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의 인재관

인재라면 원수라도 데려다 써라 사마천, 用人의 지극함을 말하다

133호 (2013년 7월 Issue 2)

 

 

<사기>는 사람에 대한 백과사전

인재가 조직의 성공과 실패, 흥성과 멸망을 좌우한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해 변치 않는 원칙이자 진리에 가까운 명제다. 동서고금을 통해 인재 기용과 관련해 많은 이론들이 나타났고, 그 이론들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인류는 인재 경영(HRM)과 관련해 많은 경험을 축적해왔다. 그중에서도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마천1 <사기(史記)>를 통해 인재 기용과 관련해 깊은 논의를 진행했다. 특히 생생한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인재의 기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를 일깨운다.

 

그는 <사기> 전체 130편의 86%에 해당하는 112편을 사람에 대한 기록에 안배할 정도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과 식견을 보여줬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인재에 대한 관심으로 직결되고 다시 개혁사상으로 심화됐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난다. 군자는 기용되고 소인은 쫓겨난다. 나라가 망하려면 어진 사람은 숨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난신들이 귀하신 몸이 된다. ‘나라의 안위는 군주가 어떤 명령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고 나라의 존망은 인재의 등용에 달려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일 게다.” (<사기> 50 초원왕세가 ; 112 평진후주보열전)

 

또 그는 어려운 시기 인재의 필요성과 관련해서집안이 어지러워지면 양처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신이 생각난다”(44 위세가)라고도 했다. 이렇듯 사마천은 인재가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깨어 있는 인식을 보여줬다.

 

사마천은 글로만 인재를 강조한 게 아니다. 실제 삶에서도 같이 술 한 잔 마신 적 없는 이릉(李陵)이란 젊은 장수를 변호하다가 억울하게도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궁형(宮刑)을 당했다. 그는 이릉을큰 지사라고 표현할 정도로 나라에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해서 그를 적극 변호했다. 특히 자신이 당한 처지 때문인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인재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나아가서는 함께 울분을 터트린다.

<사기>에 기록된 비극적 인물만 120명이 넘을 정도로 사마천은 불우한 인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다.

 

그는 깨어 있는 인재관을 갖고 있었다. 성공은 재능의 본질적 표지이긴 하지만 성공과 실패로만 재능을 가늠하는 경색된 기준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봤다. 역사 발전에 미치는 인간의 작용에 주목했고 이에 따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재가 단련되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적었다. 이는 동양의 인재 사상에 그가 남긴 거대한 공헌이었다.

 

 

실패한 영웅 항우(項羽)의 행적을 제왕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본기(本紀)’에 편입한 것이나 농민 봉기군의 우두머리로서 진의 멸망과 한의 교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동자 출신의 진승(陳勝)을 제후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세가(世家)’에 편입한 것이 그 예다. 특히 한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한 고조 유방의 아내 여태후의 행적까지도 제왕의 기록인 본기에 편입시킨 것은 정말 파격적인 역사관이자 인재관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사마천은 정통주의에 찌든 어용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사마천의 인재관이 탁월한 선구적 인식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인재관은 지금도 유용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깊은 통찰력을 선사한다. 인재란 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사마천은 확신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 각자의 역할에 눈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로 영웅을 논하지 않는다불이성패논영웅(不以成敗論英雄)’이란 말은 인재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사마천의 인재관은 어떤 것이었는지 <사기>의 서술을 통해 알아보자.

 

1. 삼불여: 아무리 뛰어난 리더도 부하 세 사람만 못하다

기원전 206, 진승의 봉기로 거대한 진() 제국이 쓰러지자 전국 각지에서 군웅들이 일어나 패권을 다퉜다. 이 경쟁은 결국 유방과 항우의 양자대결로 압축됐고 전력상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던 유방이 역전에 성공해 한()을 건국했다. 이 두 영웅의 힘겨루기는 그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결국은 인재들의 대결로 압축된다.

