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Innovation

라인의 기적 낳은 ‘칼의 도시’ 졸링겐

43호 (2009년 10월 Issue 2)

독일 현대사도 한국사만큼 드라마틱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자 전범국이었던 독일은 전후의 아픔을 딛고 1950∼1960년대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거듭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라인 강의 기적’을 먼저 일군 것이다.
 
‘라인 강의 기적’의 주 무대가 루르 지역이다. 루르는 독일의 라인 강 하류에서 합류하는 강 이름이다. 이 지역에는 석탄 등 에너지원과 아연, 납, 황철광 등 지하자원이 풍부해 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루르 강과 북쪽의 리페 강, 서쪽의 라인 강 등을 잇는 자연 수로와 인공 운하, 거미줄처럼 연결된 철도망이 잘 갖춰져 공업 입지로 손색이 없다. 이 같은 풍부한 자원과 사회간접자본을 배경으로 도르트문트, 뒤스부르크, 보훔, 에센 등과 같은 공업도시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에센은 루르 공업 지대의 핵심 도시였다. 역사적으로 최고의 철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14세기부터 광산이 개발됐다. ‘철강 왕’ 혹은 ‘대포 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알프레트 크루프가 만든 철강과 무기회사인 크루프 사의 본거지가 바로 에센이다. 크루프 사는 티센 사와 합병해 티센그룹으로 바뀌었고, 범용 철강 제품보다 고품질 철강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루르 지역의 우수한 공업 입지가 라인 강의 기적을 만든 자양분이었다면, 독일 특유의 장인 정신과 기술력을 겸비한 작지만 강한 기업을 뜻하는 ‘미텔슈탄트(Mittelstand)’는 기적을 현실로 만든 주인공들이다.
 
필기구의 파버카스텔, 만년필의 몽블랑, 카메라 렌즈의 카를차이스, 정수기의 브리타, 인쇄 기계의 하이델베르크, 고속 담배 제조기의 하우니 등이 세계를 석권한 독일 미텔슈탄트다. 이 밖에 와인 운송 분야의 힐레브란트, 특수 선박 엔진과 디젤 엔진의 MTU, 세탁기의 밀레, 주방용품의 휘슬러, 공구 제작회사인 길데마이어, 단추 생산업체인 유니온 크놉도 대표적인 미텔슈탄트로 꼽힌다.
 
루르 지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졸링겐(Soling-en)에도 독일을 대표하는 미텔슈탄트가 있다. 1374년에 자유도시가 된 졸링겐은 예로부터 좋은 철이 많아 명품 칼의 주산지였다. 독일의 유명한 대장장이들이 졸링겐에 모여 살았고, 칼 생산자들로 이루어진 길드(guild)도 있었다. ‘쌍둥이 칼’로 유명한 독일의 세계적인 칼 제조회사 ‘츠빌링 J A 헹켈스’는 이 졸링겐의 대장장이 가문에서 성장한 대표적 미텔슈탄트다. 1731년 졸링겐 지역에서 칼을 만들어오던 요한 페터 헹켈스가 헹켈스 사를 설립했다. 그는 당시 지방 영주였던 그라프 폰 베르크 밑에서 군인용 단검을 제작하다 민수용 칼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며 ‘쌍둥이 칼’의 명성을 얻었다.
 
헹켈스는 졸링겐 지역에서 발달한 합금과 열처리 기술을 토대로 뛰어난 절삭력과 디자인의 명품 칼을 생산하며 세계 시장에 이름을 알렸다. 전통적인 무쇠 칼은 절삭력은 좋지만 녹이 슬어 비위생적이다. 반면 스테인리스스틸은 위생적이지만 쉽게 무뎌지고 절삭력이 떨어지는 게 단점이다. 헹켈스는 스테인리스스틸과 고탄소강을 적절히 배합해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운 칼을 만들어냈다. 두 재료를 어떤 비율로 배합하느냐가 칼의 품질을 좌우하는데, 이 회사는 자신만의 비밀을 갖고 있다. 헹켈스는 칼의 부위별 기능에 따라 여러 재질을 하나로 합치는 합금 기술인 에스체테(SCT) 공법, 열처리와 냉각 방식으로 칼의 강도와 예리함을 높이는 프리오두르(Friodur) 공법으로 세계 특허를 받았다.
 
