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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아니되옵니다” 평생 외친 허조 경청의 왕 세종에게 ‘다른 해법’을 말했다

김준태 | 155호 (2014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황희와 맹사성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허조 역시 조선 초기 최고 명재상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직언충성스러운 반대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세종시기백성을 위한 급진적 개혁 정책이 시행될 때마다 오로지 홀로 나서 개혁이 가져올 수 있는 폐단과 위험성을 지적했다. 또 명분과 명분이 부딪힐 때에는 대세의 반대편에 서서다른 대의가 존재함을 주장했다. 오늘날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들에도 혁신의 부작용을 간파하고 직언하는 2인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다양한 해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항상다른 해답을 말하는 임원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조직의 1인자나 2인자 모두 허조라는 인물이 주는 시사점과 교훈에 주목해야 한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1439(세종 21) 어느 추운 겨울날, 잔뜩 여위고 어깨와 등이 매우 굽어 있는1  노인이 방안에 앉아 경건하게 의관을 가다듬고 있었다. 두 달째 병석에 누워 있다가 갑작스레 몸을 일으키니 가족들이 놀라서 괜찮으시냐고 물었지만 그는 미소를 지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나이는 일흔이 넘었고 지위는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태평한 세상에서 성상(聖上:세종)의 은총을 만나 간언을 올리면 실천해주셨고 의견을 말하면 경청해주셨으니 내 이제 죽지만 여한이 없구나.” 그리고 눈을 감으니, 이 노인은 좌의정을 역임한 허조(許稠:1369∼1439), 이때 그의 나이는 71세였다.2

 

황희와 맹사성에 가려져 현대인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조(正祖)가 세종(世宗)의 시대를 이끈 양대 재상으로 황희(黃喜)와 허조를 꼽았고 <연려실기술>에서도 조선의 어진 정승이라고 기록했을 정도로 그는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재상이었다.

 

허조는 그가 생의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직언(直言)하는 것을 재상인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그는 토론의 자리마다 소수 의견을 냈고 언제나 최악의 가능성을 지적했다. 다른 신하들이 동의해서 결론이 난 사안에 대해서도 끝까지 의문을 제기했다. 아무리 왕의 결정이라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반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좌천됐고 그의 집요함에 지친 세종으로부터는허조는 정말 고집불통이다3 라는 공개적인 불만을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태종은이 사람은 참으로 재상이다.” “이 사람은 나의 주석(柱石)이다4 며 그를 아꼈다. 세종도 허조에게 핵심 요직을 맡기며 항상 그에게 국정 전반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임금의 판단에 거침없이 반대했으면서도 임금의 신임을 받은 재상. 이번 호에서는 허조를 다루고자 한다.

 

1369(공민왕 18)에 태어난 허조는 고려 사대부들의 스승이었던 이색(李穡)의 직계 제자이자 당대의 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허조의 스승 권근은뒷날 우리나라의 예법(禮法)을 맡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며 자주 그를 칭찬했다고 한다. 허조는 1388(우왕 14)에 음직(蔭職)으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1390(공양왕 2)에 과거에 급제했다. 본격적인 관직생활은 조선이 건국한 후부터 하게 된다.

 

허조는 꼬장꼬장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어느 날 한밤중에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집에 도둑이 들어 물건을 모두 가지고 달아났다. 그런데 그는 졸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인형마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날이 밝은 후에야 도둑이 든 것을 안 가족들이 분통해 하며 허조에게 가만히 있었던 이유를 물으니 그는마음속에 이보다 더 심한 도둑이 와서 싸우고 있는데 바깥 도둑을 걱정할 틈이 어디 있는가라고 답했다. 정신을 집중해 수신(修身) 공부에 힘쓰다 보니 주변의 일은 모두 잊을 정도였던 것이다.

