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원인도네시아의 노사관계 현지화 전략

‘11년간 노사 분규 0’ 신화의 미원, 현지인 팀장이 노무관리하며 노조 지원

155호 (2014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HR

 미원인도네시아의 노사관계 현지화 전략

1) 노동조합 인정하기

독재 정권 아래에서조차 노조 없이 파업을 성사시킨 전력이 있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과 협력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공장 가동 초기부터 일찌감치 노조 설립 허용

2) 복수노조 차별 없이 대하기

2001년 뒤늦게 생긴 두 번째 노조(무슬림노동조합)를 즉시 인정하고 사무실 규모, 위원장 상근 허용, 위원장 상여금 지급, 노조활동 지원 측면 등 모든 면에서 차별 없이 대함

3) 노조 활동 지원하기

노조위원장에게 상여금 및 휴대폰 사용료 지급. 노조 간부 및 회원들의 대외 활동비 지원

4) 현지인이 주도하는 노사 협상

현지인 경영자에게 노사 교섭권을 부여. 일상적 노무관리는 현지인 인사팀장 및 총무팀장에게 맡기고 노사 교섭의 경영진 대표 권한은 인도네시아인 부공장에게 일임. 노사 관계 현지화를 인적 대체 수준을 넘어 권한 이양의 단계까지 끌어올림

 

 

편집자주

본 기고문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동남아센터가 한국연구재단의신흥지역연구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연구결과의 일환으로 <동남아시아연구> 24 2호에 게재된 논문해외투자 한인기업 노사관계의 현지화: 미원인도네시아 사례연구를 요약 발췌해 소개한 내용입니다.

 

종합 식품업체 대상은 1970년대부터 자사 간판 조미료인미원의 국제화를 꾀해 왔다. 1973년 인도네시아에 글루탐산나트륨(MSG) 제조 합작 기업인 미원인도네시아(PT. Miwon Indonesia)를 만들고 현지에 공장을 설립, 국내 최초로 해외 플랜트를 수출한 기업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이어 1976년엔 미원 마케팅 및 유통 기능을 전담하는 지코아궁(PT. Jico Agung)을 세우는 등 종합 식품회사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해왔다.

 

1970년대 초 대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내 시장에서의 경쟁을 피하면서 조미료 생산에 필수적인 당밀(糖蜜, 사탕수수를 설탕으로 가공할 때 나오는 즙)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세계적인 당밀 생산지이자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로 눈을 돌렸다. 그 첫 번째 신호탄으로 1973년 인도네시아 내 미원 제조법인인 미원인도네시아를 설립하고 당밀 공급과 하천 및 항만 인프라를 갖춘 동부 자바(East Java) 그레식(Gresik)에 공장 건설을 추진한다. 1975 9월에 공장을 완공하고 이듬해부터 조미료 중간제품의 생산에 돌입했으며, 1978 11월부터 미원 완제품(MSG)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됐다.

 

1970년대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조미료미원

1970년대만 해도 인도네시아 조미료 시장은 일본 회사 아지노모토와 대만계 회사 사사가 양분하는 상황이었다. 대상이 인도네시아에 발을 내딛자 아지노모토와 사사는 정부 인허가에서부터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다양한 방법으로 미원을 견제했다. 그러나 미원인도네시아는 사업시작 불과 5년 만에 시장의 10%를 점유하는 기염을 토했고 1980년대부터는 시장점유율 30%를 달성, 현지의 조미료 시장을 3분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미원은 사사와 1, 2위를 다투는 선도 조미료 업체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현재 미원인도네시아가 판매하는 제품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생활하는 이들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식재료들이다. 우선 조미료 분야에선미원’ ‘바이오(Bio, 조미료를 코팅해 미감을 더하고 적은 양으로도 맛을 낼 수 있게 만든 제품)’ ‘미원플러스(Miwon Plus, 산업용 조미료)’ ‘가람구리(Garam Gurih, 미원 10%를 첨가한 맛소금)’ 등이 있다. 분말 음료 제품으로는 인삼커피(Kopi Ginseng)와 생강차(Jahe Wangi), 레몬차(Lemon Tea) 등도 판매한다. 인도네시아 현지 고객들을 적극적으로 공략하기 위해할랄(halal, 무슬림이 먹고 쓸 수 있는 제품을 총칭하는 아랍어)’ 인증을 받은 현지어 브랜드마마수카(Mama Suka, ‘엄마가 좋아한다는 뜻의 인도네시아어)’를 만들어 튀김가루, 빵가루, 양념, 식용유, 간장, 마요네즈, 크림스프, 푸딩원료 등 다양한 가공식품도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로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지 꼬박 40주년을 맞이한 미원인도네시아는 작년 1552억 원의 매출액과 102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 중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미원인도네시아가 지금처럼알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우선 진출 초기 경쟁사 대비 저가로 제품을 판매한 전략이 주효했다. 인도네시아 소비자들의 상당수가 저소득층이라는 특성에 따라 막대한 판촉물 공세를 펼친 것도 효과가 컸다. 15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지리적 여건을 감안해 사업 초기 판매 사원이 가가호호 방문해가면서 직접 제품 홍보 및 판매에 나선 것도 미원이 인도네시아 시장에 빠르게 안착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이런 마케팅 전략 측면에서의 성공요인 외에 눈여겨볼 점이 있다. 바로 노사관계 측면이다.

