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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 from the Field

한국 vs. 대만, 신발전쟁 30년

권창오 | 45호 (2009년 11월 Issue 2)
한국과 대만의 ‘30년 신발전쟁’은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신발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전적은 1승2패로 한국의 열세. 가장 중요한 최근의 일전에서도 대만이 승리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신발업계는 뛰어난 기술력과 제품 기획력을 앞세워 최근 대만을 맹추격 중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과 대만의 30년 신발전쟁을 전체적으로 소개하면서, 특히 최근의 3차전에서 한국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세계 스포츠 신발 생산을 석권했던 한국은 해외진출 전략의 오류와 정부 정책의 엇박자로 주도권을 대만에 뺏기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의 중요한 시사점은 해외직접투자의 성패가 입지 요인이 아니라, 전략적 요인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어디로 가느냐’보다 ‘어떻게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필자는 한국과 대만 기업의 비교분석을 통해 이를 실제로 검증했다.(‘신발산업 FDI전략의 결정변수와 성과와의 관계: 한국과 대만을 중심으로’, 권창오, 2008)
 
 
 
제1라운드(1970∼80년대 중반): 대만 우위
지금부터 50여 년 전인 1960년대에도 신발 생산은 복잡하고 노동집약적인 공정을 요구했다. 당연히 원가 문제가 대두됐다. 다국적 기업들은 해외에 있는 생산기지를 찾았다.
 
1960년대 세계 신발 생산의 중심은 일본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산업 고도화를 이루고, 임금 수준도 높아지면서 중심축이 한국과 대만으로 옮겨가게 됐다.



상대적으로 수혜를 더 많이 본 쪽은 대만이었다. 대만은 1970년대 일본의 수출 물량을 이어받아 신발산업을 크게 진흥시켰다. 타이중(臺中) 강가에서 생겨난 밀짚모자 산업이 신발갑피 산업으로 발전해 있었기 때문이다. 대만은 중소형 완제품 공장을 중심으로 무수한 가족단위 작업장이 모여 하청관계를 이루는 위성공장(衛星工場)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각 생산 공정은 따이공(代工)이라 불리는 중개인을 통해 분업적 생산 네트워크로 연결됐다. 이런 시스템은 노동력의 유연한 배치와 전체 시스템의 위험 분산에 큰 도움이 됐다. 세계적 신발 메이커들은 당연히 대만으로 몰려들었다.
 
제2라운드(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 : 한국 우위
그렇지만 대만은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기인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대량생산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생산 품목도 중소기업에 적합한 슬리퍼와 저가 비닐화, 플라스틱 사출 신발이 중심이었다. 한국 기업들은 1970년대 시장규모가 크게 확대된 스포츠화를 대량생산하면서 대만을 따라잡을 전기를 마련했다. 스포츠화는 가격과 부가가치 면에서 플라스틱 사출화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한국 기업들은 결국 1980년대 중반 이후 대만을 추월했다.
 
한국의 신발산업도 1970년 이후 일본 자본과 수출 오더가 몰리면서 질적 고도화를 이뤘다. 이에 따라 부산 지역에 세계 스포츠화 생산 클러스터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1972년에는 단일공장으로 세계 최대인 국제상사 사상공장이 완공됐다. 1974년에는 삼화가 나이키와 계약을 맺고 당시 최대의 히트품상인 나일론 트랙슈즈(Nylon Track Shoes)를 집중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한국 기업들은 대만과 달리 대규모 생산방식을 적용한 스포츠화를 중점적으로 생산했다. 초기의 스포츠화는 열을 가해 밑창을 붙이는 가황방식을 사용해 내구성이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접착제로 밑창을 붙이는(cold cement) 케미컬화는 내구성과 기능성이 매우 높았다. 스포츠화는 신발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됐고, 당연히 나이키와 아디다스, 리복 등의 스포츠 신발 브랜드가 세계 신발산업을 좌지우지하게 됐다.(그림2)
 
 
이런 과정에서 한국 신발기업들은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나이키 등 신흥 브랜드들이 처음 가져온 제품은 대부분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구두 등 전통 신발에 비해 갑피와 밑창 등 부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국 기업들은 이런 제품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제품의 규격과 생산방법을 고안해냈다. 여러 가지 부품을 모아 모듈화하고, 갑피의 절단과 천공을 기계화해 동시에 대량으로 진행했으며, 공정을 체계적으로 세분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컨베이어를 이용한 운동화 대량생산 방식은 국제상사에서 적용한 시스템(ICC Production Syst-em·ICC는 국제상사의 예전 영문 이름인 International Chemical Corporation의 약자)이란 명칭으로 불렸으며, 이후 스포츠화 생산의 표준이 됐다. 대량생산은 소비자들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해 수요가 더욱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를 가져왔다.
 
지금은 잊혀진 국제상사, 삼화, 태화, 진양, 그리고 지금도 국제적인 신발 기업으로 생산활동을 하고 있는 화승 등은 새로운 생산기법을 적용한 신제품 생산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대만 기업들을 여유 있게 앞서나갔다.
 
