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낙양에서 북경까지

얻고 싶은 사람 있다면 밀지 말고 당겨라

안동섭 | 278호 (2019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피터 팬의 모험기 정도로 흔히 생각하는 『피터 팬』의 원작 『피터와 웬디』에서는 웬디의 사춘기와 ‘숙녀로의 성장’이 굉장히 중요한 스토리다. 그의 어머니 미세스 달링은 ‘그윽한 매력’의 소유자로 웬디가 감히 따라잡기 힘든 ‘성숙함’과 ‘매력’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모든 스토리의 ‘최강 캐릭터’는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매력’의 소유자들이다. 리더든, 기업이든 ‘밀어붙일 생각’을 하기보다 매력으로 ‘당기는’ 전략을 세워보는 건 어떨까.


디즈니사(社)가 영화화하면 모든 동화가 바뀐다. 예컨대, 알라딘은 더이상 중국인이 아니며 인어공주는 더이상 물거품이 돼 사라지지 않는다. 디즈니가 초록색 옷을 입은 소년의 모험 활극으로 재탄생시키기 전까지 피터는 『피터 팬』의 단독 주인공이 아니었다. J. M. 배리(J. M. Barrie, 1860∼1937) 경의 원작은 웬디가 소녀에서 숙녀로 넘어가는 그 전환의 순간을, 어느 여름밤에 불쑥 찾아온 소녀의 사춘기를 다룬 성장소설에 가깝다.

즉, 부모님도 모르게 웬디의 침실로 슬그머니 침입하는 피터 팬은 웬디에게 찾아온 사춘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 그래서 그런지 원작에는 (당시 영국을 기준으로) 숙녀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비유가 많다. 웬디의 어머니인 미세스 달링(Mrs. Darling)을 원작자가 어떻게 형용하는지 살펴보자.



그녀의 로맨틱한 마음은 마치 신비한 동방에서 온 작은 상자들 같았다. 한 상자 안에 다른 상자가 있어서 당신이 몇 개를 열든 간에 언제나 또 다른 상자가 그 속에 있었다. 그녀의 달콤하고 짓궂은 입가에는 ‘키스’가 하나 있었다. 너무도 명백히 입가의 오른편에 있었지만 웬디는 그것을 결코 가질 수 없었다. (Her romantic mind was like the tiny boxes, one within the other, that come from the puzzling East, however many you discover there is always one more; and her sweet mocking mouth had one kiss on it that Wendy could never get, though there it was, perfectly conspicuous in the right-hand corner.) 1



미세스 달링은 매력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그녀의 매력은 백주대낮처럼 명백하면서도(‘키스’) 동시에 영원한 어둠처럼 감춰져 있다(상자). 그래서 웬디는 그것을 눈앞에 두고도 결코 흉내 내지 못한다. 마치 누구나 맛집에 가서 비밀의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도 그 맛을 재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상자와 ‘키스’는 둘인 것 같지만 하나다. 미세스 달링의 매력은 무궁(無窮)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상자로부터 ‘키스’라는 형태로 피어난다. 비밀의 음식이 비전의 레서피로부터 피어나는 것과 같다. 낙양사람 정이(程頤, 1033∼1107)는 그녀를 친견하기라도 한 듯 “드러난 것과 감추어진 것 사이에 간격이 없다(顯微無間)”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2



비결이 폭로된 맛집은 대개 매력을 잃고 손님을 잃는다. 알 수 있는 것은 신비하지 않고 신비하지 않으면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파도 파도 끝이 없어서 점차 다가갈 수야 있을지언정 끝내 완벽하게 알 수는 없는 존재만이 신비하고, 신비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그녀의 남편인 미스터 달링(Mr. Darling)은 바로 이러한 매력에 사로잡힌 포로다. 그는 미세스 달링과 결혼함으로써 그녀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그는 ‘키스’를 얻으려고 버둥거렸으나 실패했고, ‘키스’의 뿌리인 상자에 대해서는 아예 감도 잡지 못했다.

