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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8

체사레 보르자,타고난 영웅의 냉혹함

김상근 | 106호 (2012년 6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르비노의 밤

이탈리아의 3대 도시로 보통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를 꼽는다. 역사와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경제 규모로 따진다면 밀라노가 단연 1등 도시이고 지역의 크기로 보면 나폴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르비노(Urbino)란 도시에 대해 들어 보셨는지? 이탈리아 반도는 한국처럼 동쪽에 높은 산들이 몰려 있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우르비노는 동쪽 지방에 있는데 한국 강원도의 원주쯤 되는 도시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니고 주요 공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리적 접근성이 좋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도시다. 그래도 우르비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역사의 주요 인물을 많이 배출한 유서 깊은 문화의 도시다. 회화 분야에서 다빈치와 쌍벽을 이뤘던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가 우르비노 출신이고 16세기 초 이탈리아 건축가들의 십장(什長) 격이었던 브라만테(Bramante, 1444-1514)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 용병대장의 모델이었던 몬테펠트로(Montefeltro) 가문과 교황을 3명이나 배출했던 델레 로베레(Delle Rovere) 가문도 모두 우르비노 출신이다. 우르비노의 델레 로베레 가문이 배출한 교황 율리우스 2(1503-1513년 재위)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위해 미켈란젤로를 고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율리우스 2세는 자기 고향 사람이었던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회화)와 브라만테(건축)를 총애했지만 피렌체 출신인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몬테펠트 가문이 우르비노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군대가 몰려와 영주 구이도발도 몬테펠트로(1472-1508)를 우르비노에서 축출시켜 버렸다. 평화의 사도가 돼야 할 교황의 아들이 전쟁을 일으켰으니 바로 이 인물이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신()군주의 이상적인 모델로 칭송했던 인물이고 시오노 나나미가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란 멋진 제목으로 소개했던 바로 그 이탈리아의 영웅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위대한 군주의 모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타인의 무력이나 호의에 의지하지 말아야겠다고 깊이 깨달았기때문이다.1 체사레가 교황이었던(친아버지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6세의 명을 받고 이탈리아 중부지방의 무력 정벌을 시작했을 때 그가 거느리고 있던 군대는 교황청의 오합지졸로 편성돼 있었다. 체사레는 자신에게 100% 충성할 수 있는 군대가 필요했다. 지략이 뛰어났던 보르자 가문의 부자(父子)는 우선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에게 호의를 베풀며 접근한다. 밀라노의 세력을 경계하던 베네치아가 프랑스에 지원을 청하자 교황청은 프랑스라는 외세(外勢)의 개입을 발 빠르게 승인해 줌으로써 루이 12세의 환심을 샀다. 그래서 프랑스의 루이 왕은 베네치아의 요청과 교황청의 공식적인 축복을 받으며 당당히 자신의 군대를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시킬 수 있었다. 체사레는 이때 프랑스 군대의 일부를 지원받아 이탈리아 중부 지방 정벌에 나서게 됐다. 물론 프랑스 군대는 체사레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명문가였던 오르시니 가문과 비텔로초 장군의 부대를 영입해 프랑스 군대와 연합군을 형성했다. 이탈리아 군과 프랑스 군을 동시에 거느리게 된 체사레는 두 군대의 충성심을 서로 경쟁시키면서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체사레는 이탈리아 중부의 정벌을 마무리하면서 서쪽에 있는 피렌체에 대한 군사행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맹주인 피렌체 공화국을 차지하면 자신의 통치권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피렌체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체사레의 피렌체 공격을 반대했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에 출장을 가서 거둔 외교적 업적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일종의 연합군 관계를 유지해 왔던 프랑스가 갑자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한 체사레는 이 대목에서 중요한 권력의 법칙을 깨닫게 된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타인의 무력이나 호의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프랑스일 뿐이라고 판단한 체사레는 새로운 권력의 작전에 돌입한다. 프랑스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힘과 무력을 구축하는 전략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이런 정세 판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어떤 국가나 개인도 남을 위해서 100% 순수한 자선이나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사레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체사레는 자기 조국 피렌체를 침범하려던 적국의 장수였지만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또 다른 체사레의 모습은 현실 감각이 뛰어난 이탈리아의 새로운 영웅이기도 했다.