제3라운드(1990년대 초반∼ 현재) : 대만 압도
1980년대 후반 한국과 대만의 신발 기업들은 해외진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나이키 등 글로벌 원청업체들이 주문자상표부착(OEM) 생산기지를 인건비가 더 싼 나라로 옮겨 판매가격 상승을 막고 이익률을 높이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만은 한국보다 더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신대만 달러는 1985년에서 1990년 사이 미국 달러 대비 30%나 절상됐다. 대만의 임금은 1984년에서 1988년 사이 82%나 높아졌다. 그 결과 1987년과 1988년 2년 동안 대만의 신발회사 1200개 중 4분의 1 이상이 폐업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대만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기고, 한국의 장점을 흡수하는 혁신을 시도했다. 1992년까지 대만 신발업체의 80%가 중국으로 생산 설비를 이전했다. 대만 기업들은 주 생산품인 비닐 신발을 한국과 같은 케미컬화로 바꾸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기술 수준이 낮고 가격이 싼 아동화와 캐주얼화에 생산을 집중해 스포츠화 부문을 키워나갔다.
 
이들은 중국 광둥성 둥관(東莞) 지역에 신발생산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다. 둥관의 클러스터에서는 완제품과 고무, 화합물 배합, 사출, 금형 등의 업체들이 계획적인 생산 집적을 이뤘다. 거의 모든 유관 업체들이 반경 50km 안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집적은 납기의 단축과 인적 네트워크 구축, 정보교환 활성화 등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대만 기업들은 전통적인 소규모 운영체제를 탈피해 생산 규모를 한국보다 더 대형화했다. 이에 소요되는 자금은 대만과 홍콩의 자본시장에서 기업공개를 통해 조달했다. 또 한국 기업을 방문 조사하고, 기술제휴를 맺거나 한국 기술자를 고용해 생산기술을 확보했다. 해외 바이어들은 차츰 한국 기업보다 대만 기업들을 선호하게 됐다.
 
대만 기업들은 ‘규모’를 무기로 삼아 중국 정부와의 협상도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둥관은 대만의 기술과 중국의 가격을 결합한 세계 최고의 신발산업 단지로 발돋움했다.
 
한국 기업들도 비슷한 시기에 중국 중부의 칭다오(靑島)로 생산기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 업체들은 당시 최고의 신발생산 클러스터인 부산을 근거지로 하면서도 산업 클러스터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칭다오 진출은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뤄졌다.
 
한국정부의 정책적 실책도 걸림돌이 됐다. 당시 정부는 생산기지 공동화와 기술유출 등을 이유로 신발기업의 해외진출을 막는 해외투자규제(1989∼1993)를 실시했다.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기업의 수와 투자액수를 제한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 신발업계의 해외진출은 정부의 눈치를 보는 큰 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이나 한계기업 중심으로 이뤄졌다.
 
당연히 한국계 신발 기업들은 둥관의 대만 기업들보다 클러스터의 협업능력과 정보기능이 훨씬 떨어지는 상황에 처했다. 바이어들의 관심은 잘 조직화된 둥관 클러스터로 옮겨갔다. 현재 대만계 기업은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등 세계 3대 스포츠화 브랜드의 생산량 중 70%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20%에 불과하다.(표2)
 
 
 
 
3라운드의 복기(復碁): 한국과 대만의 해외투자전략 차이
한국 기업과 정부의 실책은 대만 기업들에게 천금의 기회가 됐다. 대만은 스포츠화 생산기술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쉽게 제치고 세계신발 생산의 리더십을 단숨에 확보했다.
 
대만 기업들의 3라운드 승리 비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중국과 대만의 문화적 유사성과 쉬운 의사소통, 사업이 유리한 지역에의 진출 등 입지적 요인을 꼽는다. 하지만 필자는 2008년 한국(70개)과 대만(50개)의 신발부문 해외투자기업 120개를 대상으로 한 실증분석(신발산업 FDI전략의 결정변수와 성과와의 관계)에서 해외직접투자(FDI)의 성패가 입지요인보다 전략적 요인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필자는 FDI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기업자원 요인(기술, 바이어와의 관계, FDI 경험, 인적자원)과 △투자대상국 요인(생산비, 인프라 수준, 투자제도, 국가 위험도, 문화적 거리), △FDI 투자전략 요인(투자지분, 동반진출, 투자규모, 전입 시기, 생산 현지화) 등 크게 3가지로 나눴다. 이를 다중회귀분석을 통해 살펴보았더니 놀랍게도 투자대상국 요인에서는 FDI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유의한 요인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기업자원 요인에서는 기술, 바이어와의 관계, FDI 경험 등 3가지가, FDI 투자전략 요인에서는 투자지분, 동반진출, 생산 현지화의 3개 요인이 유의미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중 기술 등 기업자원 요인은 양국이 비슷한 수준이었다. 결국 FDI 투자전략요인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이는 첫째, 신발산업의 해외진출 성공 요인이 ‘어디로 가느냐’보다 ‘어떻게 가느냐’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둘째, 한국 기업들이 대만 기업들보다 ‘부품업체와의 동반진출’, ‘부품의 현지화 전략’, ‘투자지분의 분산’ 등의 측면에서 뒤떨어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전략요인은 앞서 설명한 생산 클러스터의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해외 바이어의 발길은 대만 기업들에게 향하게 됐다.(표3)
 
