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 통일, 콤플렉스의 결정체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치열하게 접근해가는 과정에서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결함. 즉 콤플렉스는 장애가 아닌 적극적인 자극제로 작용할 수 있다. 역사상 사소한 콤플렉스는 물론 심지어 치명적인 결함을 가졌음에도 궁극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적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진시황 역시 그랬다. 그는 콤플렉스가 많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강인한 의지와 자기만의 독창적 방식으로 극복했고, 천하 통일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완수했다.
천하 통일을 이루기까지 진시황이 보여준 리더십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치밀한 준비와 시기를 놓치지 않는 냉혹한 결단, 필요에 따라 자신을 굽힐 줄 아는 유연한 전략적 두뇌,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물리력이 아닌 심리적으로 파고드는 독수, 확실한 마무리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통일에 따른 제국의 재편성 과정에서는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시스템에 의한 국정 운영, 이를 위한 문물제도의 정비와 통일, 정치·경제·군사·문화를 한꺼번에 염두에 둔 기반 시설의 확충(도로)과 정책(인구 이주책) 등은 오늘날 보아도 여간 참신하지 않다.
특히 통일 이전의 진시황은 대단히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위료나 왕전에 대해 한껏 자신을 낮춘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韓)나라가 진나라의 재정을 파탄 낼 요량으로 수리 전문가 정국(鄭國)을 간첩으로 파견한 사건에 대한 진시황의 대처 방식에서도 그의 유연함이 잘 드러난다. 정국이 간첩이란 사실이 탄로 나자 진나라 조정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펄펄 끓는 물 같았다. 정국을 잡아 죽이자는 의견은 물론 당시 진나라에서 활약하던 외국 출신들을 모조리 내쫓아야 한다는 여론까지 나왔다. 하지만 진시황은 이를 역이용했다. 정국에게 수리 공사를 맡겨 경제적으로 큰 득을 보았다. 수리에 관한 한 정국은 발군의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유연성은 군사 방면에서도 발휘되었다. 천하 통일을 위한 본격적인 전쟁은 진시황 나이 30세를 전후로 시작되었다. 첫 대상은 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른바 삼진(三晋)으로 불리는 한(韓), 조(趙), 위(魏)나라였다. 한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멸망시켰다. 그러나 명장 이목(李牧)이 버티고 있는 조나라는 만만치 않았다. 진시황은 27세(즉위 14년) 무렵 이목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다. 그 후로도 조나라에 대한 공격은 여의치 않았다. 이에 진시황은 32세를 전후로 강경 대응 전략에서 반간계(反間計)로 전략을 수정해 조나라 군과 정계를 흔들었고, 결국 기원전 228년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인사 방면에서도 진시황은 확실히 고수였다. 무엇보다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특정인을 승진시킬 때마다 그 권한을 억제하는 조치를 함께 취했다. 그는 생전에 특정인을 남다르게 총애한 일도 없었다. 측근인 환관이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철저하게 통제했다. 심지어 그는 황후조차 두지 않았다. 이는 음탕한 어머니에 실망해 여성에 대해 환멸감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외척의 발호를 근원적으로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다. 요컨대 진시황은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부리되,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자기만의 용인(用人)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다. 이는 통일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통일에 이르는 과정에서 진시황이 보여준 리더십은 ‘세상에 쓸모없는 인재는 없다. 사람을 쓸 줄 모르는 군주가 있을 뿐’이라는 속설을 정확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리더십의 변질
진시황의 리더십에 언제 변화가 생겼는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다만, 통일 이후 여러 지표들이 리더십의 질적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당시 진나라는 물론 시대의 숙원이었던 통일을 기점으로 그의 리더십에 변화가 생겼다고 보면 무난할 것 같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시기는 기원전 221년, 그의 나이 39세였다. 인생의 절정기에 그는 대업을 성취했다. 그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이 어마어마한 성취가 그의 자만심에 불을 댕겼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욕망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20년 넘게 늘 숨죽이며 살면서 억제했던 본능이 무한 권력과 함께 밖을 향해 발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했다.
통일 후 진시황이 취한 첫 조치는 놀랍게도 자신에 대한 호칭과 최고 권력자와 관련한 용어 변경 및 재검토였다. 그는 자신을 신(神)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로 올려놓았다. 이전에 쓰던 제왕들의 호칭도 못마땅해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는 이름을 취했다. 황제가 자신을 부를 때 쓰는 ‘짐(朕)’이란 용어도 처음 등장했다. 아울러 사망 후 자식과 신료들이 상의하여 붙여주는 이른바 ‘시호(諡號)’ 제도도 폐지했다. 누가 감히 자신의 사후 호칭을 결정할 수 있느냐는 이유에서다. 그의 자만심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정상에 오르거나 큰 성취를 이룬 자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의 원천이 바로 자만심이다.
진시황 리더십 변질의 두 번째 징후는 과도한 토목 공사를 통해 나타났다. 함양에다 크게 궁전을 짓기 시작한 것을 필두로 자신의 무덤 축조, 아방궁 수축, 만리장성 건설, 각종 도로공사 등이 쉴 새 없이 진행됐다. 자신의 무덤인 여산묘와 아방궁 건설에는 무려 70만 명이 동원되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진 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