 

체사레가 이탈리아 중부지방을 차례로 점령해 나가자 피렌체 정국에서는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은 혼란이 일어났다. 이탈리아 중부지방은 로마냐(Romagna) 지방으로 불린다. 용병부대를 운영하던 소국의 영주들이 대대로 자치권을 행사하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보르자 가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이 로마냐 지역에 독립적인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아들 체사레를 출전시킨 것이다. 이제 로마냐의 서쪽 지역에 있는 피렌체까지 넘보고 있으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프랑스의 군사적 보호가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예측 불가능한 체사레의 성격 때문에 갑작스런 피렌체 공격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에 처해 있었다.

 

1502 622, 서둘러 결성된 피렌체 외교 사절단이 우르비노를 향해 출발했다. 체사레 보르자와의 긴급 면담을 위해 출발한 피렌체 대사는 볼테라의 대주교인 프란체스코 소데리니였고 마키아벨리는 그를 보좌하던 부사(副使)였다. 소데리니 주교는 장차 피렌체의 종신 총독으로 임명받게 될 피에로 소데리니의 친동생이다. 피렌체 행정부의 수장이 될 사람의 동생, 그것도 대주교가 외교 회담의 대표로 임명된 것은 사안의 중대성을 반영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무리 빨리 말을 몰아도 이틀 만에 피렌체에서 우르비노에 도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실제로 이틀 만에 도착한 것을 보면 사태가 정말 심각했던 모양이다. 쉬지 않고 말을 몰았던 마키아벨리는 당시 33살로 이미 프랑스 외교 경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바 있는 베테랑 공무원이었다. 국가의 존위가 위기를 맞게 된 다급한 형국에서 마키아벨리는 당대의 영웅 체사레 보르자를 처음 만나게 된다. 이때 체사레 보르자의 나이는 27. 한 시대의 두 영웅이 한 장소에 모인 것이다.2

 

체사레 보르자와의 협상

소데리니 주교와 마키아벨리가 우르비노에 도착했을 때 어둠은 이미 도시의 성곽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육중한 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우르비노 성채는 지금도 중세시대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저녁 늦게 도착한 피렌체 사절단에게 체사레는 외교관의 복장으로 갈아입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어둠이 깔려 있는 지하의 접견실로 두 사람은 거의 끌려가다시피했다. 체사레는 어두운 접견실 한쪽 끝에 서있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촛불이 켜 있지 않았다. 소데리니와 마키아벨리만 밝은 곳에 서있고 교황의 아들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숨을 죽이며 체사레 보르자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어둠 속에 서있던 체사레는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이 인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체사레가 당시 매독에 걸려 생긴 얼굴의 반점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둠 속에 서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사레는 프랑스의 비호를 받으면서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피렌체 공화국에 대해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약 일 년 전에 피렌체의 성벽 입구까지 진격해 피렌체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던 때를 상기시키며 만약 프랑스의 개입이 없었다면 당신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고 거친 협박을 이어갔다. 체사레는 피렌체 행정부의 정통성이 없다면서 메디치 가문의 복권을 요구했다. 이것은 피렌체 외교대사에게 충격을 주는 발언이었다. 1494년에 피렌체에서 축출됐던 메디치 가문이 체사레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체사레의 협박은 계속됐다. “만약 메디치 가문을 복권시키지 않으면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고 누구든지 나의 친구가 아니면, 곧 그 사람은 나의 적이란 사실 또한 알게 될 것이요!”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와의 첫 만남 이후 찬사라고 불러도 좋을 내용의 보고서를 피렌체로 보냈다. 적장이었던 체사레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영주는 정말 실력이 뛰어나며 멋진 인물입니다. 전쟁에 임할 때 더욱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결코 쉬는 법이 없습니다. 위험도 불사하고 피곤함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는 장소를 신속히 이동하는데 아무도 그의 이동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는 부하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고 그 부하들은 이탈리아에서 제일가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조건 때문에 그는 항상 승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무서운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행운의 여신이 보내는 빛이 항상 그의 앞길을 비추고 있습니다.”3

 

 

 

 

 

이몰라에서의 두 번째 만남

마키아벨리는 1502 106, 이몰라에서 체사레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두 번째 만남은 해를 넘겨 123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첫 번째 만남이 서로에 대한 탐색전이었다면 약 4달간 이어진 두 번째 만남을 통해 마키아벨리는 이른바마키아벨리즘의 핵심 내용을 체사레로부터 전수받게 된다. 냉혹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마키아벨리의 정치공학을마키아벨리즘이라고 부르는데 이 이론은 사실 체사레의 행동 법칙을 가까이서 관찰했던 1502-1503년의 경험에서 발전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마키아벨리즘은 사실체사레주의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교황군 총사령관 체사레 보르자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마키아벨리는 과연 어떤 내용을 배웠을까?

