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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에게 리더가 김혜인 BAT그룹 최고인사책임자(CHRO)

“승진 원하면 나를 대체할 사람 키워야”

김윤진 | 351호 (2022년 08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한국에서 나고 자란 김혜인 최고인사책임자(CHRO)가 글로벌 그룹인 영국 BAT 경영 이사회 최초의 여성 일원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인사관리로 시야를 한정하지 않고 비즈니스 상황에 맞는 인사 해법을 내놓음으로써 그룹 내 다른 부서, 팀의 신뢰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업 다각화가 빠르게 일어나는 격동기에 적응하려면 바뀐 시장과 고객 기반을 모사해(mirroring) 직원 기반도 다각화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그룹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화하는 중책을 이끌었다. 그리고 본인이 승진하기 위해서라도 본인을 대체할 후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팀원 개발에 노력해 ‘함께 일하면 성장할 수 있는 리더’로서 평판을 쌓았다.



최근 글로벌 기업의 가장 큰 화두는 다양성(Diversity)과 포용성(Inclusion)이다. 전 세계 175개국 이상의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다양한 국적을 가진 5만2000명 이상의 임직원이 근무하는 영국의 BAT(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 최대 담배 회사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본사에만 81개국 출신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해외 법인을 모두 합하면 141개국에 달하는 관리직들이 몸담고 있는 만큼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을 아우를 만한 조직 문화를 구축하는 게 회사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더욱이 담배 회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연초 담배 등 전통적인 제품군 외에 건강상의 유해를 낮춘 대체품 개발 등 신사업 전환이 가속화할수록 IT, 전기전자, 소비재 등 다른 산업군에서의 인력 수혈도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국제기구를 방불케 할 정도로 다양한 국적의 인력은 물론 포트폴리오 다각화 과정에서 영입된 이질적인 산업군의 인력까지 조직에 융합해야 하는 과제가 추가된 셈이다.

이렇듯 6개 대륙에서 120년간 사업을 영위해 온 전통 기업이지만 비즈니스 격변기를 지나고 있는 BAT그룹에서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 즉 인사, 문화 및 포용성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수장은 바로 한국인 여성인 김혜인 최고인사책임자(CHRO)다. 김 CHRO는 2019년 1월 BAT그룹 경영 이사회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한국인 임원으로 발탁됐다. 2008년 BAT코리아에 입사한 뒤 14년간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홍콩, 영국 등 전 세계에서 그룹 인사관리를 책임져 온 김 CHRO를 DBR가 만나 한국인으로서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진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과 그룹의 전략 및 정책 실행을 감독하는 경영 이사회에 합류하기까지의 여정을 직접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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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와 연계된 인사관리 해법을 제안하라

어떤 인사관리 성과들을 인정받아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건지 설명해달라.

인도네시아(2009∼2011년), 일본(2011∼2013년) 등 여러 나라에서 인사관리를 총괄했지만 2013년 한국에 인사총괄 부사장으로 돌아왔을 때가 회사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도전 과제가 가장 많이 산적해 있던 시기였다. 가격 전략이 뜻대로 안 풀려 시장점유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고, 매출이 안 나오다 보니 노사 간 긴장이 팽팽했다. 회사가 초기에 이 긴장 관계를 잘 관리하지 못해 우수 인재들이 많이 떠났고, 공장 생산량이 줄고 영업 성과급도 깎이다 보니 불만이 누적됐다. 복수 노조가 5개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인재 이탈을 막고 노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인사팀 업무가 과중해지다 보니 인사팀을 이끄는 책임자로서 팀원들을 어떻게 다독이고 붙잡을지가 큰 과제였다.

