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후계문제 등 ‘역린’ 건드린 재상은 몰락 1인자 영역 침범 말고 자신의 역할 찾아라

172호 (2015년 3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2인자의 자리는 참으로 어렵다. 때론 1인자만큼 혹은 그 이상의 권력을 누리기도 하지만 살얼음판 같은 권력 위에서 잠시 흔들리면 곧바로 오명을 쓰거나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다. 조선 재상들 가운데실패한 2인자를 살펴보면 다음 네 가지 중 하나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너 기업이 많은 현대 한국의 현실에서 2인자 위치에 있거나 그 자리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씩 살펴봐야 할 내용들이다.

 

1) 평판 관리에 실패했다. 2) 조정 능력이 부족했다.

3) 1인자의 역린을 건드렸다. 4) 1인자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지난 10회의 연재를 통해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수놓은 뛰어난 재상들에 대해 살펴봤다. 물론 재상을 지낸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이들처럼 훌륭했던 것은 아니다.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귀를 탐하고 권세를 휘두른 사람이 있었고 무능하게 자리만 지킨 사람도 있었다. 군주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하거나 분열과 갈등을 유발하는 트러블메이커도 있었다. 이런 유형들이야 그 자체로 함량미달이니 더는 논의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재능과 경륜이 분명 있었으면서도 실패한 재상들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DBR 창간 7주년 특집호에서는실패에서 배우는 교훈에 초점을 맞췄다. 이들에 대한 복기를 통해 오늘날의 2인자들을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평판 관리 실패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위치에 있는 재상에게평판은 매우 중요하다. “‘총명예지(聰明叡智)’하여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재상이 된다는 옛말처럼 평판은 재상에 대한 구성원들의 신뢰를 반영하는 것으로 임금이 재상을 발탁해 백관을 통솔하고 정책을 총괄하도록 위임하는 이유가 된다. 만약 재상이 다른 신하들의 모범이 되지 못하고 도덕적인 결함을 보이게 되면 재상으로서의 권위를 세울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업무를 해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세조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에 오른 정인지(鄭麟趾, 1396∼1578)는 당대의 대학자였지만 정승으로서는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1
그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비웃음을 샀다. 우선 단종을 지켜달라는 세종의 고명(顧命)을 저버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정인지는지조를 잃은 선비라는 오명을 얻는다. 더 큰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평판 관리에 실패한 것이었다. 정인지와 함께 세조를 지지한 신숙주도 배신자라고 불린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는 엄격한 수신과 뛰어난 업무 능력으로 명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이에 비해 정인지는 정승이 된 후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만 몰두했는데 성종이 그를삼로오경(三老五更)’2 에 봉하려고 하자 신하들은장리(長利·사채)를 놓고’ ‘이익을 탐해 쌓아둔 곡식이 썩어 갈정도인 그를 그렇게 예우하는 것은 나라의 망신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3 뿐만 아니라 그는 술로 인해서 잦은 구설수에 올랐다. 단순히 주정을 부리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임금을 대놓고 무시하거나 심지어는 임금을라고 부르기까지 했다.4 자칫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 때문에 정인지는 다른 신하들로부터 전혀 존중을 받지 못한다. 세조 또한 정권 출범을 지지해 준 원로공신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우했을 뿐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젊은 시절 태종으로부터대임을 맡길 만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집현전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세종의 정치를 훌륭히 보좌했던 그가 막상 재상이 돼서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조차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평판관리는 개인과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요소 모두에게 필수적인 과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업이 소비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판을 얻으면 기업이 가진 역량과 상관없이 매출에 악영향이 오고 정부로부터 규제를 받는 등 큰 리스크로 작용한다. 개인의 경우에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형성뿐 아니라 직위에 따른 권위, 업무 능력에 대한 신뢰, 승진, 채용, 이직 등 다양한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재상과 같은 2인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1인자의 경우 자신이 곧 오너이거나 구성원들의 총의(주총 등)에 의해 선출되기 때문에 제도적, 실질적 권력이 보장되지만 2인자는 다르다. 대부분 1인자의 선택에 의해 2인자가 되는 그들은 자질과 능력도 따라야겠지만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한다면 일을 해나갈 수 있는 동력을 가질 수가 없다. 아니, 그 이전에 2인자의 자리에 아예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평판은 아래에서의 공격과 위에서의 견제로부터 2인자를 지켜주는 방패가 된다. 구성원들의 여론이 그를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지난 아티클에서 소개한 것처럼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원익이 정적들의 거센 공격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계속 중용된 것이 그 예다.