 

초·한 전쟁에서 승리한 유방은 황제로 즉위한 다음 낙양(洛陽) 양남궁(陽南宮)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대신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유방은삼베옷에 세 자짜리 검 하나만 달랑 들고 항우와 천하를 다툰 끝에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과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같은 고향 출신인 왕릉(王陵) 등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오만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항우는 인자하여 남을 사랑할 줄 압니다. 하지만 폐하는 사람을 보내 성을 공격하게 해서 점령하면 그곳을 그 사람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함께하셨습니다. 반면에 항우는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시기하여 공을 세우면 그를 미워하고, 어진 자를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해도 그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땅을 얻고도 그 이익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항우는 이 때문에 천하를 잃었습니다.”

 

그러자 유방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장막 안에서 작전을 짜서 천 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걸로 말하자면 나는 장자방(장량)을 따르지 못한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다독이며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로가 끊기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나는 소하를 따르지 못한다. 백만 대군을 모아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했다 하면 기어코 빼앗는 일에서는 내가 한신을 따를 수 없다. 세 사람은 모두 걸출한 인재로서 내가 이들을 기용했기 때문에 천하를 얻은 것이다. 반면 항우는 범증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8 고조본기)

 

유방과 공신들은 초·한 전쟁의 승패 원인에 대해 나름대로의 인식을 보였지만 한결같이 인재의 포용과 대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유방이 다양한 인재를 초빙하고 이들의 능력과 지혜를 잘 활용했기 때문에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특히 유방 본인은 각 방면의 인재들이 제 몫을 해낼 때 성공할 수 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저 유명한 유방의 삼불여(三不如)’, ‘(나는) 세 사람만 못하다라는 인재관이 나왔다. 리더는 인재들이 마음 놓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면 되는 것이다. ‘인재가 성공과 실패, 흥성과 멸망을 결정한다는 사마천의 인재관이 새삼스럽다.

 

2. 외거불피구 내거불피친: 능력만 있다면 원수도 피하지 말고 친인척도 피하지 말라

중국에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인재 기용의 철칙들이 있다. ‘의심스러우면 기용하지 말고(의인불용疑人不用), 기용했으면 의심하지 말라(용인불의(用人不疑)’는 말 같은 것이다. 원수라도 필요하면 기용하라는 원칙도 있다.

 

이렇게 과거의 감정을 버리고 원수를 발탁해 성공한 인재 기용의 사례를 보자. 원수를 기용한 사례는 <사기>에 앞서 <좌전(左傳)>이란 춘추시대의 기록에도 보인다. 기원전 6세기 진()나라 도공 때 중군위라는 벼슬에 있던 기해라는 인물이 은퇴할 때가 되자 도공은 그에게 후임자를 물색해놓고 퇴직하라고 했다. 이에 기해는 해호라는 인물을 추천하는데 놀랍게도 해호는 기해와는 원수와도 같은 사이였다.

 

그런데 해호가 취임을 앞두고 급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도공은 다시 기해에게 후임자를 추천하게 했고 기해는 또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자기 아들 기오를 추천한 것이다.

 

사마천도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기해는 공정했다. 외부에서 인재를 추천하면서 적이라 해서 피하지 않았고, 내부에서 인재를 선발함에 인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았다.” (39 진세가)

 

여기서 유명한외거불피구(外擧不避仇), 내거불피친(內擧不避親)’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유능한 인재라면원수라 해서 피하지 않고 인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3. 관포지교: 인재는 원수라도 발탁하고 친구라도 상사로 모셔라

훗날관포지교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 된 관중과 포숙은 젊어서부터 절친한 친구였지만 서로 다른 주인을 모셨다. 포숙은 양공(襄公)의 셋째 동생의 아들인 소백(小白, 훗날 환공)을 보좌했고, 관중은 양공의 둘째 동생의 아들인 규()를 보좌했다. 기원전 686, 양공이 반란 와중에 장수에게 살해당하자 규와 소백은 치열한 쟁탈전에 돌입했다. 규의 외가인 노나라는 군사를 동원해 규를 서둘러 제의 수도 임치(臨淄)로 돌려보내는 한편 관중에게 먼저 기동대를 이끌고 소백이 머물렀던 거나라로 보내 거와 제의 교차 지점에서 소백의 진로를 막게 했다.

