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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udgment Deficit

판단 오류: 견제를 위한 길은 있는가

아마르 바이드 | 88호 (2011년 9월 Issue 1)

 

 

 

편집자주 이 글은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2010 9월 호에 실린 아마르 바이드의 글 ‘The Judgment Deficit’을 전문 번역한 것입니다.

 

오늘날 개개인은 그들의 선조들이 상상도 못했을 만큼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그에따라 행동한다. 실제로 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의사결정의 인간화를 물질적 소득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경제학자 에드먼드 펠프스는 200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연설에서 역동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위대함은 더 많은 여가가 아니라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독립적인 판단과 행동의 결과라고는 했지만 모든 판단이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다. 그래서도 안 된다. 때문에 나는 자본주의 경제를 모험 경제(venturesome economy)라고 부른다. 수백만 명을 비생산적이고 실체 없는 노동의 틀에 가두는 상명하달식 경제였던 소비에트 연방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상명하달식이 반드시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만일 차는 반드시 도로의 오른쪽으로 달려야 한다고 규정하는 법규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개발하는 애플의 엔지니어들은 물론 그에 더해 그 앱을 만드는 개발자들은 크고 작은 사안들에 대한 판단을 전적으로 스티브 잡스 한 명에 의존한다. 이 역시 겉으로는 상명하달식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 결과 애플의 소비자와 주주들은 손해가 아니라 큰 이익을 얻지 않았는가?

 

개개인의 자주적 판단과 상명하달식 통제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일은 우리 사회와 조직에서 매우 중요한 과제다. 물론 우리는 그런 과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를 다뤄봤던 경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형태의 중앙통제 양식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과거와 다른 점은 하나다. 과거에는 중앙통제가 구시대적인 전제 군주, 위원회, 규정집 등에 의해 이뤄졌다면 새로운 중앙통제는 통계와 알고리즘을 통해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계적인 의사 결정 테크놀로지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를 잘못 사용할 때는 구 소련 정치국만큼이나 제 역할을 못할 수도 있다. 오늘날 금융계에서 벌어진 사태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과거에는 대출회사의 담당 직원들이 직접 현장에서 발로 뛰면서 개별 대출 신청자의 신용도를 일일이 검증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들의 대출 담당 임무를 대체한 건 금융 천재들이 만들고 월가의 투자은행, 신용평가회사, 정부 지원을 받는 주택 담보대출 회사가 유포한 소수의 고만고만한 통계 모델이었다. 이러한 신용 창출의 중앙화와 자동화가 널리 인기를 끌면서 은행은 당국의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졌고 규제당국은 상명하달식의 기계적인 자본 규정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 결과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금융 위기가 도래했다. 세계 경제는 자칫하면 몰락할 뻔한 끔찍한 경험을 피할 수 없었다. 금융계는 자율적 판단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고 우리 모두는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경제 위기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반드시 금융과 다른 분야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을 쇄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집권화와 분권화 사이의 균형점은 물론 사례별 판단(case-by-case judgment)과 규격화된 표준 규정(standardized rules)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도 찾아야 한다. 사실 적절한 통제의 수준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역동성은 중앙집권화된 통제를 가장 최소로 할 때 최고로 유지된다.

 

그러나 개개인의 주도로 활발하게 생성되는 역동성이 강력해질수록 필요한 통제의 수준이 올라간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사례별 판단, 표준 규정, 컴퓨터 모델 등 중앙집권화의 방안은 물론 중앙집권화를 얼만큼 실시해야 하는가 역시 어려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앙집권화를 둘러싼 문제 제기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개인의 자발적 판단에 대한 옹호론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저서 <사회에서의 지식의 활용(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에서 분권화를 택해야 하는 고전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이에크는 경제의 안정성은 지속적으로 작은 변화에 맞게 대응하고 적응해가는 과정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A가 실패하면 즉시 B가 개입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 그 어떤 개인도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는 지식을 모두 갖고 있진 않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지식은 다수의 개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고 생각했다.

 

‘환경에 대한 순간적인 정보는 중앙의 정책 입안자에게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고 도달 과정에서 왜곡도 불가피하다. 따라서 문제 해결에 나서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장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개인이다.

 

1945년에 발표된 하이에크의 이 유명한 논문은 중앙집권적 계획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었다. 이는 세계 경제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 중 자본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사회가 직면했던 당시의 경제 정치적 문제에 대한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보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중앙집권적 계획에도 어느 정도 유연성이 생겼다. 그럼에도 하이에크의 분권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하이에크의 논문 주제였던변화에 대한 적응은 사실 이야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경제의 성공에는 혁신이라는 또 하나의 주춧돌이 있다. 혁신이 이어지면서 분권화 주장은 중앙집권적 계획 옹호론을 물리칠 수 있었다. 혁신은 전례가 없는 독특한 발전을 일컫는다. 점진적인 변화를 위해서도 혁신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혁신가는 미래의 기회를 점치면서 베팅할 때, 단순히 과거의 패턴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과거의 성공 및 실패 이유를 찾아 보는 일은 단순한 시작점에 불과하다. 혁신을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시행 착오가 뒤따라야 한다. 예측할 수 없는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소비자들은 종종 마케터에게 한 말과 상반되는 행동을 하므로 늘 현장을 살피는 관찰력, 과거에서 배울 줄 아는 능력, 상상력 등을 잘 혼합할 줄 알아야 변화하는 시장에 맞게 조정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다.

