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with Legendary CEO: 이유일 쌍용차 부회장

눈물의 호소, 1000번 설계변경의 집념. ‘티볼리’ 신화 낳으며 쌍용차 부활 일궈내

194호 (2016년 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노조의 옥쇄파업, 굴뚝농성, 정리해고, 새로운 대주주 찾기…. 2009년 쌍용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간 날부터 험난한 날들이 계속됐다. 그리고 2015 1월 쌍용차의 야심작티볼리가 나왔다. 지난해 말까지 국내에서만 총 45021, 수출 물량까지 포함하면 누적 판매 대수가 63000대를 넘었다. 국내 SUV 시장점유율 50%를 넘어섰다. 무급 휴직자 450여 명도 회사로 돌아왔다. 이런 성과 뒤에는 어려운 협상을 이끌어 온 이유일 쌍용차 부회장이 있다. 그는협상이나 경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소통이다. 늘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협상의 첫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한성희(한양대 경영학부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괜히 왔다.’

 

출근 첫날, 노조원들이 이마에 빨간 띠를 두르고 출근하는 이유일 부회장(당시 법정관리인)을 막아섰다. “한 명의 직원도 절대 해고할 수 없다는 내용의 봉투를 건네받고 사무실에 들어온 그는 착잡한 기분이었다. “이걸 정말 해야 하나라는 약간의 후회도 들었다. 동시에여기서 발을 빼면 안 된다. 쌍용차 한번 살려보자는 도전의식이 강하게 일었다.

 

출근 첫날처럼 이후로도 고단한 날들이었다. 노조의 옥쇄 파업에 대응하기, 새로운 대주주 찾기, 정리해고자와 복직 문제 협상하기, 정치권의 간섭 막아내기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하지만 모두 해야 하는 일이었고, 그는 그 일들을 모두 해냈다.

 

그렇게 6년을 보내고 지난해 1월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티볼리가 나왔다. 대주주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에 인수된 지 4년 만에 나온 쌍용차의 첫 차였다.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때 이 부회장(당시 사장) “3월에 주주총회가 열려 임기가 끝나면 그만 둘 생각이라며 대표이사 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밝혔다. 쌍용차가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하는 날, 퇴임을 발표한 것이다. 대주주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에서 강한 신뢰를 받고 있는 그였기에 기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 준 전 직원에게 무한한 감사함을 느낀다. 그동안 일하면서 해남 땅끝마을이나 국내 섬에 너무 못 가봤다. 이제 시간이 나면 그런 곳을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티볼리가 출시된 지 만 1년이 지났다. 지난해 말까지 국내에서만 총 45021, 수출 물량까지 포함하면 누적 판매 대수가 63000대를 넘었다. 국내 SUV 시장점유율 50%를 넘어서며 주력시장에서 넘버원 브랜드가 됐다. 동급(배기량 1400∼1600) 차량트랙스 ‘QM3’가 티볼리보다 먼저 출시된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뒷심이다. 이처럼 쌍용차가 ‘SUV 명가로의 재건에 성공적인 첫발을 뗀 데는 이 부회장의 공이 컸다는 평가다.

  

 

이 부회장은 1969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대부분 자동차 업계에서 경력을 쌓았다. 현대차 캐나다법인장, 현대차 미국법인장, 현대차 해외부문 사장 등을 지냈다. 2009년 법정관리인으로 쌍용차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2011∼2015 3월까지 대표이사를 지냈다. 현재는 쌍용차 부회장으로 있는 그를 DBR이 만났다.

 

47년 동안 회사에 몸을 담았고 그중 절반이 넘는 26년 동안 CEO를 지냈다.

오랜 경영 활동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쌍용차에서 일했던 시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본의 아니게 법정관리인으로 들어와서 시련과 도전이 참으로 많았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쌍용차 회생의 기반을 마련해놓고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급휴직자 450여 명도 다시 회사로 돌아오게 됐다. 직원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 가장 보람차다.

 

 

2009년 쌍용차 법정관리인이 됐다. 당시 법정관리인에게 책정된 연봉은 현대산업개발 부회장에서 물러나면서 보장받은 고문 자리보다 적은 수준이었다.

