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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의 인재관

인재라면 원수라도 데려다 써라 사마천, 用人의 지극함을 말하다

김영수 | 133호 (2013년 7월 Issue 2)

 

 

<사기>는 사람에 대한 백과사전

인재가 조직의 성공과 실패, 흥성과 멸망을 좌우한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해 변치 않는 원칙이자 진리에 가까운 명제다. 동서고금을 통해 인재 기용과 관련해 많은 이론들이 나타났고, 그 이론들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인류는 인재 경영(HRM)과 관련해 많은 경험을 축적해왔다. 그중에서도 중국 전한시대의 역사가 사마천1 <사기(史記)>를 통해 인재 기용과 관련해 깊은 논의를 진행했다. 특히 생생한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인재의 기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를 일깨운다.

 

그는 <사기> 전체 130편의 86%에 해당하는 112편을 사람에 대한 기록에 안배할 정도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과 식견을 보여줬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인재에 대한 관심으로 직결되고 다시 개혁사상으로 심화됐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난다. 군자는 기용되고 소인은 쫓겨난다. 나라가 망하려면 어진 사람은 숨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난신들이 귀하신 몸이 된다. ‘나라의 안위는 군주가 어떤 명령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고 나라의 존망은 인재의 등용에 달려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일 게다.” (<사기> 50 초원왕세가 ; 112 평진후주보열전)

 

또 그는 어려운 시기 인재의 필요성과 관련해서집안이 어지러워지면 양처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신이 생각난다”(44 위세가)라고도 했다. 이렇듯 사마천은 인재가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깨어 있는 인식을 보여줬다.

 

사마천은 글로만 인재를 강조한 게 아니다. 실제 삶에서도 같이 술 한 잔 마신 적 없는 이릉(李陵)이란 젊은 장수를 변호하다가 억울하게도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궁형(宮刑)을 당했다. 그는 이릉을큰 지사라고 표현할 정도로 나라에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해서 그를 적극 변호했다. 특히 자신이 당한 처지 때문인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인재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나아가서는 함께 울분을 터트린다.

<사기>에 기록된 비극적 인물만 120명이 넘을 정도로 사마천은 불우한 인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다.

 

그는 깨어 있는 인재관을 갖고 있었다. 성공은 재능의 본질적 표지이긴 하지만 성공과 실패로만 재능을 가늠하는 경색된 기준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봤다. 역사 발전에 미치는 인간의 작용에 주목했고 이에 따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재가 단련되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적었다. 이는 동양의 인재 사상에 그가 남긴 거대한 공헌이었다.

 

 

실패한 영웅 항우(項羽)의 행적을 제왕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본기(本紀)’에 편입한 것이나 농민 봉기군의 우두머리로서 진의 멸망과 한의 교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동자 출신의 진승(陳勝)을 제후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세가(世家)’에 편입한 것이 그 예다. 특히 한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한 고조 유방의 아내 여태후의 행적까지도 제왕의 기록인 본기에 편입시킨 것은 정말 파격적인 역사관이자 인재관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사마천은 정통주의에 찌든 어용학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오늘날에 와서는 사마천의 인재관이 탁월한 선구적 인식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인재관은 지금도 유용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깊은 통찰력을 선사한다. 인재란 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사마천은 확신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 각자의 역할에 눈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로 영웅을 논하지 않는다불이성패논영웅(不以成敗論英雄)’이란 말은 인재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사마천의 인재관은 어떤 것이었는지 <사기>의 서술을 통해 알아보자.

 

1. 삼불여: 아무리 뛰어난 리더도 부하 세 사람만 못하다

기원전 206, 진승의 봉기로 거대한 진() 제국이 쓰러지자 전국 각지에서 군웅들이 일어나 패권을 다퉜다. 이 경쟁은 결국 유방과 항우의 양자대결로 압축됐고 전력상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던 유방이 역전에 성공해 한()을 건국했다. 이 두 영웅의 힘겨루기는 그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결국은 인재들의 대결로 압축된다.

 

초·한 전쟁에서 승리한 유방은 황제로 즉위한 다음 낙양(洛陽) 양남궁(陽南宮)에서 술자리를 베풀어 대신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유방은삼베옷에 세 자짜리 검 하나만 달랑 들고 항우와 천하를 다툰 끝에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과 항우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같은 고향 출신인 왕릉(王陵) 등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오만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항우는 인자하여 남을 사랑할 줄 압니다. 하지만 폐하는 사람을 보내 성을 공격하게 해서 점령하면 그곳을 그 사람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함께하셨습니다. 반면에 항우는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시기하여 공을 세우면 그를 미워하고, 어진 자를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해도 그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땅을 얻고도 그 이익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항우는 이 때문에 천하를 잃었습니다.”