 

중앙집권화된 혁신 과정을 한번 상상해 보자. 국가과학재단 또는 식품의약안전국과 같은 국가 조직은 우수한 역량을 가진 전문가를 초빙해서 각종 제안을 심사하고 소비자에게 잘 팔릴 수 있는 신제품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게 할 것이다. 이렇듯 현장과 동떨어진 제도적 경로의 과정은 혁신가로 하여금 폭넓은 현장 지식과의 교류를 제한시킨다. 혁신가는 현장 지식을 받아들임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한 정보를 구하려 하지만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이러한 혁신가들의 본능과 상상력은 돌발 상황이 연출될 때마다 새로운 데이터와 제안서를 제출해야 하는 제약 때문에 발이 묶여버린다. 더욱이 혁신가의 판단은 팩트, 과거의 경험, 상상력이 융합돼 만들어지므로 같은 상황이라도 모두 다른 결과를 내게 마련이다. 아무리 전문가라 해도 누구의 판단이 최선인지 예측할 방법은 없다.

 

분권형 경제 체제에서는 혁신가가 자신들의 과거 실적이나 능력 때문에 제한 받는 일이 없다. 국가 조직이 초빙한 전문가의 한마디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일도 없다. 혁신가들은 필요한 자원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오로지 자신의 의사 결정에 따라 행동할 자유가 있다. 그 결과, 분권형 시스템은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혁신을 도모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혁신을 위한 노력은 복제되지만 편향성이나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거부감 같은 중앙집권 시스템의 특성은 사라진다.

분권형 시스템에서는 초빙 전문가가 아니라 개인 소비자가 시장에서 기성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혁신적인 상품을 선택한다. 이러한 소비자의 선택은 로봇처럼 습관적인 일이 아니다. 새로운 상품이 등장하면 사용자들은 상상력과 모험 정신을 발휘해서 구매 결정을 해야 한다.

 

독립적인 사례별 의사 결정은 역동적 경제 체제를 관통하는 중요한 대들보지만 이는 단지 첨단 테크놀로지에서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원자재 가격 급등 문제에 직면한 금속 가공업체는 단순히 원자재 가격이 높았던 시절의 대응책을 반복할 수 없다. 최근의 원자재 가격 급등은 소비자와 경쟁자의 대응까지 생각하면서 의사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변 지역이 재개발로 깨끗하게 단장된 동네의 식당들도 메뉴와 장식을 그에 따라 변경해야 한다.

 

소비자 역시 지속적으로 새로운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자동차 유지비 절감을 위해 하이브리드 차종을 선택해야 할지, 주택 단열 등 보수에 나서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새로 생긴 식당에 갈 수도 있고 오래된 단골 식당에 갈 수도 있다. 어쨌든 선택을 해야 한다.

 

대화와 관계 효과적인 분권화를 위해서는 독립적인 각각의 발의안을 서로 조정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역동적인 사회와 조직들은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행동을 지시하는 사명하달식 시스템보다 대화와 관계에 의존하고 있다.

 

수십 개의 반도체 업체, 프린터 제조업체, 백여 개의 프린터 제조업체, 수백 개의 PC 제조업체, 수십만 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만들어낸 생태계는 바로 윈도가 PC 운영 체제를 독식하는 데 기여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새로운 버전의 윈도를 개발할 때 생태계의 다른 구성원들과 긴밀히 협의한다. 그래야 윈도를 발표하는 순간에 이 윈도와 양립 가능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즉각 시장에 나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윈도 생태계의 구성원이 새로운 기능을 탑재한 제품개발을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 MS와의 협의를 통해 이득을 보고 있다.