 

체사레는 이몰라에 배수진을 치고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명령을 따르던 이탈리아의 용병대장들이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른바마조레의 반란으로 알려진 사건으로 그동안 체사레의 일방적인 지휘에 반감을 품고 있던 베텔로초 장군과 오르시니 가문의 장군들이 주동이 돼 일으킨 쿠데타였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마조레의 반란을 잔인하고 충격적인 방법으로 진압해 가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마키아벨리가 이 시기에 쓴 54통의 세밀한 보고서는 체사레가 얼마나 교묘하고 잔혹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반란을 진압하면서 권력을 확보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체사레를 지켜보면서 쓴마키아벨리즘의 보고서인 셈이다.

 

체사레는 반란의 싹이 트고 용병대장들의 군사행동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했다. 위장작전을 펼친 것이다. 물론 상대방을 안심시켜 역공의 허를 찌르기 위한 방책이었다. 107,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장들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체사레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는 용병대장들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면서 교황청과 프랑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외교전에만 주력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꼼수를 꿰뚫어 보았다.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은밀히 자신의 군사력을 계속 확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에스파냐 장군 3(보르자 가문은 에스파냐 출신)을 주력부대의 대장으로 재편성하고 프랑스 가스코뉴의 보병 500명과 창기병 1500명을 은밀히 모병했으며 용맹하기로 유명한 스위스 용병 1500명을 사비를 털어 모집했다. 프랑스 군대와 협상을 벌여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 정규군도 3000명이나 추가로 확보했다. 체사레에게는 여러 곳에서 모집한 군대가 이몰라에 집결할 시간이 필요했다. 평화를 위장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고 마키아벨리는 이 사실을 피렌체 정부에 속속 보고했다.

 

체사레에 대한 프랑스의 변함없는 지지선언은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장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체사레와 프랑스의 보복을 우려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장들은 하나둘 전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 반란을 일으킨 지 채 한 달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두 진영 간의 평화협정이 서둘러 추진됐다.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반란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협정 내용은 로마냐 지방에 대한 체사레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용병대장들은 다시 체사레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체사레는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장들에 대해 사면을 선포했다. 자기 주군에게 칼끝을 겨누었던 용병대장들은 체사레의 관대한 결정에 감읍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아직 약관 20대를 채 넘기지 않았던 체사레는 자기 아버지뻘 되는 용병대장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악어의 눈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키아벨리는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해의 마지막 날인 1231, 다시 도래한 평화를 축하하기 위해 세니갈리아에서 축하연이 벌어졌고 용병대장 5명은 체사레의 정중한 초청을 받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행동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키아벨리의 예상대로 잔치에 초청된 사람은 모두 체포됐고 그날 밤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장들의 영혼은 지상을 떠나게 된다. 반란의 싹을 완전히 제거해 버린 것이다.

 

체사레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로마냐 지방 사람들의 민심을 얻기 위한 두 번째 공작이 펼쳐진다. 체사레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했던 무자비하고 전광석화 같은 방식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방식도 신속하고 충격적이었다. 우선 능력이 뛰어나지만 성격이 잔혹했던 레미로 데 오르코(Remirro de Orco)를 로마냐의 총독으로 파견한다. 예상대로 레미로 데 오르코는 폭정으로 로마냐 지방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체사레가 노린 것은 단 하나였다. 마키아벨리의 관찰대로그때까지의 모든 비행(卑行)은 자기 탓이 아니라 대리인 레미로 데 오르코의 냉혹한 성격 탓이었음을 은근히 보여 주려고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반전을 노린다.4 어느 날 아침, 로마냐 시민들은 체사네 광장에 두 동강이 난 레미로 데 오르코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경악했다. 체사레는 그동안의 학정에 대한 책임을 물어 레미로 데 오르코 총독을 처형하고 반 토막으로 잘려진 그의 시신을 광장에 전시해 놓은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표현대로 로마냐 시민들은이 처참한 광경에 민중은 통쾌한 기분과 아울러 전율을 금하지 못했다.”5 체사레는 존경심과 공포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로마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군주론>에 소개된 체사레 보르자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라는 이탈리아의 영웅이 탄생하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 본 역사의 증인이 됐다. 태생적으로 타고났다고 볼 수밖에 없는 체사레의 영웅본색(英雄本色)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는 것을 권력을 위한 첫걸음이라 보았던 체사레의 통찰력에서 출발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13장은 외국원군, 혼성군, 그리고 자국군의 효율성을 각각 비교한 부분인데 여기서 체사레를 칭찬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가 처음에는 프랑스 군대를 동원했다가 나중에는 오르시니 가문과 비텔리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 군대를 주력부대로 중용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아무래도 프랑스일 뿐이고 결국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자력의 군대, 즉 이탈리아의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본 체사레의 진면목이며 후대의 정치가나 조직의 리더가 깨달아야 하는 점이다. 남의 호의나 외부의 판단에 내 운명을 맡기지 않겠다는 결의가 체사레 보르자를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마키아벨리가 내린 긍정적 평가의 본질이다.

