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 국내 기업들 사이에 공채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데는 직무가 아닌 사람 중심으로 인사 시스템을 운영해왔던 관행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의 발전과 세대교체, 직무별 전문성이 강조되는 조직문화적 변화 등을 고려할 때 국내 기업들의 채용 문화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1. 직무별 채용을 핵심으로 하는 수시 채용 문화로의 이행 2. AI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객관적 채용 방법론 개발 3. 채용의 전 과정에 실무 부서의 참여도 제고
지방 호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나라를 세운 고려 태조 왕건은 공신에게 벼슬을 내리거나 귀족의 자제를 추천받아 관리로 삼았다. 관리가 된 공신과 귀족의 자제들은 특권 의식을 갖기 쉬웠고 친밀한 가문 간에 파벌을 형성했다. 4대 왕 광종은 이로 인한 문제를 바로 잡고자 제술과 명경, 잡과의 세 가지 분야 시험을 보는 과거제도를 도입했다. 공채로 선발된 중류층 지식인들은 탁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행정 조직을 견고하게 다졌고, 고려 초기의 정치 사회를 안정화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덕분에 광종 역시 고려 왕조의 기반을 세운 왕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과거 시험의 전통은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 한국 사회의 행정, 사법 공무원 선발뿐만 아니라 사기업에서의 인재 선발 방식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방법으로, 그래서 귀족만이 아니라 평민 자제들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여겨지며 오랜 기간 고유의 채용 문화를 형성하며 자리를 잡아 왔다.
근래 들어 우리 기업의 각종 제도와 시스템이 서구화되고 있고 AI(인공지능)와 빅데이터 등 고도의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 경영 혁신을 도모하는 추세가 확산되면서 대규모 공채가 아닌 수시로 전문가를 영입하는 방식이 늘고 있다. 특히 국경 없는 인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서구기업들의 인재 채용 방식과 우리 기업이 갖고 있는 채용 문화 사이의 차이점을 알아보고 개선점을 탐색할 필요가 커졌다. 이 원고에서는 한국 인사 문화 저변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공채 중심의 채용 문화를 되짚어 보고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뿌리 깊은 공채 문화
우리 기업의 공채 역사는 1957년 삼성그룹의 대졸 신입사원 공채로부터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여성 공채, 열린 채용, 계열사별 채용 등 일부 변화가 있었으나 서구 기업의 채용 방식과 비교하면 여전히 그 차이가 크다. (표 1) 2017년 경영자총협회의 채용 실태 조사에 따르면 300인 이상 기업의 정기 채용은 67.9%로, 직무별 수시 채용(32.1%)에 비해 대규모 공채가 2배 이상 많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차이는 채용에 대한 우리나라와 서구 간 시각차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국내 기업들은 조직에 적응해 향후 리더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는 인재를 중시하며 직무 전문가보다는 제너럴리스트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앞서 소개한 같은 조사에서 실무 면접의 평가 기준으로 업무 지식(30%)이 1위를 차지한 데 비해 임원 면접에서는 조직적응력(24.4%)이 1위였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반면 서구 기업의 경우 직무마다 최고의 전문가를 찾아내려는 경향이 강하다. 구글 경영진 중 한 명이 인터뷰에서 “최고 수준의 기술자가 갖는 가치는 평균적인 기술자의 300배에 달한다. 공대 졸업반의 기술자 전체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명의 비범한 기술자를 선택하겠다”고 언급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 기업이 조직력을 중시해 평균 수준의 허들을 통과한 ‘적정 인재’를 선호하는 데 비해 서구 기업은 비범한 ‘핵심 인재’를 뽑기 위해 탁월한 기준을 제시한다(raising bar)는 것이다.
서구 기업은 신입사원도 경력직원과 마찬가지로 수시 채용 방식으로 모집한다. 공석이 생겼거나 신규 포스트가 나오면 우선 해당 직무를 잘할 만한 내부 직원을 공모해 순환 배치한다. 적합한 후보자가 없으면 임직원의 지인 추천을 받거나 인사부서의 채용 담당자가 외부 리크루팅 업체 또는 온라인을 통해 모집한다. 채용 계획 단계에서 어떤 직무에 대한 인력을 모집할지 결정돼 있으므로 직무 전문가를 뽑는 절차로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임직원이 전문가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으므로 추천 채용(referral)이 일반화돼 있다. 나아가 일반인들이 자신의 이력서를 SNS에 올려두면 기업 채용 담당자들이 검색해 보고 후보자를 선정해 연락하는 소셜네트워크 리크루팅(Social Network Recruiting)이 보편적으로 활용된다.
천성현
- (현) 포스코 인재경영실 그룹장
- 대우경제연구소, PWC, 딜로이트컨설팅 등에서 인사조직 전문가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