 

그러자 유방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장막 안에서 작전을 짜서 천 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걸로 말하자면 나는 장자방(장량)을 따르지 못한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다독이며 양식을 공급하고 운송로가 끊기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나는 소하를 따르지 못한다. 백만 대군을 모아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했다 하면 기어코 빼앗는 일에서는 내가 한신을 따를 수 없다. 세 사람은 모두 걸출한 인재로서 내가 이들을 기용했기 때문에 천하를 얻은 것이다. 반면 항우는 범증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8 고조본기)

 

유방과 공신들은 초·한 전쟁의 승패 원인에 대해 나름대로의 인식을 보였지만 한결같이 인재의 포용과 대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유방이 다양한 인재를 초빙하고 이들의 능력과 지혜를 잘 활용했기 때문에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특히 유방 본인은 각 방면의 인재들이 제 몫을 해낼 때 성공할 수 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저 유명한 유방의 삼불여(三不如)’, ‘(나는) 세 사람만 못하다라는 인재관이 나왔다. 리더는 인재들이 마음 놓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면 되는 것이다. ‘인재가 성공과 실패, 흥성과 멸망을 결정한다는 사마천의 인재관이 새삼스럽다.

 

2. 외거불피구 내거불피친: 능력만 있다면 원수도 피하지 말고 친인척도 피하지 말라

중국에는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인재 기용의 철칙들이 있다. ‘의심스러우면 기용하지 말고(의인불용疑人不用), 기용했으면 의심하지 말라(용인불의(用人不疑)’는 말 같은 것이다. 원수라도 필요하면 기용하라는 원칙도 있다.

 

이렇게 과거의 감정을 버리고 원수를 발탁해 성공한 인재 기용의 사례를 보자. 원수를 기용한 사례는 <사기>에 앞서 <좌전(左傳)>이란 춘추시대의 기록에도 보인다. 기원전 6세기 진()나라 도공 때 중군위라는 벼슬에 있던 기해라는 인물이 은퇴할 때가 되자 도공은 그에게 후임자를 물색해놓고 퇴직하라고 했다. 이에 기해는 해호라는 인물을 추천하는데 놀랍게도 해호는 기해와는 원수와도 같은 사이였다.

 

그런데 해호가 취임을 앞두고 급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도공은 다시 기해에게 후임자를 추천하게 했고 기해는 또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자기 아들 기오를 추천한 것이다.

 

사마천도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기해는 공정했다. 외부에서 인재를 추천하면서 적이라 해서 피하지 않았고, 내부에서 인재를 선발함에 인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았다.” (39 진세가)

 

여기서 유명한외거불피구(外擧不避仇), 내거불피친(內擧不避親)’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온다. 유능한 인재라면원수라 해서 피하지 않고 인척이라 해서 피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3. 관포지교: 인재는 원수라도 발탁하고 친구라도 상사로 모셔라

훗날관포지교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 된 관중과 포숙은 젊어서부터 절친한 친구였지만 서로 다른 주인을 모셨다. 포숙은 양공(襄公)의 셋째 동생의 아들인 소백(小白, 훗날 환공)을 보좌했고, 관중은 양공의 둘째 동생의 아들인 규()를 보좌했다. 기원전 686, 양공이 반란 와중에 장수에게 살해당하자 규와 소백은 치열한 쟁탈전에 돌입했다. 규의 외가인 노나라는 군사를 동원해 규를 서둘러 제의 수도 임치(臨淄)로 돌려보내는 한편 관중에게 먼저 기동대를 이끌고 소백이 머물렀던 거나라로 보내 거와 제의 교차 지점에서 소백의 진로를 막게 했다.

 

소백과 포숙은 수레 100대와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없이 제나라 도성 임치로 향하던 도중 관중 일행과 마주쳤다. 관중은 소백을 향해 화살을 날렸고 소백의 가슴을 맞혔다. 소백은 가슴을 움켜쥔 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관중은 소백이 죽은 줄 알고 서둘러 되돌아가 규에게 이를 알렸다. 그러나 공교롭게 관중이 날린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를 맞췄고 이 덕에 소백은 목숨을 건졌다. 소백은 순간 기지를 발휘해 화살에 맞은 척하며 관중을 현혹시켰던 것이다. 결국 소백이 규를 앞질러 임치에 도착해 왕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 환공이다. 속임수에 넘어갔음을 알게 된 관중은 노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제를 공격했으나 패했다. 승리한 환공은 공자 규의 처형과 관중의 압송을 요구했고 노나라는 하는 수 없이 관중을 제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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