이때 생각한 게 결국 갈등의 원천은 ‘회사가 우리 이야기를 안 들어준다’라는 불만이 쌓여서인 만큼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는 데서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피플 베이직(People Basic)’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관리자가 기본부터 다시 다지자는 취지로 직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영업 직원들이 현장에서 판촉이나 캠페인 등에 대한 개선안을 제시하면 하루 이틀 내 반드시 피드백을 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금요일에 업무 관련 요청이 접수되면 어떤 부분은 반영이 가능하고, 어떤 부분은 안 되는지 반드시 월요일까지는 답변을 하도록 했다. 또한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회사가 바로 액션을 취하도록 했다. 그리고 실제 이런 직원 요청을 바탕으로 업무를 효율화해서 성과가 날 경우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이렇게 본인들의 불만과 제안이 받아들여지니 주인 의식과 사기가 높아졌고, 노사 간 대립 관계도 완화됐다. 이런 갈등 관리 전반에 대해 성과를 인정받은 게 아시아퍼시픽 지역본부의 인사총괄 헤드로 승진하는 계기가 됐다.

구체적으로 현장에 어떤 불만들이 있었고, 어떻게 해결했길래 노사 관계까지 개선된 것인가?

가령, 한국 사천공장의 경우 담배 생산량이 계속 줄고 그에 따른 성과급 감소나 고용 안정성 저하가 불가피하다는 게 불만의 근원이었다. 대부분 내수용 담배만 생산하다 보니 내수 시장 축소로 인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가 힘들었다. 생산량을 다시 늘리려면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판매되는 제품 물량까지 수주해야 하는데 해외시장 판매분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노사 관계가 반드시 안정돼야 했다. 일본의 담배 시장이 큰 편인데 당시만 해도 미국 공장에서 이 물량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었기에 이를 끌어오는 것만으로 생산량 감소분을 메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장 근로자들을 열심히 설득했다. 사천공장이 안정적이고 협력이 잘된다는 것을 대내외에 보여주고 노사가 합심해서 물량을 확보해 와야 규모의 경제도 달성되고 생산 원가를 낮춰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고 호소한 것이다.

이렇게 대안을 제시하고 진심으로 설득하자 공장 근로자분들도 회사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줬다. 사실 원래부터 한국 공장의 기술력이나 전문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에 노사 긴장이 완화되자마자 상황이 좋아졌다. 아시아 판매 물량 가운데 복잡한 작업이나 혁신이 필요한 제품군에 대한 생산 의뢰는 모두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생산량이 확충되면서 성과급도 다시 늘고, 라인도 증설됐으며, 사천공장의 직원 수도 훨씬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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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퍼시픽 지역본부 총괄로 갔을 때
어려움은 없었나?

아시아퍼시픽 인사총괄 헤드로 갔을 때 이 지역본부에서 가장 이익을 많이 내던 호주 시장의 수익성이 대폭 하락하는 상황이 닥쳤다. 한 플레이어가 촉발시킨 가격 전쟁으로 인해 시장 전체가 출혈을 감수하게 된 것이다. 외부 시장 상황 자체를 바꿀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지역본부의 수익이 악화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때 비용 절감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조직 구조나 직급 체계 등을 어떻게 효율화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지역본부에 1만7000여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과연 이 정도 규모의 직원을 배치하는 것이 최선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이 중 대다수가 판매직인데 과연 산업 자체의 파이가 축소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영업 조직의 사이즈를 유지하는 게 효율적인지, 이 인원에 투입되는 고정비가 합당하게 책정됐는지를 고민한 것이다. 인건비를 많이 쓸수록 브랜드 자체에 대한 투자가 줄고, 브랜드 가치를 제고하지 못하면 계속 판매가를 낮춰 가격으로만 경쟁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작용했다.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도 궁금하다.

