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현대사도 한국사만큼 드라마틱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자 전범국이었던 독일은 전후의 아픔을 딛고 1950∼1960년대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거듭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라인 강의 기적’을 먼저 일군 것이다.
‘라인 강의 기적’의 주 무대가 루르 지역이다. 루르는 독일의 라인 강 하류에서 합류하는 강 이름이다. 이 지역에는 석탄 등 에너지원과 아연, 납, 황철광 등 지하자원이 풍부해 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루르 강과 북쪽의 리페 강, 서쪽의 라인 강 등을 잇는 자연 수로와 인공 운하, 거미줄처럼 연결된 철도망이 잘 갖춰져 공업 입지로 손색이 없다. 이 같은 풍부한 자원과 사회간접자본을 배경으로 도르트문트, 뒤스부르크, 보훔, 에센 등과 같은 공업도시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에센은 루르 공업 지대의 핵심 도시였다. 역사적으로 최고의 철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14세기부터 광산이 개발됐다. ‘철강 왕’ 혹은 ‘대포 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알프레트 크루프가 만든 철강과 무기회사인 크루프 사의 본거지가 바로 에센이다. 크루프 사는 티센 사와 합병해 티센그룹으로 바뀌었고, 범용 철강 제품보다 고품질 철강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루르 지역의 우수한 공업 입지가 라인 강의 기적을 만든 자양분이었다면, 독일 특유의 장인 정신과 기술력을 겸비한 작지만 강한 기업을 뜻하는 ‘미텔슈탄트(Mittelstand)’는 기적을 현실로 만든 주인공들이다.
필기구의 파버카스텔, 만년필의 몽블랑, 카메라 렌즈의 카를차이스, 정수기의 브리타, 인쇄 기계의 하이델베르크, 고속 담배 제조기의 하우니 등이 세계를 석권한 독일 미텔슈탄트다. 이 밖에 와인 운송 분야의 힐레브란트, 특수 선박 엔진과 디젤 엔진의 MTU, 세탁기의 밀레, 주방용품의 휘슬러, 공구 제작회사인 길데마이어, 단추 생산업체인 유니온 크놉도 대표적인 미텔슈탄트로 꼽힌다.
루르 지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졸링겐(Soling-en)에도 독일을 대표하는 미텔슈탄트가 있다. 1374년에 자유도시가 된 졸링겐은 예로부터 좋은 철이 많아 명품 칼의 주산지였다. 독일의 유명한 대장장이들이 졸링겐에 모여 살았고, 칼 생산자들로 이루어진 길드(guild)도 있었다. ‘쌍둥이 칼’로 유명한 독일의 세계적인 칼 제조회사 ‘츠빌링 J A 헹켈스’는 이 졸링겐의 대장장이 가문에서 성장한 대표적 미텔슈탄트다. 1731년 졸링겐 지역에서 칼을 만들어오던 요한 페터 헹켈스가 헹켈스 사를 설립했다. 그는 당시 지방 영주였던 그라프 폰 베르크 밑에서 군인용 단검을 제작하다 민수용 칼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며 ‘쌍둥이 칼’의 명성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