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3. 전쟁에서 배우는 인재 기용 전략
Article at a Glance
전쟁사 연구자들이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고 인정하는 전투에는 어김없이 ‘반골형’ 지휘관이 등장한다. 그들은 주로 자신의 직책은 물론 목숨까지도 잃게 만들 수 있는 상관의 지시마저 거부하고 자신의 경험과 분석에 근거해 현장에서 놀라운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반골형 인재가 갖는 특성은 최근 미국이 이라크전과 아프간전쟁에서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뒤 펴낸 <작전디자인의 기술과 방법>에서 제시하는 미래형 지휘관의 모습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상황이 급변하는 현대전에서는 민첩성과 적응력을 갖추고 때론 정해진 교범을 깨거나 상관의 지시를 반박하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리더들이 필요하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장면 1) 1912년 10월, 터키 륄레부르가즈
때는 이때다! 신생 불가리아군의 질주
터키(당시 오토만제국)가 약해졌다. 유럽 열강은 어부지리를 취할 셈으로 터키와 국경을 맞댄 발칸국을 꼬드겼다. 터키를 포함한 주변 강국의 지배에 신음해오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자주와 복수를 원했다. 소국 몬테네그로는 영토 확장의 야심이 있었다. 이들은 반(反)터키-발칸동맹을 맺고 1912년 10월, 터키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발칸전쟁(1912∼13)이 시작됐다. 대치와 탐색 속에 소규모 조우전이 몇 번 있은 후 전황은 돌연 화약고가 터진 것처럼 치열해졌다. 특히 1912년 10월 28일부터 11월2일까지 벌어진 륄레부르가즈(Lüleburgaz)전투는 양측의 전사상자만 4만2000명에 달하는 격전이었다. <그림 1> 지도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이 바로 륄레부르가즈다.
초전의 선봉은 불가리아였다. 준비되지 않은 터키군을 남으로 밀어내면서 이스탄불로부터 약 200㎞ 떨어진 키르클라렐리(Kırklareli)까지 진격했다. 터키군으로부터 반격이 없자 불가리아군은 10월27일 공격을 재개했다. 양측이 다시 맞붙은 것은 10월29일, 륄레부르가즈(이스탄불 서측 약 150㎞)였다. 흑해, 에게해, 마르마라해를 포함한 발칸반도 남부의 주도권이 이곳에 걸려 있었다.
불가리아군의 기세에 터키군은 계속 밀렸다. 불가리아군은 실전 경험에 기반한 우수한 전술전기를 갖고 있었다. 특히 포병은 정확하고 치명적이었다. 이대로라면 최초 계획대로 불가리아 제1군이 발칸반도 동쪽에서 내려오면서 측면 포위를 시도할 때, 제3군이 정면에서 공격해 터키군을 격멸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험한 지형, 궂은 날씨로 제1군의 남진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썩어도 준치’ 터키군의 반격에 맞서 황제의 명을 어기고 공격하다
터키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가리아 제3군과 제1군 사이에 발생한 간격으로 역습을 시도했다. 불가리아군 지휘부는 당황했다. 터키군에 돌파를 허용한다면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었다. 터키 본토로부터 증원군이 도착한다면 발칸동맹군 전체가 철수해야 할지도 몰랐다. 따라서 불가리아군 지휘부는 ‘제3군은 방어로 전환해 현 위치를 고수하고, 제1군은 신속히 측방으로 기동해 터키군을 공격하라’는 요지의 명령을 하달했다.
방어 전환 명령을 받은 불가리아 제3군의 사령관은 라드코 디미트리예프(Radko Dimitriev) 장군으로, 러시아-터키 전쟁(1877∼78)과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1885)에 참전했던 53세의 노장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공세의 템포를 놓치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총사령관인 황제의 명을 어기고 터키군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단순히 감으로 맞대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면공격을 하는 대신 서쪽으로 주력을 보내 터키군의 측면을 강타하기로 했다. 10월29일 야간의 기습은 효과를 발휘했고 불가리아 제3군은 쉬지 않고 사흘간 터키군을 밀어붙였다.
터키군, 600년 만에 발칸반도에서 철수하다
측면이 노출된 터키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여기에 동쪽으로 내려오던 불가리아 제1군까지 가세한다면 터키군은 양 옆구리를 얻어맞을 것이었다. 터키군은 조금씩 후퇴하기 시작했다.
디미트리예프 장군은 이 결정적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0월31일 야간, 이번에는 터키군 한가운데를 돌파했다. 옆구리에 훅을 적중시킨 후 비어 있던 얼굴 한가운데 스트레이트를 꽂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터키군은 패닉에 빠졌다. 순식간에 장병 약 2000명이 포로가 될 정도였다. 터키군 주력은 11월2일부로 발칸반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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