첫 번째는 과연 영업사원이 자기 채널에서 제 역할을 하는지를 점검했다. 가령, 그룹 내에는 소매점 등 고객사를 상대로 BAT의 제품을 더 잘 보이는 좋은 위치에 진열하고, 소비자에게 구두로 잘 홍보해 달라고 독려하는 ‘트레이드 마케터(trade marketer)’란 직무가 있다. 그런데 시장 상황에 따라 이 직무의 역할이 제한적인 경우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고객사가 일반 소매점이 아니라 대부분 편의점인데 편의점 점주들은 보통 담배 제품을 진열대에 배치할 때 본사 정책을 반드시 따르겠다는 계약을 맺는다. 즉, 본사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개별 점주를 상대로 트레이드 마케팅에 투자하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얘기다. 또한 모든 담뱃갑의 모양을 똑같이 하도록 제한하거나 광고 자체를 금지하는 국가에서는 브랜드 마케팅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이렇듯 기존 인력 배치에서 비효율성을 발견하면 과감히 이와 관련된 인건비를 줄이고 그만큼의 비용을 브랜드 가치를 높이거나 제품 품질을 개선하는 데 투자하는 식으로 자원을 재할당했다.

두 번째로 주재원(expatriate)들에 대한 불필요한 특혜를 없앴다. 해외 파견이나 연수 기회도 결국 고위직을 육성하고 인력을 개발하기 위한 고비용의 투자다. 그런데 이런 투자를 잠재적 리더에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나 하면 상위 직급자가 되기도 전에 회사를 관둔다. 회사로서는 자원의 낭비가 될 수밖에 없고 기회를 얻어야 할 인재들이 해외에 가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같은 교육비를 쓰더라도 임팩트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나치게 관대하던 선발 조건 등을 조금 더 까다롭게 만들고 파견한 주재원들이 잘 활용하지 않는 클럽 멤버십 등도 과감히 없앴다.

인사 관리만 하는 게 아니라 시장 상황에도
해박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 가령, 앞서 비용 절감 드라이브를 걸 때는 유통도 아웃소싱했다. 직접 모든 영업 조직을 관리해서 소매점 판매를 담당하게 하는 게 아니라 일부 물량은 여러 제품을 동시에 취급하는 외부 유통사에 맡겨 비용을 줄이는 작업이었다. 유통뿐 아니라 생산에 있어서도 가동률이 떨어지는 공장 10곳을 통폐합해 물량을 6곳에 몰아줬더니 물류비용 증가분을 상쇄할 정도로 생산 단가가 낮아졌다. 이런 조치들은 시장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렇게 인사관리에 국한하지 않고 비즈니스와 연계된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게 개인적인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인사관리 이론을 설파하는 게 아니라 시장에 맞고, 비즈니스에 맞는 인력의 재편이나 재교육 등을 제안하니 자연히 CEO 등 최고경영진부터 마케팅팀, 재무팀 등도 인사 제안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게 된다. 원래는 인사팀에서 제안을 해도 현장에서 맞받아칠 수가 있는데 함께 현장의 난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기존 관행의 어떤 점이 비효율적이고, 어떤 점이 나쁜지를 시장 상황과 결부시켜 설명하니 회사 구성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인 화법을 쓰고, 강한 어조로 말하더라도 합리적인 지적을 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면 일에서의 마찰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비화하지 않는다.

승진하고 싶다면 나를 대체할 후임자를 키워라

줄곧 관리직에 있어 왔는데 리더십 스타일이 궁금하다.

일단 BAT그룹 문화 자체가 팀워크를 장려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팀원 개발을 굉장히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지금도 후배들에게 ‘후임자를 개발해 놓지 않으면 당신이 앞으로 승진을 하기 어렵다’고 분명히 말한다. 내가 떠나도 언제든 후임자가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어야 내가 그 직책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을 위해서라도 후임을 양성하라는 얘기다. 실제로 한국에서 홍콩 지역본부로 갈 때도, 홍콩 지역본부에서 영국 본사로 갈 때도 항상 직속 후임자가 내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부분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신용이 쌓여야 후배들도 ‘저 사람 밑에서는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더 따르게 된다.