 

소백과 포숙은 수레 100대와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없이 제나라 도성 임치로 향하던 도중 관중 일행과 마주쳤다. 관중은 소백을 향해 화살을 날렸고 소백의 가슴을 맞혔다. 소백은 가슴을 움켜쥔 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관중은 소백이 죽은 줄 알고 서둘러 되돌아가 규에게 이를 알렸다. 그러나 공교롭게 관중이 날린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를 맞췄고 이 덕에 소백은 목숨을 건졌다. 소백은 순간 기지를 발휘해 화살에 맞은 척하며 관중을 현혹시켰던 것이다. 결국 소백이 규를 앞질러 임치에 도착해 왕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 환공이다. 속임수에 넘어갔음을 알게 된 관중은 노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제를 공격했으나 패했다. 승리한 환공은 공자 규의 처형과 관중의 압송을 요구했고 노나라는 하는 수 없이 관중을 제로 보냈다.

 

 

제 환공은 자신을 쏜 원수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관중을 태운 압송 수레가 제국의 국경에 도착하자 참으로 뜻밖에 친구 포숙이 호화로운 수레를 가지고 와서는 정중한 예로 관중을 모시는 것이 아닌가! 실은 포숙은 이미 환공에게 관중의 죄를 사면하고 그를 요직에 발탁할 것을 요청했다. 재능이 뛰어난 인재인데 단지 서로의 길이 달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면서 자신이 관중에 미치지 못하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소를 들어 환공을 설득했다.

 

하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품에 그만 못합니다.

, 나라를 다스림에 공평함이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 신의를 지켜 여러 제후를 포용함이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 법을 정하여 천하가 실행하게 함에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다섯,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어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킴에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포숙은국군()께서 이 나라 하나를 다스린다면 고혜와 이 포숙 둘이면 충분하지만 만약 천하의 패자가 되시고자 한다면 관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관중을 얻는 나라는 어느 나라가 되었건 초강국이 됩니다. 따라서 그를 잃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강조하면서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자신은 그를 보좌하는 데 만족한다고 했다.

 

포숙의 간곡한 요청을 들은 환공은 깊은 원한을 풀고 관중을 기용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재상이란 막중한 자리에 오른 관중은 제국과 환공을 위해 일련의 개혁정치를 단행했고제 환공이 아홉 제후를 통합하여 패자가 되어 천하를 다스리니 관중의 공로가 크다는 평을 들었다.

 

역사상 과거의 원한이나 개인적 감정 때문에 인재를 해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오늘날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인성의 약점을 극복하고 상황이나 사람을 객관적으로 직시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인성의 약점을 뛰어넘어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원수를 중용한 사례는 시공을 초월해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과 영감을 준다.

 

환공은 적이자 원수인 관중을 큰 자리에 기용했다. 이는 환공의 너그러운 도량과 포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관계란 상황에 따라 극적으로 반전되는 경우가 많다. 갈망하던 대권을 차지한 상황에서 환공이 유능한 인재로 정평이 나 있는 관중을 발탁한 일은 드물고 귀한 일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생을 변함없이 관중을 이해하고 그를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추천한 포숙의 행동은 참으로 어렵고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오죽하면이웃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천박한 인심을 보여주는 속담이 지금까지 회자될까? 그리고 사실 그것이 보통 인간의 마음 아닌가 싶다. 따라서 포숙의 행동은 고귀한 인품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인재를 알아보는 일도 어렵지만 인재에게 자신의 자리까지 내주며 추천하기란 정말 어렵다. 어려운 만큼 고귀한 것이기도 하다.

 

4. 일목삼착 일반삼토: 인재를 성심으로 대하라

경영학에는인재를 제 자리에 배치하지 않으면 쓰레기나 마찬가지다라는 말이 있다. 특성과 전문 영역에 맞게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라는 말이다. 인재에 대한 욕심만 앞서 대거 뽑아놓고는 적절히 활용하고 대우하지 못한다면 인재를 데려오지 않는 것만 못하다.

