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까칠하게 밀어붙이는 ‘미스터 대동법’ 김육 왕은 그의 현실정책능력에 반했다

177호 (2015년 5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사, 인문학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가 채 복구되기도 전에 병자호란까지 겪고 나자 조선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백성의 삶은 피폐했고 조정은 무능했다. 개혁을 부르짖던 이들은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됐다. 재상 김육은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임금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옳다고 믿는 것이라면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앞만 보고 나갔다. 그는현실적인 정책과 결과를 중시했고, 이 과정에서대동법을 적극 추진했으며, 강한 의지로 밀어붙였다. 지나치게 고집스럽고 타협할 줄 모르던 단점에 유의하기만 한다면 현대 기업의 2인자, 특히 COO(Chief Operating Officer)들에게 김육의 삶은 큰 교훈을 준다. 그는자신만이 가진 능력과 현실적 대안 제시를 통해대체 불가능한 2인자가 됐다. CEO와 역할이 미묘하게 겹치면서 자칫 불안한 위치에 있을 수 있는 COO 등의 2인자들은, 그의 현실적 정책제안 능력과 추진력이 조직(국가)에 도움이 됐던 방식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옛 역사를 보고픈 마음이 없는 건 볼 때마다 매번 눈물이 흘러서네. 군자는 언제나 불운하고 재앙을 겪는데 소인배는 다들 원하는 바를 이루는 구려. 성공하나 싶으면 패망이 싹트고, 안정이 되나 싶으면 위태로움이 닥치니 그 옛날 삼대(三代) 이후론 하루도 제대로 다스려진 적이 없었네. 백성은 또 무슨 죄란 말인가! 저 푸른 하늘의 뜻을 알 수가 없으니. 지난 일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오늘날의 일이겠는가!” 김육(金堉)이 남긴관사유감(觀史有感)’이라는 시다.

 

김육이 마주한 현실은 암울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남긴 폐허 속에서 조선은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백성의 삶은 피폐했고 조정은 무능했다. 뼛속까지 곪아드는 환부를 치료하고자 한 사람들이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됐다. 역사라는 소재를 빌렸지만 사실 김육의 이 시는 질식할 것 같은 현실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육은 포기하지 않는다. 절망은 보통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좌절하고 체념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지 않고 분투할 것인가. 김육은 후자였다. 그는 두 전쟁의 참상을 몸으로 겪으며, 직접 농사를 짓고 숯을 구워 팔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다졌다. 먹을 양식이 없어 배를 곯으며, 반드시 안민(安民)을 이루고 말겠다는 열정을 꽃피웠다. 이런 그에게 더 이상 두려울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임금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옳다고 믿는 것이라면 과격하다 할 정도 앞만 보고 나아갔다. 다음 사건은 이러한 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656(효종 7) 825. 평안도 영변 고을에 거센 비바람이 불고 우박이 쏟아졌다. 민가에서는 다행히 아무런 피해도 없었지만 유독 향교 대성전(大成殿)1 이 무너졌다. 안에 모셔져 있던 공자와 맹자의 위패도 크게 손상된다. 이어 이틀 후인 27. 전라 우수사가 진도 앞 바다에서 실시한 수군 훈련 중에 큰 폭우와 풍랑이 일었다. 이날 진도군수를 비롯한 군인 1000여 명이 물에 빠져 죽는다.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대참사였다.

 

일반적으로 재난이 일어나면 임금은 즉각 스스로를 반성하고 책망하는 교서를 발표한다. 민심수습을 위한 다양한 대책들도 마련해 시행한다. 그런데 이때는 달랐다. 효종은 현장 지휘관과 담당 관리만 문책했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김육이 상소를 올렸다.

 

“이번 변고는 역사서에서도 기록된 적이 없는 듣도 보도 못한 막중한 재해입니다. 반드시 크게 경계하고 백성의 마음을 진작시켜야 조금이나마 화란(禍亂)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헌데 조정은 무사안일에 빠져 이전과 전혀 달라지는 바가 없으니 신은 참으로 놀랍고 두렵습니다. 가슴이 아파 눈물이 흐릅니다. … 지금 전하께선 이 사태를 등한히 하시고 그저 우연한 사고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례적인 유시와 대책으로 책임을 모면하시면서 그 죄를 변방의 무부(武夫)에게만 돌리고 계십니다. 정말 이 변고가 하늘의 경고가 아니란 말입니까? … , 전하의 마음을 거스르길 두려워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며 감히 아룁니다. 지금 하늘이 변고를 내리신 것은 인심(人心)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이 성상의 뜻을 떠받드는 일에만 급급하고 정작 백성이 바라는 일에 대해선 성상께서 원치 않으실 거라 외면하니 백성의 마음이 이미 흩어졌는데 어찌 나라가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2