 



허조는 태종의 집권 초기에는 좌천을 당하고 유배를 가는 등 몇 차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능력과 올곧음을 높게 산 태종으로부터 중용됐다. 그러면서 외교와 예제(禮制), 인사를 관장하는 요직들을 차례로 맡게 된다. 세종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주로 이조판서로서 임무를 수행했는데 품계가 1품으로 승진이 돼도(판서는 2) 거듭 이조판서에 보임됐을 정도로 인사 분야에 있어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다 1438년에 우의정이 됐고 이듬해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지독한 반대자: 조선판 Devil’s Advocate

재상으로서 허조는 무엇보다 소수 의견을 많이 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세종실록>에 보면허조만 홀로 아뢰기를∼(獨許稠曰)’이라는 대목이 유독 자주 등장한다. 가령 다른 신하들이 모두 동의했던 파저강 여진족 정벌에 대해서도 그는이들은 미련하고 완강해 한 번 원수를 맺게 되면 때마다 보복을 해올 것이니 경솔히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혼자서 반대했다. 여진 정벌 자체는 큰 성공을 거뒀지만 이후 조선은 그의 말처럼 끊임없이 여진의 도발에 시달려야 했다.

 

다른 신하들이 동의해서 결론이 난 사안에 대해서도

끝까지 의문을 제기했다. 아무리 왕의 결정이라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반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허조의 소수 의견이 가장 두드러졌던 사건은부민고소금지법(府民告訴禁止法)’ 논쟁이다. 조선 초기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의 질서와 도리를 강조하는 유교윤리에 입각해 고을수령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었더라도 백성이 그 수령을 고발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이 존재했다. 이것이 바로부민고소금지법이다. 지금이야 구청장이나 군수의 잘못으로 그 지역 주민이 피해를 봤다면 지자체장을 고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만 당시의 윤리적 기준은 그렇지 않았다. ‘부모=스승=고을수령이 동격이기 때문에 백성이 고을수령을 고발하는 것은 흡사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긴 것이다. 더욱이 이 법을 폐지하게 되면 사람들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앞 다퉈 고소를 남용하게 돼 행정낭비가 생길 뿐 아니라 나라의 풍속까지 어지럽히게 되리라는 것이 허조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이 법은위민(爲民)’이라는 또 다른 대의에 어긋난다는 점에서 논란을 가져오게 된다. 민심(民心)이 곧 천명(天命)이고 그 천명을 정통성의 근거로 삼아 정치를 펼쳐야 하는 유교국가에서 백성이 피해를 입고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도 아무런 구제조치를 취하지 못한다면 이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세종은백성들이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살펴주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정치를 행하는 도리이겠는가?”5 라며 부민고소금지법을 개정하고자 했다. 다른 신하들도 대부분백성들이 고소하는 것을 금지시키면 관리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이고, 고의로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라며 세종의 입장에 동조했다. 하지만 허조는 홀로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허조는 정말 고집불통이다라는 세종의 불만은 바로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허조가 지적한 문제도 유교윤리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 문제는 백성이 고발을 할 수 있게 해 그 문제를 나라에서 반드시 처리해주되 고발당한 수령의 죄를 원칙적으로 묻지 않으며 다만 고의로 사건을 은폐하거나 왜곡한 경우에 한해서만 처벌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6 허조도소신이 반대하였지만 끝내 전하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이젠 시행해도 중용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한발 물러선다. 법 자체의 취지에는 아직도 동의할 수 없지만 그 법이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들이 예방됐으니 시행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허조는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법전을 이두로 번역해 나눠주라는 세종의 지시를 두고백성들이 법에 대해 잘 알게 되면 법망을 교묘히 피하고 제 멋대로 법을 가지고 노는 무리들이 생겨날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7  신문고(申聞鼓)를 백성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세종의 결정에 대해서도 홀로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신문고를 울릴 수 있는 조건과 절차를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담당 고을이나 관청에서 일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임금에게 다 가져와서 해결하려 들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허조의 태도나 논의들은 얼핏 세종의 개혁정책을 무조건 반대하는 수구적인 모습으로 해석되기 쉽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세종에 비해 고리타분한 원칙이나 내세우며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논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급진적 개혁의 위험성을 경계하다