 

인재를 대접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인재 기용의 첫 단계는 사람을 아는 지인(知人)이고 다음 단계가 그 사람을 적절하게 쓰는 용인(用人)인데 이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 대접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모른 체하는 것이 낫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는 인재들은 약간의 허영심과 강한 자존심을 가진 경우가 많고 명예욕도 일반적으로 높다. 따라서 이들을 쓰려는 고용주나 리더는 인재의 이 같은 일반적 특성을 잘 살펴 그를 알아주고 대접해야 할 것이다.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만큼 많은 인재가 필요한 경우도 없다. 기원전 11세기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 중에 주공(周公)이 있었다.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무왕의 동생으로 형을 도와 막 건국한 주나라의 내부 조직을 정비하고 그에 알맞은 인재들을 스카우트하는 일을 책임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악(禮樂, 예법과 음악)을 제정해 주나라 봉건통치의 기초를 닦고 조카 성왕을 보좌하며 건국 초기 불안했던 왕조를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예악의 제정 등 주 왕조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제도 정비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과정에서 주공은 유능한 인재의 발굴과 기용이 관건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래서 자신의 식견을 높이고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아침에는 100편의 글을 읽고 저녁에는 70명의 인재들과 면담했다고 한다. 그가 면담한 사람들 중에는 평민과 하층민도 다수 포함돼 있었고 어질고 유능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라면 천 리 길을 마다 않고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에게 언제든지 좋은 정책과 의견을 제안하는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 그룹은 그 수가 무려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사기> 33 노주공세가에서는 주공이 인재들을 얼마나 중시했는지에 대해 아들 백금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나온다. 차분히 생각하면서 읽어볼 만하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며, 지금 왕이신 성왕의 숙부다. 어느 모로 보나 나는 천하에 천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나는일목삼착(一沐三捉), 일반삼토(一飯三吐)’하면서까지 인재를 우대했다. 오로지 천하의 현자를 잃지나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목욕 한 번 하다가 머리카락을 세 번이나 움켜쥐고 나왔고, 밥 한 번 먹다가 먹던 것을 세 번이나 뱉어내고 나왔다일목삼착, 일반삼토라는 이 유명한 말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인간관계를 소홀하지 말 것이며 아울러 늘 성심으로 인재를 대우하라는 충고다.

 

5. 월석보와 안영: 인재를 알아봐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더 원망을 산다

사마천은 인재를 대접하는 문제에 대해 흥미로운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기원전 6세기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이었던 안영이 숨은 현자 월석보(越石父)에게 혼이 난 이야기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안자가 온몸이 오랏줄에 묶인 채 죄수를 태우는 수레에 갇혀 끌려가는 숨은 은자 월석보를 봤다. 안자는 황급히 관아에 요청해 속죄금을 내고 월석보를 풀어주게 한 다음 자신의 집으로 모셔왔다. 그런데 이날 이후 안자는 이런저런 바쁜 일 때문에 월석보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오랜만에 안자의 얼굴을 본 월석보는 당장 두 사람의 우의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해 하는 안자에게 월석보는 이렇게 말했다.

 

“듣자 하니군자는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뜻을 펼친다고 합니다. 내가 묶여 있을 당시 나를 묶었던 포졸들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어 속죄금을 내고 나를 구했으니 이는 나를 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나를 알면서 무례하게 대한다면 이는 묶여 있을 때보다 더 못한 것 아닐는지요?” (62 관중안영열전)

 

이 말에 안자는 깨달은 바가 있어 두 말 않고 큰 손님에 대한 예의로 월석보를 우대했다고 한다. 천하의 안자도 한순간 사람 대접을 소홀히 했다가 혼쭐이 난 것이다. 여기서 월석보가 말한군자는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뜻을 펼친다는 대목을 음미해보시기 바란다.

 

인간관계가 다 그렇지만 인재를 쓰는 일에 있어서도 단순히 인재임을 알아주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알아줬으면 그 사람을 대접하고 필요한 곳에 써야 한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도 인재를 알아 적소에 기용했을 때 설득력을 가진다.

