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뇌물, 청탁, 가족비리로 얼룩진 황희 정승 20년 영의정 지낸 비결은?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HR,인문학 

‘청백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조선 초기 명재상 황희는 사실 청렴함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태종 시대 최고 실세 중 하나인지신사를 거쳐 세종시대에 거의 20년간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황희에게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조정능력이었다. 왕의 개혁과 정책이 현실에 제대로 착근할 수 있도록 그 내용을 조정했고, 신하들 사이에서의 논쟁을 조율해가며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처럼 황희는 비록청백리는 아니었을지 모르나 2인자에게는 훨씬 더 중요한 덕목이자 능력, 바로탁월한 조정능력으로 조선 최고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황희는 청백리가 아니다?

최근 총리 인사와 개각 등과 관련해지금 같은 검증 시스템에서는 황희(黃喜) 정승이 와도 통과할 수 없다는 말이 회자됐다. 총리를 비롯한 장관 후보자에게 요구되는 기준이 너무 높고 엄격해서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황희라도 요즘의 잣대를 댄다면 인준을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잘못됐다. 청문회가 지금보다 더 쉬웠다고 해도 황희는 아마 통과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황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신선 같은 수염을 기른 인자한 노() 정승, 그리고 청백리 재상이다. 황희에 대해서는 수많은 일화들이 전해져 온다. “붓으로 먹을 찍어 글씨를 쓰려고 하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쌌으나 아무런 노여운 기색도 없이 손수 그것을 훔칠 따름이었다.”1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의 어린아이들이 들어와서 어느 놈은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또 어떤 놈은 공의 옷을 밟으며 술상 위의 안주를 모두 움켜쥐고서 먹고, 또 공을 때리기도 하니, 공이 말하기를아프다. 아파라고 할 뿐이었다. 이 어린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아이들이었다2 라든가, 어느 날 세종이 미복 차림으로 황희의 집을 방문했다가 청빈하고 검소한 모습에 감동해 새 집을 하사했다3 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스토리들이 정말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시대 내내 황희가 재상의 사표(師表)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하는 재상상이 황희라는 인물에 투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종의 구전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 것이다. 더욱이 황희가 온화하고 관대했다는 것은 당시의 기록 곳곳에 등장하지만 청백리라는 부분은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조선왕조실록>영의정부사 황희 졸기(卒記)’에 보면 그는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제가(齊家)에 단점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비판을 받았다고 돼 있다.4 주로 청탁에 관한 내용이 많은데친한 사람을 주로 추천하는 등 인사에 공정하지 못했고5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 뇌물을 챙겼다는 비난도 받았다.6 그는 대사헌을 겸하고 있던 세종 7, 남원부사로부터 유지(油紙)로 만든 안롱(鞍籠·수레나 가마 등을 덮는 우비)을 받았다가 자수했으며 좌의정으로 재임하던 세종 9년에는 소위서달 사건에 깊이 개입했다. 자신의 사위이자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인 서달이 신창현의 고을 아전을 때려 죽인 일이 벌어지자 사건을 덮어달라고 우의정 맹사성을 통해 해당 고을 수령에게 청탁했다가 진상을 재조사하도록 지시한 세종의 명에 의해 전모가 드러나 투옥된 것이다.7 세종 12년에는 관리 소홀로 말 1000마리를 죽게 만든 감목관(監牧官·목장 관리 책임자) 태석균의 죄를 완화시켜주려고 형조에게 사적으로 부탁을 했다가법을 맡은 사람과의 사적인 인연을 기회로 공공연하게 청탁을 행한다며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의정으로 임명되기 몇 달 전인 세종 13 4월에는 교하현감에게 관의 소유인 둔전을 달라고 요청해 얻어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크게 망신을 당한다.

 

황희의 아들들도 하나같이 문제를 일으켰다. 서자 황중생이 세자궁의 재물을 훔치다 발각됐고, 이 사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적자인 황보신도 함께 재물을 착복한 것이 드러나 처벌을 받았다.8 이어 황보신의 형인 황치신이 죄를 지어 몰수되는 아우의 기름진 과전을 자신의 과전과 바꿔치기하다가 걸려 파면된다.9 재산 문제로 잡음이 많았던 것은 막내아들인 황수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세조 때 영의정에까지 올랐지만뇌물이 폭주했으며 한 이랑의 밭이나 한 사람의 노복까지도 탐하고 다투어서 여러 번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10 <실록>에 기록됐다.

 

 

이처럼 문제 많은 인물 황희가 어떻게 태종과 세종의 지극한 지우를 받으며 19년이라는 긴 시간을 영의정에 재임, 조선 최고의 명재상이라는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까.