 

 

임금의 무책임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강력히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민생안정을 위해 시급히 처리해야 할 과제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김육의 상소를 본 효종은 깊이 명심하며 반성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3일 후, 몸이 아프다며 돌연 경연을 취소했다. 내의원 도제조를 겸임하고 있었던 김육이 병문안을 하자경이 올린 상소를 보고 염려하고 부끄러워하느라 병이 들어 정신이 어지럽다. 그래서 경연을 정지한 것인데 무엇 하러 병문안을 왔는가라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놀란 김육이 대죄(待罪)를 청하자, “하늘이 움직이면 새와 짐승도 놀랄 줄 알고, 땅이 움직이면 풀과 나무도 빛을 변하는 법인데, 오직 나만이 두려워할 줄 몰랐으니 나는 무지한 이들만도 못한 것이다. 이런 나를 임금으로 섬기고 있으니 신하들 또한 수치스럽고 욕되지 않겠는가. 내가 감히 다시 군림할 뜻이 없는 이유이다. … 하늘이 경고한 것은 나라에 임금다운 임금이 없어서일 것이다. 답답하고 침통한 가운데서도 경들이 있어 다행이다 싶으니 나의 부덕함을 이유로 해이하지 말고 각기 재능을 펼쳐 나라를 보전하도록 하라고 비답을 내렸다.3 항상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임금이 이 정도로 감정적인 대응을 했다는 것은 진노의 정도가 보통이 아님을 보여준다. 다른 신하들 같으면 목숨을 잃을까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육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임금의 병을 초래한 것에 대해선 석고 대죄했지만 상소에 올린 말들을 철회하진 않았다.

 

그러자 효종은 대신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자신은 무능한 임금이니 퇴위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김육의 상소를 옹호하고 임금이 도리에서 벗어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자 그제야 한 걸음 물러난다.4

 