물론 허조는 보수적인 정치가였다. 세종이 추진한 새로운 정책이나 개혁 작업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개혁 그 자체에 대한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혁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정책이 제대로 된 검증 없이 급하게 시행될 때 생겨날 수 있는 폐단들에 맞춰져 있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허조는 자신이 반대하는 사안뿐 아니라 동의하는 안건에 대해서도이러한 폐단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저러한 폐단에 대비해야 합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공법(貢法)의 제정 자체에는 동의했지만 새 제도를 섣불리 적용하면 그 피해가 이익보다 훨씬 더 클 수 있으니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기존 제도를 보완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고8  철두철미한 유학자로서 불교를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불교 혁파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는 오히려혁파는 점진적이어야 한다며 불교에 대한 급진적인 공격에 제동을 걸었다.9  불교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왔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 없이 급격하게 바꾸려만 든다면 오히려 큰 문제가 생겨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요컨대 허조는 새로이 추진되는 프로젝트의 문제점이나 변경되는 제도의 단점을 파악하고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가능성까지 집요하게 파고듦으로써 앞으로 초래될지도 모를 피해를 선제적으로 예방해 정책의 완결성을 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찍이 나폴레옹은작전을 세울 때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겁쟁이가 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불리한 조건을 과장한다고 했다. 전쟁이든, 국정운영이든, 기업경영이든 간에 공통된 특징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발생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최소한 어떠한 경우에도 최악보다는 나아질 수 있다. 허조는 이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기업에서도 혁신은무조건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경영환경과 장기불황 국면에서 혁신 없이 기업이 생존하는 건 어렵다. 그러나 다급하게 혁신을 추진하다가 부작용이나 생각지도 못한 오류가 발생했을 때 기업은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이때 만약 기업조직 내에 허조와 같이 급격한 개혁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그 부작용을 생각해 조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궁극적으로 혁신이 이뤄진다 하더라도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혁신의 발목을 잡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아울러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옳다고 믿는 것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드라마정도전에서 주인공 정도전이 정몽주와의 논쟁 장면에서대의의 반대편에는 불의가 아니라 또 다른 대의가 있다고 일갈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앞서 얘기한 신문고 규제나 부민고소금지법 폐지 문제는사회질서와 기강을 지켜야 한다.’10 는 당시의 중요한 윤리 기준과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나라는 그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는 두 옳음이 충돌하면서 생겨난 고민이다. 이처럼옳음옳음이 충돌하는명분의 전투에서 정답이란 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리더는 구성원들이 이 충돌을 어떻게 보는지를 이해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신과 가치를 잘 구현해낼 수 있는 쪽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옳음과 옳음이 부딪힐 때는 어느 한쪽이 전부 아니면 전무가 되는 (all or nothing)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택한 쪽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오로지 한쪽으로만 편중돼 가는 경우가 많다. 이때 선택되지 않은 다른옳음의 가치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리더에게 자각시켜주는 역할이 필요한데, 바로 여기에 허조의 존재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허조가 항상훌륭한 반대를 했던 것은 아니다. 임금에게 올린 말은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죄를 줄 수 없다고 천명한 세종에게 허조는어리석은 말을 하는 자는 죄를 주어야 하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죄를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세종은 반박한다. “어리석으냐, 아니냐는 그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고 수양을 많이 쌓았느냐에 달린 것일 뿐 그것으로 죄를 줄 수는 없다. 명색이 대신으로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질책한다.11  말 중에는 물리쳐야 할 말도, 버려야 할 말도 있겠지만 그런 말을 했다는 이유로 죄를 주게 되면 다른 좋은 말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들어가 버린다. 사람들은 리더의 눈치를 보며 리더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리더의 입맛에 맞는 말만 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말이 나오더라도 우선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줘야 사람들이 속마음을 남김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것으로, 말을 취사선택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라는 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기업에도 반드시 필요한직언자합리적 반대자

일찍이 IBM의 창업자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승진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말 뭐가 사실인지를 말하는 반항적이고 고집 센, 거의 참을 수 없는 타입의 사람들을 항상 고대했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많고 우리에게 이들을 참아낼 인내가 있다면 그 기업에 한계란 없을 것이다.”