 

동양의 전통적인 인재 기용의 단계는 대체로 지인(知人) - 용인(用人)이었다. 그런데 이 단계를 차분히 음미하고 살펴보면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필요한 몇 단계가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용한 인재를 아끼는애인(愛人)’과 보다 나은 인재를 키우는육인(育人)’ 내지배인(培人)’의 단계가 그것이다. 지인 - 용인 - 애인 - 육인에 이르는 단계는 오늘날 기업의 인재 경영에 있어서도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이다.

 

6. 무정과 부열: 술수를 써서라도 인재를 확보하라

전 세계 기업들이 인재를 데려오기 위해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는 오늘날만의 현상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재를 모셔오기 위한 경쟁은 정도의 차이만 있었지 본질은 같다. 사마천이 <사기> 곳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인재를 알아보고 그 인재를 모셔와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방법의 문제다. 특히 춘추전국이라는 기회의 시대에는 오늘날과 흡사하게 국경을 넘나드는 인재 모셔오기 열풍이 불었다. 인재 유출 때문에 크게 낭패를 보거나 나라를 망친 경우도 적지 않다. 그 시대는 새로운 계층이 생겨나 사회를 주도하는 등 개인의 가치가 극대화됐던 시기였기 때문에 인재 확보 경쟁 또한 매우 치열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중요한 인재를 어떤 극적인 방법으로 기용하고 붙들었는지 다음의 일화를 보자.

 

무정은 상 왕조 후반기의 국왕으로 큰 성과를 남긴 인물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을 민간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런 경험 때문에 백성들의 노고를 잘 헤아렸고 하층민들의 삶도 잘 이해했다.

 

왕의 자리에 오른 무정이 주변 대신들을 살펴봤으나 자신을 도와 대업을 이룰 만한 인재가 없었다. 이에 무정은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어느 날 대신들과 연회를 베풀던 무정이 갑자기 기절해 쓰러졌다. 무정은 사흘이나 지나서야 깨어나서는 대신들에게 이상한 꿈을 꾸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누워 있는 동안 하늘에 가서 천제(天帝)를 만났다. 천제는 나더러 나라 일에 온 힘을 다하되 과거의 법속에 구속받지 말고 유능한 인재를 기용해 나라를 부흥시키라고 했다. 천제께서 떠나면서()’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예가 있는데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라 특별히 내게 준다고 했다. 그대들은 서둘러 사방으로 찾아 나서되 특별히 변방에서 고된 일을 하는 노예를 주의해서 살펴라.” (3 은본기)

 

명령을 받은 대신들이 사방으로 찾아다닌 끝에 지금의 산서성 평륙현 동쪽으로 추정되는 부험(傅險)이란 지방에서 성을 쌓고 있는이란 사람을 찾아냈다. 열을 무정에게 데려가니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고 무정은 그를 재상에 기용해 상을 잘 다스렸다. 열을 부험이란 곳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에게부열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그렇다면 무정은 부열이란 존재를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사마천은무정이 꿈에서이라는 이름의 성인을 만나 백관을 시켜 교외에서 찾게 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기록들을 종합해볼 때 대체로 이런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어린 시절 민간 생활을 체험한 바 있는 무정은 그 과정에서 부험이란 지역에서 열이란 노예를 알게 됐다. 그와 사귀어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왕위에 오른 무정이 열을 기용하고 싶었으나 미천한 출신인데다 대신의 반대가 뻔했기 때문에 꿈에서 천제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꾸며 열을 초빙하도록 한 것이다.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자 할 때는 그 출신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인재임을 알게 된 즉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를 찾아 모셔 와야 한다. 무정이 성공한 비결이다. 이럴 경우 인재를 기용하기 위해 어떤 술수를 사용했다 해서 나무랄 일은 아니다.