기술을 강조하는 졸링겐의 헹켈스 공장은 장인들의 집합소다. 종업원 700명 중 450명 정도가 생산직이고, 장인의 최고 영예인 마이스터도 15명이나 있다. 칼의 절삭력과 더불어 손에 착착 감기는 손잡이 디자인도 이 회사의 강점이다.
 
 
 
헹켈스는 칼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가위, 냄비 등 주방 용구, 조리 도구, 양식기, 접시, 미용 기구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지역 특산물인 칼을 세계적 브랜드로 키우고, 핵심 역량인 칼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주방 기구 시장으로 사업을 다각화한 것이다. 지난해 이 회사는 3억3100만 유로의 매출을 올렸고, 100여 개 국가로 상품을 수출해 전체 매출의 80%를 벌어들였다. 금융위기 전인 2007년 한 해에만 2억8200만 유로의 영업이익을 올려 인구 16만 명의 지역 사회를 먹여 살리는 효자 기업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칼의 도시(Klingenstadt)’ 졸링겐의 힘은 연관 산업이 한데 모이는 클러스터(Cluster)에서 나온다. 스웨덴의 시스타, 핀란드의 울루, 미국 샌디에이고, 프랑스의 소피아앙티폴리스, 스위스의 바젤 등 대표적 산업 클러스터 도시들처럼 기술과 노하우,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이전되는 ‘클러스터의 파워’를 토대로 세계 칼 시장을 석권했다. 특정 지역에 칼 전문 기업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다른 역량 있는 기업들이 잇달아 등장하는 선순환이 일어난 셈이다. 1814년 볼프강 우스토프가 졸링겐에 설립한 우스토프 사는 드라이작(Dreizack) 칼을 수작업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휘두르는 삼지창이 드라이작이다. 이외에도 졸링겐에는 보커, 아이크호른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여러 칼 브랜드가 모여 있다. 졸링겐 외에도 영국의 셰필드나 일본 기후 현의 세키에도 칼을 전문으로 하는 클러스터가 형성돼 있다. 세키 시는 750년 전부터 칼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곳의 칼은 일본 시장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졸링겐 시 당국도 ‘칼’을 주제로 도시 브랜드 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시내에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해오는 온갖 칼들을 전시하는 ‘칼 박물관(Deutsches Klingenmuseum)’이 있다. 박물관 정원에서는 나이프, 스푼, 포크, 가위 형상의 다양한 조각물이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칼 박물관의 웹사이트(www.klingenmuseum.de)도 한번 둘러볼 만하다.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신흥 국가의 급성장 속에서 ‘라인 강의 기적’은 이제 흘러간 옛 노래가 됐다. 화려했던 에센과 도르트문트의 공장 불빛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과거의 산업도시들은 ‘도시 재생’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공장을 박물관과 문화 공간, 친환경 공간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하지만 졸링겐은 칼과 주방 기구에 특화된 산업 클러스터의 응집력을 토대로 아직도 건재하다. 경쟁 전략의 대가인 마이클 포터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관련 및 지원 산업과의 연계가 도시의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지적하며, 칼을 제조하는 기업들이 협력한 독일의 졸링겐을 거론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졸링겐처럼 전통 기술과 장인 정신이 어우러진 특산품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작지만 강한 도시들이 많았으면 한다. 대기업에 밀리지 않는 ‘한국판 미텔슈탄트’야말로 세계 최고 선진국으로 성장하는 핵심 역량임을 졸링겐의 역사가 웅변하고 있다.
 
필자는 마케팅 컨설팅 회사인 리드앤리더 대표이자 비즈니스 사례 사이트인 이마스(emars.co.kr)의 대표 운영자다. 서울대와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한국은행과 SK에너지에서 근무했고 건국대 겸임교수를 지냈다. <로하스 경제학> <글로벌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하인리히 법칙> 등의 저서와 <깨진 유리창 법칙> 등의 역서가 있다.
 
편집자주 한국 최고의 마케팅 사례 연구 전문가로 꼽히는 김민주 리드앤리더 컨설팅 대표가 전 세계 도시의 혁신 사례를 분석한 ‘City Innovation’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급격한 환경 변화와 거센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도시를 운영한 사례는 행정 전문가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자들에게도 전략과 조직 운영, 리더십 등과 관련해 좋은 교훈을 줍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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