 

 

 

2. 조정(調停) 능력의 부족

 

재상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소는조정능력이다. 원래 조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다양한 생각과 성향을 가진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공동체를 위해 통합된 힘을 이끌어내는조정(調停)’과 인적/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조정(調整)’이 그것이다. 후자는 경영의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혼선과 중복에 따른 낭비를 막고 역량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상의 역할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바로 전자다. 흔히 구성원들은 각자 자신의 입장만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념의 충돌이나 입장 차이로 인한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개입돼 조정을 해야 한다. 최고지도자인 군주가 여기에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그 다음가는 권위를 가진 재상이 조정자의 임무를 맡는 것이다. 더욱이 조정에는 국정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안목도 요구되기 때문에 정부의 주요 직책들을 거치며 행정 경험을 쌓아온 재상의 경륜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조정에는 국정 전반에 대한

 

깊은 안목도 요구되기 때문에

 

정부의 주요 직책들을 거치며

 

행정 경험을 쌓아온

 

재상의 경륜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전통사회에서는 조정의 기본을()’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입장에서 조정을 해나간다는거중조정(居中調停)’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조정자는 서로 다른 의견들에 빠짐없이 귀 기울여야 하며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철저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방향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 너도 옳고, 너도 옳다라는 유명한 일화로 상징되는 황희나 사림(士林) 소장파들의 선명성 경쟁을 무리 없이 조율해낸 이준경이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정인홍(鄭仁弘, 1535∼1623)5 은 조정자의 역할을 아예 방기한 케이스다.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그는 광해군 시대의 집권세력인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면서 차례로 삼정승을 지냈다. <실록>에 따르면 정인홍은성질이 너무 거세어, 그저 자신이 옳다고만 여긴 나머지 남들과 이야기할 때 조금이라도 자기의 뜻에 거슬리면 곧장 화를 내고 이기려 들었다고 돼 있다.6 정적인 서인이 남긴 기록이긴 하지만 실제로도 그는 평생 비타협적인 강경노선을 걷는다. 역적에 대한 토벌을 주장하며 자신의 손에 반대파의 피를 묻히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면 군주의 명이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인의 영수였던 성혼에게사림을 더럽혀 욕되게 했다” “종묘사직을 능욕하고 우리 강토를 유린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과 비슷한 짓을 했다라며 공격하는 등 극언도 마다하지 않는다.더욱이 정인홍은 무리수를 뒀다. 이언적과 이황에 대한 문묘 출향(黜享)7 을 주장한 것이다. 자신의 스승 조식이 이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생각의 발로였지만 상대방의 이념적 정통성까지 무너뜨리려는 과격함에 여론은 등을 돌렸다. 재상으로서 정파 간의 의견 대립을 조율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정운영의 동력을 확보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정권의 고립을 가속화한 것이다.

 

이 밖에도 정철(鄭澈, 1536∼1593)은 정여립의 옥사8 에서 무리하게 반대파인 동인을 탄압해 그 자신도 이내 실각했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란을 맞으면서도 하나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은 절의(節義)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소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 구휼에 탁월한 업적을 세운 남인 재상 오시수(吳始壽, 1632∼1680)를 죽임으로써 노론-소론-남인 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고, 본인도 그 보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인 김홍집(金弘集, 1842∼1896)도 친일파와 친러파의 대립을 조정하지 못해 결국매국노라는 오명을 쓰고 길거리에서 백성들에게 맞아 죽는다. 조정 능력의 부재가 재상들이 실패하는 최대 원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그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처럼 재상이 조정자가 아니라 갈등 유발자가 될 경우 그 재상은 실패하고 정권도 위기에 빠진다. 2인자는 조직 내 의견을 가감 없이 1인자에게 전달함으로써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줄 수 있어야 한다. 1인자의 생각과 반대된다거나, 혹은 2인자 자신의 입장과 다르다고 해서 그 의견을 묵살하면 조직의 창의성은 사라질 것이다. 자신의 신념과 생각을 고집하며 과격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해나가서도 안 된다. 그리되면 필연적으로 반발이 생겨나고 조직의 힘은 갈수록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2인자의 생각은 구성원들의 생각을 모두 담아낼 수 있어야 하고 2인자의 판단은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편견이나 선입관이 없는 열린 자세로 포용력을 키우고 경청과 대화를 통해 조정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사회와 조직의 2인자들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과제다.

 

3. 역린(逆鱗)-1인자의 분노

 

재상의 실패는역린을 건드려서 초래되는 경우도 많다.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 편에 보면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은 길들여 타고 다닐 수도 있지만 그의 목에는역린이란 거꾸로 달린 비늘이 있어서 그것을 만지는 사람은 반드시 용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한다. 용에 비유되는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으므로 그것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린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군주마다 서로 다를 것이다. 군주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이나 금기일 수도 있고 군주가 매우 싫어하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공통적인 역린도 있는데 왕권에 대한 위협이나 왕위승계 문제에 대한 개입이 그것이다. 이는 1인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고 군주의 강한 분노를 유발한다.

