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석 산돌커뮤니케이션 이사
Article at a Glance – 전략, 혁신
성공하는 서체의 요건은? 일관성:소비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모든 통로에서 해당 서체를 사용해야 한다. 예컨대 상품 패키지에는 A서체, 광고에는 B서체를 쓰면 소비자가 제품 및 기업에 대해 일관된 이미지를 형성할 수 없다. 지속성:한번 개발하면 적어도 10년 이상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한두 해 사용하고 말 서체는 안 하니만 못하다. 개발 후 방치하기보다는 트렌드와 사고방식의 변화에 발맞춰 꾸준히 다듬어주는 일도 필요하다. 가독성:읽히지 않는 글자는 실패다. 개성을 강조하다 실용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읽기 편한 글자가 오래 생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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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지혜(가톨릭대 영문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현대카드는 전용서체를 활용해 성과를 낸 베스트 케이스로 꼽힌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광고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현대카드의 그것을 단번에 구별해낸다. 2005년 현대카드 전용서체가 빛을 본 후 지속적이면서도 일관되게 사용됐을 뿐 아니라 다른 마케팅 및 브랜딩 활동들과 잘 어울려 긍정적인 시너지를 낸 덕분이다.
이 시대 많은 기업들이 많이 말하는 데 주력한다. 더 자주 접촉하고, 더 강하게 인식되며, 더 효과적으로 흡수되기를 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체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수단일 수 있다. 직접적이지 않고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도 없으며 때로는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측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은 소비자와의 대화에서 스스로 어떤 말투를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가다듬어야 한다. 대화는 주고받는 말의 내용만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어조와 어투는 내용 이상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이 꾸준히 사용하는 전용서체는 그 기업의 어조이자 어투다. 같은 어조와 어투를 지속적으로 접한 소비자들은 해당 기업에 명확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그 기업을 다른 기업과 구별하며 친숙하게 여긴다. 전용서체야말로 직설적이지 않으면서도 잠재의식 속에 다가갈 수 있는 기업 고유의 분위기이자 뉘앙스다. 따져보면 이보다 효과적인 브랜딩 수단도 없다.
16년째 기업 전용서체를 비롯한 각종 폰트 디자인을 다루며 삼성과 현대카드, KT&G 등 주요 기업과 전국 도로교통 안내판, 평창동계올림픽, 제주도 등의 글자를 만들어 온 권경석 산돌커뮤니케이션 타이포랩 이사를 DBR이 만났다.
권경석 산돌커뮤니케이션 이사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1998년 산돌커뮤니케이션에 입사해 지금까지 서체와 관련된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국내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현대카드 전용서체(2005), 삼성그룹 전용서체(2003), 국토해양부의 도로교통 안내판과 주소명 전용서체(2008), 네이버 나눔고딕과 옥션고딕(2008), 제주도 전용서체(2010), KT&G 전용서체(2011), 평창올림픽 엠블럼 로고 및 전용서체(2013), HP 전용서체(2014), SBS 전용서체(2014) 등을 개발하는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체는 어떤 과정을 거쳐 개발되는가.
일단 서체 개발을 의뢰한 기업의 담당자로부터 해당 기업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목표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틀을 잡아간다. 그런데 기업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포괄적이며 모호할 때가 많다. 듣고 나면 어떤 느낌인지 대략 감은 오지만 구체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기업 측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이미지를 잡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을 다양하게 시도한다.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시민들을 붙잡고 이 기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이 기업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묻는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고, 다른 범주의 아이콘들을 활용해 이미지맵을 그리기도 한다. 이미지맵이란 뚜렷한 이미지를 가진 구체적인 대상들로 표현하고 싶은데 모호한 이미지를 대체해보는 작업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남자 연예인 중에 장동건의 느낌이 다르고 현빈이나 정우성이 가진 이미지는 또 다르다. 자동차 중에 벤츠와 BMW는 모두 부를 상징하지만 벤츠가 명예를 강조하며 묵직한 느낌이 드는 반면 BMW는 좀 더 활동적이면서 젊은 느낌을 준다. 남자 연예인 중에 이 기업의 이미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누구인지, 자동차로 표현한다면 어떤 자동차로 이 기업을 대변할 수 있을지를 매치해 보는 것이 이미지맵을 그리는 과정이다. 이런 작업들을 통해 해당 기업의 이미지를 구체화한 후 이것을 서체에 담아내는 작업에 들어간다.
서체를 한번 만들기 시작하면 적게는 2350자, 많게는 1만1172자를 만든다. 2350자는 한국 표준(KS)으로 이 정도 글자가 있으면 우리나라 말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정된 최소 조합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말 또는 새로운 말, 이를테면 ‘뷁’이라든지 중국 사람들의 발음이나 이름을 한글로 표현하고자 할 때는 2350자 범위를 벗어나는 글자도 필요하다. 따라서 한글을 조합해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인 1만1172자를 만들어야 한다.
생각한 이미지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과정은 분명 창의적인 작업이다. 이전과 다른 모양이나 표현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일은 디자인에서 요구되는 창의성의 영역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같은 고딕이라도 어느 쪽을 얼마나 구부리느냐에 따라 느낌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가가거겨’부터 시작해 한 글자 한 글자를 매만지는 일은 쉽게 말해 ‘막노동’이다. 0.1㎜를 조정해가면서 하얀 바탕 위 검은색 글자를 하염없이 그리고 다듬어야 한다. 이 작업에만 수개월이 걸린다. 창의성을 꽃피우는 것은 결국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반짝이는 아이디어라도 노동과 시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세상 빛을 볼 수 없다.
1만1172자를 만들었다고 해서 작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단계가 남아 있는데 ‘검수’다. 일단 모든 OS에서 작동하는지 일일이 적용해봐야 한다. 오탈자가 없는지도 꼼꼼히 확인한다. 제일 중요한 과정은 ‘합’을 보는 것인데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서체는 일종의 ‘관계’다. 한 자 한 자 떼놓고 봤을 때 아무리 예뻐도 모였을 때 별로면 실패다. 이 글자 다음에 어떤 글자가 오느냐, 글자들이 모였을 때 어떤 문장이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마크나 심벌처럼 하나에 모든 것을 압축해 담으려고 하면 십중팔구 실패한다. 그보다는 글자 하나하나에서는 가급적 욕심을 줄이고 글자들이 모였을 때 발휘되는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글자만 떼놓고 봤을 때 좀 심심한 듯해야 모였을 때 간이 적당하고 균형이 맞는다. 네이버와 ‘나눔고딕’ 프로젝트를 할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네이버가 글자를 따로따로 보고는 “심심하고 평범한 느낌”이라면서 다소 불만스러워했지만 합쳐놓고 보니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글자는 모였을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이는 기업의 브랜딩이나 마케팅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일 것이다. 특이한 이벤트 하나 또는 잘생긴 모델 한 명이 기업 이미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기업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모였을 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분위기와 뉘앙스, 그게 그 기업의 브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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