쌍용차 법정관리인으로 온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이전에는 쌍용차에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쌍용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냥그렇구나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현대산업개발 고문 발령을 받기 직전이었는데 법원에서 연락이 왔다. 자동차 업계에서 오랜 기간 몸담고 있었던 경력 때문인지 법정관리인을 해보지 않겠냐고 법원에서 먼저 제안이 왔다. 주변에 물어보니고문으로 있기보다는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리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어느 정도 긍정적이다라는 식으로 얘기했는데, 법원에서는 내가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여긴 모양이다. 법원과 산업은행에서 일을 진행시키던 도중 기사가 났다. 내가 쌍용차 법정관리인이 됐다는 내용이었다. 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된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내가 법정관리인이 된 걸 알았다. 그래서 빼도 박도 못하게 법정관리인이 된 거다(웃음).

 

실제 쌍용차에서 일을 해보니 어땠나.

쌍용차 법정관리인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쌍용차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 공부를 할수록 쌍용차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의식 같은 게 생겼다. 현대차에 오래 있었지만 소비자를 위해서 한 브랜드가 내수를 독점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다. 쌍용차가 현대차보다 소비자에게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는데, 쌍용차가 없어지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의욕을 갖고 일을 시작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해보니 당장 할 일이 태산이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법정관리인으로 첫 출근을 했는데 오자마자 노조가 나를 막아섰다. 마음은 한시가 급한데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싶었다. 공장을 둘러보고 나니 더 걱정이 됐다. 공장 분위기는 침울했고, 직원들의 표정에서 의욕을 읽기 어려웠다. 회사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푸대접을 받았다. 은행에 가서 돈 빌려달라고 하니까 거절당하고,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에 갔을 때는 욕도 들었다. 노골적으로시장점유율이 2%도 안 되고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미미할 텐데 망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는 빈정거림도 들었다.

 

회사 안에서는 노조가 구조조정에 반발해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법원으로부터 회생인가를 받아야 하는 급박한 날이었는데 정말 답답했다. 공장 전체를 노조가 점거해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경찰도 우리를 안 도와줬다. 용산 참사와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한때는 아예 공장 주변에서 경찰 인력이 모두 철수하기도 했다. 경찰은 오히려 경영자들에게인명 피해가 날 수 있으니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불의의 사태를 막기 위해 적극 개입을 자제했다는 설명이었지만 회사 정상화를 애타게 바라는 입장에서는 정말로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경찰에서 단계적 진입작전을 펴면서 77일간의 옥쇄파업이 끝이 났다.

 

파업이 끝나고 이제는 법정관리를 졸업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채권단과 합의를 해야 하는데 1원도 손해를 안 보겠다는 태도의 외국계 투자회사들을 설득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들이 끝까지 뻣뻣한 태도로 일관하는 바람에 결국 법원의 법정관리 강제 인가를 통해서 쌍용차가 법정관리를 졸업해야 했다.

 

그 다음은 쌍용차의 새 주인을 찾는 일이었다. 주인을 찾으러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세계를 돌아다녔다. 주요 자동차 회사는 거의 다 찾아갔다. 크라이슬러, 벤츠, 포드, 피아트 등에다가 회사를 사라고 했더니 눈도 깜빡 안 했다. 회사를 사라고 제안하러 갔는데 오히려 자기네 엔진을 사가라는 역제안을 받기도 했다. 그때 법원에서쌍용차를 사겠다는 회사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바로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이었다.

 

쌍용차에 있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무엇인가.

우선 나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처음에는 법정관리인 자격으로 쌍용차에 발을 담갔다. 나는이건 내 회사가 아니다. 이건 나라의 회사다라는 사명감으로 일을 했다. 정부에 가서도 얘기했지만 한국에서는 현대차가 국내 자동차 시장을 거의 점유했다. 소비자의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하고, 협력업체에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현대차의 건강한 경쟁자가 필요했다. 쌍용차를 작지만 건전한 경쟁자로 키워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건 회사를 정상화시키고 성장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쌍용차에 있으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이 있는데 바로 파업이 끝난 직후였다. 옥쇄파업이 끝나고 나니까 많은 것이 황폐해져 있었다.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직원들이 흰 스티로폼 용기에 밥과 볶은 김치만으로 식사를 해야 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정말로 눈물이 났다. ‘우리 직원들을 배불리게 먹이고 싶다라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했다.

