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1960년대 정부 주도로 형성된 ‘선단식 경영’ 체계는 그룹사가 비관련형 다각화와 수직적 계열화에 집중하며 빠른 성장을 거두도록 도왔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가 휘청이고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선단식 경영이 주효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패러다임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는 자원의 분산과 모기업 의존성 등으로 인한 단점이 더 커질 수 있다. 비핵심/비주력 사업은 매각 또는 축소하고 핵심/주력 사업에 자원을 더욱 집중해야 한다. 중장기 저성장 기조엔 내실 경영을 우선하지만 여력이 생기면 신성장 동력 창출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편집자주 이 글은 송재용 외(2023), 『패러다임 대전환(부제: 한국 기업, 전략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라)』을 기반으로 작성됐습니다.
포스트 팬데믹 패러다임 대전환,사업 포트폴리오 재조정을 요구지난달 31일부터 사흘간 경기도 이천 SKMS 연구소에서 열린 ‘2024 SK그룹 CEO 세미나’의 최대 화두는 ‘포트폴리오 재조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수년간 잦은 인수합병으로 비대해진 SK그룹의 계열사들을 합병하거나 매각하는 방식으로 계열사 간 중복 투자, 과잉 투자를 막는 리밸런싱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언급하며 운영 개선 드라이브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SK그룹뿐만 아니라 삼성그룹, 두산그룹 등 거의 모든 국내 그룹사가 최근 구조조정과 포트폴리오 재조정에 나서고 있다.
사실 한국의 대기업은 심각한 부실화 우려에 직면한 기업들을 제외하고는 선진 기업들과 비교해 볼 때 자발적이고 선제적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에 상당히 소극적인 편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국내 1위 기업집단인 삼성 그룹은 화학, 방산과 프린터 사업 등을 매각해 자발적, 선제적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했다. 하지만 정작 삼성보다 경쟁력이나 재무적 여건이 열악했던 국내 대부분의 대기업은 그렇지 않았기에 이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기업은 국내외 경제의 저성장,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와 글로벌 공급망의 대전환, 디지털 대전환과 AI 혁명의 본격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거대한 메가 트렌드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이는 기업 전략 패러다임의 근본적 재검토와 수정을 요구한다.
실제 세계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부채가 급증한 상황에서 주요 선진국들이 양적 완화로 돈을 너무 많이 푼 결과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양적 긴축과 함께 기준금리 인상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주요국의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이 생겨나고 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부채가 큰 상황에서 보호무역주의 대두,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 글로벌 공급망 재조정 등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구조적 인플레이션이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에 기준금리가 인하되더라도 초저금리 시대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디레버리징(부채 정리) 과정에서 개인은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투자를 줄이며, 정부는 재정지출을 줄이거나 증세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됐다. 세계 경제의 중장기 저성장 기조 고착화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중장기 저성장을 초래할 수 있는 한국 경제 내부의 구조적 리스크도 커지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가장 심각한 저출산·고령화와 가계 부채로 인한 내수 위축이 일본식 장기 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중국 경제의 급격한 감속과 세계 경제의 중장기 저성장 우려,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심화되고 있는 미중 패권전쟁과 글로벌 공급망의 대전환 등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일본식 장기 불황까지 예견되는 상황에서 고도성장기에 형성된 비관련형 다각화, 수직적 계열화를 기반으로 한 사업 포트폴리오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한 시기가 도래했다. 이에 따라 저성장 시대에 적합한 사업 포트폴리오의 재구성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또한 리쇼어링(resho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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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진과 외국 기업 투자 유치를 통한 미국 제조업 부활 노력과 함께 중국발(發) 경쟁 심화로 제조업에서의 글로벌 경쟁은 초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전통 제조업에서 한국 기업은 차별적 기술력을 갖춘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선진 기업과 원가경쟁력에 더해 품질 및 기술 경쟁력까지 급격히 향상된 중국 기업 사이에서 샌드위치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따라서 사업별 글로벌 경쟁력을 재점검해 혁신을 통한 차별적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사업을 주력 사업으로 규정 또는 재규정하고 그렇지 못한 사업을 축소, 매각하면서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AI 혁명은 반도체와 전력 인프라, 스마트 팩토리 산업 등의 폭발적 성장을 촉발하면서 궁극적으로 로봇, 자율주행, 금융, 생명공학 등의 발전을 가지고 올 것이다. 인터넷 혁명, 모바일 혁명이 각각 정보의 연결성과 이동성을 증가시켜 새로운 산업 성장의 토대가 됐던 것처럼 AI 혁명 또한 다양한 연관 산업의 발전의 토대를 제공할 것이기에 그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사업 포트폴리오의 재편도 필요한 시점이다.