 

1389년 문과에 급제한 황희는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다가 1394(태조 3) 조선 왕조에 출사해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직언을 잘해 여러 차례 파직되긴 했지만 이조, 병조, 형조, 예조 정랑 등 주요 부처의 실무 책임을 두루 맡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가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태종의 비서실장인 지신사에 임명되고 난 이후부터였다. 비밀리에 지시한 많은 일들을 절대 누설하지 않고 탁월하게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태종은 하루 이틀이라도 보지 못하면 반드시 그를 불러 찾았고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는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면서 하루에 3∼4번이나 병의 차도를 확인할 정도로 황희를 총애했다. 그는 육조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치며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키웠는데 육조 판서를 전부 거친 사람은 조선왕조를 통틀어서도 그리 많지 않다.

 

황희는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그는 왕실의 안정을 위해서는 적장자승계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희는부왕께서 일깨워주신 뜻을 잊지 말라며 세자를 타일렀고11 궁궐 담을 넘고 기생을 불러들여 연회를 여는 등 세자의 계속된 일탈에 태종이 대노하자세자는 아직 어립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것입니다라며 필사적으로 세자를 변호했다.12 하지만 이미 폐세자를 하기로 마음먹은 태종의 뜻을 바꿀 수는 없었다. 태종이 넌지시 경고를 줬음에도 그의 세자 옹호가 계속되자 태종은민무구와 민무질(세자의 외숙)의 숙청을 주도한 황희가 장차 자신에게 닥칠 화를 모면하기 위해 세자에게 아첨한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파직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해 자손까지 서용(敍用)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총애하던 황희를 이처럼 가혹하게 처벌한 것은 양녕대군 폐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양녕대군이 국가의 앞날에 저해가 되기 때문에 고심 끝에 폐세자를 한 것인데, 이러한 임금의 결단에 반대해 양녕대군을 옹호하는 것 또한 국가에 해를 끼치는 것이므로 단호히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희에 대한 태종의 마음이 아예 떠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태종은 황희를 남원으로 유배 보내면서 군사들에 의해 죄인 다루듯 호송하지 않고 노모를 모시고 스스로 이동하도록 배려했다. 황희의 죄를 묻는 교서를 내릴 때도 황희의 조카 오치선을 보내 전달하게 했다. 이후 4년이 지난 1422(세종 4) 212, 상왕이었던 태종은 세종으로 하여금 황희를 불러들이게 한다. 세종의 권력승계가 안정됐기 때문에 더 이상 폐세자의 추종 세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다 자신이 누구보다 아끼고 행정능력이 뛰어난 황희가 장차 세종을 도와 큰 일을 해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귀양을 보낸 황희를 세종으로 하여금 다시 등용하게 함으로써 황희에게 세종의 은혜를 입혔다. 세종의 세자 책봉을 끝까지 반대한 세종의 정적으로 숙청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인데 오히려 용서를 해주고 높은 관직까지 줬으니 황희의 충성이 자연히 세종에게 향할 것이라고 계산했는지도 모른다.

 

황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조정능력

이후 황희는 세종 4 1028일 의정부 참찬에 임명됐고 세종 6년에는 당시 기근이 극심하던 강원도에 감사로 파견됐다. 여기서 백성구휼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가 임무를 마치고 귀경하자 강원도 백성들이 그 공을 기려 소공대(召公臺)를 세웠다고 한다.13 이어 그는 세종 8 513일 우의정이 됐고, 9 125일에는 좌의정에 보임됐다. 황희가 좌의정이었을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세종은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후임자도 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거듭된 재고 요청에도 불구하고 두 달 만에 기복(起復)14 하도록 했다. 서달 사건으로 투옥되고 태석균 사건으로 해임되기도 했지만 세종은경은 세상을 다스려 이끌 만한 재주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학문을 지니고 있다. 모책(謀策)은 만 가지 사무를 종합하기에 넉넉하고, 덕망은 모든 관료의 사표가 되기에 족하다. 아버님이 신임하신 바이며 과인이 의지하고 신뢰하는 바다라며 깊은 신임을 표시했다.15

 