 

이처럼 기존 관계는 대화를 보충해 줌으로써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협력을 도모하는 데 기여한다. 동일한 파트너와 지속적으로 비즈니스를 함께하면서 아무리 조심스럽게 협상을 해도 발생할 수 있는 모호성과 오해를 줄여나갈 수 있다. 협의에 협의를 거듭한다고 해도 사람 사이의 말은 언제나 정확할 수 없다. 때문에 서로 합의에 도달해도 양측의 생각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 간극을 결코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최고의 노력(best effort)’이란 과연 무엇일까? 한쪽 당사자의 눈에 비친 부지런함은 상대방의 시각에서는 대충대충 하는 태도로 보일 수 있다. 똑같은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를 내놓아도 어떤 고객은 입맛에 맞는다고 하지만 어떤 고객은 너무 익혔다고 불평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거듭된 거래를 통해서만 양쪽 당사자는 서로 상대방의 언어와 기대 수준을 정확하게 이해해 나가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지속적인 관계는 일이 잘못됐을 때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유연하게 해 주기도 한다. 협력업체 하나가 차세대 하드 드라이브의 약속된 납기일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자. 구매업체는 계약서에 의거해서 주문을 취소할 권리가 있다. 납기일을 준수하지 못한 이유가 디자인 문제라면 문제를 바로 잡는 데 시일이 많이 걸리기에 주문 취소가 합리적이다. 그러나 협력업체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특히 납기 지연 이유가 생산 라인에서의 일시적인 정체라면 납기를 연기해주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중앙집권 옹호론

기술적으로 진일보한 사회가 제 기능을 하려면 중앙에 집중된 통제력이 꼭 필요하다. 정부는 기업이 석유를 시추하고, 유전자 변형 작물을 재배하고, 유아용 장난감에 사용할 페인트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법에 따라 마땅히 이들을 감독해야 한다.

 

기술적 진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합법적인 통제라고 받아들이는 범위를 넓히는 역할을 한다. 자동차의 발명으로 도로교통법이 제정됐고 자동차 검사도 의무화됐다. 항공 여행이 증가하면서 교통량을 통제하고 비행기의 기계적 상태를 인증하는 시스템이 필요해졌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전파는 경쟁하는 방송국의 신호와 충돌하지 않게끔 정부 당국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석유화학제품 개발로 대기 오염을 통제하는 법규도 필요해졌다.

 

국가의 권력에 굴복하는 일과 별개로 개인이 자발적으로 민간 조직의 권위와 규정에 따를 때도 있다. 조직의 리더는 부하 직원들은 물론이거니와 협력업체와 외부에서 초빙한 변호사나 컨설턴트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발휘한다. 리눅스 운영체제의 개발은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자유분방한 오픈소스형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창업자인 라이너스 토발즈는 정교한 일련의 개발 과정과 규정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위계 질서로 구현해냈다. 인터넷 기업가들은 표준 규격을 설정하는 기관들이 수립한 복잡다단한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조직적 통제의 기원은 규모와 범위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 19∼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철도 교통은 당시로는 막대한 이점을 가져온 혁명적인 신사업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조정과 협력 문제가 어찌나 복잡한지 하이에크가 주창한 즉각적인 현장의 조정만으론 해결할 수 없었다. 태평양 및 대서양 횡단 철도는 대륙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연결하는 대사업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집권화된 통제 기관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선제적 기획과 지속적인 감독 작업을 수행해 나가야 했다.

 

건설된 철도의 안전 운행을 위해서도 마찬가지 과정이 필요했다. 역사학자 앨프리드 챈들러의 기록에 따르면 1841년 승객용 열차 충돌 사건 이후 사람들의 격렬한 항의가 계속됐다. 이는 미국 기업에서는 최초로 현대적이고 잘 정비된 내부 조직 구조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19세기에는 신제품이 소수의 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 토머스 에디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소규모 공장에서 백열등, 영화, 축음기 등 다채롭고 획기적인 발명품을 속속 내놓았다. 당시 에디슨이 데리고 있던 직원 규모는 오늘날로 치자면 실리콘밸리의 갓 창업한 회사의 직원 수만큼도 안 되는 극소수였다. 전화기를 발명할 당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단 한 명의 조수를 데리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조직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제품을 재빨리 개발해내는 일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의 발명품은 그 당시 부자들을 위한 노리개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규모 팀 단위에서는 처음부터 일반 대중을 겨냥한 값 싸고 믿을 만한 스마트 폰과 넷북 컴퓨터를 내놓을 수 있다. 제품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인적 구성원들은 방대한 경험과 전문성을 갖고 있다. 때문에 이들을 정확하게 기술된 과제와 시간표에 따라 긴밀하고 조직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소위 큰 물에서 놀고 싶은 기업이라면 마이크로소프트나 델처럼 설령 시작 단계에서는 이렇다 할 경영 조직을 갖추지 않았다 해도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 방식에 일정한 규칙성을 부여해야 한다. 때로는 조직 외부로부터 경영진을 초빙해서 신제품 개발 과정을 관리하게끔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성장한 많은 대기업은 결국 극단적인 중앙집권의 한계에 봉착하기도 한다. 직원들에게 작업을 일일이 정확하게 지시하면 이들의 자발적인 동기 부여를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헨리 포드는 노동자들에게 고임금을 지급했지만 그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은 크지 않았다. 하이에크의 예측처럼 중앙집권화는 종종 낭비를 가져온다. 특정 환경에 대한 지식을 가진 노동자들은 환경에 맞는 조정이나 자발적인 선택을 하고 이를 주도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조직은 톰 피터스나 로버트 워터맨이느슨하게 조이는 통제(loosetight control)’라고 지칭한 시스템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즉 중앙집중적 과업과 분권적 과업이 뒤섞인 조직 구조가 등장했다.