 

 

 

 

6. 소하와 한신: 인재가 인재를 알아보고 데려온다

유방이 서한 왕조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세 사람을 흔히들서한삼걸이라 부른다. 이 중에서 한신(韓信)은 명장으로 군대를 이끌며 열세에 놓여 있던 유방이 항우를 꺾고 최후의 승자가 되게 했다. 그런데 한신은 한때 자신을 몰라주는 유방에게서 도망치기도 했다. 이때 도망간 한신을 밤새 뒤쫓아 가서 그를 데려온 사람이 역시 서한삼걸의 하나인 소하(蕭何)였다. 한신은 유방 밑에서 앞날이 여의치 않음을 직감하고 다른 곳에 몸을 맡길 결심을 했다. 그래서 어느 날 새벽을 틈타 행장을 꾸린 다음 말을 몰아 유방의 진영을 빠져나왔다. 보고를 받은 소하는 깜짝 놀라 유방에게 알릴 겨를도 없이 부하 몇을 데리고 한신의 뒤를 쫓았다. 피로도 아랑곳 않고 계속 뒤를 쫓았으나 해가 질 때까지 한신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소하는 포기하지 않고 달빛을 따라가 마침내 한계(寒溪)라는 시냇가에서 한신을 만났다.

 

소하: 한 장군, 우리는 첫 만남부터 의기투합해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이인데 어째서 인사도 없이 슬그머니 떠나십니까?”

한신: 재상의 은혜는 정말 잊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한왕이 저를 쓰려 하지 않으니 제가 거기 남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소하 : 제가 다시 한번 한왕께 한 장군을 대장군에 임명하게끔 추천해보겠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한왕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저도 장군을 따라 떠나겠소!

 

한신은 소하의 진솔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유방의 진영으로 되돌아왔다. 이틀이나 소하가 얼굴을 보이지 않자 소하도 도망친 줄 알았던 유방은 한신과 함께 돌아온 소하를 보고는 버럭 화를 내면서도망간 장군이 열은 넘는데 어째서 한신만 뒤쫓았는가라고 다그쳤다. 소하는장군감은 찾기 쉬워도 능력 있는 장군감은 찾기 힘듭니다. 한신은 천하에 둘도 없는 인재입니다. 대왕께서 한중(漢中)에만 둥지를 틀고 있으려면 한신을 기용하지 않아도 무방하겠지만 천하를 얻으시려면 한신 없이는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극적인 과정을 통해 한신은 대장군에 임명됐고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는 결정적인 전투는 거의 모두 한신이 지휘하게 된다.

 

인재가 인재를 알아본다고 했다. 훌륭한 인재라면 자신보다 뛰어나거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사심 없이 추천할 줄 알아야 한다. 소하는 일찌감치 한신의 자질을 간파했으나 유방은 머뭇거렸다. 이에 소하는 강경한 태도로 유방을 설득했고 마침내 한신을 대장군으로 발탁하게 만들었다.

 

치열한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재 하나가 승부를 가름하는 관건으로 작용한다. 훗날 초한 쟁패전에서 한신이 보여준 결정적 역할은 소하의 눈이 정확했음을 여실히 입증했다. 인재라고 확신한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잡아야 하며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줘야 한다. 또 그런 인재는 다른 인재가 알아본다.

 

7. 정료지광: 인재를 찾고 있음을 광고하라. 그러나 문턱은 낮춰라

앞서 포숙의 추천을 받아들여 원수였던 관중을 재상에 기용한 제나라 환공의 리더십과 포숙의 사심 없고 숭고한 인재 추천 사례를 보았다. 인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제 환공이 전국의 인재를 모으고 기용하는 과정에서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일화가 전해진다.

 

관중과 포숙을 중심으로 투톱 체제를 구축한 환공은 나라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각 분야에서 일할 인재들을 초빙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환공은 자신의 집무실 뜨락에 야간에도 불을 훤히 밝히게 하여 누구라도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게 배려했다. 이것이 유명한정료지광(庭燎之光)’이란 고사성어의 출전이다. ‘뜨락에 밝혀 놓은 불빛이란 뜻으로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해서 환공은 적지 않은 인재를 모으고 기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찾아오는 오는 사람이 줄더니 급기야 아무도 걸음을 하지 않았다. 환공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렇게 24시간 대기하면서 인재를 위한 문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 불과 몇 달 만에 발길이 끊어지다니.