사업 포트폴리오의 재조정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실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임직원의 충성도를 중시하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높으며, 인수합병 시장이 그리 활성화되지 않은 한국의 상황에서는 위기 상황이나 패러다임 변화가 와야 큰 저항 없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할 수 있다.1990년대 말 외환위기 직후 삼성을 좋은 예로 꼽을 만하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은 삼성전자의 파워 디바이스, 방산, 건설기계, 지게차, 할인점 사업 등 비주력 사업을 글로벌 기업에 매각하고 위성체, 공작기계 등 한계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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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철수했다. 한편 항공기 사업, 발전 설비, 선박용 엔진 등을 타 기업과의 빅딜 형태로 정리했다.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했던 자동차 사업의 경영권도 르노-닛산에 넘겼다. 대신 주력 사업인 전자와 반도체, 디스플레이 패널 사업의 경쟁력 강화에 매진함으로써 삼성전자가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반면 외환위기의 와중에도 비주력, 적자 사업을 제대로 구조조정하지 않고 버티다가 무너진 대우그룹과 같이 안타까운 사례도 많다. 포스트 팬데믹 패러다임 대전환은 외환위기 이상의 큰 변화와 충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에 외환위기에 무너진 많은 기업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 기업, 특히 기업집단의 자발적, 선제적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이 시급하다. 이러한 과거 경험들을 바탕으로 또다시 큰 변화가 도래한 ‘포스트 팬데믹 패러다임 대전환기’에 한국 기업들의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 방향성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고도 성장기에 형성돼지금까지 이어진 ‘선단식 경영’한국 대기업집단의 소위 ‘선단식 경영’ 체제는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본격 형성됐다.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전략 산업을 선정하고 전략 산업에 진입할 수 있는 기업들의 숫자를 통제하는 형태로 사실상 과점 체제를 인정해 주는 체계하에서, 역량 측면에서 우위에 있던 기존의 대기업들이 정부의 승인하에 전략 산업에 진입했다. 이러한 방식의 신규 산업 진출은 많은 경우 기존 사업과 관련이 없는 분야였기에 비관련형 다각화 위주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형성됐다. 그 이후 ‘재벌’이라고 흔히 불리는 대기업집단은 독과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가치사슬상의 전후방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수직적 계열화 체제를 구축했다. 그 결과 수평적으로는 비관련형 다각화, 수직적으로는 가치사슬상의 전 영역으로의 수직적 계열화를 중심으로 선단식 경영 체제가 자리 잡았다. 선단식 경영 체제하에서 한국의 기업집단들은 소유 경영자의 강력한 리더십하에 계열사들이 시너지 효과 창출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 왔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전후해 계열사 간 상호출자와 지급보증의 고리로 연결된 선단식 경영이 특정 계열사의 부실화로 인한 타 계열사의 동반 부실화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대우를 포함한 다수 기업집단의 붕괴로 이어지면서 기존의 시너지 창출을 위한 재벌의 선단식 경영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비판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지배구조의 개혁 및 정부 규제 강화에 반영됐다. 이러한 와중에 살아남은 기업집단들은 비주력, 비핵심 사업을 일부 구조조정하고 핵심 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사업별 책임 경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을 단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비관련형 다각화와 수직적 계열화를 중심으로 하는 선단식 경영의 큰 틀은 유지돼 왔다.
외환위기의 고비를 넘긴 21세기 이후 SK그룹, 현대자동차그룹 등 주요 대기업집단들은 다시 사업 범위를 넓히는 방향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했다. 이에 선단식 경영 체제는 최근 들어 오히려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국 기업집단의 다각화 정도를 살펴보기 위해 30대 기업집단을 기준으로 지난 2003년부터 2022년까지 20년간 평균 계열사의 수를 살펴봤다. 일반적으로 상위 기업집단에 속한 기업일수록 계열사의 숫자가 많은 경향을 보인다. [그림 1]을 보면 30대 기업집단이 보유한 평균 계열사 수는 2003년 기준 20.3개에서 2022년 55개로 증가했다.