팀원 개발의 핵심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변화 관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매년 쳇바퀴처럼 같은 일만 되풀이하지 않도록 ‘현 영업 조직 사이즈가 효율적인지 살펴봐’ ‘지금의 인재 개발 프로그램 말고 다른 접근이 가능할지 찾아봐’ ‘매년 반복되는 임금단체협상 프로세스를 혁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해봐’ 이런 식의 채찍질도 한다. 특히 관리직이 된 후배들에게는 리더로서 어떤 부분이 힘들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내 이야기나 경험담을 많이 공유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인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직원이 새로운 역할을 맡거나 승진할 때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불안감을 느낀다.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낼 수 있도록 계속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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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워크를 장려하는 조직 문화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

결국 조직 문화는 ‘누가 승진을 하고, 고위직에 올라가느냐’ ‘어떤 행동이 용납이 되고, 용납이 안 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승진 결정이 중요한데 BAT그룹은 팀원을 개발하지 않고 본인만 스타 플레이어가 되려는 사람을 승진시키지 않는다. 인사 기준이 그렇다 보니 자연히 주변과 잘 어울리면서 이견이 있더라도 접점을 찾는 사람, 누군가를 깎아내리지 않는 사람이 회사 내에 요직을 점하게 되고, 이들이 자신과 비슷한 후임자를 키우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또한 개인별 인센티브 구조를 너무 세분화해도 팀워크를 해칠 수 있다. 개인마다 성과급이 차등 지급되는 기업에서 온 직원일수록 KPI에 있는 일만 하고 그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BAT그룹도 성과 평가를 연봉 인상에 반영하긴 하지만 그룹 전체의 성과에 대한 성과급 분배 비율을 똑같이 책정하기 때문에 개인이나 팀 단위로 치열하게 경쟁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성과급 차등을 크게 두지 않는 것은 궐련형 전자담배, 액상형 담배, 모던 오럴 파우치 등으로 포트폴리오 확장이 활발하고 자원과 인력의 재배치가 수시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더 중요하다. 가령, 전통적인 제품군이 여전히 강세인 지역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대체품으로의 전환이 빠른 지역에 재투자할 때 지역, 팀 간 이기주의가 있으면 내부적인 이견 조율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룹 단위의 이익 극대화가 성과로 연결되는 구조에서는 신사업 성장성이 큰 지역에 투자를 확대해 최적화하는 게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이렇듯 회사의 가치 성명(value statement), 조직 구조, 보상 체계가 맞물려서 팀워크를 강조하는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조직 문화는 왜 중요하고,
문화를 바꾸기 위해 조직 구조는 어떻게 바꿨나?

모든 전통 기업이 당면한 가장 큰 난제는 관료주의를 어떻게 타파하고 복잡성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다. 원래 연초 담배만 판매할 때는 시장이 안정적이고 경쟁자가 고정돼 있다 보니 혁신 사이클이 길었다. 시장점유율을 몇 % 올리자는 점진적인 성장만 계획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궐련형, 액상형 전자담배 등 신제품 시장의 경우 신규 진입자도 워낙 많고, 미국 등지에서는 신생 업체가 시장을 휩쓸기도 하는 등 혁신이 어디서 일어날지 가늠이 힘든 상황이다. 신시장의 짧은 제품 출시 주기에 맞추려면 기존의 프로세스에서 완전히 탈피해 빠르게(fast) 의사결정하고, 과감한(bold) 목표를 세우고, 현장에 위임(empowered)하려면 조직 문화를 바꿔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문화를 바꾸겠다고 가치를 천명하는 것만으로는 주주나 이해관계자에게 변화 의지를 보여줄 수 없다. 조직 구조가 바뀌어야 일하는 문화가 바뀌기 때문이다. 이에 글로벌 단위에서는 최대한 현지 법인에 권한을 위임할 수 있도록 본사 운영 조직을 약 40% 없앴고, 본사와 지사의 가교 역할을 하는 지역본부 역할도 절반으로 축소했다. 조직이 존재하는 한, 없어도 될 일이 계속 만들어지고 괜한 간섭으로 실행에 방해만 되기 때문이다. 현지 법인에서도 본사 보고용 업무를 하는 유닛(direct reporting business unit)을 23개에서 18개로 줄여 시장 최전선(end market)의 권한을 늘렸으며 직제도 효율화했다.