 

기계적 의사결정론의 부상

상명하달식 의사 결정 방식은 중앙집중적 통제 방식과 비슷한 영향력을 갖는다. 이런 구조에서 조직의 리더는 상황이나 사례에 따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제품 디자인에 관한 헨리 포드의 결정, 패션지 보그의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의 의사결정을 생각해 보면 쉽다. 리더의 이런 의사결정을 대신해 규정화되고 기계적인 규정이 조직의 통제를 위해 동원되기도 한다. 평가표와 평가 공식이 영업 사원의 재량과 판단을 대신하는 일이 대표적이다.

 

역동적인 사회와 조직은 사례별 의사 결정 방식에 어느 정도 정해진 규칙을 가미한다. 권위와 자율 사이에서 균형을 취할 줄 아는 일과 비슷하다. 보너스를 결정할 때 많은 조직에서는 보통 상관의 평가와 측정 가능한 목표치에 대한 해당 직원의 성과 수치를 함께 고려한다. 법 제도는 판례와 법전에 올라가 있는 법규는 물론 개별 사건에 대한 특정한 사실에 대한 판단에 의거하기 마련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은 매 순간 절체절명의 선택을 해야 하지만 수술실에서조차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검사항목 명세표를 엄격하게 활용하는 일만으로도 실수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정보기술 혁명은 판단이 존재하지 않는 의사 결정에 강력한 경제적 심리적 요인을 부가함으로써 판단과 규정 사이의 세력 판도를 바꿔버렸다. 만일 IBM의 슈퍼 컴퓨터인 딥블루(Deep Blue)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이기고, 다른 슈퍼 컴퓨터인 왓슨이 미국의 인기 퀴즈 프로그램인 제퍼디(Jeopardy)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그 외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컴퓨터가 명백하게 인간의 판단력을 능가하는 우수성을 입증해 보인 사례가 있다. 컴퓨터로 신발이나 옷을 만들면 천이나 가족을 재단할 때 물자 낭비가 적다. 이들은 대규모 트럭 선단 관리, 반도체 디자인을 위한 회로 설계, 정유소 관리 작업에도 효과적이다.

 

수학적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수행하는 이들 컴퓨터의 우수한 능력은 자연법칙, 혹은 기하학이나 연역추론을 따르는 수동적이거나 무생물적인 대상을 통제하는 데 커다란 이점이 있다. 이러한 대상물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목적에 반하거나 이를 저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자동 통제하고자 하는 시도는 좀처럼 성공하기 힘들다. 자연법칙이나 수학적 추론은 다음에 나올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 알고리즘은 기본적으로 통계 모델에 기반한다. 계량 경제학의 측면에서 살펴봐도 통계 모델은 궁극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을 숫자로 간결하게 서술한 단순한 형태에 불과할 뿐이다. 또 단순화를 위한 가정이 지나칠 때가 많기 때문에 통계 모델로는 모델 수립의 근거가 되는 과거 데이터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통계 모델의 결과가 보여주는 건 단순히 널리 영향을 끼치던 경향이거나 반복된 패턴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유 의지와 상상력을 가진 인간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선택을 하는 역동적인 사회에서는 통계 모델로는 신뢰할 만한 예측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은이번에는 다를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낙천주의자들을 비웃는다. 하지만 현대 사회와 경제에서는 늘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통계 모델은 이러한 개별 사안의 예외성을 무시한다. 그저 통 속에 크기와 색상이 다른 공을 넣어둔 채 이번에 나올 공은 그중 하나일 거라고 상정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통계 모델이 지닌 더 큰 함정은 인간의 행동이 소수의 변수에 의거할 뿐이라고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회적으로만 나타나는 개성, 개별적 상황의 풍부한 사례성을 무시하고 있는 통계 모델은 분권형 경제를 움직이는 힘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다. 하이에크는 이미 1945년 특정 상황에서만 들어맞는 정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무능력이야말로 중앙집권형 조직의 유연성을 저해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창업 초기부터 효율적으로 잘 돌아가는 비즈니스 과정을 수립해놓은 기업들조차 이러한 성공의 덫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남들도 우리 회사의 성공 사례를 쉽게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 한 대당 운임을 극대화하는 수익관리 프로그램, 숫자를 이용해 야구단을 관리하는 세이버 매트릭스(마이클 루이스의 책 <머니볼>에 설명)와 같은 도구를 처음 사용할 때는 그 효과가 기가 막히다. 하지만 업계 전반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도구를 사용하면 약효는 점차 떨어진다. 항공기나 체스와 달리 인간은 누가 통제한다고 해서 조용히 따르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행동을 지시하려고 하는 게임 프로그램에 맞춰서 새롭게 학습한다.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기계적 모델의 효과는 수명이 매우 짧다.

