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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8

체사레 보르자,타고난 영웅의 냉혹함

김상근 | 106호 (2012년 6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르비노의 밤

이탈리아의 3대 도시로 보통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를 꼽는다. 역사와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경제 규모로 따진다면 밀라노가 단연 1등 도시이고 지역의 크기로 보면 나폴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르비노(Urbino)란 도시에 대해 들어 보셨는지? 이탈리아 반도는 한국처럼 동쪽에 높은 산들이 몰려 있는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우르비노는 동쪽 지방에 있는데 한국 강원도의 원주쯤 되는 도시로 보면 되겠다.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니고 주요 공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리적 접근성이 좋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도시다. 그래도 우르비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역사의 주요 인물을 많이 배출한 유서 깊은 문화의 도시다. 회화 분야에서 다빈치와 쌍벽을 이뤘던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가 우르비노 출신이고 16세기 초 이탈리아 건축가들의 십장(什長) 격이었던 브라만테(Bramante, 1444-1514)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 용병대장의 모델이었던 몬테펠트로(Montefeltro) 가문과 교황을 3명이나 배출했던 델레 로베레(Delle Rovere) 가문도 모두 우르비노 출신이다. 우르비노의 델레 로베레 가문이 배출한 교황 율리우스 2(1503-1513년 재위)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위해 미켈란젤로를 고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율리우스 2세는 자기 고향 사람이었던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회화)와 브라만테(건축)를 총애했지만 피렌체 출신인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몬테펠트 가문이 우르비노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군대가 몰려와 영주 구이도발도 몬테펠트로(1472-1508)를 우르비노에서 축출시켜 버렸다. 평화의 사도가 돼야 할 교황의 아들이 전쟁을 일으켰으니 바로 이 인물이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신()군주의 이상적인 모델로 칭송했던 인물이고 시오노 나나미가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이란 멋진 제목으로 소개했던 바로 그 이탈리아의 영웅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위대한 군주의 모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타인의 무력이나 호의에 의지하지 말아야겠다고 깊이 깨달았기때문이다.1 체사레가 교황이었던(친아버지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6세의 명을 받고 이탈리아 중부지방의 무력 정벌을 시작했을 때 그가 거느리고 있던 군대는 교황청의 오합지졸로 편성돼 있었다. 체사레는 자신에게 100% 충성할 수 있는 군대가 필요했다. 지략이 뛰어났던 보르자 가문의 부자(父子)는 우선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에게 호의를 베풀며 접근한다. 밀라노의 세력을 경계하던 베네치아가 프랑스에 지원을 청하자 교황청은 프랑스라는 외세(外勢)의 개입을 발 빠르게 승인해 줌으로써 루이 12세의 환심을 샀다. 그래서 프랑스의 루이 왕은 베네치아의 요청과 교황청의 공식적인 축복을 받으며 당당히 자신의 군대를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시킬 수 있었다. 체사레는 이때 프랑스 군대의 일부를 지원받아 이탈리아 중부 지방 정벌에 나서게 됐다. 물론 프랑스 군대는 체사레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명문가였던 오르시니 가문과 비텔로초 장군의 부대를 영입해 프랑스 군대와 연합군을 형성했다. 이탈리아 군과 프랑스 군을 동시에 거느리게 된 체사레는 두 군대의 충성심을 서로 경쟁시키면서 자신의 세력을 조금씩 키워나갔다. 체사레는 이탈리아 중부의 정벌을 마무리하면서 서쪽에 있는 피렌체에 대한 군사행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맹주인 피렌체 공화국을 차지하면 자신의 통치권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피렌체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체사레의 피렌체 공격을 반대했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에 출장을 가서 거둔 외교적 업적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일종의 연합군 관계를 유지해 왔던 프랑스가 갑자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한 체사레는 이 대목에서 중요한 권력의 법칙을 깨닫게 된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타인의 무력이나 호의에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프랑스일 뿐이라고 판단한 체사레는 새로운 권력의 작전에 돌입한다. 프랑스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힘과 무력을 구축하는 전략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이런 정세 판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어떤 국가나 개인도 남을 위해서 100% 순수한 자선이나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사레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체사레는 자기 조국 피렌체를 침범하려던 적국의 장수였지만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또 다른 체사레의 모습은 현실 감각이 뛰어난 이탈리아의 새로운 영웅이기도 했다.