직급 체계는 어떻게 효율적으로 개편한 것인가?

대표적으로, 1대1 보고 체계(reporting line)를 없앴다. 1대1 보고가 많으면 당연히 의사결정의 단계가 많아져서 속도가 느려지고, 단계별로 부가되는 가치가 별로 없을 수가 있다. 특히 요새 MZ세대는 크든 작든 자기만의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직접 결정하기를 원한다. 개인으로서 인정받길 원하고 개인의 특성을 최대한 발현하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결정하는 일과 상급자가 결정하는 일에 분명한 차이점이 있어야 한다. 둘 다 같은 시각을 가지고 같은 질문을 던질 거라면 결재자가 없는 편이 낫다. 그냥 상급자라서 보고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모든 보고 체계가 반드시 가치를 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에 불필요한 보고를 최소화하고 일선 현장에 권한을 더 위임하는 쪽으로 체계를 바꿨다. 소비자와 가장 가깝고, 문제와 가장 가깝게 위치한 직원이 자기만의 지식과 전문성을 가지고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을 최대한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제도들을 개편하자 주주들이나 시장 애널리스트들도 BAT그룹의 변화 의지를 높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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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조직 문화나 인재의 특징은 무엇이고,
보완할 점이 있나?

개인별 차이가 크기 때문에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지만 한국 직원들은 공장 근로자든, IT 인력이든 분야별 전문성이 뛰어난 편이고 일에 대한 욕심이 큰 편이다. 다만, 본인들의 전문 분야나 일에 노력을 쏟았으면 이를 외부에 알려야 하는데 자신의 내공을 키우는 데 집중하다 보니 외부와의 소통이나 변화 관리에 소홀한 측면이 있다. 주변 사람들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배우는 데도 의식적으로 시간을 쏟아야 한다.

반면 유럽 직원들은 소통에 더 익숙한 편이다. 이들은 불편할 수 있는 얘기를 부드럽게 돌려 하기도 하고, 때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더라도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게 하는 습관이 몸에 잘 배어져 있다. 이런 것이 강점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해외에 파견될 때마다 개인적으로도 현지 직원들과 어떻게 하면 잘 소통할 수 있을지 미리 공부한다. 이동 전부터 미리 수소문해 현지 동료들의 일하는 방식, 배경 등을 숙지하고 멘토링이나 코칭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받아 언제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서포트 네트워크를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현지 근무를 시작한 뒤에도 계속해서 다른 부서 직원들과 최대한 많이 이야기를 나눈다. 현지 시장의 규제, 장단점 등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내가 참석하지 못하는 상사의 미팅에서 무슨 논의가 나왔는지 팔로우업한다. 국가별 시장 상황과 조직 문화, 조직 구조가 세부적으로는 다 다르지만 이렇게 맥락(context)을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은 어디에서나 유효하다.

시장과 고객을 모사한 직원 기반을 갖춰라

한국인 여성으로서 어떻게 영국 본사의
경영 이사회에 합류할 수 있었나?

2018년 영국 본사에서 그룹의 인재총괄을 맡을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물리적으로 거리도 멀고 한 번도 본사에서 일을 해본 적이 없기에 중책을 맡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전임자가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용기를 불어넣어 줬고 영국으로 건너가게 됐다. 당시 BAT그룹이 미국의 담배 회사인 레이놀즈아메리칸 지분을 사들여 당시 기준 세계 최대 규모의 45조 원짜리 인수합병이 성사된 상태라 이와 관련된 인수 통합 작업을 하고, 인사 정책, 보상 체계, 인력 이탈 방지 등의 새 판을 짜야 하는 때였다. 그리고 2018년부터 서서히 차세대 제품군, 잠재적 건강 유해를 저감한 비연소 제품군을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던 단계라 경영진도 교체됐다. 자연스레 이에 걸맞게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하는 과제가 생겨났다.

