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s from Classic - 베토벤과 그의 시대 下
“한때 내가 가장 완벽하다고 인정받았던 청각이, 이제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말았어.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해야 할 때에 위축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몸서리치고 가슴 아픈 일이지…. 내 가장 친한 친구들, 슈밋 박사와 리히노프스키 공(公)에게 가장 미안하고 고맙다고 전해주게. 그리고 너희들(동생 칼과 조카 요한) 중 누군가가 그들에게 받은 선물을 꼭 간직해 주기를.”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보내는 유서
베토벤에게 서른 살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시기였다. 우선 교향곡 3번을 구상하면서 기존 작품과 차별화된 실험을 감행하려던 때였다. 또 친구들(후원자들)의 신의와 후원도 매우 두터워서 그들의 힘을 빌려 여러 독주회와 협연을 하고 권위 있는 연주자로 인정받는 시절이기도 했다. 위의 유서를 쓰기 불과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가장 화려한 젊음을 보내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권위 있는 음악 비평지인 <비엔나 음악 신문(Wien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은 ‘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던 가장 아름다운 콘서트’라며 1800년 4월2일 베토벤이 직접 지휘했던 교향곡 1번 연주를 극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곧 가혹한 운명이 닥쳤다. 명석한 두뇌와 절대음감으로 인정받았던 작곡가가 이유를 알 수 없이 청력을 잃은 것이다. 티니투스(Tinnitus)라고도 알려진 이 질병은 26살이던 1796년부터 베토벤을 괴롭혔다. 처음에는 메니에르 병처럼 귀가 잘 들리지 않거나 이명 현상이 발생하는 듯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대화나 음악 감상도 어려워졌다. 청력 장애가 점점 심해지자 극도로 예민해진 작곡가는 주변 사람들과 자주 다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의 생애를 연구하는 이들은 그가 청력을 잃고 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시작하게 됐다고 평가한다. 유서를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나가게 됐다. 당대 지식인들의 호의에 기생하는 명사가 아니라 당당하게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어느 소설가가 자신의 삶을 ‘시대와의 불화’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베토벤의 삶도 격동의 시대에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밝히는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부터 그를 상징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나타 ‘열정’을 비롯해서 피아노 협주곡 ‘황제’, 교향곡 5번 ‘운명’ 같은 강인하고 장엄한 작품들 역시 이 시기에 나왔다. 시대의 변화를 읽은 베토벤의 새로운 예술적 선언이었다. 절망의 끝에 다다랐던 예술가가 본격적인 자신의 의견(opinion)을 세상에 밝히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고, 그가 지향했던 가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객관적 통찰로 위기를 정면돌파
전략 연구자인 로버트 미첼(Robert Michell)과 그의 동료들은 경영자가 전략적 일관성(consistency)을 갖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메타인지능력(Metacognition)과 환경역동성(Environmental Dynamism)에 대한 인식이라고 지적한다. 지나간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위치와 환경 변화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흔히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는 리더들은 ‘감’이라는 경험적인 요소와 기존의 성공 공식에 의해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환경을 통찰할 수 있는 이들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도 강한 정면 돌파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1
베토벤 역시도 객관적인 성찰이 가능했던 사람이었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돌아온 그는 열정적으로 창작 활동을 재개한다. 구시대의 귀족이었던 친구들이 ‘허락해주는 연주’를 하는 것보다는 ‘자기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이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1802년부터 1813년까지의 베토벤은 교향곡 3번부터 8번에 이르는 굵직한 작품들을 써내려 갔다. 예전에 작곡했던 피아노 소나타 시리즈에 이어 ‘합창 환상곡(Choral Fantasy. Op. 80)’ 같은 실험적인 작품들을 양산해내기도 했다. 1805년 이후부터는 리히노프스키 공을 비롯한 살롱 후원자들에 대한 의존도 역시 점점 줄어갔다. 그의 수입은 점점 후원자들의 프로젝트 일환으로 조성된 기금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출판한 작품의 인세를 중심으로 채워지게 된다. 친구들에게 항상 ‘음악가는 작품을 통해 충분히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며 세상과 직접 소통하며 적극적인 전략을 모색할 것을 강조하던 베토벤이었다. 당대 지식인들이 구호로 외치던 ‘유러피언 정신’을 그는 당당하게 비즈니스 모델로 입증해 냈다.런던과 파리, 그리고 베를린과 비엔나와 같은 굵직한 문화 중심지마다 각각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지적 재산권 규정을 간파하고 국제적인 규모로 작품을 출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2
베토벤은 시대의 변화를 주도 면밀하게 읽어 냈다. 자신의 친구였던 브렌타노나 실러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식인이 자유롭게 의견(opinion)과 문화 코드(cultural code)를 창출하고 대중이 편안하게 공감할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의 가능성에 점점 빠져들게 됐다. 이것은 후원자들과 ‘위대한 천재’의 모습을 논하던 20대와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인간의 자유와 이상이 갖는 가치를 찬양한 교향곡 9번 ‘합창’의 구상 역시 이 무렵부터 진행돼 왔다고 음악사가들은 해석하고 있다.
