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with Legendary CEO: 이유일 쌍용차 부회장
Article at a Glance
노조의 옥쇄파업, 굴뚝농성, 정리해고, 새로운 대주주 찾기…. 2009년 쌍용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날부터 험난한 날들이 계속됐다. 그리고 2015년 1월 쌍용차의 야심작 ‘티볼리’가 나왔다. 지난해 말까지 국내에서만 총 4만5021대, 수출 물량까지 포함하면 누적 판매 대수가 6만3000대를 넘었다. 국내 SUV 시장점유율 50%를 넘어섰다. 무급 휴직자 450여 명도 회사로 돌아왔다. 이런 성과 뒤에는 어려운 협상을 이끌어 온 이유일 쌍용차 부회장이 있다. 그는 “협상이나 경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소통’이다. 늘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협상의 첫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한성희(한양대 경영학부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괜히 왔다.’
출근 첫날, 노조원들이 이마에 빨간 띠를 두르고 출근하는 이유일 부회장(당시 법정관리인)을 막아섰다. “한 명의 직원도 절대 해고할 수 없다”는 내용의 봉투를 건네받고 사무실에 들어온 그는 착잡한 기분이었다. “이걸 정말 해야 하나”라는 약간의 후회도 들었다. 동시에 “여기서 발을 빼면 안 된다. 쌍용차 한번 살려보자”는 도전의식이 강하게 일었다.
출근 첫날처럼 이후로도 고단한 날들이었다. 노조의 옥쇄 파업에 대응하기, 새로운 대주주 찾기, 정리해고자와 복직 문제 협상하기, 정치권의 간섭 막아내기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 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는 그 일들을 모두 해냈다.
그렇게 6년을 보내고 지난해 1월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티볼리’가 나왔다. 대주주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에 인수된 지 4년 만에 나온 쌍용차의 첫 차였다.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때 이 부회장(당시 사장)은 “3월에 주주총회가 열려 임기가 끝나면 그만 둘 생각”이라며 대표이사 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밝혔다. 쌍용차가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하는 날, 퇴임을 발표한 것이다. 대주주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에서 강한 신뢰를 받고 있는 그였기에 기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 준 전 직원에게 무한한 감사함을 느낀다. 그동안 일하면서 해남 땅끝마을이나 국내 섬에 너무 못 가봤다. 이제 시간이 나면 그런 곳을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티볼리가 출시된 지 만 1년이 지났다. 지난해 말까지 국내에서만 총 4만5021대, 수출 물량까지 포함하면 누적 판매 대수가 6만3000대를 넘었다. 국내 SUV 시장점유율 50%를 넘어서며 주력시장에서 넘버원 브랜드가 됐다. 동급(배기량 1400∼1600㏄) 차량 ‘트랙스’와 ‘QM3’가 티볼리보다 먼저 출시된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뒷심이다. 이처럼 쌍용차가 ‘SUV 명가’로의 재건에 성공적인 첫발을 뗀 데는 이 부회장의 공이 컸다는 평가다.
이 부회장은 1969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대부분 자동차 업계에서 경력을 쌓았다. 현대차 캐나다법인장, 현대차 미국법인장, 현대차 해외부문 사장 등을 지냈다. 2009년 법정관리인으로 쌍용차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2011∼2015년 3월까지 대표이사를 지냈다. 현재는 쌍용차 부회장으로 있는 그를 DBR이 만났다.
47년 동안 회사에 몸을 담았고 그중 절반이 넘는 26년 동안 CEO를 지냈다.
오랜 경영 활동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쌍용차에서 일했던 시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본의 아니게 법정관리인으로 들어와서 시련과 도전이 참으로 많았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쌍용차 회생의 기반을 마련해놓고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급휴직자 450여 명도 다시 회사로 돌아오게 됐다. 직원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 가장 보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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