이렇게 경영진을 교체하는 시기에 주 이사회의 승계 계획을 짜는 데 관여한 것이 본격적으로 이사회와의 소통 접점을 넓히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유럽 기업은 미국 기업과 달리 경영 이사회와 주 이사회(main board)가 양립하는 투 티어 이사회(two-tier board) 체제다. 주 이사회는 그룹의 성과, 전략적 방향, 가치, 지배구조와 경영 이사회의 인수인계를 책임지고, 경영 이사회는 이 전략과 가치를 실행하면서 구체적인 매출과 이익에 대해 책임진다. 그런 의미에서 회사가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시작하는 시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게 CHRO로 승진하는 데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그룹의 문화 및 포용성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데
BAT그룹의 다양성이 실제로 개선되고 있나?

현재 BAT그룹 주 이사회 이사들의 출신 국적은 8개, 여성 비율은 36%로 다양성이 굉장히 높은 편이다. 단순히 국적만 많은 게 아니라 실제 출신 배경들이 완전히 상이하고 출신 업계도 동종 업계만 있는 게 아니라 에너지 회사, 언론사, 테크 회사, 모터사이클 회사 등으로 다양하다. 경영 이사회도 여성 임원의 풀이 아직까지는 적어 여성 비율이 8%로 낮긴 하지만 출신 국적은 11개에 달한다. 다만, 젠더 다양성을 보다 강화할 필요는 있다. 인재 구성을 다변화하는 탤런트 이니셔티브의 과정은 어느 정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인재를 채용하고 육성해서 고위직으로 성장시키기까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가령, 2010년 아시아퍼시픽 헤드 본부에 갔을 때만 해도 아시아 고위직 비율이 적고 현지 법인의 CEO들이 대부분 주재원이었는데 이때부터 꾸준히 공을 들였더니 현재는 거의 로컬 출신들이 대표직을 맡고 있다.

이처럼 젠더 다양성 측면에서도 현재 2025년까지 전체 관리직의 여성 비율을 40%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드라이브를 세게 걸고 있다. 그래도 2019년 처음 영국 본사에 올 때만 해도 목표 비율이 11%이었는데 40%로 상향 조정됐으며 한국은 물론 스리랑카나 이탈리아 법인 등의 CEO가 여성이고 직무도 법률, 인사 등에 제한돼 있던 게 다양해지는 등 변화는 이미 가시화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인력의 유치를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다양성을 강조하는 취지는 결국 우리가 제품을 판매하는 국가, 고객의 기반을 그대로 반영, 모사하는(mirroring) 직원 기반을 갖추자는 데 있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그래야 해당 시장과 소비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면서 IT, 전기전자, 소비재, 제약 산업으로 확장을 하고 있으니 다른 산업에서 다른 관점을 가진 인력을 기존보다 2배 더 채용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건강상 유해를 줄인 대체 품목을 확대하면서 여성의 비율도 늘리게 됐다.

또한 수치상 나타나는 지표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다양한 인재 풀이 존재해도 이를 활용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러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왔을 때 자신의 생각과 차이점을 자유롭게 말하고 그 의견을 회사가 레버리지할 수 있는 포용적 문화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개인에게는 특장점이 있는데 이걸 조직 전체의 역량으로 승화하느냐는 그 차이점을 얼마나 존중하는지에 달려 있다. 리더십이 교체된 뒤 리쿠르팅 구호를 ‘너만의 차이점을 가져와라(bring your difference)’로 정한 것도 다른 국적, 산업, 역량, 지식, 경험이 회사의 자산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사회도 구성의 다양성 덕분에 모든 이사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다르다. 이런 시너지가 회사의 전략적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어 큰 경쟁력인 것 같다.


김윤진 기자 truth3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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