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
구성원들의 출신과 성향이 점점 다양해지면서 의사소통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이 조직 문화 전체를 해칠 위험이 커지고 있다. 한쪽 편만 들지 않고 구성원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최선의 의사결정을 하는 리더 역할이 중요하다. 조선시대 왕들도 정파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다. 숙종은 한 붕당에서 다른 붕당으로 주도 세력을 전면 교체하는 ‘환국’ 정치를 실시하면서 정파 간 갈등을 극단적인 대립 구도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일방적 편들기와 과도한 탄압으로 점철된 세 번의 환국은 당파 간 감정 갈등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붕당 정치가 혁신적인 타협의 정치로 발전할 기회를 빼앗았다.
편집자주
조선에서 왕이 한 말과 행동은 거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록 중 비즈니스 리더들이 특히 주목해봐야 할 것은 바로 어떤 정책이 발의되고 토론돼 결정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왕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이끄는 리더들 역시 고민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해당 정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면밀히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정통한 연구자인 김준태 작가가 연재하는 ‘Case Study 朝鮮’에서 현대 비즈니스에 주는 교훈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허적(숙종 6년 5월11일), 윤휴(숙종 6년 5월20일), 송시열(숙종 15년 6월3일), 김수항(숙종 15년 윤3월 28일). 숙종 때 목숨을 잃은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영수들로 괄호 안의 날짜는 사약을 받았다고 기록된 날이다. 이들이 어떤 사람이었느냐, 과오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이처럼 각 붕당을 대표하는 인물이 연이어 죽임을 당한 것은 그때껏 없던 일이다.
그러면 먼저 허적과 윤휴가 죽은 1680년(숙종 6년)으로 가보자. 3월28일, 공조판서 유혁연과 광성 부원군 김만기, 포도대장 신여철이 임금의 호출을 받았다. 세 사람이 모두 모이자 숙종은 “재앙과 이변이 계속 나타나고 불안한 의심이 생겨나며 거짓말이 떠들썩하므로” 한양과 궁궐을 호위하는 군영(軍營)의 지휘관을 교체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유혁연이 겸임하고 있던 훈련대장은 김만기에게, 총융사는 신여철에게 맡겼다. “유혁연은 삼조(三朝: 인조, 효종, 현종)를 섬긴 장수이므로 내가 매우 의지하고 중히 여기지만 20년이나 오랫동안 이 임무를 맡아온 데다 근력이 이미 쇠했으니 우선 해임하고자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김만기와 신여철에게 즉시 임무를 수행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볼 때 문책성 인사에 가까웠다. 더욱이 유혁연은 남인을 대표하는 무장이고 신여철은 서인을 대표하는 무장이었다. 김만기는 서인의 중심인물로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였다. 즉, 이날의 인사이동은 임금이 남인에게 주었던 병권을 거둬들여 서인에게 준 것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의 시발점이 된다.
숙종은 이어서 귀양을 가 있던 서인의 영수, 전 좌의정 김수항을 복권시켰고 남인 대신 이조판서 이원정을 삭탈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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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3월30일에는 의금부,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의 주요 포스트를 서인계 신료로 교체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남인들이 사직을 청하니 이를 모두 수리했고 마침내 4월3일, 서인으로만 구성된 조정을 출범시킨다. 숙종은 이 과정을 신속하지만 매우 치밀하게 진행시켰는데 1) 병권을 빼앗아 남인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하고 → 2) 서인의 영수를 복권시켜 정국을 전환하겠다는 시그널을 보냈으며 → 3) 이조판서를 바꿈으로써 인사권을 장악하고 → 4) 의금부와 사헌부, 사간원을 교체해 남인을 탄핵하고 수사, 처벌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뒤 → 5) 조정을 전면 교체하는 환국을 단행했다. 이와 같은 숙종의 조치에 남인 정권은 손써볼 새도 없이 무너져버린다.
<실록>에 따르면 남인에서 서인으로의 정권 교체를 촉발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허견의 옥사’였다.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은 평소 참람하고 무도한 행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가 복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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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결탁해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병을 양성하고 체부(體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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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통해 병력을 동원하려 했는데 체부는 남인들 건의에 따라 설치된 것인 데다가 체부의 책임자인 도체찰사가 바로 영의정 허적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돼 있는 남인 대신들에게도 역모 혐의가 씌워졌다. 허적과 함께 체부의 설치를 처음 주장했던 윤휴가 사사됐으며 유혁연도 사약을 받았다. 이밖에도 이원정이 장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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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등 많은 남인 신하들이 목숨을 잃는다.
이후 9년이 지난 1689년(숙종 15년), 조정에는 다시 한번 폭풍우가 몰아친다. 이번에는 반대로 서인이 축출당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벌어졌다. 경신환국을 초래한 직접적 원인이 ‘허견의 옥사’였다면 기사환국을 가져온 발단은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였는데, 1688년 10월 희빈 장씨가 아들(훗날 경종)을 낳자 숙종은 곧바로 ‘원자’의 호칭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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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란 임금의 맏아들을 부르는 말로 통상 적장자가 세자에 책봉되기 전까지 갖는 칭호이다.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정했다는 것은 곧 이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2월1일,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원자정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상소를 올린다. “(송나라) 철종은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6
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해 태자로 삼은 것”은 “제왕의 거조는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며 “여러 신하들이 정후(正后, 왕후)께 경사가 있을 때를 거론하는 것은 사전에 주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라고 밝힌다.7
아직 나이가 젊은 인현왕후가 적자를 출산할 가능성이 충분하니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인들 다수가 공유하던 생각이었는데 적장자를 원자로 삼는 것이 예법인 데다 희빈 장씨가 남인계 인물이고 이미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남인세력이 결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우려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