선단식 경영, 여전히 유효한가?비관련 다각화를 추구하는 ‘복합형 기업집단(conglomerate)’은 선진국에서 1980년대까지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기업 형태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복합형 기업집단은 자원 배분과 경영 관리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특정 사업에만 전념하는 전업형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선진국에서는 급격히 약화되거나 해체의 길을 걸었다. 이처럼 저성장과 치열한 시장 경쟁에 직면해 온 구미(歐美) 기업들에서는 비관련형 다각화와 수직적 계열화 추세를 줄여 나갔다. 즉 핵심 사업과 활동은 직접 수행하되 그렇지 않은 비주력, 비핵심 사업은 과감히 축소하거나 매각하고 비핵심 활동은 전략적 제휴나 아웃소싱으로 외부화하는 것이 21세기에 나타난 일반적 경향이다. 파나소닉, 히타치와 같은 일본 기업들도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 저성장 시대를 거치면서 사업 포트폴리오를 주력 사업 위주로 재편해왔다.
기업은 다각화를 통해 전문화 전략에 비해 성장의 규모와 속도를 더욱 크게, 빨리하고자 하는 전략적 선택을 한다. 특히 서로 별로 관련이 없는 사업들을 사업 포트폴리오에 편입시킴으로써 경기 사이클 변화 등으로 인한 리스크 분산을 도모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각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제한된 자원의 분산으로 인해 핵심 사업의 경쟁력이 저하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다.
산업의 가치사슬상에서 전후방으로 확장하는 수직적 계열화 형태의 다각화는 부품, 소재를 내부에서 직접 생산, 조달한다. 반대로 완제품 제조 내지 유통 분야로 진출함으로써 수급의 안정을 도모하고 매출 증대 형태의 시너지를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례에서 보듯 내부의 부품, 소재 벤더와 세트 메이커가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면 서로 중장기적인 기술 로드맵을 공유하고 유기적인 기술 협력을 통해 차별적인 제품을 경쟁자보다 신속하게 개발할 수 있는 장점도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수직적 계열화는 흔히 경쟁력이 약한 계열사가 모기업에 의존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나쁜 품질의 제품을 시장 가격보다 비싼 가격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계열사로부터 지속적으로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기존 핵심 사업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또한 조선과 해운의 수직적 계열화를 추구하다가 위기에 빠진 STX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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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보듯 수직적 계열화 형태의 다각화는 경기 사이클 연동으로 인한 리스크나 계열사 간 의존성 심화로 인한 동반 부실화 리스크에 직면할 수 있다. 저성장과 경쟁력 저하를 먼저 경험했던 구미의 제조업체들이 핵심 사업에 집중하며 전략적 제휴나 아웃소싱을 강화한 이유를 한국 기업들도 곱씹어 볼 시점이 됐다.
정리하면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경제가 고도 성장할 때는 수평적 다각화와 수직적 계열화가 신속한 성장을 촉진할 수 있기에 장점이 많다. 하지만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되고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패러다임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원의 분산과 모기업 의존성 등으로 인한 경쟁력 저하 및 전략적 민첩성 제약 등의 단점이 더 커질 수 있다. 따라서 포스트 팬데믹 패러다임 대전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업 수준의 전략적 민첩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한국 기업의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과 미래 성장 전략의 방향성은?자발적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은 기업 전략의 핵심이며 CEO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필자는 2014년 GE 전체 임원이 모인 연례 경영진 회의에서 기조 강연을 하게 됐고 GE의 제프리 이멜트 회장과 패러다임 변화 시기 대기업 CEO의 역할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이멜트 회장은 “CEO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업 포트폴리오의 매니저가 되는 것이다. 즉 수시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해 GE의 비전과 전략의 잣대로 볼 때 강화해야 할 핵심 사업, 신규 육성해야 할 사업, 정리·축소해야 할 사업을 골라내는 것이다”라고 본인의 생각을 전했다. 이멜트 회장은 재임 중 화학 사업을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빅(Sabic)에 매각하고 글로벌 금융위기로 타격을 받은 금융 사업을 매각 및 축소하는 등 비주력/비핵심/적자 사업의 구조조정을 단행한 바 있다. 