 

‘좋은 제품으로 다시 일어서자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회사는 제품과 서비스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티볼리를 준비하면서 전 직원과 합심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우선 부품업체에 최고 수준의 제품을 요구했다. 우리 기준을 따라오지 못하는 곳이 있어 초반에는 힘들기도 했다. 디자인을 하면서 설계 변경도 많이 했다. 설계 변경 한번 하는데 엄청난 돈이 든다. 티볼리는 한 1000번 정도 변경했다. 그만큼 좋은 제품을 내놓고 싶다는 연구진의 욕심이 컸다는 의미다. 회사의 정치적 이슈를 해결하는 동시에 제품의 질을 관리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았다. 결단을 내리면서 고민했던 점은 무엇인가. 노조와 협상하는 원칙 같은 게 있었나.

 

디자인을 하면서 설계 변경도 많이 했다. 설계 변경 한번 하는데 엄청난 돈이 든다. 티볼리는 한 1000번 정도 변경했다. 그만큼 좋은 제품을 내놓고 싶다는 연구진의 욕심이 컸다는 의미다.

 

노조는 사용자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집단이다. 조합원들의 요구를 반영해 회사가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도 하곤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모두 선한 사람이다. 그 사람들도 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려는 이들이다. 가끔 노조에서현대차 직원들은 얼마를 받는데, 우리는 얼마를 받는다라고 비교를 할 때가 있다. 경영자로서, 나도 우리 직원들에게 최대의 것을 주고 싶다. 그런데 현대차 직원과 같은 수준으로 모든 것을 맞춰줄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협상 첫날부터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고 논의를 시작했다.

 

내 원칙을 말한 다음은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했다. 모든 협상의 답은 소통이다. 노조든, 누구든 협상을 잘하려면 계속 소통하는 수밖에 없다. 노조도 우리 직원이다. 회사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다 같을 것이다.

 

노조 사무실에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꼭 들렀다. 특별한 이슈가 없어도 꼭 들렀다. 갈 때마다 회사의 사정을 조금씩 이야기하고 그들의 애로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들었다. 노조 집행부와 술자리를 갖거나 밥을 먹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가벼운 대화부터 현안까지 다양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노조 사무실에서 들은 합리적인 요구는 최대한 들어주려고 했다. 예를 들어안전화가 2년에 한 번꼴로 나오는데 좀 더 자주 바꿔달라’ ‘겨울 점퍼 하나로는 부족하니 더 달라’ ‘부식비 좀 올려달라와 같은 요구들은 전부 들어줬다. 내 나이가 70이고, 노조집행부는 40대가 많았는데 어떻게 보면 그들 모두 내 아들 같은 이들이다. 심적으로 최대한 많은 것을 도와주고 싶었다.

 

노조가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에 직접 얘기하고 싶은 게 있을 때도 내가 대신 얘기해주곤 했다. 복직 문제와 관련해 한번은 해고노동자 5명이 쌍용차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파완 쿠마 고엔카 사장을 직접 만나러 가겠다고 한 적이 있다. 복직문제 해결을 직접 요구하기 위해 인도로 원정투쟁을 나선 것이다. 그때 고엔카 사장은 허리 수술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당시 주변에서는지금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해고 노동자들이 고엔카 의장을 만나는 것이 사태 해결이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직접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 쪽에 전화해서해고노동자들과 만나달라. 만나서 성실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했다. 협상의 상대자라 하더라도 멀리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들의 요구가 타당하다면 언제나 앞장서 도와주는 게 옳다. 일각에서는 해고노동자와 고엔카 사장이 만나는 게 좋지 않다고 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이를 통해 서로가 진정성 있는 교섭을 하고 문제를 해결하자는 데 협상 양측이 공감대를 갖게 됐다. 이후 원정투쟁을 접은 것은 물론 교착상태에 빠졌던 노노사 3자 간 협상도 재개됐다. 노조와 고엔카 사장의 만남을 도와준 것이 해고자 복직을 둘러싼 6년간의 갈등을 마무리하는 계기가 됐다.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과 인도를 위해 일해줘 고맙다는 의미로 아난다 마힌드라 회장이 이유일 부회장에게 선물한 액자. 인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노사가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대화를 통해 노조와 경영진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노사 협상을 하면서 의견 불일치도 많았지만 싸우더라도 금방 화해했다. 노조에게 정말로 고맙다. 노조에서도 회사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많이 노력해줬다. 정말로 쌍용차를 위해 잘해줬다고 생각한다.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던 노사가 타협점을 찾고 회사가 정상화되자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쌍용차를 찾아오기도 했다. 쌍용차 노조위원장에게 노조 문제에 대한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인도 기업에 국내 자동차 회사가 넘어간다는 것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우선 북미나 유럽 등 유수의 자동차 회사에 먼저 제안을 했는데 다 거절을 당했다. 당장 새 주인을 찾고 정상화에 들어가야 했는데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때 마침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에서 먼저 제안을 해왔다. 한국 사람들이 인도 기업인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에 대해서 잘 모를 수 있는데 알고 보면 굉장한 회사다. 자산 규모만 약 20조 원(165억 달러)이 넘고 고용 인원이 전 세계에 20만 명에 달한다. 농기계와 정보기술(IT), 금융, 자동차, 부동산 분야에 다양한 자회사를 두고 있다.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의 정보기술 계열사인 마힌드라 사타얌은 2012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스폰서로 나서기도 했다.