 
 
 
한국과 대만 신발산업의 미래
대만의 신발 생산 우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가? 많은 신발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대만이 중국에서 구축한 압도적 우위와 생산 클러스터를 동남아시아까지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의 파우첸(寶城) 사는 한국의 국제상사가 1980년 세계 최대인 120개 라인을 운영할 때 단 3개의 생산라인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총 368개의 라인을 운영하며 연간 41억 달러어치의 신발을 수출한다.
 
대만 신발업계는 신발 생산 사업이 미래 산업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들은 나이키 등 대형 브랜드와 주식을 상호교환하는 등 장기적이며 전략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필자는 최근 대만 신발업계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중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서 앞으로 100년 이상 장기 계획을 가지고 생산활동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한국 기업에 좀처럼 새로운 기회가 오지 않을 것도 같다.
 
 
하지만 분명 한국 기업들에게도 기회가 있다. 그 근거는 신발 브랜드 사업과 첨단 미래 신발, 북한의 활용이란 3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①신발 브랜드 사업 OEM 업체의 수익성은 브랜드를 가진 회사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대만은 신발 생산의 강자로 올라서긴 했지만 자체 브랜드가 미흡하다는 약점이 있다. 반면 한국의 신발 생산 업체들은 트렉스타, 비트로, 스타필드, EXR, KIKA, RYN 등 자체 브랜드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2007년 기준 부산 신발산업의 매출액 1조7503억 원 중 1조35억 원이 도소매유통에서 나왔다. 이는 국내 신발산업의 축이 제조에서 서비스, 디자인, 브랜드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우리 신발 기업들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품질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내수 시장은 외국 유명 브랜드들로부터 ‘죽음의 시장’이란 평을 받는다. 해외의 유력 바이어들은 “한국 신발 브랜드는 고가 정책으로 최고급 유통 채널을 이용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입을 모은다.
 
아래에서 설명할 첨단 기능성 신발의 경우, 일반 운동화와 달리 기능만 뛰어나면 한국 브랜드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 한미와 한-EU FTA는 한국 브랜드들이 외국 시장으로 쉽게 진출할 길을 트게 될 것이다.
 
②첨단 미래 신발 등산화와 웰빙화, IT신발 등의 분야에서 우리 기업들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부산은 기술과 소재, 전문인력 인프라가 모두 갖춰진 신발 산업의 최고 클러스터다. 운동량이나 운동거리 등을 측정해 주는 IT신발을 예로 들어 보자. IT신발 분야에서는 부품이 제품경쟁력을 좌우한다. 그런데 센서와 마이크로모터, 배터리 등의 IT신발 부품은 휴대전화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휴대전화는 우리나라의 대표 산업이다. 해외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다른 나라보다 최소 1년은 앞서 있다고 평가한다. 한국의 IT와 신발기술의 융합은 웰빙화, GPS화, 체중조절화, 운동거리측정화, 뮤직신발, 메디컬신발 등 각종 인공지능신발을 만들어가고 있고, 한국 기업들은 이 부문에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매년 11월 열리는 부산국제신발전시회도 올해부터는 부산국제첨단신발부품전시회로 이름을 바꿔 열리게 됐다.
 
③북한의 활용 만약 북한을 신발 생산 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면 한국은 OEM 측면에서도 대만을 능가할 수 있다.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보다 인건비가 싸고, 기술 인력이나 원부자재의 수급도 부산에서 쉽게 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은 ‘신발 클러스터’란 개념에서 볼 때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다. 중국에서는 가까운 곳이라고 해봐야 이동에 3∼4시간이 걸린다. 글로벌 차원에서는 7∼8시간 거리도 가깝다고 한다. 부산에서 개성은 6∼7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부산과 개성은 충분히 하나의 클러스터로 엮을 수 있다.
 
한국의 신발 산업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회생의 불씨를 계속 지펴왔다. 이제 그동안 축적한 기술과 브랜드, 노하우를 이용해 재도약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 신발산업이 새로운 제품과 전략으로 세계 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것을 학수고대해본다.
 
필자는 국제그룹 종합조정실에서 조사와 신규사업업무를 담당했으며, 국제상사에서 자체 브랜드인 프로스펙스 수출 부장을 지냈다. 이후 신발수출회사 STI와 신발정보회사 ShoeDB를 설립해 운영했다. 2005년 신발산업진흥센터 2대 소장으로 선임됐고, 3대에 이어 4대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서강대에서 국제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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