 

미원인도네시아의 그레식 공장

 

필자는 미원인도네시아의 성공 요인을 노사관계 측면에서 분석하기 위해 2013 1월 말에 자카르타(Jakarta) 본사를, 6월 말에는 동부 자바 그레식에서 가동 중인 공장을 방문, 현지 조사를 실시하면서 한인 경영자와 현지인 관리자 및 노동조합 간부들과 인터뷰하고 자료를 수집했다.1  이로부터 얻은 시사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미원인도네시아의 현지화 역정 40

미원인도네시아의 성공은 철저한 현지화 덕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직원 구성과 직급 편재에서 현지화의 징표는 명확하다. 미원의 그레식 공장에 소속된 한국인 주재원 수는 전체 1013명의 직원 중 단 5명에 불과하다. 그들의 주된 업무도 기술 관리 지도다. < 1>의 인력구성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현지인 관리자가 꾸준히 증가했고 한인 주재원은 계속 감소했다. 거의 전적으로 현지인에 의해 가동되는 공장으로 발전한 것이다.

 

1 미원인도네시아 그레식 공장의 인력구성 변화

 

 

미원인도네시아는모든 것을 현지인 체제로 운영하기 위해 모든 업무를 인도네시아어로 처리하고 2001년 이후에는 아예 영어 사용을 금지했다. 당연히 한인 주재원들도 인도네이사어를 원활히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석 달이 지나도록 현지어가 능숙해지지 못한다면 현지인과 결혼해서라도 숙달시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한인 주재원들은 현지인 직원들과 동일한 작업복을 입는다. 사무직과 생산직의 복장에도 차이가 없어서 한인 공장장이 현지인 생산직과 똑같은 작업복을 착용한다. 오로지 모자 옆면에 작은 글씨로 적힌 직능만 다를 뿐이다. 게다가 한인 주재원들은 현지 사원들과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공장 인근 사택에서 지낸다. 사무직원들의 책상 배치도 공장장과 부공장장의 경우만 별도의 반()개방적 사무공간으로 분리돼 있을 뿐이고 나머지 한인 주재원들은 현지인 사무직원들과 구분이 안 되는 위치에 배치돼 있다.

 

무슬림들을 위한 식품 생산임을 인정하는 할랄 인증을 받고 잘 준수함으로써 할랄 기준 위반으로 현지 사회의 비판을 받은 적도 없다. 경쟁사인 일본계 조미료업체 아지노모토의 경우, 2000 9월 할랄 인증과 감독을 관장하는 MUI(인도네시아 이슬람 학자 위원회) 감사 결과 발효에 사용되는 미생물을 배양하는 배지에서 돼지기름 성분이 검출됐다. 이로 인해 현지인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3000톤에 달하는 조미료를 회수해야 했으며 한때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세 명의 직원이 지방경찰에 구속수사를 받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미원인도네시아의 주요 브랜드

 