 

물론 인간의 행동에 관한 통계 모델의 통제나 데이터 마이닝 프로그램이 전혀 쓸모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통계 모델이나 데이터 마이닝 프로그램은 잘못된 추론이나 고정관념의 오류를 밝혀줄 수 있고 새로운 경험 법칙도 제안해 준다. 단 한 명을 뽑는 자리에 수천 명이 입사 지원을 할 때처럼 선택의 폭이 대단히 큰 상황에서도 유용하다. 통계 모델이나 데이터 마이닝 프로그램을 통해 1차적 선별 과정을 짧은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례별 판단에 대한 대안으로 통계 모델을 사용하거나 통계 패턴에 근거해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일은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통계 모델은 점점 인기를 얻고 있다. 문제는 금융 산업에서 이 통계 모델이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이다. 금융업만큼 통계 모델의 사용이 위험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로봇화된 금융

모험 경제(venturesome economy)에서는 혁신 제품의 개발자와 소비자가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선택을 한다. 이들의 자금 요청에 대한 평가 역시 개별적이고 주관적으로 이뤄진다. 자본가들은 대수법 시험 점수를 매기는 수학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의 에세이를 발전시켜주는 영어 교사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따라서 이들의 역할은 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SAT) 채점을 하는 자동기계와는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금융 분야에서는 자금조달 구조 자체가 점점 더 중앙집권형의 기계적인 구조로 변해가고 있다. 이러한 자금조달 구조는 더 이상 애초 존립 목적인 분권형의 실제 경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판단의 부재는 경제의 첨단 분야에서만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상호교류에 의해 현대 경제의 역동성이 점점 커지면서 금융인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되거나 예측 가능한 규칙에 따라 현상이 일어나는 영역은 이제 거의 없다. 겉으로 보기엔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듯 보이는 산업도 종종 타 분야의 혁신에 의해 타격을 입는다.

 

주택시장의 부침이 적절한 예다. 미국의 GM, 포드, 크라이슬러보다 일본산 자동차가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미국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의 집값이 폭락했다. 2003 98000달러에 달했던 디트로이트의 평균 주택가격은 2009 10 15000달러로 주저앉았다. 이에 따라 과거 주택담보대출 부도율에 기초해 계산됐던 이 지역의 주택담보대출 부도 예상치는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만큼 현실과 동떨어졌다.

 

기존의 대출 모델은 사례별 판단에 의거해 만들어졌다. 주택 구입을 원하는 사람들은 보통은 그간 거래를 해왔던 거주지 은행에 가서 대출을 신청하는 게 관행이었다. 은행에서는 개별 대출 신청 건에 대해서 대출 신청자, 신청자의 직장, 보유 부동산, 신청 지역의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대출 허가 여부를 판단했다. 물론 은행에서는 집값의 과거 변동 상황, 대출 신청자의 과거 대출 기록, 대출자와 유사한 상황에 있는 개인의 대출 기록 등에 대해서도 면밀히 살펴봤을 것이다.

 

그러나 은행이 제대로 일을 하려면 미래 지향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능력도 지녀야 한다. 즉 앞으로 벌어질 미래가 과연 어느 정도나 지나온 과거와 유사할지 적절하게 판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출 신청자와의 대화와 관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다. 은행은 대출 신청자와 무릎을 맞대고 대화를 나눠 대출 신청자의 진정한 의도와 의지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 대출이 실행된 이후에도 대출자와 긴밀한 연락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필요한 경우 대출 조건 조정과 관련해서 즉각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중앙집권형의 자동화된 금융 시스템은 기존 모델을 중앙 무대에서 변방으로 몰아냈다. 은행의 대출 심사는 주택담보대출 중개업체가 대신했다. 주택시장이 최고의 활황세를 누린 2004년 당시 주택담보대출 중개업체 수는 무려 53000여 개에 달했다. 여기에서 근무하는 직원 수도 418700명이었다. 미국 전체 주택관련대출의 68%가 이들의 손을 거쳐 실행됐다. 바꿔 말하면 실제 대출 기관에 의해 발생된 대출은 전체 대출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신용 창출 과정에서 대출중개업체의 주 역할은 대출 신청 서류 작성을 보조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주택담보대출 신용도와 관련해 사례별로 개별적 판단을 내리는 대출중개업체는 거의 없다. 사람들이 대출을 신청하면 이들은 극소수의 기가 막히게 머리가 좋은 금융가들이 고안해낸 복잡한 모델을 활용해서 신청을 허가하거나 거부할 뿐이다. 옵션 ARM(중간 이상의 신용자를 대상으로 원리금 상환방식을 차입자가 직접 선택하게 하는 대출)이라는 새로운 주택담보대출 상품을 개발해내기까지 한다. 이 복잡한 모델은 실제 현장에서의 개별적이거나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