 

일단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에 대해 충분히 알아본 다음에 연락을 했다. 그랬더니 인도로 와서 미팅을 하자고 했다.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 쪽에서 비행기표와 숙박비 등 모든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거절했다. 비용 지원에 대해 나중에 어떤 부담이라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비용 처리를 했다. 그렇게 해서 인도에 갔다. 회사를 보고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을 만나보니 생각보다도 더 좋았다. 경영 철학이나 비전이 아주 건강했다. 그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좀 더 나은 가치를 세상에 전달하기 위해 애쓰자고 했다. 자신도 오너 일가지만 65세 이상이 되면 물러난다는 규정에 따라 물러날 계획이라는 것도 말해줬다. 마힌드라 회장은 딸밖에 없어 사실상 자신이 물러나면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겨야 한다. 그런데도 원칙을 지키겠다고 나에게 선언한 것이다. 자신을 위한 경영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좋은 경영을 한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서 2010년 매수자 공개 입찰을 했다. 6곳이 참여했다. 근데 다들 금액을 엄청 낮게 써냈다. 당시 쌍용차 자산이 한 9000억 원 정도 됐는데 대개 3000억 원 이하로 써낸 거다.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이 그나마 5200억 원이 넘는 금액을 써냈다. 매수자 입찰을 할 때만 해도쌍용차보다 실력이 더 나은 회사에다 팔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마힌드라는 쌍용차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이후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은 진정성을 갖고 쌍용차 발전을 위해 애써줬다. 인재 육성에도 많은 투자를 했다. 쌍용차에서는 1년에 두 명이 하버드비즈니스스쿨에 가서 수업을 듣는다. 하버드대에는 마힌드라 프로그램이 별도로 있는데 거기에서 맞춤형 MBA 코스를 듣는 것이다. 마힌드라 회장은 소통에도 누구보다 열심이다. 트위터 팔로어가 100만 명이 넘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직접 글을 단다. 평택공장에 농성사태가 있었을 때도 굴뚝농성자와 마힌드라 회장이 트위터로 얘기를 나눴다. 마힌드라 회장을 여러 번 만났는데 정말로 내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쌍용차의 대주주인 게 결코 나쁘지 않다.

 

 

법정관리인을 하다가 CEO가 됐다.

2010년 여름에 외국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CEO를 뽑아야 하는데, 지금 당장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나더러 당분간만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힌드라 회장이 나의 나이를 물었다. 왜냐하면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에서는 60세가 넘으면 경영진이 다 나가야 한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톱 레벨의 일부 경영자만 65세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근데 당시 내 나이가 66세였다. 이미 회사에서 정한 기준을 넘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CEO 1년 계약을 하게 됐다.

