坑儒)를 단행했다.
 
45세를 기점으로 진시황의 리더십은 파탄을 드러냈다. 47세 때 유명한 분서(焚書)가 단행되어 전국의 지식인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48세 때 갱유가 있었다. 모두가 신경질적인 반응이었고, 이는 그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건강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에 약물을 남용하고 결국 약물에 중독되었을 거라는 주장은 그의 죽음과 관련해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이런 건강 문제가 무리한 정책 추진을 낳았고, 무리수가 이어지면서 그의 리더십은 완전 파탄에 이르렀다.
 

진시황 리더십 변질 분석
진시황의 시뮬레이션은 늘 완벽했지만 실제 상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상상력과 실제 상황이 잘 맞아 떨어지지 않자 진시황의 리더십은 강박관념과 강하게 충돌했다. 결국은 독단과 극단적 방법까지 서슴지 않고 동원했다. 자기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자신의 계획에다 기어이 일의 과정과 결과를 맞추는 무리한 정책과 추진이 따랐다. 신발이 발에 맞지 않자 신발을 늘이거나 줄이는 게 아니라 발을 자르거나 억지로 늘려 신발에 맞추려 한 셈이다. 이런 잘못은 오늘날 리더들이 많이 범하는 실수이기도 하다. 여기에 건강 문제가 겹치면서 진시황의 강박관념은 극대화되고 무리수가 속출했다.
 
가상 현실이 안고 있는 치명적 약점은 돌발 변수에 대한 대응력(면역력)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많은 변수를 상정하고 그에 맞는 대응책을 준비한다 하더라도 실제 상황에서 일어나는 변수에 맞춰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다. 이때, 실제 상황과 맞지 않는 점을 추출하여 원인을 분석한 후 다시 시뮬레이션하고 현실에 적응하는 피드백의 수순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진시황은 이 단계를 생략했다. 건강 문제가 등장하면서 이 단계를 아예 무시했다. 흔히들 진시황이 조급한 성격이었다고 진단하지만 순서가 바뀌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건강 문제에 강박관념을 가지게 된 이상 자신의 제국을 하루라도 빨리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야 한다는 조급함은 필연적이다.
 
진시황은 통일 후 자신을 신격화하는 과대망상증까지 보였다. 이는 출세욕에 사로잡힌 일부 권신들의 부추김이 크게 작용했지만 그보다는 오랫동안 억눌렀던 진시황의 욕망이 통일을 계기로 꺼릴 것 없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과대망상은 지나친 자신감에서 나온다. 자만도 겹친다. 급기야 그는 자기 없는 진 제국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이른다. 통치 후반기 많은 시간을 내서 전국 순시에 몰두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순시에 힘을 쏟느라 후계자 문제도 깨끗하게 정리해두지 못했다. 이는 결국 훗날 조고(趙高)를 비롯한 야심가들에게 정변의 빌미를 제공했다. 일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고,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6국 백성들은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할 충분한 시간을 부여받지 못했다. 곳곳에서 모순과 갈등이 터져 나왔고, 이 모든 게 진시황을 압박했다. 그는 잠도 자지 못하고 일했지만 결국 쓰러졌다. 300만 제곱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끌어안은 채.
 
필자는 고대 한·중 관계사를 전공하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년 동안 사마천의 <사기>를 연구해오고 있으며, 2002년 외국인 최초로 중국 사마천학회의 정식 회원이 됐다. 저서로 <난세에 답하다> <사기의 인간경영법>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사기의 경영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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