작곡가에게 음과 선율, 그리고 곡의 구조를 형상화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청력’이 상실돼 간다는 것은 최대의 위기였다. 특히 작곡가가 작품을 생산(production)하는 것뿐만 아니라 후원자와 대중들 앞에서 공개 연주를 하는 것이 일상화된 경제 시스템에서는 다른 신체 부위가 불편하게 된 것보다 더욱 강한 고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자신에게 찾아 온 어두운 운명을 비극적으로 해석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몸보다 더욱 가파른 속도로 변화해 가는 시대의 양상에 주목했다. 흔히 클래식 음악이 낭만주의로 가는 가교가 열렸다고 평가하는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다.
인간관계를 되돌아보다
1803년부터 1810년까지 베토벤은 모든 문화인 중에 가장 바쁜 사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를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데에 한계가 생겼다. 우선 청력 상실로 직접 연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피아노 협주곡 협연을 하다가 망치거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가 소절을 놓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결국 1806년 이후부터 베토벤은 직접 공연에서 작품을 선보이기보다는 ‘곡을 만드는’ 작곡가로서의 역할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그는 이전보다 더욱 깊은 만남을 통해 사람들을 접하고 의견을 공유하려고 애썼다. 뿔처럼 생긴 호른을 보청기처럼 사용해 듣다가 그조차도 시원치 않자 필담을 통해 상대방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게 됐다. 비록 예전처럼 쾌활한 모드로 깔끔한 화술을 구사할 수는 없었지만 작품에 대한 식견과 통찰을 나누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은 많았다. 이제 관계는 예전의 귀족 친구들과 프로젝트를 모색하는 하나의 ‘사건’ 또는 ‘단계’에 머무르기보다는 자아를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주는 ‘과정’으로 인식하게 됐다. 관계를 자산으로 해 대외적인 역량을 쌓는 것 이상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에너지를 갖게 하는 원동력으로 보게 된 것이다. 결국 중장년기가 되면서 베토벤은 관계를 ‘사회학’이 아니라 ‘심리학’의 차원에서 접근하게 된 셈이다.
베토벤보다 20살이 많았던 작곡가이자 건반악기 연주자인 클레멘티(Clementi)와의 만남이 대표적이다. 클레멘티는 자신이 작곡한 작품의 모티브나 조성의 구현 방식을 모듈(Module)화된 방식으로 만들었다. 베토벤 역시 제자들에게 반드시 클레멘티 소나타를 공부하도록 하는가 하면 그에게 직접 권유 받아 ‘피아노 환상곡(op.77)’이나 ‘합창 환상곡(Op.80)’처럼 실험적인 시도를 감행하기도 했다. 또 클레멘티는 예술가인 동시에 런던의 대표적인 출판업자 중 하나였다. 따라서 베토벤의 건반악곡 중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클레멘티 사를 통해 활발하게 영국에서도 유통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추기경과의 인연 또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베토벤은 추기경이 10대 후반의 어린 왕자였던 시기부터 음악교사로서 피아노와 작곡법을 지도했다. 합스부르크 추기경은 베토벤에게 매우 특별했던 제자이자 친구, 때로는 선생님으로 평가받았다. 나폴레옹 군대가 오스트리아 지역으로 진군하자 추기경을 비롯한 왕실 일가는 비엔나를 잠시 떠나야 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자신의 가장 돈독한 친구에게 베토벤은 ‘고별(피아노 소나타 26번)’이라는 곡을 바쳤다. 재미있는 것은 그는 그가 바쳤던 대부분의 곡들을 헌정자의 실제 연주로 듣고자 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대공(Archduke)’이라는 피아노 3중주곡을 비롯해 14곡의 작품이 합스부르크 추기경의 시연을 위해 씌어졌다. 베토벤에게 추기경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창작을 자극하는 기폭제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인간관계들이 어떤 변화를 가져다준 것일까? 우선 자신의 삶에 타인이라는 존재가 크게 자리잡을 만큼 심적인 여유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30세 이전까지의 베토벤은 완벽하게 짜인 삶을 사는 천재 작곡가였다. 항상 준비된 자세로 연주를 기획하고 자신의 후원자들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가치에 보답하기 위해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력을 잃어가고 그 스스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야 하는 시기가 되자 자원과 가치를 교환하던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웠다. 끊임없는 연주 시연과 작곡가의 변(辨)을 통한 설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제 베토벤은 계획된 비즈니스 마인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완성되지 않은 모습의 여유와 정감, 그리고 근본적인 정체성(identity)에 호소하게 됐다.
경영학자 제임스 마치(James March)도 비슷한 요지를 자신의 저서에서 남긴 바 있다. 조직이나 개인의 변화는 ‘고도로 계산된(managerial calculation)’ 방책의 결과가 아니라 오랫동안 맥락화되고 내재된 특성들이 더욱 강하게 작용한 산물이라는 것이다.3 이제 베토벤은 진정으로 위대한 천재는 예술가를 신화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personality)과 영혼(soul)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메이나드 솔로몬을 비롯해 그를 연구하는 음악학자들은 베토벤의 30대를 정리하면서 ‘격정과 좌절에 가득 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낭만 작곡가로 변화되기 시작한 시절’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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