 

체사레가 이탈리아 중부지방을 차례로 점령해 나가자 피렌체 정국에서는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은 혼란이 일어났다. 이탈리아 중부지방은 로마냐(Romagna) 지방으로 불린다. 용병부대를 운영하던 소국의 영주들이 대대로 자치권을 행사하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보르자 가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이 로마냐 지역에 독립적인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아들 체사레를 출전시킨 것이다. 이제 로마냐의 서쪽 지역에 있는 피렌체까지 넘보고 있으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프랑스의 군사적 보호가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예측 불가능한 체사레의 성격 때문에 갑작스런 피렌체 공격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에 처해 있었다.

 

1502 622, 서둘러 결성된 피렌체 외교 사절단이 우르비노를 향해 출발했다. 체사레 보르자와의 긴급 면담을 위해 출발한 피렌체 대사는 볼테라의 대주교인 프란체스코 소데리니였고 마키아벨리는 그를 보좌하던 부사(副使)였다. 소데리니 주교는 장차 피렌체의 종신 총독으로 임명받게 될 피에로 소데리니의 친동생이다. 피렌체 행정부의 수장이 될 사람의 동생, 그것도 대주교가 외교 회담의 대표로 임명된 것은 사안의 중대성을 반영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무리 빨리 말을 몰아도 이틀 만에 피렌체에서 우르비노에 도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실제로 이틀 만에 도착한 것을 보면 사태가 정말 심각했던 모양이다. 쉬지 않고 말을 몰았던 마키아벨리는 당시 33살로 이미 프랑스 외교 경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바 있는 베테랑 공무원이었다. 국가의 존위가 위기를 맞게 된 다급한 형국에서 마키아벨리는 당대의 영웅 체사레 보르자를 처음 만나게 된다. 이때 체사레 보르자의 나이는 27. 한 시대의 두 영웅이 한 장소에 모인 것이다.2

 

체사레 보르자와의 협상

소데리니 주교와 마키아벨리가 우르비노에 도착했을 때 어둠은 이미 도시의 성곽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육중한 산 중턱에 우뚝 솟아 있는 우르비노 성채는 지금도 중세시대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저녁 늦게 도착한 피렌체 사절단에게 체사레는 외교관의 복장으로 갈아입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어둠이 깔려 있는 지하의 접견실로 두 사람은 거의 끌려가다시피했다. 체사레는 어두운 접견실 한쪽 끝에 서있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촛불이 켜 있지 않았다. 소데리니와 마키아벨리만 밝은 곳에 서있고 교황의 아들은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숨을 죽이며 체사레 보르자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어둠 속에 서있던 체사레는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이 인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체사레가 당시 매독에 걸려 생긴 얼굴의 반점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둠 속에 서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사레는 프랑스의 비호를 받으면서 자신을 견제하고 있는 피렌체 공화국에 대해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비난을 퍼부었다. 약 일 년 전에 피렌체의 성벽 입구까지 진격해 피렌체 점령을 눈앞에 두고 있던 때를 상기시키며 만약 프랑스의 개입이 없었다면 당신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고 거친 협박을 이어갔다. 체사레는 피렌체 행정부의 정통성이 없다면서 메디치 가문의 복권을 요구했다. 이것은 피렌체 외교대사에게 충격을 주는 발언이었다. 1494년에 피렌체에서 축출됐던 메디치 가문이 체사레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체사레의 협박은 계속됐다. “만약 메디치 가문을 복권시키지 않으면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고 누구든지 나의 친구가 아니면, 곧 그 사람은 나의 적이란 사실 또한 알게 될 것이요!”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와의 첫 만남 이후 찬사라고 불러도 좋을 내용의 보고서를 피렌체로 보냈다. 적장이었던 체사레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영주는 정말 실력이 뛰어나며 멋진 인물입니다. 전쟁에 임할 때 더욱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결코 쉬는 법이 없습니다. 위험도 불사하고 피곤함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는 장소를 신속히 이동하는데 아무도 그의 이동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는 부하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고 그 부하들은 이탈리아에서 제일가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조건 때문에 그는 항상 승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무서운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행운의 여신이 보내는 빛이 항상 그의 앞길을 비추고 있습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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