황희는 1431(세종 13) 93, 19년을 장기 재임하게 될 영의정에 오른다. 앞에서 황희가 요즘에 청문회를 받았으면 통과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했는데 그 당시에도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황희가 영의정으로 임명된 후 열흘 가까이 반대하는 상소들이 산더미처럼 쌓이며 정국이 요동쳤다. 황희도 사직하는 상소를 계속 올렸지만 수리되지 않았다. 세종은 그로 하여금 속히 영의정에 취임할 것을 명령했고 하륜, 박은 등 역대 주요 재상들과 비교하며 황희만 한 사람이 없다며 논란을 종결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영의정으로서 황희는 조정(調整) 능력 면에서 발군의 모습을 발휘한다. 여기서조정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세종의 이상적인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는조정이다. 세종은 새로운 제도를 제정하고 기존과는 다른 혁신적인 사업을 추진하고자 한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그 자체로 실현 가능한 것이라면 별다른 문제가 없겠지만 구성원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조직의 추진역량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시도될 경우에는 오히려 더 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백성들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좋은 제도라고 세종이 고집해 추진하다가 실패한 저화(楮貨·종이화폐)가 대표적인 사례다. <황희졸기>에 따르면세종께서 새로운 제도를 많이 만들고자 하시니 황희가 홀로 반박하는 의논을 올렸다. 세종이 이를 비록 다 따르지는 않았지만 중지시켜 막은 바가 많았다고 돼 있다. 여기서 황희의 반박이 허조처럼 세종과 정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실록>을 보면 황희는좋은 계책이지만,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를 보완하시는 게 나을 것입니다.” “훌륭하신 뜻이기는 하나된다면 그 폐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제도를 유지하소서같은 형식을 취한다. 그는 오랜 행정 경험과 육조의 책임자를 모두 거친 경륜을 바탕으로 정책의 실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 중점을 두고 안정적이고 매끄럽게 국가의 사업들이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의 이상(理想)에 대한 견제와 보완을 통해 그 이상이 현실 속에서 힘을 얻어 구현돼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세종도 이런 황희 말에는 언제나 귀를 기울인다. <세종실록>에 많이 나오는 대표적인 말이 바로황희의 의견에 따랐다.

 

다음으로 신하들의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한다는 의미에서의조정이다. “그래 너도 옳고, 그래 너도 옳다는 유명한 황희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황희는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차이를 좁히며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에 탁월했다. 어느 날 세종이내가 명령한 일에는 서로들 논박하면서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왜 육조에서 올라오는 일에는 별다른 의논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황희가전하께 상신하는 일에 (신하들 사이에) 합의하지 못하는 점이 있으면 다시 조정해 신 등의 의견이 모두 합치된 후에야 이를 올립니다. 그래서 다른 의논이 없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16 영의정으로서 백관을 통솔하며 다양한 의견과 갈등을 조화롭게 조정시켜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황희의 조정 능력은 세종 재위 기간 중 임금과 신하들 사이의 대립이 가장 극심했던 불당(佛堂) 논란에서도 빛을 발했다. 1448(세종 30) 717, 세종은 문소전(文昭殿) 서북쪽에 불당을 건립하라는 명을 내린다. 선왕 태종이 불당을 지으셨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렸으니 다시 세워 선왕의 뜻을 기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온 조야(朝野)가 들끓었다. 승정원과 대간, 육조, 의정부가 연이어 반대 상소를 올렸고 중앙과 지방, 문신과 무신, 원로대신과 소장 관료를 가릴 것 없이 어명을 철회하라고 세종을 압박했다. 유교를 국시로 해 건국된 조선왕조에게 불교는 단호히 배척해야 할 이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 시기 세종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소진된 상태였다. 아들 광평대군(1444년 사망)과 평원대군(1445년 사망)이 젊은 나이에 연이어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사랑하는 아내 소헌왕후와도 사별해야 했다.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느라 건강이 매우 악화돼 두 눈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도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세종이 먼저 떠나간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종교적 안식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이 문제에 집착했고 임금의 개인적인 바람도 들어주지 못하냐며 신하들을 탓했다. 세종은승지들의 학문이 뛰어나서 나를 불가하다고 여긴다” “나는 신하의 제재를 받는 임금이 아니다” “만일 내가 어진 임금이라면 경들의 말을 따랐겠지만 나는 부덕한 임금이니 따르지 않겠다라고 하는 등 그의 말이라고는 믿기 힘든 격한 반응들을 쏟아냈다. 이어 식사를 재차 거부하고 이럴 거면 차라리 선위(禪位)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으며불당이 궁궐에서 가깝다고 반대를 하니 내가 이어(移御)하면 되겠구나. 그러면 불당이 궁궐과 멀어질 테니 괜찮은 것이냐!”며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까지 한다.