 

 

계유정난으로 정국을 장악하고 단종으로부터 양위를 받기 전 잠시 영의정에 올랐던 수양대군의 사례를 제외하면 조선에서 재상이 왕이 된 경우는 없었다. 임금에 대한 유교적 의리와 충성이 강조되고 왕의 말 한마디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왕조체제 아래에서 왕위 찬탈은 최후의 상황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선택이다. 더욱이 왕위계승의 자격이 있는 왕족도 아닌 이성(異姓)의 신하가 보위를 차지하려 들면 곧바로 다른 모든 구성원들의 맹공격이 가해지게 된다. 대신, 왕위를 넘보지 않는 선에서 왕권을 넘어설 정도로 강한 권력을 휘두른 재상들이 존재했었다. 세조의 공신이자 예종과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韓明澮, 1415∼1487),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 ∼1565)이 대표적이다. 누이인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강력한 후원을 받았던 김좌근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영의정을 지내며 권세를 누렸는데, 심지어 김좌근의 안동김씨 일문은 철종을택군(擇君)’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들의 권력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한명회는 성년이 된 성종이 친정에 나서면서 무력화됐고, 윤원형은 누이인 중종의 비 문정왕후가 죽은 후 사약을 받았다. 김좌근을 위시한 안동김씨의 고위급 대신들도 흥선대원군에 의해 정계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이들이 퇴진한 이유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그들이 가진 지나친 권력에 대한 1인자(각각 성종, 명종, 흥선대원군)들의 경계심과 분노가 공통적으로 작용했다.

 

왕위계승 문제를 입에 담는 것도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다. 좌의정 정철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하루빨리 국본(國本, 세자)을 세워야 한다고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고 경종 즉위 초기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1648∼1722)과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1633∼1722) 등도 왕세제(영조)의 책봉과 대리 청정을 추진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목호룡의 무고가9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왕위 승계에 개입하려고 한 이들에 대한 경종의 분노가 기저에 깔려 있다.

 

본래 1인자는 후계자 선정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왕위계승자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시대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자신이 노쇠해질수록 후계자를 향한 눈치 보기와 줄서기도 가속화하기 때문이다. 세자지만 곧 권력의 경쟁자가 될 수 있으므로 이 문제만큼은 철저히 군주 자신의 의도대로 컨트롤하고 싶은 것이고, 동시에 이 사안에 대한 신하들의 개입은 매우 불쾌한 일이다.

 

후계자를 교체하려고 했다가 역모로 몰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선조 말기에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 1550∼1608) 15년 넘게 세자의 자리에 있던 광해군을 제치고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시도한다. 선조가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넘기고 싶어 했다는 정황은 여러 곳에서 보이지만 적자가 태어났다고 해서 과오가 없는 세자를 폐위시키는 것은 절차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유영경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일차적으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에 대항해 자신이 이끄는 소북파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영창대군 옹립의 공신이 됨으로써 재상으로서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실패했고 그는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사사(賜死)된다.

 

신하가 후계자 전쟁에 참천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세종처럼 자신의 왕위 계승을 반대한 황희를 중용하고 제 환공처럼 자신의 등극을 저지하려 한 관중을 재상으로 삼는 미담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전쟁에서 지면 죽음뿐이고 이기더라도 생존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왕위 등극에 공을 세웠다고 권력을 누리려고 하는 순간 이를 부담스러워하는 자신의 주군에 의해 언제 제거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기업 후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상에서 소개된 재상들은 편차는 있지만 재상으로서 기본적인 역량은 가지고 있었던 인물들이다. 재능, 지혜, 인품, 행정력, 기획력, 추진력 등에서 적어도 한 가지 이상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채 펼치지 못하거나 혹은 비극적으로 퇴장해야 했다. 역린을 자극함으로써 1인자의 분노를 샀고 후계 권력게임에 참가해 스스로를 위기에 빠트렸기 때문이다. 물론 역린을 건드리지 말란다고 해서 그것이 1인자의 눈치만 보고 1인자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2인자는 2인자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2인자는 자신의 분수에 맞게 자신의 역할모델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데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1인자에게 부담과 불쾌감을 줄 정도로 전면에 나서거나 1인자의 고유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특히 스스로 뛰어나다고 믿는 2인자들이 이와 같은 잘못을 밟게 될 확률이 높은데 적재중량이 초과된 차량은 결국 주저앉고 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1인자의 몰락

 