 

즉 금융회사의 대출은 더 이상 해당 회사의 자체 예금이나 자본 기반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일부 금융회사들은 실제로 많은 돈을 보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출 시장에서 상당한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69년 단 2명으로 출발한 미국 모기지업체 컨트리와이드 파이낸셜은 공중분해된 2007년 당시 미국 전역에 500여 개 지점을 두고 있었다. 당시 컨트리와이드가 발행한 모기지 건수는 미국 전체 주택담보대출의 20%를 차지했다.

 

하지만 컨트리와이드도 민관 융합형의 미국 최대 주택담보대출 회사인 페니매와 프레디맥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미 재무부가 이들 페니매와 프레디맥을 인수한 2008년 당시 페니매와 프레디맥이 보유하거나 보증을 선 모기지는 미국 전체에서 유통되던 모기지 12조 달러의 절반에 달했다. 이후에도 이들의 시장점유율은 떨어질 줄 모른다.

 

유동화된 모기지 금융상품을 구입한 투자자들 역시 신용도에 관한 사례별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페니매 또는 프레디맥의 대출 서류를 구매한 측에서는 해당 모기지가 부도를 낼 위험에 대해 판단한 적이 없다. 심지어 유동화 증권의 위험성에 대한 안전 장치가 없었을 때도 개별 모기지에 대한 신용도를 무시하고 관련 상품을 사들였다. 이들이 기댄 건 모기지를 유동화한 리먼 브러더스, 골드만 삭스, 시티 그룹 등 10여 개 투자 은행과이들 유동화 증권의 안전성을 보증한 3대 신용평가회사 등이었다.

 

인간의 주체적 판단 배제는 대량 생산된 파생금융상품이 극소수의 대형 기관에 빨려들어 가게 하는 데 일조했다. 결국 이들 기관의 경영진과 규제 당국이 통제하지 못할 정도의 조직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위험을 초래했다.(‘기계화된 파생상품참조)

 

부작용 금융의 자동화가 낳은 긍정적인 결과물은 거의 없을 정도다. 사례별로 정밀하게 위험을 검토하는 관행이 사라지면서 실제 경제 상황에서는 자원의 분배가 많이 왜곡됐다. 최근의 주택가격 거품에서 보듯 적정한 평가절차(due diligence) 없이 무모하게 대출자에게 돈을 빌려준 대출회사들은 신중한 주택구매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집값 상승을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

 

거래 당사자와의 밀접한 관계 대신 독립적인 기관 대 기관의 계약이 등장함으로써 대출 조건의 조정기능은 근본적으로 훼손됐다. 아무리 계약서를 잘 작성한다 해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돌발 상황을 예측할 수는 없다. 특히 유동화된 대출은 향후 돌발 상황에 대한 지속적인 조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대출 조건에 관한 재협상 자체가 너무 어렵기에 대출자와 대출 기관 모두 애초에 설정한 거래 조건을 무조건 고수해야 한다. 때문에 최근의 연구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유동화된 모기지는 대출자가 원리금 상환에 실패해 압류를 당할 확률이 은행이 보유한 모기지보다 훨씬 높다.

기계화된 파생상품
기계화된 방법을 통해 위험한 투기 거래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하지만 이는 위험 공유와 위험 관리의 혁신 방안이라고 소개됐다. 금융회사 창구에서 판매된 파생상품의 규모는 2000년 97조 달러에서 2008년 중반 684조 달러로 6배 이상 증가했다. 금융위기를 불러오고 사태를 악화시킨 주범이었다. 부실 채권에 대한 보험 파생상품인 신용부도스와프(CDS; credit default swap)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대량 구매자에게 안전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주입해 투기를 부추겼다. 결국 서브프라임 시장의 비정상적인 성장과 파멸의 주범이 됐다. CDS는 레버리지가 높고 불투명한 투기거래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금융기관이 대규모의 손실을 볼 거라는 공포가 확산됐다. 이는 2008년 가을의 신용 시장 경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파생상품은 사실 수세기 전부터 존재했다. 때로는 경제적인 목적에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파생상품 시장의 급성장은 위험에 대한 기계적이고 잘못된 접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통적인 위험관리의 관점에서는 수치화하기 어려운 부분을 포함한 여러 측면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개별 상황의 특수성도 고려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개별 상황에 따른 위험 요인을 분산할 수 있으며, 위험을 과거 데이터의 통계적 분석으로부터 얻어진 숫자 하나로 축약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몇 가지 변수로부터 스톡옵션의 가격을 정하는 모델이 대표적 예다. 핵심 변수는 변동성(volatility), 즉 미래에 주가가 얼마나 크게 변할 것인가의 지표다. 정확한 값은 오로지 신만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거래인들은 과거의 변동성 자료를 끌어와서 자신의 예측을 일부 반영한다. 과거의 자료에 기반해 예측한 주가 변동성은 심하게, 특히 최악의 시기에 틀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 회사나 차주에 대한 현장 분석은 수고가 많이 들고 어렵기 때문에 이 모델은 처음 소개된 1970년대 초반부터 널리 퍼졌다.
 