김육과 효종 간의 긴장관계는 이 사건뿐만이 아니었다. 김육은기휘(忌諱, 꺼리거나 두려움)를 피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임금이 언짢아하건, 노여워하건 할 말이 있으면 직언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주로 사직 상소를 활용했는데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 영의정으로 재임할 때마다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렸다. 나이가 너무 많다고 여겨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동법 등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의 성격이 강했다. 그는 몇 년 사이 수십 편의 사직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마다 효종이 수리를 거부하긴 했지만 상당히 언짢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효종은 왜 이런 김육을 내치지 못하고 계속 옆에 뒀을까. 우선, 김육이 현실에 맞는 정책을 입안하고 이를 총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신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조선은 양대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각종 재해가 계속 일어나서 국가재정은 파탄 상태였으며 민생도 매우 열악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해소하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 마련이 요구됐는데 조정의 다른 신하들은 이를 능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유학은 본래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내세운다. 하지만치인보다는 개인의 내면적 도덕성을 함양하는수기에 더 방점을 두는 편이다. 공자는몸가짐을 바르게 한다면 명령하지 않아도 아랫사람들이 행할 것이며, 몸가짐이 바르지 않다면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5 고 하면서 통치자의 도덕적 마음이 현실 정치에서의 성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봤다. 주자도군주의 마음이 바르다면 천하의 그 어떤 일도 바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이 정치의 현실적인 부분을 소홀히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지만 17세기 조선의 대다수 지도층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사대부들은안민을 강조하면서도 그 방법은 오직성의정심(誠意正心)’, 즉 뜻을 정성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통치자의 도덕적 수양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백성을 위한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효종이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고 구체적인 정사(政事)를 처리하는 것은 지엽적인 일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이리도 급박한데 어찌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고 하면서 팔짱만 낀 채 앉아 있을 수가 있는가. 나는 부덕하여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로잡는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선 정사를 통해 잘못된 일들을 해결해 가고자 하니 경들은 구체적인 일들에 대한 보완과제부터 이야기하라6 고 재촉했지만 이와 같은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김육은 여기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모든 일은 실질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7  천하의 일은 실재(實在)일 뿐으로 이름은 실재에서 생기고 실재는 이름에 근본하는 것이다. 실재가 없는데도 이름만 있는 것이 나는 옳은지 모르겠다8 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원칙이고 추구해야 할 이상이더라도 당장의 현실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세상의 학자들이 모두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을 주워 모아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면 천하와 국가가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입으로만 떠든다. 나는 흐리멍덩하고 천박하여 비록 학문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내가 원하는 바는 실제적인 것으로써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부역을 줄여 세금을 적게 거두어야 하니, 나는 헛되이 이상만을 추구하여 형식을 숭상하진 않을 것이다9 라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김육은 다양한 안민 정책을 기획하고 실천했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해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의학서 언해본(諺解, 한문을 한글로 풀이함)을 간행해 백성들이 기근과 질병에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 수차(水車)의 제조와 보급을 활성화해서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켰으며, 비록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화폐 유통을 통해 상업 활동을 촉진하고자 애썼다. 시헌력(時憲曆)을 채택한 일도 주목할 만하다. 시헌력은 서양 역법에 따라 만들어진 달력으로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명나라의 달력보다 훨씬 더 정교했다. 김육은 뇌물을 줘서라도 그 운용 원리를 알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확한 달력은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그는변통10 을 강조했다. 김육은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서 그에 맞게 법과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변통하지 않으면 백성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백성의 삶이 안정되지 못하고, 재난이 끊이지 않는 것은 변통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노력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 변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11 라며변통의 방향을 백성에게 맞췄다. 그는 잘못된 폐단과 관습을 유지하려 들고,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김육의 노력 덕분에 조선은 점차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다. 북벌(北伐)을 거론하게 될 정도로 국부(國富)도 축적한다. 그는 허적, 이시방, 이시백 등 서로 다른 당파 소속의 경제 전문 관료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했는데 이런 김육을 대체할 만한 이는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김육이 계속 중용된 이유는 둘째, 대동법12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육은미스터 대동법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대동법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가 대동법을 처음 입안한 것은 아니지만 법의 시행과 성공에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죽기 하루 전날에도 영의정 정태화에게 편지를 보내호남에서 대동법을 시행하는 일을 힘써 챙겨주길 바란다고 부탁했으며, 대동법과 관련한 전라감사의 상소가 어떻게 처리됐는지를 확인했다. 이런 그를 두고 효종은대동법은 김 영돈녕(김육)이 혼자 스스로 맡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시행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토록 대동법에 집념을 보였을까. 김육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은 몹시 고루한 사람이라 기발한 비책 같은 것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서경>백성들을 감싸주어 보호하라는 말과 <논어>용도를 절약해서 백성을 사랑하라는 말, <중용>여러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라는 말과 <대학>대중의 뜻을 얻으면 나라를 얻는다는 말은 영원토록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부역을 고르게 함으로써 백성을 안정시켜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13 신이 어찌 백성들만 사랑하느라 군비를 충당하고 세금을 거둬들이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생각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나라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백성의 삶을 안정시켜야 합니다라고도 했다.14 백성을 보호하고 아끼는 것은 국가가 최우선으로 실천해야 할 도리이며, 부국강병은 안민(安民)이 선행되면 자연스레 이뤄진다는 것이다. 공납의 폐해를 개선하고, 부세부과 기준을 가구에서 토지면적으로 바꿈으로써 백성의 부담을 크게 줄여주는 대동법은 이러한 그의 생각과 가장 잘 부합하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김육은 이내 큰 반발과 마주해야 했다. 당대 유림으로부터 존경받던 김상헌(金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등이 대동법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김집과는 감정적인 논쟁까지 벌였는데, 이로 인해 오랜 친구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졌다.

 

대동법을 반대하는 논리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양반지주층의 반대였다. 집권의 기반이 되는 양반의 반발은 정권의 안위까지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유(張維)나라에서는 차라리 소민(小民, 일반 백성)의 마음을 잃을지언정 사대부의 마음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라며 대동법에 반대했고15  , 신흠(申欽)대가(大家)와 거족(巨族)이 불편하게 여기며 원망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라며 재고를 요청한 바 있다.16

 

