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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묻고 신하가 답하다: 인조 - 정두경

뛰어난 무기보다 뛰어난 장수가 더 중요

김준태 | 314호 (2021년 0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정묘호란을 겪은 인조는 조선이 뛰어난 병기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이유를 묻는 과거 문제를 냈다. 여기서 장원급제한 문신 정두경은 병기가 승리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병기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병사의 능력에 달려 있기에, 그런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지휘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지휘관이 자신의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오로지 전투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임금의 중요한 책무이다.



조선은 문(文)의 나라다. 유학(儒學)이 문무겸전을 강조한다고 해도 몇몇 탁월한 인물만이 그 모범을 보였을 뿐 ‘무(武)’는 뒷전이었다. 문반(동반)과 무반(서반)을 합쳐 ‘양반’이라고 불렀지만 세상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문신, 학자가 쥐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군주들이 국방력 강화에 힘썼던 초기를 제외한다면 조선의 무력은 튼튼하지 못했다. 왜군에게 전 국토를 유린당하고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던 임진왜란, 순식간에 방어망이 뚫려 임금이 강화도로 몽진했던 정묘호란,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병자호란 등은 조선의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629년(인조 7년)에 치러진 별시문과의 책문(策問)에는 이와 같은 현실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엿보인다. 인조는 “군사에 관한 일을 몰라서는 참된 유학자가 될 수가 없다”며 국방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2년 전 정묘호란에서 후금의 군대에게 처참히 무너진 경험, 그리고 후금의 움직임이 여전히 심상치 않다는 우려가 위기의식을 키운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왕이 묻는다. 병가(兵家)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데는 각각의 장기(長技)가 있다. 자신의 장기를 가지고 상대방의 단기(短技)와 맞서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 중략 …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적과 마주하고 있어서 싸우고 지키는 방책을 평소부터 강구해 놓았다. 하여 성지(城池)가 깊고 단단하며 기계(器械)는 정밀하고 날카로운 편이다. 그런데도 임진년(1592)의 난리에는 모두 함락돼 나라가 뒤엎어졌으며 정묘년(1627)의 난리에는 오랑캐의 군마가 나라 깊숙이 쳐들어왔다. 이는 장기를 제대로 쓰지 못해 그러한 것인가? 강한 활과 건장한 말, 화포(火砲)와 병선(兵船), 갑옷과 방패, 칼과 창 등 오랑캐들이 장기로 삼는 것들을 우리나라도 가지고 있다. 한데 오랑캐를 제압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기예(技藝) 외에 별도로 승리를 쟁취하는 요체가 있는 것인가?”

『손자병법』에 ‘피실격허(避實擊虛)’1 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적의 단점을 최대한 키우되 나의 단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나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되 적의 장점을 무력화하는 것은 그야말로 전쟁의 기본이다. 그리하여 나의 장점(장기)으로 적의 단점(단기)과 대결함으로써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문제는 적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대응하리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장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를 기약할 수는 없다. 조선은 장기를 가졌음에도 오랑캐를 제압하기는커녕 큰 위기를 겪은 바 있다. 따라서 장기 외에 승리하는 데 필요한 요소가 또 있느냐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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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험에서 장원급제한 정두경(鄭斗卿,1597∼1673)은 “싸워서 이기는 방법은 만 가지로 같지 않지만 결국은 우리의 장기로 상대의 단기를 공격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라며 전쟁에서 장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장기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고 본다. 그때그때의 ‘형세’에 부합해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느냐, 아니냐가 장기가 될지 여부를 결정한다. 예컨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정예 중장기병을 보유했다. 개전 초기 이 부대를 이끌고 왜군 저지에 나섰던 신립은 높은 지대에서 활과 화살로 왜적의 조총에 맞서야 한다는 의견을 묵살하고 평야에서 기병 돌격전을 벌였다. 평지에서는 기병이 유리하다는 고전적인 전략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신립이 전투를 벌인 탄금대에는 습지가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탁 트여 있는 만큼 적의 조총에 피격되기도 쉬웠다. 습지와 조총이라는 형세에서는 ‘평지-기병전’이 더 이상 장기일 수 없었던 것이다. 정두경이 ‘장기가 이기고 단기가 진다’라고 말하지 않고 “유리한 것이 이기고 불리한 것이 진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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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태akademie@skku.edu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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