 

이 논란은 한 달 가까이 계속됐는데 갈등이 갈수록 고조되자 황희가 나섰다. 86세의 고령에다 여러 가지 병이 겹쳐 집에서 요양하고 있던 황희는 22, 26일 두 차례에 걸쳐 반대상소를 올렸다. 특히 두 번째 상소에서는 반대의견을 개진하면서도지금 말하는 것이 혹 지나친 점도 있으나 아첨하며 입을 다물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신하들이 이처럼 숨기지 않고 할 말을 다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전하의 다스림이 훌륭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나라의 복이며 만세에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라며 신하들의 결사적인 반대에 섭섭해 하고 있던 세종의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불당 건립에 반대해 출근을 거부한 집현전 학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해 다시 업무를 보도록 했다.17 이때 한 어린 유생이 그의 행차를 가로막고당신은 정승이 돼 어찌 임금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오?”라고 꾸짖자 황희는 유생의 기개를 보니 나라의 앞날이 밝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18

 

오늘날 기업 경영진에게 주는 교훈

이와 같은 황희의 역할은 오늘날 재벌 2, 3세가 오너 CEO를 맡는 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CEO의 자리에 오른 재벌 2, 3세들은 상대적으로 현장에 약하다. 주요 직책을 맡으며 실무수습 기간을 거치기는 하지만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창업자나 평사원에서 출발해 수십 년간 경험을 쌓은 고위임원들에 비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부회장이나 사장과 같이 기업의 상황을 잘 알고 있고 현장을 비롯해 주요 업무들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 2인자가 뒷받침을 잘 해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2인자가 자신의 능력과 경륜을 내세우며 1인자를 가르치려들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는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것으로 역사 속에는 그러다 제거당한 재상들의 사례가 수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갈등은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다. 오늘날의 기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1인자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이는 조직을 위태롭게 만드는 첩경이다. 일반적으로 오랜 시간 조직 속에서 성장해 온 2인자는 기존 업무 관행에만 익숙하고 보수적이 되기 쉽다. 곧바로 CEO의 자리에 오른 젊은 리더는 현실을 모르고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이상적이 되기 쉽다. 따라서 이 둘 사이의 건강한 대화가 중요하다.특히 2인자는 CEO가 제시한 방향을 따르며 그의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충심 어린 견제와 보완을 통해 올바름을 잃지 않도록 보좌해야 한다. 그래야 그 기업도 번영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황희의후계자 육성이다. 그는 후계자를 키우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2인자를 누구로 임명할 것인지는 최고권력자의 고유 권한이다. 재상의 임면(任免)권도 어디까지나 군주에게 있지만 현직 책임자만큼 그 자리의 역할과 책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다. 따라서 자신의 자리를 이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후계자들을 골라 준비시킴으로써 업무와 리더십의 공백을 막고 1인자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주는 것은 2인자로서의 중요한 임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태평성대에는 훌륭한 재상들이 훌륭한 후임자를 직접 추천한 경우가 많았다.

 

황희는 북방 개척의 주역 김종서를 유독 혹독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김종서가 병조, 호조판서를 지낼 때 한 가지 일이라도 실수를 하면 박절하다 할 정도로 꾸짖었고, 종에게 대신 책을 물어 매질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19 는 기록이 있다. 동료 재상이었던 맹사성이김종서는 당대의 명신(名臣)인데 대감께선 어찌 그리도 허물을 잡으십니까라고 물으니 황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내가 그를 아껴서 제대로 된 인물을 만들고자 합니다. 종서의 성격에는 오만하고 거친 점이 있으니 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스스로를 경계하도록 해 뜻을 가다듬고 언행이 무게가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우리의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신중히 행동해 일을 허물어뜨리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20

 

김종서를 자신의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하드 트레이닝을 시킨 것이다. 당시 황희는 80대 고령으로 10년이 훨씬 넘도록 영의정에 재임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차기 영의정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맹사성, 허조, 신개, 하연 등 고위 관료들도 모두 육칠십 대 노인이었다. 재상을 맡을 만한 후보군들이 한꺼번에 늙어 죽고 조정에는 경험이 부족한 신하들만 남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후계자를 키워야 한다는 황희의 판단은 적절했다. 실제로 김종서는 세종 사후 문종에서 단종으로 이어지는 권력 혼란기에 좌의정으로서 정국의 중심을 잡아 줬다. 황희는 오너 CEO, 2인자 그룹이든, 기업에서도높은 지위에 오를 사람들을 어떻게 훈련시켜야 할지 모범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 특히 기업들에도 시사점이 크다.

 

하지만 황희의 후계자 수업이 부족했던 탓인지, 김종서의 한계였던 탓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 몰라도 김종서는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을 제어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된다. 끝내 실패한 재상이 되고 만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이어 다루고자 한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a@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트위터에서 세종(@SejongDaeWang)과 정조(@King_Jeongjo)의 가상 계정을 운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저서로 트위터에 게재한 내용과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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