그 이후 모든 종류의 파생상품 거래에서 소위 공정한 가격을 산출하는 데 같은 방식이 쓰였다. 위험을 단순화하고 일괄적으로 개념화하자 (파생상품의 ‘델타’나 주식의 ‘베타’가 그 예) 거대 금융회사의 CEO들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각각에 대한 상세한 지식 없이도 아주 넓은 분야의 활동을 관리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은행의 개별 대출 심사에 초점을 맞췄던 감독기관마저 이 일괄적 접근을 위험 관리에 적용했다. 그 결과 개별 위험에 대한 정밀 조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의사결정이 소수의 은행, 금융회사 또는 수량적 모델에 의해 중앙집권화돼 있을 때 이들의 실책은 개인과 기업은 물론 경제 전체를 위험에 빠지게 한다. 물론 분권형 금융 체제에도 시스템 전체에 위험을 가져오는 요인은 있다. 개별 금융가들 역시 대세에 따라 주택 대출을 위한 첫 계약금을 낮춰 줌으로써 주택가격 거품에 일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사회 전체의 극단적인 분위기에 휩쓸리기 전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중앙집권형 권위가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사회 전체에 이러한 광기가 횡행하지 않더라도 돌발적이고 돌출적 행동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극소수의 궤도를 이탈한 대출 모델 또는 부하 직원이 감수하고 있는 위험의 크기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몇몇 CEO만으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오래된 철도 및 전기 서비스 채권의 유동화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모기지 및 소비자 대출의 유동화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철도와 공공 서비스에 관한 채권을 발행하는 과정에서는 사례별 판단이 배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유동화를 진행하는 소수의 증권인수회사와 신용평가회사가 앞장 서서 대출자들과 광범위하게 대화를 나눈 후 판단을 내린다. 반면 주택이나 자동차 대출의 유동화 과정에서는 대출자의 상황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조사하는 작업이 뒤따르지 않는다. 대출자의 신용에 대한 획일적인 의사 결정을 통해 대출 발행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대출 발생 비용이 낮다고 해도 상환 능력이 없는 대출자에 대한 대출을 환영할 사람은 없다. 소비자 대출을 대량 양산하는 일은 소비자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과도한 대출 양산이 가져올 문제는 대출자는 물론 채권자와 사회 전체에 끔찍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미국 의회와 규제당국은 직접 나서 금융위기 해소에 열중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유동화 관행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제대로 평가하지는 않는 듯하다. 유동화 관행이 과연 기존 은행 대출을 넘어서고 있는지, 그랬다면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의회와 규제 당국은 유동화 관행을 금융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일에만 전력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금융위기가 안정세를 보이고 있는 측면도 있다. 은행은 유동화된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5%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새로운 법도 마련됐다. 사면초가에 빠진 신용평가회사는 평가 모델을 개선하고 투명성을 제고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책 입안자들은대출자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검토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산으로만 처리된 신용 점수에 의해 주택 구매자들과 소비자들에게 발행된 대출이 왜 유동화 및 평가 대상이 돼야 하는가라는 근본 문제에는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필자는 유동화의 종류와 정도에 대한 결정 권한을 의회나 규제 당국이 가져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니다. 파생금융상품의 대량 생산을 금지하거나 이들에 대한 밀착 감시 역시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전면적 금지가 제대로 작동하는 법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는 모호한 법규는 규제 기관, 로비스트, 변호사들의 업무만 늘려줄 뿐이다.

 

때문에 금융 개혁의 중심은 이들 주체의 판단력을 되살려 주는 데 있어야 한다. 인간이 판단력을 상실했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주체에게 말이다. 그 대표 주자는 바로 은행이다.(‘금융을 되살리는 길참조)

금융을 되살리는 길
거래 기록 의무를 강화하는 일은 답이 될 수 없다. 그보다 은행들이 사람의 판단 없이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를 막아야 한다. 그들의 무모함은 우리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나는 전통적인 방식, 즉 은행이 차주에 대해 잘 아는 방식의 은행업이 회복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려면 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개인과 비금융기관에 돈을 빌려주는 일과 간단한 헤지 거래 외에는 금지해야 한다. 리스크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는 현장에서 발로 뛰어야 한다. 은행의 대출 및 헤지 거래의 표준은 은행과 감독 기관이 감독관리할 수 있는지의 여부로 해야 한다. 금융 관련 박사학위 소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달리 말하면 ‘신중한 대출주의 원칙’, 즉 대출의 리스크가 자기 돈을 빌려주더라도 감당할 리스크인지의 여부다.
 
