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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Case Study

역발상과 마오쩌둥 전략으로 中 최대 음료 거부가 되다

이병희 | 131호 (2013년 6월 Issue 2)

 

편집자주

※ 이 기사는 삼성경제연구소가 출간할 예정인 가제)> 게재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왕웨이(연세대 경제학과 4학년) 씨와 박철순(LG전자 TV사업부 TV마케팅팀 사원) 씨가 참여했습니다.

 

 

신흥국 기업의 성장 스토리를 살펴보면 대부분 원가 경쟁력을 무기로 성공을 거둔 사례가 많다. 세계의 공장이라 불릴 만큼 저렴 요소 비용이 장점이었던 중국의 기업들도 마찬가지. 자국기업에 우호적인 정부의 정책과 제도도 중국 기업의 성장에 도움이 됐다는 시각도 많다. 하지만 시장의 변화를 선제적으로 예측하고 차별화된 스토리와 품질 경쟁력을 내세워 자국 시장에서 확고한 자리를 확보한 중국 기업도 있다. 중국의 토종 식음료 기업인 와하하(회장 쭝칭허우)가 어떻게 국내외 기업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중국 대표 식음료 기업으로서의 위치를 굳혔는지 살펴보자.

 

 “와하하를 마시면 밥이 맛있어진다

1987 5월 항저우(Hang Zhou)시의 한 학교 판매부에서 쭝칭허우가 두 명의 퇴직 교사와 함께 14만 위안을 빌려서 사업을 시작한 게 와하하의 시초다. 어린이의 웃음소리를 본뜬와하하브랜드가 탄생한 것은 1988년으로 이해 쭝칭허우는 항저우와하하영양식품공장을 설립하고 건강식품 및 드링크제 생산에 뛰어들었다. 무엇보다 중의식사요법을 따라서 어린이가 밥을 잘 안 먹거나 편식하는 것을 해결해 준다는 아동영양드링크제를 생산한 게 주효했다. 특히와하하를 마시면 밥이 맛있어진다라는 유명한 광고는 와하하가 전국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1990년에는 이 제품 하나만으로 매출액 1억 위안을 돌파했다.

[그림1]와하하 그룹 매출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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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당시 직원 100명 규모의 와하하는 직원 2000명 규모의 항저우통조림식품공장을 인수하고 항저우와하하그룹유한회사를 설립, 본격적으로 식음료 제품 사업에 진출했다. 이해 와하하는 와하하과일요구르트(중국 시장 1), 통조림죽, 감기드링크액 등을 출시했다.

 

와하하는 중국의 대규모 개발 사업인 싼샤댐 건설을 지역적 확장의 계기로 삼았다. 1994년 와하하는 싼샤댐 지역주민들의 이주를 지원한다는 목표 아래 충칭(Chong Qing)시 푸링(Fu Ling)구에서 3개 기업을 인수해 와하하푸링지사를 설립했다. 수몰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물품 지원도 하며 우호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후 현지 생산과 판매를 본격화하면서 와하하는 충칭시 및 싼샤댐 지역의 주요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와하하는 사업 영역 및 고객군 확대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5 10여 가지의 식품제품을 출시하며 아동 시장에서 성인 시장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매출액 88000만 위안을 달성한다. 또한 1996년 와하하는 현재의 주력 제품 중 하나인 생수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림2]와하하 부문별 매출 비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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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합작, 그리고 결별로 성장하다

1996 3월 와하하는 프랑스의 식품 기업인 다농(Danone)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5개의 합작기업(Joint Venture)을 설립했다. 지분율은 다농이 51%, 와하하가 49%였지만 쭝칭허우가 회장을 맡고 실질적 경영권은 와하하가 행사하는 구조였다. 와하하는 다농과의 합작을 통해 외자뿐만 아니라 선진 기술과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1990년대 말 전국적 기업으로 거듭나게 됐다.

 

1998년에는우리 중국인의 콜라를 모토로페이창커러(非常可樂Future Cola)’를 출시했다. 이는 와하하가 중국의 대표적인 토종 식음료 기업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얻는 계기가 됐다. 1998년 말 와하하그룹은 매출 및 이익에서 중국 음료업 중 1위를 차지한다.

 

두 회사의 합작은 성장을 거듭해 2006년 와하하와 다농과의 합작 기업 수는 39개에 이르게 된다. 이는 두 회사 모두에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1996년 설립 당시 1억 달러 규모였던 합작 매출액은 10년 만에 225000만 달러 규모로 크게 늘어났다. 와하하와의 합작기업에 모두 합쳐 17000만 달러를 투자한 다농이 얻어간 배당액은 총 37000만 달러에 이른다. 2006년 다농그룹 전체 이익 중 약 6%가 와하하와의 합작기업에서 나왔다.2

 

 

다농과의 합작을 성장의 발판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쭝칭허우는 독자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 사례가 1999년 중국 정부의 서부대개발 정책에 부응해 다농과는 관계없는 독자적인 자회사를 설립해 중국 서부 지방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이다. 와하하는 진출 첫해에 서부 지역에서만 104000만 위안의 이익을 올렸다. 또한 2002년 와하하는 아동 음료 시장에서의 성공을 기반으로 아동복 시장으로 진출, 전국에 약 800개의 아동복 전문매장을 열었다.

 

이처럼 다농과의 합작과는 별도로 쭝칭허우가 적극적으로와하하브랜드를 활용해 사업을 확장하면서 다농과의 사이는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법적으로 와하하 브랜드는 다농과의 합작에서만 쓸 수 있도록 양측 간에 계약이 돼 있었다. 2006년 와하하 브랜드하의 자회사 수는 총 70개에 이른다. 이 중 양측의 합작기업은 39개였다.

 

같은 해 다농은 나머지 31개 자회사를 인수하고자 쭝칭허우에게 인수금액으로 5억 달러를 제시했다. 하지만 쭝칭허우는 이 자회사들의 자산만도 7억 달러에 이르고 이익 합계가 13000만 달러이기 때문에 다농의 제안에 따르면 주가수익비율(P/E Ratio)이 단지 4에 그치는 것이라며 인수 제안을 거절했다. 또 그는 만일 다농이 와하하 브랜드에 대한 통제권을 모두 가지게 된다면 다농은 와하하 브랜드를 서서히 도태시키고 다농과 에비앙 같은 글로벌 브랜드를 내세우게 될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러자 다농은 와하하 브랜드를 다농과의 합작기업에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합작 계약서를 근거로 소송을 제기했다. 쭝칭허우도 이에 강력하게 대응했으며 회사의 실적은 악화됐다. 2007년 와하하 합작기업들의 성장률은 3%에 그쳤으며 이는 산업평균보다 17%포인트나 낮은 수치다.

 

결국 2007 12월 프랑스 대통령과 중국 상무장관이 압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고 2008 3월 다농과 와하하는 모든 소송을 철회하고 상호공격적인 발언을 멈추기로 합의했다. 구체적인 합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농과 와하하의 결별이 공식화된 셈이다.

 

이처럼 합작은 좋지 않은 모습으로 종료됐지만 양측 모두 합작은 윈윈 게임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다농 대변인의 언급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개도국 시장에서 전체 매출의 30%를 올리고 이 같은 성과를 단지 10년 안에 이뤘다면 이는 합작 전략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와 와하하 사이에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와하하 없이 사업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문제가 있더라도 와하하와 합작을 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고 본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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