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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에서 북경까지

말 않는 이 있다면, 발언권부터 줘 보라

안동섭 | 288호 (2020년 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중국 송나라 때에는 형식적으로 3년에 한 번 30여 명을 선발하던 과거시험 제도를 완전히 바꿔 3년에 한 번 1400명씩을 뽑도록 했다. 지방 유력자의 자제들은 ‘서울’로 올라와 관직에 오르기 위해 시험을 쳤다. 그렇게 지방의 유력자들은 서울에 의해 관리되고 지배됐다. 문제는 처음으로 남중국(강남)의 경제력이 북중국(강북)의 경제력을 앞서면서 두 지역 간 교육과 문화 인프라 격차도 벌어졌다는 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균형선발제도가 추진됐으나 최종 선발에는 적용되지 못했다. 나중에 벌어진 북중국의 송나라에 대한 민심 이반은 바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밀어 넣을 수 있는 통로가 없었음에 기인한다. 회의실에서, 강의실에서, 내무실에서, 거실에서, 술자리에서 사흘째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 발언할 수 있는 통로부터 만들어 줘라. 그게 이후에 조직이나 자신을 살리는 길이 될 수도 있다.


편집자주
인간사에는 늘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함은 바로 그 패턴 속에서 현재의 우리를 제대로 돌아보고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철학과 역사학을 오가며 중국에 대해 깊게 연구하고 있는 필자가 주(周)나라가 낙양을 건설한 후로 현대 중국이 베이징에 도읍하기까지 3000년 역사 속에서 읽고 생각할 만한 거리를 찾아서 서술합니다.




사람이 먼저다. 나에게 역사학으로의 문을 열어준 선생님은 한 사회가 변화하는 양상을 들여다볼 적엔 늘 인구 변동(demography)을 먼저 살펴보라고 하셨다. 사람이 늘었는지 줄었는지, 어디서 늘어나는 동안 어디서 줄었는지, 그 많던 사람은 누가 다 먹었는지를 꼼꼼히 챙겨보면 변화의 윤곽이 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 축으로 만들어진 좌표평면에 사람들을 점찍는 것이 먼저다.

중국사를 통틀어 ‘사람’의 측면에서 가장 큰 변화가 생긴 시기를 하나만 꼽자면 아마도 송(宋, 960-1279) 대일 것이다. 바로 이때 중국의 통일제국이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에서 벗어나 개봉(開封)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장안 근처에서 발호한 주나라(周, 약 BC1050-BC256) 왕실이 낙양을 건설했고, 낙양을 불태운 동탁(董卓, 138-192)은 장안으로 옮겨갔고, 장안이 부담스러운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는 낙양으로 천도했다. 낙양과 장안은 마치 자존심 강한 두 천재처럼 도읍지 자리를 두고 끝없이 경쟁했으나 송나라 황실이 개봉에 자리 잡은 이후로 체제의 변두리로 밀려나고 만다. 저쪽에 있던 황제가 이쪽으로 오면서 한 시대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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