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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게으른강자’여, 각성하라

신동엽 | 39호 (2009년 8월 Issue 2)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나 몽골 등 위대한 제국들은 예외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기업에도 흥망성쇠가 있다. 최근 GM, 씨티그룹, 소니, 코닥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21세기 글로벌 초경쟁 환경에서는 세계 시장을 주도했던 초우량 기업들이 갑자기 몰락의 길을 걷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왜 이런 전설적인 기업들이 계속 경쟁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위기에 빠지는 것일까?
 
강한 기업들의 몰락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조건들이 비슷하다면 당연히 현재 강한 경쟁력을 가진 기업들이 약한 기업들에 비해 미래에도 계속 경쟁력을 유지하기 쉬워야 한다. 따라서 초우량 기업들의 부침은 극히 드물어야 한다. 예를 들면 혁신 창출에 있어서도 풍부한 역량과 자원을 가진 초우량 기업들이 약한 기업보다 훨씬 유리하다. 그러나 실제 기업의 역사를 살펴보면,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갑자기 몰락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경영학 조직 이론 분야의 ‘레드 퀸 경쟁(Red Queen Competition)’ 이론은 초우량 기업들의 흥망성쇠라는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레드 퀸 경쟁
 
레드 퀸 현상은 라이벌 기업들 사이의 ‘경쟁적 공동 진화(competitive co-evolution)’를 뜻한다. 레드 퀸 경쟁의 원래 아이디어는 진화생물학에서 나왔다. 이 이론은 경쟁하는 종(species)들 중 어느 한 종이 진화했을 때, 나머지 종이 그대로 있으면 멸종하기 때문에 그 종도 따라서 진화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레드 퀸의 원리는 특히 기업들 간의 혁신 경쟁 원리를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므로 경영학의 조직 이론 분야에서 급속히 발전해왔다.
 
이런 경쟁적 공동 진화가 ‘레드 퀸 현상’으로 불리게 된 것은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으로 1871년에 쓴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일화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앨리스가 자신을 해치려는 빨간 옷의 심술꾸러기 여왕 레드 퀸을 만나자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는 장면이 나온다. 죽을 힘을 다해 앞으로 달린 앨리스가 이제 레드 퀸을 따돌렸겠지 하고 뒤돌아보는 순간, 레드 퀸이 바로 자기 옆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외친다. “난 당신에게서 도망치려고 온 힘을 다해 한참을 달렸는데, 어째서 당신과 한 걸음도 멀어지지 않았나요?” 그러자 레드 퀸은 이렇게 답한다. “너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뛰고 있었지만, 네가 뛰고 있는 길은 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뒤로 움직이고 있어. 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으려고만 해도, 그냥 서 있으면 안 되고 길이 움직이는 만큼 빨리 뛰어야 해. 그리고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고 싶으면 길보다 빨리 뛰어야 하고.”
 
즉 레드 퀸이 말하는 것은 경쟁 상황에서의 진화와 발전의 상대성이다. 경쟁자나 환경이 앞으로 움직일 때는 자신이 앞으로 나간 만큼 진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진화나 발전의 정도는 반드시 경쟁자나 환경의 발전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창조적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수익의 대부분을 독점하는 21세기형 창조 경쟁에서는 어느 기업이 특정 기술 하나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고 해서 퍼스트 무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기간 경쟁 기업이 세계 최초 기술을 2가지 개발해버리면, 앞의 기업은 퍼스트 무버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걸음 뒤로 후퇴했다고 봐야 한다.
 
게으른 강자 증후군
 
레드 퀸 경쟁의 원리는 진화생물학의 연구 대상이던 동물이나 식물은 물론 인간과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 기업들의 진화와 흥망성쇠에 그대로 적용된다. 레드 퀸 경쟁이 기업의 흥망성쇠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온 윌리엄 바넷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게으른 강자(lazy monopolist)’ 이론에서 초우량 기업들이 레드 퀸 경쟁에서 어이없이 무너지는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편의상 라이벌 기업들 간 경쟁이 2라운드에 걸쳐 벌어진다고 가정하자. 1라운드에서 초우량 기업은 당시 갖고 있던 전략이나 시스템, 역량, 문화 등의 경쟁력을 토대로 나머지 라이벌을 압도할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기업들의 상당수는 1라운드를 버티지 못하고 사멸하고 소수만 살아남는다. 그런데 이때 겨우 살아남은 소수의 약자들은 그 상태로 2라운드 경쟁이 벌어지면 또다시 초우량 기업에 패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2라운드에 들어가기 전에 필사의 노력을 다해 환골탈태하며 근본적 혁신을 시도한다.
 
그런데 문제는 1라운드를 제패했던 초우량 기업이다. 이 강자는 당시의 전략, 시스템, 역량, 문화 덕분에 1라운드에서 라이벌을 압도했으므로 근본적 혁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1라운드의 경쟁력 패러다임을 그대로 유지한 채 2라운드 경쟁에 돌입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즉 압도적 경쟁 우위를 지닌 초우량 기업들은 근본적 혁신 노력을 하지 않는 ‘게으른 강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강자는 2라운드 경쟁 양상이 1라운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1라운드에서 겨우 살아남은 소수의 약자들은 그동안 뼈를 깎는 혁신 노력을 통해 전혀 다른 플레이어로 업그레이드해 2라운드 경쟁에 나섰다. 따라서 1라운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략과 시스템, 역량, 문화를 구축한 과거의 약자들 때문에 게으른 강자는 생존 위기에 처한다. 그는 1라운드 때의 경쟁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경쟁자들이 앞으로 나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레드 퀸 경쟁이 재미있는 것은, 2라운드에서 게으른 강자가 위기에 빠진 이유가 바로 1라운드 때의 자신의 강한 경쟁력 때문이라는 점이다. 즉 1라운드 때의 강력한 경쟁력이 다른 기업들의 혁신 노력을 자극해 결과적으로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고 말았다.
 
21세기형 레드 퀸 경쟁과 상시 생존 위기
 
레드 퀸 경쟁과 게으른 강자 현상은 현대 기업사를 통해 무수히 관찰되고 있다. 20세기 초 세계 자동차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포드의 경쟁력 때문에 생존 위기에 빠진 GM은 시장 세분화 전략과 사업부제 조직으로 재무장해 포드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또 GM의 엄청난 규모의 경제 때문에 고사 위기에 빠졌던 도요타는 ‘TPS(도요타 생산 시스템)’라는 생산 패러다임 혁신으로 또다시 GM을 쓰러뜨렸다. 최근 글로벌 전자 산업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소니 등 일본 전자업체들의 막강한 경쟁력 때문에 수차례 생존 위기를 겪어야 했던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디지털 기술 역량의 개발과 글로벌 공급망 관리(SCM) 구축 등 뼈를 깎는 혁신 노력으로 일본 업체들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창조와 항구적 혁신이 경쟁의 룰인 21세기 글로벌 초경쟁 환경은 레드 퀸 경쟁의 원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작용하는 시대다. 21세기형 레드 퀸 경쟁에서는 현재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기업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근본적 혁신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경쟁력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자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조직 이론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직 이론 분야의 세계 최고 학술지 등 다수의 저널에 논문을 실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공동대표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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