재상은 군주와 운명공동체다. 반역을 하지 않는 한 1인자에 오를 수 없는 그는 본인이 얼마나 뛰어났느냐,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에 못지않게 주군(主君)의 성공과 실패에 구속된다. “늘그막에 일을 처리할 때 어둡고 어지러웠으나 한가롭게 세월만 보내며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10 는 평가를 받은 영의정 하연(河演, 1376∼1453)은 그가 모셨던 세종의 후광 덕분에 뛰어난 재상으로 남았으며 자신의 권세로 다른 사람의 노비를 강탈하고 동생과 재산다툼을 벌였던 남재(南在, 1351∼1419)11 나 무오사화(戊午士禍)12 의 가해자 중 한 사람이었던 윤필상(尹弼商, 1427∼1504)13 도 각각 태종과 성종의 영의정을 지내면서 무난했던 재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재상은 군주와 운명공동체다.

 

반역을 하지 않는 한

 

1인자에 오를 수 없는 그는

 

본인이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느냐에 못지않게 주군(主君)

 

성공과 실패에 구속된다.

 

 

단종 대의 황보인(皇甫仁, ?∼1453)이나 광해군 대의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다. 1447(세종29)년 우의정이 된 후 문종과 단종 연간에 영의정을 지낸 황보인은 김종서와 더불어 북방개척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오래도록 평안도와 함경도 도체찰사를 겸임했고 재상이 된 후에도 병조와 이조 업무를 관장하는 등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는다. 세종이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할 때는 반드시 그를 참여시킬 정도였다. 그런데 황보인은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게 된다. 왕위에 대한 수양대군의 야심을 막지 못한 것이다. 그로 인해 섬기던 임금은 타의에 의해 퇴위했고, 그 자신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던 날 철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상황을 정당화시켜야만 했던 집권세력들은 단종의 신하들도 철저히 격하시켰는데, 특히 수석대신이었던 황보인은 탐욕스럽고 무능했던 인물로 기록됐다. 숙종 31, 단종에게 충성을 바친 점을 높이 평가받아 복권되긴 했지만 이 평가는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광해군 시절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반대파에게서까지재능과 안목이 높아 맡는 일마다 직책을 잘 수행했다는 평을 들었으며14 7년 동안 재상으로 있으면서 정쟁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고 폐모(廢母)를 막기 위해 애쓰는 등 정국 안정에 공헌했다. 이이첨 일파가 인목대비를 암살하려 할 때에도 직접 나서서 저지한 바 있다. 하지만 광해군에게 극간(極諫)하다 각기 귀양, 삭탈관직, 문외출송의 처벌을 받은 이원익, 이덕형, 기자헌 등 광해군 대의 다른 영의정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광해군의 과오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고 정권의 핵심으로서 계속 남아 활동했는데, 이로 인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됐다. 이이첨, 유희분과 함께삼창(三昌)’으로 불리며 광해군을 망친 주역으로 취급된 것이다.15

 

이상 두 사람의 사례는 1인자의 흥망이 곧 2인자를 평가하는 주요 잣대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인자는 임무 자체가 1인자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 잡고 1인자가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좌하는 것이다. 그는 1인자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해야 하기 때문에 혼자만 잘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때론 자신의 신념과 다르거나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사직해버리거나 어중간하게 타협하며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목숨을 걸 정도의 기개로 공동체와 구성원, 그리고 1인자를 위한 진정한 길을 찾아야 한다. 이는 2인자로서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도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갖춘 2인자들이 1인자의 몰락으로 인해 함께 무너져 버리는 경우를 본다. 아무리 탁월한 부사장이 있어도 오너 CEO의 자질이 부족해서 기업이 도산하면 그 또한 실패한 임원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심지어 1인자의 실책에 대한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권한은 작으면서 책임은 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또한 2인자의 숙명이다. 1인자의 성공을 충실히 도우며 차분히 미래를 준비해간다면 그에게도 분명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이다.

 

이상으로 재상이 실패하게 되는 네 가지 요인에 대해 살펴봤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2인자에 걸맞은 평판을 확보하지 못하고 조직 내 다양한 갈등과 이해관계 충돌을 조정하지 못하면 2인자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조차 담당할 수가 없게 된다. 1인자의 분노를 사거나 1인자가 실패하게 만들어도 그 역시 성공을 거둘 수가 없다. 이는 아무리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갖춘 2인자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2인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자세는 1인자와 자기 자신, 조직과 자기 자신을 운명공동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주관적인 생각은 접어두고 오로지 조직 전체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1인자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자신을 최대한 객관화시킬 때 평판과 조정능력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될 것이며 구성원과 1인자도 모두 그를 신뢰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를 우선시하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결국 실패로 귀결된다는 것을 앞선 재상들의 실패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아무쪼록 반면교사의 가르침이 되길 기대한다.

 

김준태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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