미원은 지역과의 분쟁도 대화와 협상 및 적극적인 사회기여 활동을 통해 해결해왔다. 2000년부터 2011년까지 인도네시아 지역 주민들과 총 11건의 분쟁이 있었다. 분쟁의 소재는 주로 환경문제로서 소음발생, 수질오염, 대기오염, 토지사용 등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미원은 투자초기부터 인접한 수라바야강(Kali Surabaya)의 오염원으로 지목돼 왔다. 한때는 지방 정부의 지시로 9개월 동안 공장가동이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과 2008년에 연이어 폐수처리시설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환경오염원이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주민들이 불만을 표하는 환경 문제들은 유발 원인을 제거하거나 민가와 떨어진 곳으로 이동시키고 주민들에게 조미료, 식수, 전기, 명절선물, 보상금, 일자리나 대안적 토지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러한 타협에 대해 자카르타 본사의 한인 주재원은인도네시아에서마샤라깟(masyarakat, 사회 혹은 지역사회)’은 대통령도 못 이긴다는 말이 있다. 외국인은 당연히 주민들에게 져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불할 것은 지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원은 분쟁에 대한 수동적 대응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동네의 도로를 닦고, 하천을 정비하고, 남는 전기와 정수장치로 걸러진 식수를 주민들과 나눔으로써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분쟁 대응보다 더 넓은 차원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활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함으로써 인도네시아투자조정청(BKPM)이 수여하는 표창까지 받았다. 특히 2011년부터 현지 자선단체와 협력해 지원하기 시작한사랑의 마마수까마차사업은 현지 노점상 문화에 기반하고 식품 산업으로서의 정체성도 잘 살린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현지 거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까끼리마(kaki lima)’라는 조리 판매 겸용 소형 노점을 198대 제작해 4개월 치 식자재와 함께 빈민들에게 제공하고 위생관리와 경영방식까지 교육하는 경제자립프로그램이었다.

 

이처럼 미원인도네시아의 역사는 현지화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지화가 중요했던 이유는 여러 측면에서 추정할 수 있다. 소비재를 생산하고, 제품화 하는 데 있어서 내수시장이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현지화가 중요한 경영전략으로 추진됐을 것이다. 현지 사업의 출발이 영업활동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현지화가 기업의 전통으로 수립됐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다른 기업들처럼 현지화는 임금비용 절감을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매일 24시간 가동돼야 하는 장치산업이기에 현지인 운전자들과의 융화가 각별히 중요했을 수도 있다. 현지 법인의 자율적인 위상 역시 현지화를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었을 것이다.

 

조화로운 노사관계

미원인도네시아의 현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역이 노사관계다. 지난 11년간 미원인도네시아에선 단 한 건의 파업도 발생하지 않았다. 노조운동이 날로 강해지는 인도네시아 상황에서 장기간 노사분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1980년대 초반, 1995, 1997, 1999년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발생한 바 있으나 불과 몇 시간 만에 끝났다. 2002년에 이틀간 파업에 들어가 장치 가동이 중단된 사태가 사상 최악의 파업이었다. 그러나 이후 파업이 발생하지 않았다.

 

미원은 임금과 고용 면에서 적법하게 경영되고 있어 분쟁의 소지가 적다. 우선, 최저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에서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지불은 불법이며 사원들이 강력히 저항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안이다.

 

미원의 정규직 중심 고용체계 역시 노사관계 안정에 기여하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200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뒤 인도네시아에선 아웃소싱 인력의 사용이 노조 측의 주요 불만 사안으로 떠올랐다.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핵심공정에 아웃소싱 인력을 사용할 수 없도록 돼 있는데 적지 않은 기업에서 이를 어겨 분쟁의 소지가 됐다. 하지만 그레식 미원 공장에서 일하는 1008명의 현지인 근무자 중 아웃소싱 인력은 불과 150( 15%)뿐이며 이들 모두 핵심 공정이 아니라 폐기물관리/청소/운전/단순포장처럼 비핵심 분야에 배치함으로써 애초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 2)

 

 2013년 미원인도네시아 현지인 인력 현황

 

미원인도네시아 공장식당에서 현지인들과 점심을 함께하는 한인주재원들

 

노사관계 현지화 전략

미원의 노사 관계 현지화 전략은 크게 1) 노동조합을 인정하는 공장 체제를 일찍이 갖추고 2) 복수노조를 차별 없이 대하고 3) 노조 활동을 지원하고 4) 노사교섭을 현지인이 주도하게끔 했다는 점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노동조합 인정하기

인도네시아에선 노동조합 설립을 방해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전략으론 파업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1990년대 초중반의 독재 치하에서 노동조합이 없거나 무력했던 사업체들에서조차 제조업 노동자들이 거침없이 파업을 했다는 점이 단적인 예다. 당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은 공장 밖에 있는 비공식 조직 및 노동인권운동단체의 지원을 받아 파업을 추진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에선 노동조합의 공식적 조직화를 허용하고 협상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한 경영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미원인도네시아는 노조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노조 활동을 지원해주고 있다. 노조위원장들에게 30만 루피아( 3만 원)의 상여금과 10만 루피아( 1만 원)의 휴대폰 사용료를 지급한다.