그러나 김육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백성은 원하지만 수령들이 원하지 않아 시행할 수 없다고 하는데수령들이 안하겠다고 해서 수많은 백성이 간절히 바라는 바를 시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17 백성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정책이라면 지배층이 반대한다고 해도 반드시 관철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다행히 대동법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점차 확대돼 갔다. 충청도에서 시범 실시된 대동법이 가시적인 정책 효과를 거두며 백성의 지지를 받았고, 호남지역의 유생들은 호남에서도 대동법을 시행해달라며 상소를 올려왔다. 산림의 거두인 송시열, 우의정 이후원이 지지로 돌아서는 등 대동법에 대한 반대도 크게 줄었다. 대동법이 바꿀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보다 대동법을 잘 알고 있고18 대동법의 시행을 위해 일관되게 헌신해 온 김육은 효종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끝으로, 효종은 김육의 굳은 의지와 추진력을 높이 산다. 대동법을 비롯한 당시의 민생개혁 정책들은 각 계층, 집단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사업이었다. 이익을 침해받는 기득권층의 반발도 거셌다. 정책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야 상반되는 입장들을 조율하고 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결정된 정책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집행해야 한다. 옳다고 믿으면 반대를 개의치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김육은 이 과업을 책임질 수 있는 적임자였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와 같은 면모를 보인 바 있는데 집권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비판한 소위회퇴변척(晦退辨斥)’ 사건을 일으키자 성균관 유생이던 그는 정인홍의 이름을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해버렸다.19 이 일을 주도한 죄로 대과 응시자격이 박탈되자 주저하지 않고 낙향해버린다.20 이후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관직생활을 시작하면서도 그는 맡은 일마다 타협하지 않고 과감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그가 죽은 후 효종은 미루기만 하고 결단하지 못하는 대신들의 행태를 한탄하며확고하여 흐트러짐이 없기가 김육과 같은 사람을 얻고 싶지만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라며 그를 그리워했다.21

 

 

물론 이러한 그의 성격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반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의 정책의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집요할 정도로 매달리면서 적을 만들었다. 그에게는어리석으면서 자기가 옳다고 고집한다22  “자신감이 너무 지나치다23 라는 비판이 쏟아진다. 효종조차 공개석상에서김육의 고집스럽고 막힌 병통은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24 다행히 그의 대의가 옳았고 그가 추진했던 방향이 타당했기 때문에 그의 비타협적인 면모는 일을 성공시키는 강한 추진력으로 작동했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었다면 일을 그르쳤을지도 모른다.

 

이상 김육의 사례는 특히 오늘날 COO(Chief Operating Officer)들에게 시사점을 준다. COO의 역할모델이 김육과 같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최고경영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김육은 분명 불편한 2인자일 것이다. 나이가 많은데다 고집스럽고 타협할 줄도 모른다. 조직 내부의 다양한 노선과 견해들을 조율하고 중재하기는커녕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며 반감을 사기도 한다. 게다가 1인자와의 충돌도 주저하지 않는다. 매끄럽게 설득했다면 더 좋은 효과를 발휘했을 일들도 수위를 신경 쓰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해 1인자의 분노를 사곤 했다. 효종과 같은 CEO가 있어 이를 참고 받아들인다면 모르지만 아마도 그러긴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김육의 단점에 유의하면서 그의 장점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무릇 그 사람이 가지는 힘은 그가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냐에 따라 좌우되는 법이다. 위에서 위임해주는 힘은 준 사람이 거둬 가면 그만이고, 제도에 의해 보장되는 힘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사라진다. 오직 내 안에 내재된 능력,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또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대체될 수 없을 때, 그 힘은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깊이를 갖게 된다.

 

김육은 당대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공동체가 당면한 과제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고,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업무역량도 겸비하고 있었다. 이는 처음부터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와 열정이 쌓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더욱이 그를 비난하는 상소에서조차나라와 백성을 위한 김육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로 공동체를 향한 그의 헌신에 대해서는 그를 싫어했던 사람들조차 이견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COO CFO(Chief Financial Officer) CMO(Chief Marketing Officer)처럼 전문 영역을 가지고 있지 않다. CEO를 보좌해 조직의 사업을 총괄하고 최종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그의 주 업무다. 그러다보니 스탠스가 애매해지기도 한다. CEO와 역할이 중복되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이 일천한 새 임금이나 갓 CEO가 된 오너 후계자를 보좌하기 위해서는 연륜이 있는 재상, COO가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아닐 경우 COO는 단순한 보좌 그 이상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COO는 이름 그대로 조직의 운영책임자다. 그렇다면 조직이 현재 마주하고 있는 핵심 당면 과제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이를 개선 혹은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 구성원들의 현실을 이해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집행부와 다른 관점, 다른 생각을 제시해 의사결정의 질을 높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김육이 주는 교훈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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