사진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녀 마음속 가장 안쪽에 있는 상자와 ‘키스’는 아니었다. 그는 그 상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키스’에 대해서도 결국 포기해버렸다. 웬디는 나폴레옹이라면 그것을 얻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엔 그조차도 한참 시도하다 버럭 짜증을 내며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을 것 같다. (He got all of her, except the innermost box and the kiss. He never knew about the box, and in time he gave up trying for the kiss. Wendy thought Napoleon could have got it, but I can picture him trying, and then going off in a passion, slamming the door.) 3


고대 희랍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제우스에게 패배한 거인들이 갇힌 명계(冥界) 타르타로스를 “거대한 구렁텅이(카스마, χάσμα)” 라고 불렀다. 어찌나 깊은지 그곳에 떨어지면 1년 동안 낙하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고 한다. 4

상상해보자. 지표면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윤곽이 분명하지만 햇빛이 닿지 않는 저 깊은 곳은 어둡고 흐려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떨어지면 곧바로 하데스의 왕국으로 직행할 터이지만 그러면서도 그 아득함이 아름다워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지표면의 파열과 그것을 쳐다볼 때 품게 되는 이런저런 연상들을 가리키던 말인 ‘카스마’는 영어 단어 ‘틈(chasm)’의 어원이다. 다 알면 다 예상이 되고, 다 예상되면 지루하다. 지루한 것은 매력이 없다. 미세스 달링의 매력이 무한한 까닭은 그것이 무한히 펼쳐지는 상자나 무한히 깊은 카스마와 같아서 이성과 계몽의 상징인 저 위대한 나폴레옹조차도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천자문(千字文)』의 첫 네 글자는 ‘하늘 천(天) 따 지(地) 가물(검을) 현(玄) 누를 황(黃)’이다. 땅은 누르고 하늘은 가물다. 약 2000년 전에 편찬된 중국 최초의 자전(字典)인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이 ‘현(玄)’자를 ‘그윽하고 아득하다(幽遠)’라고 풀었다. 백주대낮의 하늘이 어떻게 그윽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우신 분은 밤하늘을 떠올려보자. 별빛 사이로 펼쳐진 검은 하늘(玄)은 땅속 깊이 이어져 끝이 없는 검은 틈(카스마)을 닮았다. 아득해 포착하기 어렵고, 그래서 무어라 이름하기 어렵고, 그래서 신비하고, 따라서 매력적이다. 지표면에 난 깊은 틈이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아 무서우면서도 자꾸만 흘끔거리던 고대 희랍의 소년처럼, 젊은 필자는 십수 년 전 강원도의 한 천문대 주차장에 드러누워서 검은 밤하늘을 기약 없이 바라본 적이 있다. 그렇게 하늘 위에 펼쳐진 심연(深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대로 빨려 들어가 피아(彼我)의 분별 없이 영원히 온 우주와 한 몸이 될 것만 같은(玄同) 5 벅찬 기분이 들었다. 동행했던 선배가 “추운데 이제 그만 가자”라며 그때 나의 몸을 두드려주지 않았더라면 필자는 어쩌면 그대로 견우성(牽牛星)이 돼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고전을 읽는 데 취미가 없다 하더라도 간혹 신문지상이나 방송에서 소개해준 덕분에 노자(老子)가 썼다는 『도덕경(道德經)』의 제1장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이 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난다. “그윽하고 더욱 아득해 모든 오묘함과 아름다움이 거기에서 나온다(玄之又玄, 衆妙之門).” 그렇다. 도가 신비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까닭은 그것을 포착해 이름하고 형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도덕경 첫 장은 미세스 달링의 매력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각주처럼 보인다. 나폴레옹조차도 찾아서 이름할 수 없었던 내면의 상자는 밤하늘처럼 깊어서 모든 오묘함과 아름다움과 ‘키스’가 거기에서 나온다.