 

허조처럼 반대를 하고 직언을 하는 사람이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흔쾌히

수용해 줄 수 있는 세종 같은 리더가 존재해야 한다.

 

 

동양의 고전 <효경(孝經)>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군주에게 바른 말을 하고, 군주와 논쟁하는 신하가 있으면 설령 군주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임금이라도 나라를 잃지는 않을 것이다.” 정조도나라를 위해 직언하고 자신의 생각을 주저함 없이 말하는 자들이 없다면 나라가 제대로 되어갈 수 없다고 했다. 모두 조직과 리더에게 있어서 직언을 하는 사람이 필요함을 강조한 말들이다.

 

리더 중에는 경험과 능력에 대한 과도한 확신 때문에 자신이 내린 판단은 무조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리더도 사람인지라 자신과 성향이 맞고 군말 없이 자기의 뜻을 충실히 따라 주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리더의 주위에는 리더의 성향에 자신의 성향을 맞추려 하고 리더의 뜻에 영합하려는 사람들만 몰려든다. 그리하여 결국엔 그 조직도 넓은 시야를 갖지 못하게 되며, 자정능력을 잃고, 잘못이나 오류가 발생해도 이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강력하게 반대를 하고 주저 없이 직언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리더는 자신의 판단력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 반대와 만나야 집단사고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문제점은 없는지, 보완할 점은 없는지를 찾아내고자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세종이 때론 질책하고, 때론 답답해 하고, 때론고집불통이라며 불평을 하면서도 허조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허조와의 논쟁과 반박, 재반박의 과정을 멈추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허조의 반대를 통해 정책이 더욱 튼튼해지고, 정치는 더욱 건전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허조처럼 반대를 하고 직언을 하는 사람이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흔쾌히 수용해 줄 수 있는 세종 같은 리더가 존재해야 한다. 더욱이 직언은 조직의 2인자가 행할 때 무게가 실리게 되는데 실무자와는 달리 리더와 같은 시야에서 일의 큰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인자가 반대 의견을 개진하게 되면 리더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거역이나 위협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2인자는 곧 직언자여야 하지만 그러기엔 져야 할 정치적 부담이 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격군(格君)’, 즉 리더를 바로잡아 리더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은 2인자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이다. 자신의 직언을 포용해줄 리더를 만날 수 있을지, 아닐지는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그저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허조가 병이 들자 세종은출근하지 않고 녹을 받는 것을 절대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쉬면서 안심하고 병을 치료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그러자 허조는숨이 아직 붙어 있는 동안은 어찌 감히 나라를 잊겠습니까라고 답하며 병든 몸을 이끌고 밤낮으로 정무에 몰두했다. 죽기 바로 며칠 전에는 개인적으로 소망하는 바가 없는지를 듣고자 임금이 보내온 승지에게이제 다시는 살아서 전하의 용안을 뵙지 못할 것 같기에 그대를 통해 내 뜻을 전하께 올리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에는 야인(野人:여진족)이 있고 동쪽에는 섬오랑캐(왜구)가 있어 만약 이들이 동시에 난리를 일으킨다면 나라가 매우 위태롭게 됩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앞 다투어 태평성대라고 말하니, 위태로운 상황이 닥치기 전에 미리 난리를 근심하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시어 국경을 굳건히 방비하소서라는 말을 남긴다. ()를 뒤로 하고 철저하게 공()을 우선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성실함으로 세종의 신뢰를 받은 것이고, 군주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도 군주의충성스러운 반대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생각된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a@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트위터에서 세종(@SejongDaeWang)과 정조(@King_Jeongjo)의 가상 계정을 운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저서로 트위터에 게재한 내용과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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