 

그러던 어느 날 늙은 노인이 환공을 찾아왔다. 환공은 무슨 재주가 있냐고 물었고 노인은 자기는구구산법’, 즉 구구셈을 아주 잘한다고 대답했다. 환공은 어이가 없었다. “구구셈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어이가 없다는 환공의 표정에서 환공의 마음을 읽었는지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인재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것은 공이 기용한 인재들이 너무 잘난 인재들인데다 공이 바라는 기준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인재들이 기용되지 않으면 어쩌나 겁이 나서 안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구산법밖에 모르는 이 늙은이를 기용하시면 저보다 나은 인재들이 걱정 없이 몰려 들 것입니다.”

 

환공은 노인의 충고를 받아들였고 다시 많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인재를 아끼고 기용하고자 할 때는 여론의 환기가 필요하다. 이는 오늘날의 광고와 다름없다. 환공이정료의 예의를 채택한 것은 정말 좋은 광고이자 홍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홍보가 몰고 올 파장이나 효과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인재를 아끼는 것이 지나쳐 강렬한 소유욕으로 발전하면 인재들이 가까이 오길 꺼린다. 또 인재를 발탁하고 기용하는 사람의 능력과 명성이 너무 출중해도 인재들의 심리상태가 위축돼 머뭇거린다. 통치자나 기업 경영자는 인재를 초빙하고 기용할 때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재를 자기 주변에 줄줄이 거느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인재들은 이를 가장 무서워한다. 요소요소에 안배하고 적절한 대접을 해줘야 한다.

 

8. 채성자의 충고: 인재의 유출은 두 배 피해다

최근 나라의 인재 유출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들 반 이상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 설문조사도 있다. 인재는 대우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마음 놓고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따진다.

 

춘추시대에도 인재 유출이 심각했던 모양이다. 채성자(蔡聲子)는 춘추시대의 소국이었던 채()나라 사람으로 탁월한 웅변가이자 외교가였는데 그는 초나라의 인재를 진나라가 역이용한 사건에 대한 논평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채성자는 초나라의 재상 자목과 대화를 나누면서 초나라의 구기자나무, 가래나무, 가죽 등이 끊임없이 진나라로 수출돼 활용되고 있는 상황을 지적했다. 인재 유출 문제를 에둘러 말한 것이다.

 

그는 이어 초나라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 인재가 유출돼 피해를 본 사례들을 들어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기원전 589년 초나라 대부 자영과 사마자반이 하희라는 여자를 두고 갈등을 빚었다. 자영은 진으로 도주하고 훗날 오나라의 군대를 훈련시켜 초나라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끝으로 채성자는 최근 석연치 않은 오해 때문에 정나라로 도망갔다가 다시 진으로 가서 큰 대우를 받고 있는 초나라 사람 오거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를 다시 불러들이지 않으면 그 후환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경고했다.

 

채성자의 경고는 초나라 재상 자목을 불안하게 했다. 자목은 이를 초 강왕(康王)에게 보고했고 강왕도 채성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해 오거의 명예와 직위를 회복시킨 다음 다시 초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자기 쪽 인재가 상대나 적 편으로 넘어가고 상대가 그를 이용한다면 그 결과는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보다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기 마련이고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사람의 몸뚱이를 붙잡는 것보다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인재의 유출은 현대사회에서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길을 걷다 보면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산에 걸려 넘어지는 법은 없다. 인재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문제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다가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을 쓰는 용인에 있어서 인재의 대접이란 문제는 미묘한 것이어서 리더는 늘 인재의 심기변화를 놓치지 않고 살펴야 하고 인재의 주변상황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그 인재가 기업의 핵심 기술이나 국가의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요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김영수 전 영산원불교대 교수 allchina21@naver.com

필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고대 한중 관계사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중국 소진학회 초빙이사, 중국 사마천학회 회원이며 영산 원불교대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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