먼 옛날 중국의 한(漢)나라가 몰락해가던 때에 오늘날 허베이(河北)성 인근의 작은 마을에는 돗자리를 짜서 밥벌이를 하던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이 친구의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작은 상자들이 있었고, 유달리 컸던 귓불의 잘 보이는 자리에는 작은 ‘키스’가 있었다. 어찌나 매력적이었는지 제발 밑에서 아무 일이나 하게 해달라고 찾아오는 영웅호걸이 줄을 이었다. 성은 유(劉), 이름은 비(備), 자는 현덕(玄德)이었는데, 현(玄)이라는 한 글자가 과연 자신의 캐릭터에 꼭 들어맞았다. 6



일본 코에이사(社)는 1980년대 중반에 발표한 삼국지 게임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수십 년간 십수 편의 후속작을 내놓는 동안 결코 바꾸지 않은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게임상에서 무력치가 가장 높은 이는 여포요, 지력은 제갈량이며, 매력은 유비다. 그윽한 매력을 가진 군주는 나라를 경영할 때 수고롭지 않다. 굳이 찾아서 부르지 않아도 조자룡이 와서 같이 일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실종됐던 관우도 조조가 약속한 부귀공명을 마다하고 연어처럼 집을 찾아 돌아온다. 공명은 과연 똑똑해서 그런지 유현덕의 매력에 완강히 저항하지만, 그래도 세 번쯤 찍으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홀라당 넘어온다. 일단 넘어오고 나면 차라리 단기필마로 백만대군을 대적할지언정 결코 우리 대장님, 우리 형님을 배신하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도덕경』은 이미 한(漢)나라 당시에 위정자들의 정치비급으로 인기를 얻었다. 저 위대한 도(道)는 현묘(玄妙)한 매력만으로 천지만물이 알아서 움직이게 만드니 이 매력을 황제가 본받을 수만 있다면 그에게 감화돼 모인 유능한 인재가 적절히 제국을 운영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매력통치는 어쩐지 전통시대의 여성들에게 기대됐던바 남성들을 움직이던 방식, 배리 경이 묘사한바 미세스 달링이 미스터 달링을 움직이던 방식과 닮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도덕경』도 (당시 기준으로) 여성성을 이상적인 품덕으로 묘사한다. 공격이 들어오면 유도선수처럼 흘려버려라, 높은 데서 누르지 말고 낮은 데서 기다려라, 화내지 말고 달래주어라. 말하자면 무력으로 밀어붙일 때보다 매력으로 당길 때 일이 더 잘 풀린다는 것이다.

‘재벌가 상속녀’인 조조는 가난한 남자 주인공 관우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를 얻기 위해 열정적으로 달려들어 집도 주고, 취직도 시켜주고, 훈장도 달아주고, 최고급 수제 스포츠카도 선물해줬지만 관우는 그런 그녀의 적극성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그는 오히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돗자리 ‘알바’로 연명하는 유비의 그윽한 눈동자와 귓불의 그 작은 ‘키스’를 잊지 못한다. 조조가 관우에게 매일 선물을 퍼붓는 동안 유비가 보낸 것은 고작 손편지 한 통이었다. 하지만 관우는 그것을 읽자마자 마음속에 사랑의 불길이 일어나 즉시 조조가 준 스포츠카를 몰고 그녀에게 달려간다. 여러분도 얻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카스마처럼, 유현덕처럼, 강원도의 밤하늘처럼, 미세스 달링처럼, 저 그윽한 도(道)처럼, 밀지 말고 당길 궁리를 해보자. 세상 사는 데 매력만큼 좋은 능력치가 또 없다.


필자소개 안동섭 인문학자 dongsob.ahn@univ.ox.ac.uk
필자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중국 남송시대를 연구한 논문으로 동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이의 거경에 대한 연구’ ‘Contested Connection: the 12th Century Debate on Zhou Dunyi’s Hometown’ 등 다수 논문을 국내외 유력 학술지에 게재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