 

미원인도네시아의 노무관리는 노동조합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동의를 거치는 시스템에 근거하고 있다. 특히 독재시대였던 공장가동 초기 시절부터 노동조합 설립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개발 시대 한국 공장의 독특한 권위체계를 극복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미원인도네시아는 경제개발 시대의 한국적 경영방식을 선진적인 것인 양 착각하는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에 빠지지 않고 투자 초창기부터 노조 설립을 허용함으로써 노사관계의 현지화를 추진했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조차 노조 없이 파업을 성사시킨 전력이 있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과 일찌감치 공식적인 대화 채널을 확보한 것은 외국계 기업으로서 적절한 자구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복수노조 차별 없이 대하기

미원인도네시아는 제2노조가 설립되자 두 개의 노조를 명시적인 차별 없이 상대함으로써 복수노조 시대를 지혜롭게 헤쳐나가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보다 먼저 결사의 자유에 관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인준하고 모든 층위의 복수노조를 법적으로 인정한 나라다. 이에 따라 한 회사에 노동조합이 다섯 개나 설립되기도 했다. 미원에서도 2001년에 무슬림노동조합(Sarbumusi)이라는 두 번째 노조가 설립됐다. 회사 측은 제2노조를 즉시 인정하고 사무실 규모, 위원장 상근 허용, 위원장 상여금 지급, 노조활동 지원 측면에서 차별 없이 대했고 단체교섭에도 참여시켰다. 덕분에 제2노조의 회원은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9명에서 출발했으나 작년에는 175명으로 무시할 수 없는 소수파로 성장했다. ( 3)

 

3 미원인도네시아의 노조원 현황

 

 

적지 않은 사업체들에서 제2, 3의 노조가 등장했을 때 노조 사무실을 제공하지 않거나, 노조활동으로 작업장을 비우는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단체교섭 참여권을 부여하지 않는 방식 등으로 신생 노조들을 차별하곤 했다. 이러한 차별이 노사분쟁의 불씨가 되곤 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소수파 노조도 라인 전체를 멈추게 할 수 있다. 일부가 나서서 선동하더라도 전체 인력이 소속을 불문하고 집단행동에 가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소수파 노조라고 섣불리 차별했다가는 큰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현지의 맥락을 미원인도네시아 경영진이 파악하고 적절히 대처했다고 볼 수 있다.

 

3) 노조 활동 지원하기

미원인도네시아는 노조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노조 활동을 지원해주고 있다. 우선 노조위원장들에게 30만 루피아( 3만 원)의 상여금과 10만 루피아( 1만 원)의 휴대폰 사용료를 지급한다. 뒷돈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근거도 갖춘 공식적 지원금이다. 명목은 인사팀 간부 상여금이고 액수도 인사팀 간부가 받는 액수와 같다. 노조위원장을 인사 업무를 보는 간부처럼 대하는 것이다.휴대전화 요금 보조는 노조위원장의 휴대전화 사용을 회사 업무라는 공적인 용도로 간주한 결과다. 노조위원장은 인사팀이나 노조원들과 소통하기 위해 휴대전화 통화나 문자를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그 사용료를 회사 측이 보전해 줄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상여금과 휴대전화 요금 보조는 노조 업무를 회사를 위한 업무로 인정하는 시각의 산물이다.

 

나아가 미원인도네시아는 노조의 대외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사측은 노조 간부와 회원들이 전국노조연맹의 회의와 교육, 지역시민단체와의 연대활동, 기념행사, 각종 노동자연대시위에 참여할 때 교통비나 음료를 지원한다. 노조는 출장 신청을 하고 회사는 참여 인원, 시간, 거리 등을 감안해 지원금이나 물품을 제공한다. 노조의 독자적인 활동에 사측의 지원이 필요한 이유는 적은 조합비로 인해 노조 재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노조원들이 납부해야 할 조합비 부담은 월 기준으로 단 돈 몇 천 루피아(한국 돈 몇 백 원)에 불과하지만 가난한 노동자들에겐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복수노조가 설립되고 회원 확보 경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는 조합비를 인상하기도 쉽지 않다. 상대 노조보다 회비를 더 많이 받으면 적지 않은 노조원들이 상대 노조로 옮겨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의 노동조합은 특별 활동에 대한 회사의 지원을 기대하게 되고 회사의 지원이 있다면 노조의 역량이 신장된 덕분이라 여겨서 자랑스러워한다.