이멜트 회장이 강조했듯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의 기본 원칙은 주력/핵심 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비주력/비핵심 사업을 축소 및 정리하고 패러다임 변화에 부합하는 미래 신성장동력 사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서구 기업들과는 달리 실패한 사업, 비핵심 사업을 구조조정하는 데 소극적인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실패한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주력 사업에서 돈을 빼서 무한 지원하다가 동반 부실화로 이어져서 그룹 전체가 무너진 사례도 많았다. 주력 사업인 소주 사업은 높은 수익성을 보였지만 실패한 신사업을 무한 지원하다 무너진 진로그룹이 대표적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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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의 경우에도 외환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사업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 경영의 기치하에 확장 위주의 전략을 고수하다가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포스트 팬데믹 패러다임 대전환에 대응해 한국 기업들의 자발적, 선제적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이 절실히 요청된다. 비관련형 다각화 체제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비핵심, 비주력, 적자 사업은 과감히 축소 및 매각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저성장과 초경쟁이 겹치면 비관련형 다각화와 수직적 계열화를 기반으로 한 선단식 경영이 경쟁력 측면에서 한계에 부닥칠 가능성이 크기에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비관련형 다각화에서는 자원이 분산되고 경영 관리의 효율성과 스피드가 저하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은 호황기에 낀 군살을 빼면서 비주력, 적자 사업은 매각, 청산, 아웃소싱,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축소 및 정리하고 핵심 사업에 자원을 더욱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2010년대 삼성이 비주력 사업이었던 화학, 방산 부문을 한화와 롯데에 매각하고 프린터 사업을 HP에 매각한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었다.
또한 한국의 기업집단들이 맹신에 가까운 믿음을 갖고 발전시켜 온 수직적 계열화는 모기업에 대한 의존성 심화로 인한 품질, 원가경쟁력 저하와 전략적 유연성 저하로 인해 저성장, 초경쟁 상황에서는 동반 부실화를 초래할 수 있기에 앞으로도 경쟁력 확보에 유용한지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패러다임 변화 시기 수직적 계열화의 단점이 더 크게 나타난다면 옥석을 가려서 차별적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핵심 부품, 소재는 내재화하더라도 비핵심 부품, 소재는 아웃소싱이나 전략적 제휴를 통해 외부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내부 벤더를 유지하는 경우에는 내부 벤더와 외부 벤더를 경쟁시키는 듀얼 소싱 체제를 도입하고 내부 거래에도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함으로써 내부 벤더의 의존성 심화로 인한 원가, 품질 저하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한국 기업 신성장동력 창출 전략의 변화 방향은?중장기 저성장 국면에서는 내실 경영을 우선으로 해야 하지만 여력이 있는 기업이라면 핵심 역량 강화, 혁신과 신성장 동력 창출을 통해 수익성을 동반한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따라서 무조건 방어적 경영으로 움츠러들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경쟁력이 있는 기업이라면 국내외 경제의 저성장 국면을 혁신을 통한 주력 사업에서의 점유율을 제고하는 것은 물론 국내외 기업 M&A 및 우수 인력 확보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은 단순히 비주력, 비핵심 사업의 축소 및 정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패러다임 변화를 잘 읽으면서 신성장동력을 창출하는 활동도 조정의 핵심이다. 특히 AI 혁명 등이 본격화되고 있는 포스트 팬데믹 패러다임 대전환 시기는 한편으로는 비주력, 비핵심 사업을 축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패러다임 변화에 부합하는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해야 하는 시기이다.신성장동력 육성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은 중국, 일본 기업들보다도 인수합병(M&A), 특히 해외에서의 M&A나 전략적 제휴, 유망 벤처기업들에 대한 전략적 지분 출자에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시장 진입과 역량 확보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비유기적 방식을 적극 채택할 필요가 있다. 