 

1년 후 계약 만료 시기가 다가오자 회사에서는 계약을 1년 더 연장하자고 했다. 근데 내가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다. 사장을 제대로 하려면, 이런 식으로 1년씩 계약을 연장하는 것이 도움이 안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비전에서 일을 해나가려면 안정적인 임기가 필요했다. 베이징에서 마힌드라 회장과 단 둘이 이틀 동안 대화를 나눴다. 마힌드라 회장이 나에게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나는내가 쌍용차에 온 이유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다. 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코란도C만 갖고는 안 된다. 지금 기획 중인 자동차가 있는데 2015 1월에 이것을 성공적으로 론칭시키고,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키고 싶다. 이후에는 그만두겠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면 CEO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결국 마힌드라 회장은우리 회사 규정에서 당신은 예외다. 나이 제한이 없다라며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2011년부터 나는 좀 더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마힌드라&마힌드라그룹의 이사회 멤버가 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연임에 대한 얘기도 흘러나왔다.

박수 받으면서 떠나고 싶었다. 사람이 너무 욕심을 내면 나중에 돌아오는 것은 욕밖에 없다. 한국 국가대표팀을 2002년 월드컵 4강에 올려놓은 히딩크가 올림픽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감독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는 떠나야 할 때를 알았기 때문에 여전히 한국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남아 있다. 잘할 때 떠나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한다. 계속 더 하고 싶다는 욕심을 못 버리면 그게 바로 자기 발목을 잡는 것이다. 만약에 나보고 다시 CEO를 하라고 하면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안 할 것이다. 회사는 젊어야 한다는 생각도 나의 확고한 은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올해까지 47년째 월급쟁이를 하고 있는데 더 한다고 하면 나쁜 사람이다.

 

경영 철학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건내 생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에게 더 유리한지,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더 많이 얻는지에 대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직 회사와 조직 구성원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이렇게 해야만 회사가 성장하는 좋은 방법, 최고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또 하나 내가 평생 동안 지키고자 했던 게 있다면 바로 투명함이다. 회계나 재무 등의 분야는 물론이고 인사와 마케팅 등 모든 결정에서 투명해야 한다. 그래야 어디 가서도 당당할 수 있다. 나는 우리 회사에 어떤 협력업체도 소개하거나 추천한 적이 없다. 오랫동안 자동차 회사에 있으면서 여러 군데에서 그런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모두 거절했다. 잠깐의 이득을 취해서 나중에 회사에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나? 이런 원칙 때문에 잡음 없이 좋은 가격, 좋은 품질의 상품을 내놓는 거래처와 같이 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아주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나에게 인사 청탁을 한 적이 있다. 추천받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시험을 봤는데 그 사람이 백지를 내놨다. 영어도 한마디를 못했다. 상사에게 가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낙하산을 못 받겠다고 했다. 실력이 있으면 부정한 방법으로 들어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상사가 나의 태도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반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은 회사에 입사하지 못했다.

 

이처럼 기본 원칙을 지키면 어디서든 당당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청문회 때도 당당했다. 청문회에서 나의 태도에뭘 믿고 정치인에게 저렇게 당당하게 구는 거야” “무슨 백이 있나라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나는주주가 임명해서 쌍용차의 CEO가 됐다. 주주가 그만두라고 하면 당장 그만두지만 당신이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스스로가 깨끗해야 모두에게 좋은 경영을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이지만 경험해보니 이게 사실이었다. 투명해야 어떤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고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할 수 있었다.

 

 

후회되거나 아쉬운 경험이 있나.

내가 현대차 캐나다법인의 문을 열고, 또 문을 닫고 나왔다. 사실 처음부터 나는 캐나다공장 설립에 반대했다. 그때가 1989년인데 미국의 빅3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캐나다 승용차 시장이 1년에 60만 대인데 10만 대 규모의 쏘나타 공장을 짓는다는 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회사는 포니의 성공에 취해 있었다. 수익성이 안 나온다고 하면 캐나다공장 설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은가격을 올리면 된다’ ‘몇 대를 더 팔면 된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일부 임원들이 이런 식으로 최고경영진을 설득한 것이다. 현대차가 추진한 첫 해외 공장이 실패할 것이라는 나의 의견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캐나다법인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법인장을 맡게 됐다.

 

쏘나타 생산을 시작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손익분기점인 6만 대를 넘기는커녕 2만여 대에서 늘어날 줄을 몰랐다. 공장이 있는 장소도 외진 곳이라 주변에서 부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웬만한 부품은 한국에서 가져다 썼는데 물류비가 차 한 대당 600달러 정도 들었다. 완성차를 한국에서 만들어 가져와도 물류비가 400달러면 됐는데 엄청난 낭비인 것이다. 결국 1993년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철수했다.

