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합 깨진 실리콘’ 단일 결함 아닌
다양한 배위 결함 상호작용 밝혀내
최운이 삼성전자 수석연구원(왼쪽), 정하웅 KAIST 물리학과 교수.
40년 넘게 미해결 난제로 남아 있던 비정질 반도체 ‘전하 트랩(charge trap)’ 현상의 작동원리와 지배 법칙이 처음으로 규명됐다. 전하 트랩은 메모리 반도체가 정보를 저장하는 핵심 원리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한국 연구자 주도 국제 연구팀은 전하 트랩의 양자화학적 기원을 밝혀 반도체 재료 과학에서 반세기가량 이어져 온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최운이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CSE(Computational Science & Engineering)팀 수석연구원, 정하웅 KAIST 물리학과 교수, 리하르트 드론스코프스키 독일 아헨공대 교수 국제 공동연구팀은 플래시 메모리(CTF)의 전하 저장층으로 널리 사용되는 ‘비정질 실리콘 질화물(a-SiN)’의 전하 트랩 메커니즘을 원자 수준에서 규명하고 연구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25일 발표했다.
전하 트랩은 반도체 안에서 전자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히는 현상인데, 근본 원인은 명확히 설명되지 못한 채 그동안 경험적으로만 활용돼 왔다. ‘결합이 깨진 실리콘(Si-DB)’이라는 단일 결함으로 전하 트랩이 발생한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연구팀은 전하 트랩이 특정한 종류의 원자가 가진 결함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배위 결함(원자 간 결합 규칙성이 깨진 상태)들의 상호작용 및 화학결합의 재조직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Si-DB 모델이 설명하지 못했던 트랩의 특성과 전하 안정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연구팀은 전하 트랩 메커니즘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필립 앤더슨이 1975년 제안한 ‘네거티브-U(Negative-U)’ 개념과 연결된다는 점도 확인했다. 네거티브-U는 비정질 물질에서 결합이 깨진 전자가 홀로 존재하기보다 서로 끌어당겨 짝을 이루려는 성질을 말한다. 연구팀은 전하 트랩이 다양한 배위 결함들이 서로 전자를 주고받는 상호작용 결과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확인해 그동안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비정질 물질에서의 네거티브-U의 화학적 실체를 반세기 만에 확인했다.
연구팀은 질소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조성에서 a-SiN 내부에 형성되는 실리콘-실리콘 결합 네트워크가 전하 트랩의 강도와 공간적 분포에 관여한다는 점도 새롭게 밝혔다. 연구팀은 비정질 물질이 단순한 무질서 상태가 아니라 통계적 규칙성과 상호작용 구조를 지닌 복잡계 시스템이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최 수석연구원은 “이번 연구는 전하 트랩을 단일 종류의 결함으로 설명해 온 기존 Si-DB 모델의 한계를 넘어 배위 결함들의 상호작용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며 “비정질 물질의 전자구조를 해석하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문세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moon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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