특히 AI 혁명 등으로 떠오른 많은 신생 산업 분야에서는 플랫폼 리더십과 네트워크 효과를 기반으로 한 선점 기업의 승자 독식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데다가 역량의 융복합화를 통한 차별적 비즈니스 모델 확보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M&A와 전략적 제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진입과 역량 확보의 속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또한 신규 사업 추진 시에는 기존 사업과의 관련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삼성전자나 LG전자가 자율주행 기술의 진전에 따라 유망한 분야로 떠오르고 있는 미래 자동차용 전장 사업을 강화하고 있는 것은 주력 사업과 연계된 신성장동력 확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LG와 삼성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반도체, 통신, 디스플레이 패널 등 전자, 반도체 기술력을 전장 사업에 결합하면 상당한 시너지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 친환경차로 대변되는 미래 자동차에서는 IT가 핵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패러다임 변화 시기 신규 사업을 추진할 때는 사업의 매력도와 함께 기존 사업에서 확보한 핵심 역량, 조직문화, 경영 시스템의 이전 가능성과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 창출 가능성을 중시하면서 핵심 사업을 확장하는 형태의 ‘관련형 다각화’가 바람직하다. 또한 불확실성도 매우 높은 상황이기에 신규 사업에 빠르게 진입하되 대규모 투자 시점은 늦추는 단계적 투자 전략인 ‘리얼 옵션(real option)’ 투자와 마인드셋도 중요해진다. 이러한 리얼 옵션 투자로 신규 사업 진출 시의 성과 증진 가능성은 확보하되 리스크는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태양광 붐이 불 때 국내 주요 기업들은 앞다퉈 원재료인 폴리실리콘 사업에 신규 진출했다. 이 당시 웅진그룹은 폴리실리콘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가 큰 낭패를 봤다. 하지만 웅진보다 자본력과 화학 기술력이 훨씬 우위에 있었던 SK는 SK케미칼이 울산에 소규모 파일럿 플랜트를 만들고 R&D에서 고순도 정제 기술 개발을 하다가 태양광 업황이 붕괴되고 폴리실리콘 가격이 폭락하자 대규모 투자 계획을 접고 철수했다. SK가 한 방식이 리얼 옵션에 따른 단계적 신규 사업 진입 전략이다.
자발적·선제적 포트폴리오 조정에 나서라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내 최대 그룹인 삼성그룹 역시 최근 경쟁력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반도체 사업에서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조정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SK하이닉스에 비해 열위에 놓이게 된 HBM 메모리와 선단 D램에서 어떻게 경쟁력을 강화할 것인지, TSMC와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는 파운드리 사업은 어떻게 할 것인지, 수율 문제 등으로 삼성전자 자체 모바일 제품에도 납품이 힘들어지고 있는 모바일 AP(Application Processor)의 시스템LSI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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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돈과 사람이 한정된 상황에서 메모리 반도체, 파운드리, 시스템LSI로 자원을 분산하다 보니 주력 사업이던 메모리 반도체의 경쟁력까지 흔들리게 됐다.
SK그룹 역시 앞서 언급했듯 그룹 차원에서 포트폴리오 재조정에 나서고 있다. 최근 SK그룹은 전기자동차의 캐즘 진입 및 경쟁력 열위로 SK온이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모기업인 SK이노베이션 역시 석유화학 사업의 부진으로 힘들어진 상황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해 온 다양한 친환경 및 IT 관련 신사업들의 적자가 누적되면서 그룹 전체의 위기론이 불거진 바 있다. 다행히 SK하이닉스가 HBM 메모리에서 업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해 2023년의 대규모 적자에서 2024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를 추월하는 사상 최고의 이익을 기록하고 있지만 SK 전체로는 그룹 차원에서 위기 극복을 위한 강도 높은 사업 구조조정을 진행할 수밖에 없게 됐다.
SK그룹이 자율 경영을 강화하면서 그룹 또는 계열사 차원에서 수소 등 유사 사업에 중복 투자를 하는 등 다소 방만하게 신규 사업을 확장한 측면이 있었기에 이 시점에 그룹 차원에서 대규모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SK의 그룹 차원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의 성패는 SK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기자동차의 캐즘이 얼마나 빨리 끝날 것인지, SK온이 경쟁력 열위를 극복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SK온과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SK엔텀의 합병 후 성과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패러다임 변화 시대에 주력 사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신성장동력을 육성하면서 ‘수익성을 동반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선단식 사업 포트폴리오에 대한 근본적 재점검과 수정이 필요하다. 또한 AI 혁명 등으로 떠오르고 있는 신산업에서의 기회를 적극 확보하기 위해 M&A와 개방적 혁신을 통한 신성장동력 확보에도 적극적으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도 가능하면 비관련형 다각화는 지양하고 기존 사업에서 확보한 역량이 이전될 수 있는 분야를 우선 고려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