 

참으로 큰 손해고, 뼈아픈 교훈이었다. 이후에 현대차는 해외 공장 설립에 상당히 조심하게 됐다. 부지 선정, 시장조사부터 현지화 전략까지 더 체계적으로 해외에 진출하는 시스템을 갖게 됐다. 아주 값비싼 수업료를 낸 셈이다.

 

현대차 캐나다법인장, 미국법인장, 해외 부문 사장 등을 역임했다. 해외 진출 전략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을 것이다. 현재 한국 기업 역시 글로벌화에 고민이 많다.

한국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경쟁기업이 해외 진출을 한다고, 어떤 회사가 해외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너도나도 나가서는 안 된다. 현대건설이 해외에서 좋은 성과를 내니까 여러 건설회사가 너도나도 나갔다가 많이 망했다. 그건 잘못됐다. 해외 진출을 하려면 먼저 자기 실력을 분명하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강점이 무엇이며, 해외시장 어디로 가는 것이 경쟁력을 가장 높일 수 있는가 등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또 글로벌화에 신중해야 하지만 동시에 과감해야 한다. 지금 불황이라고 많은 기업들이 위축경영을 한다. 하지만 불황일 때 기회가 있다. 어려울 때 준비를 잘해서 나가면 오히려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실력을 키우는 것이다. 실력이 충분한 상태에서 해외 진출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밀어붙여야 한다. 초반의 단기적인 손해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면 너도나도 해외 진출을 했을 것이다. 지금 쌍용차도 미국 진출을 준비 중이다. 아주 신중하게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고 전략을 짜고 있다.

 

오랫동안 CEO로 살아왔다. 좋은 CEO는 어떤 사람인가.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CEO는 말만 잘하는 사람, 일방적으로 말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직원의 말을 늘 귀담아듣고, 그들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직원보다 먼저 나서서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직원이 CEO보다 경력이 짧다고나보다 모를 것이다’ ‘못할 것이다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나도 늘 이런 태도로 직원을 대하려고 노력했다. 퇴근하다가, 출근하다가 직원들을 만나면 사심 없이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눴다. 직원과 사장은 조직 내 상하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직원들 입장에서는 상사나 CEO이라고 여겨진다. 그 벽을 허무는 게 소통이다. 직원들이 언제라도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서야 하는 게 리더의 큰 역할이다.

 

 

CEO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늘 후배 양성을 위해 힘쓰고, 재능 있는 후배가 있다면 그에게 권한을 줘야 한다.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좋은 후배들이 많이 나오고, 이게 회사가 성장하는 지름길이 된다. 내가 떠나더라도 누군가가 내 자리를 이어받아서 매끄럽게 일하게끔 해두는 것이 훌륭한 리더다. 이렇게 하면 CEO가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된다. 어떤 CEO는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된다고 해서 세세한 이슈까지 다 챙기는데 그렇게 되면 점점 더 결정하기 어려워진다. 적당한 타이밍을 놓치게 되고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직원들로부터 신뢰를 잃기도 쉽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나는 회의도 2시간 이상 못하게 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물어보고 보고받는 회의를 하는 것이 일종의 시간낭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바쁜 임원과 직원들을 단체로 모아놓고 하는 회의일수록 효율적이어야 한다. 회의가 여러 개 겹쳐서 3∼4시간이 되면 그 회의는 능률적일 수가 없다. 필요한 것만 결정하고 나머지는 후배에게 위임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좋은 후배를 양성하고 그에게 투자하면 CEO는 더 큰 것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다. 임기 마지막에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들어가자 나 역시 좀 더 큰 비전을 실천하는 데 투자하려고 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리더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봐야 한다.

 

현직 CEO 및 경영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경영학의 첫 번째가돈과 사람의 관리. 오랫동안 경영 현장에 있으면서 매번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느낀다. 기업이 실력을 키우려면 우선 사람을 잘 뽑고, 투자를 잘해야 한다. 그리고 후배를 잘 믿어야 한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제대로 교육시키면 엄청난 성과를 낸다.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는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고,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 관리 중의 하나다.

 

정지영 기자 jjy2011@donga.com

 

동아비즈니스리뷰 330호 플라스틱 순환경제 2021년 10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