 

체사레가 반란을 일으킨 용병대장들을 몰살시키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비정한 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도자는 때로 냉혹해져야 하며, 권모술수로 자신의 의도를 위장할 수도 있어야 하고,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작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보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무슨 일에서나 선을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악한들 속에서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군주는 선하기만 해도 안 되고, 악인이 되는 법도 알아야 하며, 또한 그들의 태도를 따라 행동을 임의로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6

 

이것이 바로 냉혹한 조직 운영의 현실이며 어떤 조직에서든 지도자가 짊어지고 가야할 책임의 본질이란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의 행동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런 비정한 처세술만을 배운 것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시각을 통해 인간의 내면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배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진정한 마키아벨리즘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진정한 마키아벨리즘의 본질: 모든 인간은 악한 것일까?

시중에는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을 비정한 처세술의 방편으로 보는 책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이것은 <군주론>에 대한 오독(誤讀)이며 마키아벨리에 대한 모욕(侮辱)이다. 마키아벨리가군주는 자기 백성을 단결시키고 충성을 지키게 하려면 잔인하다는 악평쯤은 개의치 말아야 한다. 그것은 자애심이 너무 깊어서 혼란 상태를 초래해 급기야 시민들을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군주에 비하면 소수의 몇몇을 시범적으로 처벌해 질서를 바로잡는 잔인한 군주가 훨씬 인자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때 분명 체사레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맞다.7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를 영웅호걸로 칭송했지만 본받아야 할 인물로 내세우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라는 영웅의 모습을 통해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서 접근했다. 바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냉정한 관찰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핵심을 이루는 제17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그것은 인간에 대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문장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말하고 있는 핵심이며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본 마키아벨리즘의 본질이 정확하게 표현돼 있다.

 

“원래 인간은 은혜도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인데다 뻔뻔스럽고, 신변의 위험을 피하려 하고,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인간은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받아들인 최초의 이탈리아인이다. 피렌체의 대문호 단테(Dante, 1265-1321)조차 인간의 영혼은 숭고한 천국으로 인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선()한 존재로 보았다. 메디치 가문의 주변에 모여든 15세기의 인문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인간의 선함을 재발견하려던 르네상스 시대의 성선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원래 인간이란은혜도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인데다 뻔뻔스럽고, 신변의 위험을 피하려고 만하고,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기 마련인 악한 존재로 보았다.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체사레는 이런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들에게 철퇴를 가함으로써 조직을 장악하고 이탈리아의 역사를 새롭게 써가던 영웅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선천적으로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들을 통제하는 것이 더 큰 혼란을 막는 방법이고 이기적이며 위선적인 행동을 일삼는 인간들을 무력으로라도 통제하는 것이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봤던 것이다.

 

정치가는 국민을, CEO는 직원을, 교수는 학생을, 부모는 자식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모든 국민은, 직원은, 학생은, 자식은, 늘 은혜에 감사하고, 변덕을 부리지 않으며, 뻔뻔스럽지도 않고,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손해를 보며, 물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선한 존재일까? 아니면 그들은 늘 월급이 적다고 불평을 일삼고, 맡겨진 업무에 게으름을 피우고, 부모를 속이려고만 드는 악한 존재일까? 만약 그들이 마키아벨리의 표현처럼은혜도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인데다 뻔뻔스럽고, 신변의 위험을 피하려고 만하고,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기 마련인 악한 존재라면 정치가는, CEO, 교수는, 부모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체사레 보르자처럼 냉혹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하는가? 그것이 최상의 방법인가?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고민한 부분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마키아벨리즘은 해답이 아니라 고민 자체였으며 이 고민은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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