 

노조의 대외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사측은 노조의 활동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 인사팀장에게 올리는 노조의 청구내역을 분석하면 노조원들이 출장 가는 곳, 목적, 참가자 등의고급 정보를 사무실에 앉아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회사는 또한 작업장 안보 측면에서 이득을 본다. 연대시위에 노조원의 일부를 참여시키지 않으면 회사가 외부 시위대의 공격을 당하는 일이 요즘 인도네시아의 산업지대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이른바스위핑(sweeping·휩쓸기)’이라고 불리는 집단행동인데 연대시위에 가담하지 않는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을 강제로 끌어내기 위해 시위 중인 외부 노동자들이 남의 공장 문을 부수고 침입하는 행동이다. 이와 관련, 노조위원장들은 회사의 노조 활동 지원에 대해 자신들이 공장수호로 보답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원칙적으로 연대시위를 포함한 각종 대외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회사가 경비를 지원함으로써 공장 침입을 당할 일도 많지 않겠지만 설령 노조가 동의하지 않는 연대시위 참여까지 외부 노동자들이 강요해 공장 침입을 할 경우 노조원들이 앞장서서 공장을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미원사의 두 노조위원장 모두우리 회사는 우리 스스로 지킨다며 공장 안보의 선봉에 나설 수 있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천명하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4) 현지인이 주도하는 노사협상

미원인도네시아의 야심 찬 실험은 노사교섭의 현지화다. 현지인 경영자에게 노사교섭권을 부여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미원은 인도네시아기업이라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일상적 노무관리는 현지인 인사팀장이 주관하고 현지인 총무팀장이 보조한다. 노사교섭의 경영진 대표는 인도네시아인 부공장장이다. 노사협상은 연중 2(임금협상을 1, 상여금 협상을 1)에 걸쳐 정해진 절차와 기간을 준수해 진행된다. 두 노조 다 협상에 참여하고 노조 측 협상대표 9명의 위원은 노조원 비례로 제1노조에 6, 2노조에 3명으로 배분된다. 노조 협상 과정에서 한인 공장장과 한인 주재원들은 입회하지 않는다.

 

현지인 경영진이 노사협상의 주역이어야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현지어 능력에서 현지인들이 앞서기 때문이다. 미원에서는 모든 업무가 인도네시아어로 처리되고 노사협상도 예외가 아니다. 한인 경영진은 언어 능력의 부족으로 자칫 잘못 알아듣고 오해를 하거나 교섭상황의 미묘한 변화를 제때 간파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둘째로, 노사교섭에 필요한 현지 지식 및 정보, 사회관계망의 측면에서 현지인들이 단기간 파견 나온 한인 주재원들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현지인 경영자들이 현지식 협상문화(효율성보다는 충분한 논의를 통한 타협안 도출을 추구해 참석자 모두에게 발언기회를 주며 회의를 수차례 반복)에 준해 끈기 있게 협상하는 데 더 적합하다. 관계자들 간 끈질기게 대화해 합의를 보는무샤와라(musyawarah, 숙의, 심의, 토의 등을 뜻하는 인도네시아어)’의 전통은 인도네시아에서 전통적으로 강조돼 온 덕목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미원인도네시아의 노사관계 현지화 사례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인 기업들 가운데서도 선진적인 사례에 속한다. 여전히 갈등적 노사관계로 곤란을 겪는 해외 투자 한인 기업들이라면 미원인도네시아와 같은 제도와 전략을 일부라도 도입해 볼 가치가 있다. 아울러 경영현지화에 관한 연구자들도 미원 사례를 참조해 노사관계 현지화를 중요한 점검 항목에 포함시키길 바란다.

 

전제성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jsjeon@chonbuk.ac.kr

필자는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인도네시아 노동운동 연구)를 각각 받았다. 서강대 동아연구소와 한국동남아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근무했다.<동남아시아연구> 편집위원장 및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인도네시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인도네시아> <맨발의 학자들: 동남아 전문가 6인의 도전과 열정의 현지조사> 등이 있다. 주 관심 분야는 동남아의 노동운동, 시민사회, 민주화, 아시아연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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