이 원칙은 은행이라는 이름을 쓰든 안 쓰든 일반인으로부터 단기 예금을 받는 곳이라면 어디든 적용돼야 한다. 그 외 투자은행, 헤지펀드, 신용조합 등의 다른 곳은 추가 감독 없이 최대한 혁신적인 투기성 운용을 해도 좋다. 하지만 그들은 감독을 받는 은행과 거래하거나 그들의 채권을 담보해선 안 된다. (유동성이 높고 우량한 담보가 있다면 예외가 가능하다.) 부채담보부증권(CDO)을 인수하거나 CDO를 담보로 대출을 하는 것, 유동화 대상의 대출을 묶어놓은 상품에 자금을 제공하는 일도 금지해야 한다.
 
기계화된 금융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이 위기에 빠지는 최근 몇 년의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
 

균형을 잡아주는 조치

실리콘밸리의 석학 폴 사포는 최근 이런 말을 했다.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라. 혁신은 엘리트의 활동이다.” 그렇지만 사포의 지적은 틀린 듯하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라는 걸출한 제품의 개발을 지휘해낸 사람이 스티브 잡스인지는 몰라도 애플 제품이 성공하기까지는 애플과 애플의 광범위한 협력업체에 고용된 수천 명의 엔지니어, 디자이너, 마케터, 저작권 전문 변호사, 수십만 개의 어플리케이션과 관련 소프트웨어의 개발자들이 필요했다. 신제품을 기꺼이 사용하려는 모험 정신이 투철한 수백만 명의 소비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현대 경제는 변화 자체를 하나의 일상처럼 언제 어디서나 꾸준히 발생하는 현상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 대다수는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갖고 있다. 현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도 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신이 만드는 제품이 감자튀김이든 최첨단 반도체이든 앞으로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바짝 긴장해야 한다. 이들에게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가, 규제 당국, 이들의 제품을 소비하는 고객 역시 예외는 아니다.

 

판단력과 상상력을 활용하는 기회가 충분히 제공됨으로써 위대한 도약을 성취하는 순간, 다시 중앙집권형 통제의 필요성이 생긴다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정부기관이나 민간 조직의 권위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약한 상황은 독립 자영농으로 이뤄진 미국 독립운동 시기의 제퍼슨식 사회 정도에 불과하다. 오늘날처럼 훨씬 복잡하고 대규모 활동이 이뤄지는 경제 체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는 통제를 유지할 때 이를 인간의 권위로 할지, 컴퓨터 모델에 의존할지에 대한 결정이다. 물론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폭넓은 가이드라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컴퓨터에 의한 통제는 물리적으로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시킬 수 있고 상황에 대한 변수(제품 포장 내의 온도나 습도 조절 등)를 최소화할 수 있는 무생물적 제품이나 과정에서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때 측정 가능한 결과치에서 얻은 피드백을 의사 결정 알고리즘을 조정하고 개선하는 데 지속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

 

체스판 위에서의 조합처럼 산출 가능한 경우의 수가 대단히 크면서도(이러한 엄청난 경우의 수야말로 컴퓨터의 이점을 적극 살리는 기회다) 예외 없이 일정한 규칙에 따르고 있을 때는 컴퓨터 통제가 유용하다. 반대로 외부 환경과의 단절이 대단히 어렵고 결과를 측정하기 모호하며 가능성의 한도가 없을 때는 사람의 판단이 더 유리하다.

 

가장 큰 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적정선의 판단인가라는 문제 자체가 또 다른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라는 점이다. 우리는 중앙집권형 통제가 이루어지는 분야에서 현명하게 균형을 지켜내는 법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과학적 관리 기법, 시간과 동작 연구 전문가, 기업 경영자와 위원회의 지혜라고 해서 무턱대고 신뢰해선 안 된다. 그러나 일정한 질서와 규칙을 위해서는 조직의 상관이나 법규에도 의존해야 한다.

 

계량경제학의 블랙박스 모델은 인간의 판단과 쉽게 섞이지 않는다. 그 지배 원리는 보이지도 않고 실체도 없어서 상대하기 더 어렵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판단력을 계속 우선하고자 한다면, 수량 모델에 굴복하고 끌려가는 대신 이를 통제하고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번역 |박미라 mira_park@naver.com

 

아마르 바이드

 

아마르 바이드(Amar Bhide)는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 스쿨의 슈밋 하이니 교수다. 이번 글은 그의 저서 <판단력의 필요성: 역동적 경제를 위한 현명한 금융(A Call for Judgment: Sensible Finance for a Dynamic Economy, Oxford University Press, 2010)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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